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김성수 목사)
(이 7 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안식의 수’‘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운명 지어진 그 영광과 기쁨과 승리와 평안을 ‘삶의 내용으로, 과정으로 누리고 있는 가‘’믿음으로 지켜내고 있는 가‘를 확인하셔서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성경의 그 확실하고 명확한 언약을 마음에 새겨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어 평안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계 1:4-8)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6 우리로 나라를 이루셔서,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3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여느 성경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복을 받은 자들은 그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확실성과 긴박성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의 구조를 나누었을 때 1장 1절부터 8절까지를 계시록 전체의 서론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1-3절까지는 요한이 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고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써 놓은 것이고 진짜 편지의 서론은 4절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전체가 7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지요? 그래서 4절부터 요한은 편지의 서론으로 들어갑니다. 4-5절 상반부까지가 편지의 인사말이고 5절 하반부부터 6절까지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고 7,8절에서 요한 계시록 전체의 주제가 나옵니다. ‘다시 오시는 하나님’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 전체의 주제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반드시 속히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전체 주제입니다.
오늘은 인사말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먼저 4절과5절을 보시면 요한이 편지의 인사말을 당시 사도들이 썼던 편지의 인사말과 동일한 형식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은 일반적인 편지 형식의 인사말처럼 ‘누가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다.’라고 쓰면서 거기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부했던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인사말을 쓰는지 보시면 아마 사도 요한의 편지 인사말이 쉽게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엡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누가? 바울은, 누구에게?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어떤 축원을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바란다’고 축원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누가 편지를 씁니까? 요한은(엄밀하게 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이 쓴 것이지요) 누구에게?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어떤 축원을 하지요? 본문 4절부터 읽어보지요.
(계 1:4-5)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5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요(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주셨고, ”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사말 형식과 똑 같지요? 이렇게 이 편지는 요한이 썼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지는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골로새 교회라든지 히에라 폴리스 교회라든지 다른 교회가 많았는데도 왜 굳이 일곱 교회라고 숫자를 맞추었다고 했지요?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숫자에다가 어떤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소 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그 일곱 교회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라 했습니다.
각 교회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그 마지막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말을 마칩니다. 발신자가 누구이십니까? 성령, 수신자는? 교회들입니다. 어떤 특정한 지역적 교회를 지칭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요한 계시록은 일곱 교회에게 쓴 편지라고 기록이 되어있지만 전체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인 것입니다. 이 7 이라는 숫자의 개념은 원래 창세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 안식하신 것에서 ‘안식의 수’‘완전수’라는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쉬다, 편안히 거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창조가 완성되고 완성된 창조 안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장면입니다. 모든 피조물 위에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완성의 의미에서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의 완성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곱 인(印)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도 그런 의미에서 즉, 심판의 완성과 필연의 의미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를 쓴 것입니다. 그건 시간적인 순서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 청년이 가지고 온, 요즘 한인 타운에 급속히 번지고 있다는 어떤 사람의 요한계시록 해설은 그런 의미에서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지금 여섯 번째 대접이 쏟아졌고 이제 일곱 번째 대접이 쏟아질 거라고 협박하던데, 그건 요한 계시록을 잘 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것입니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레 26:18) “18 너희가 이 지경이 되어도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번에는 너희가 지은 죄를 일곱 배로 벌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치겠다. 그런데도 청종치 않으면 너희가 지은 죄의 일곱 배로 벌을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딱 일곱 배만 벌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벌의 중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일곱이라는 개념은 상징 적인 개념입니다. 왜 제가 일곱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 드리는가 하면 요한 계시록은 특히 이 일곱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곱이라는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아셨죠? 네, 그럼 이제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서는 공부를 했고 그 축원의 내용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그 축원의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의 서신의 인사말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가 에베소서 공부를 할 때 자세히 살펴보았지요. 은혜는 값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평강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헬라어로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앞에 헬라어‘아포’‘from’이라는 전치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앞에‘아포’라는 전치사가 있고요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전치사 ‘아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데 그 은혜와 평강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 분 한 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아포’라는 전치사 다음에는 소유격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포’라는 말 뒤에 전부 주격이 와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렇게 어법에도 맞지 않는 글을 썼을까요? 문법상으로는 당연히 소유격으로 써야 하지만 요한이 주격을 쓰는 파격을 범한 것은 구약에 기록된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명사에 대하여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외심과 그 절대성과 주권 성을 강조하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기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성부하나님을 표현하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성경은 어떻게 설명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헬라어는 잘 모르시니까 4절을 영어로 한번 보겠습니다.
(계 1:4) “4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내려 주시고,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내려 주시고,”
하나님을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표현 같지 않으세요? ‘I am who I am’출애굽기 3:14절이 생각나시지요?
(출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칠십인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히, '나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 스스로 계신 분이(히, "'나'라는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모세가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 누가 보내서 왔냐? 그러면 어떻게 대답 합니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I am who I am’이라고 당신을 표현하십니다. 이 말은 현재형으로도 쓰이고 미래형으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도 하나님을 뜻하는‘여호와’라는 단어는 ‘존재’를 가리키는 be동사에 해당하는 ‘하야’ 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생령이 바로 히브리말로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많은 문서에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연상할 때 떠오르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금방 연상할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이 이제도, 즉 지금도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안전해’하고 마음에 평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일부러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동원한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사 41:4) “4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Who has done this and carried it through, calling forth the generations from the beginning? I, the LORD--with the first of them and with the last--I am he."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역사를 결정하였느냐? 처음에도 나, 주가 거기 있었고 나중에도 나, 주가 거기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어제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는 분으로 묘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묘사가 어떤 구절에 붙어있는지 보시면 왜 요한이 이 구절들을 인용해서 은혜와 평강을 설명하려 했는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사 41:1-4) “1 "섬들아, 나의 앞에서 잠잠하여라. 백성들아, 송사를 가져 오너라. 가까이 와서 말하여 보아라. 와서 함께 판가름하여 보자. 2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느냐? 누가 그를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였느냐? 누가 민족들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였느냐? 누가 그를 왕들의 통치자로 만들었느냐? 그의 칼은 그들을 쳐서 티끌처럼 만들고, 그의 활은 그들을 흩어서 검불처럼 날리게 하였다. 3 그가 거침없이 질주하여 그들을 추격하니,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4 누가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하였느냐? 누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였느냐? 태초부터 나 주가 거기에 있었고, 끝 날에도 내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Who has done this and carried it through, calling forth the generations from the beginning? I, the LORD--with the first of them and with the last--I am he."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셨는지를 설명하시고 ‘그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하면 바로 구약의 이런 구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렇게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나님께서 지금 어려움에, 핍박에 처해 있는 우리도 분명 건져내실 것이다’하고 승리를 확신하고 그 분의 그러한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을 찾도록 요한은 의도한 것입니다. 한군데 더 보겠습니다.
(사 44:6)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Israel's King and Redeemer, the LORD Almighty: I am the first and I am the last;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하나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난 어제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나중에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구절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보세요.
(사 44:1-5)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But now listen, O Jacob, my servant, Israel, whom I have chosen. This is what the LORD says--he who made you, who formed you in the womb, and who will help you: Do not be afraid, O Jacob, my servant, Jeshurun, whom I have chosen. For I will pour water on the thirsty land, and streams on the dry groun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your offspring, and my blessing on your descendants. They will spring up like grass in a meadow, like poplar trees by flowing streams. One will say, 'I belong to the LORD'; another will call himself by the name of Jacob; still another will write on his hand, 'The LORD'S,' and will take the name Israel.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궁극적인 참 복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말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난 처음이요 나중이다’ ‘어제도 있었고 지금도 너희와 관계하며 나중에도 오직 나만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다른 신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불변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을 한 번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신 분이시고 이루고 계신 분이시고 앞으로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교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안을 잃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가나안, 바벨론 그 어떤 대적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어떤 대적도 하나님 백성들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하물며 로마 일까보냐?’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마귀의 세력은 지금은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지리멸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그 역사의 하나님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계셔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여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리라고 사도 요한은 편지의 시작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를 보면 ‘호온 호엔 엘코메노스’입니다.
(1) ‘이제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호온’은 헬라어 be동사인‘에이미’의 현재분사입니다. 그 뜻은 현재도 물론 계시지만 계속하여 계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성은 영원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전에도 계시고’를 의미하는 ‘호엔’은 ‘에이미’ 동사의 미완료 시제입니다. 미완료 시제라는 것은 그 계신 상태가 언제 끝나는지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알 수 없는 시점부터 계신 그분이 지금 현재도 계속하여 존재하시는데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라는 것은 과거에 시작에서 끝, 결과를 기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단어도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장차 오실 이’로 번역이 된‘엘코메노스’는 ‘오다’라는 단어인‘엘코마이’의 중간 태 현재분사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뜻은 ‘지금도 오시고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하나님을 단순히 미래에 영원히 존재하실 분으로 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영원히 미래에도 존재하실 분이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은 영원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의 복을 가지고 현재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요한 계시록을 읽는 그 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현재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순으로 배열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 이렇게 현재, 과거, 미래의 순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고난과 고통과 환난을 이길 뿐 아니라 그렇게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온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치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나중에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과 기쁨과 평강을 우리는 지금 차용해서 미리 맛볼 수 있다고, 그것을 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분명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는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계 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년동안은 어느 기간을 가리킨다고 했지요? 교회 시대, 지금 교회인 여러분이 사시는 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나중에 요한 계시록 말미의 천년 왕국을 설명할 때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이 왕 노릇하고 계세요? 왕은 무슨 왕이에요? 맨 날 직장 상사한테 터지고, 거래처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고, 부자들에게 아첨이나 하고 그런 삶을 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더러 왕 노릇하는 자들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러나 그 왕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 왕은 이 세상에 싸우러 오시지 행동을 하시던 간에 그 모든 순간에 그 분은 메시야의 신분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순간을 메시야로 사셨습니다. 그 분은 그 일을 위하여 그의 모든 권세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는 실패한 메시아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이셨습니다. 우리가 왕 노릇 못하고 있는 것이 왕도와 패도를 혼동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패도라는 것은 도전하여 빼앗는 것, 승리를 쟁취하고 목적을 탈취해 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패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도전자 일 때의 삶입니다. 왕도는 이미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관용과 자비를 가지고 이웃들에게 베풀고 포용하고 감싸는 것이 왕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왕 노릇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고 천국에서도 그런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천사가 말 안 들으면 주리를 틀고 심부름 안 하면 옥에 가두는 그런 왕 노릇이 아닙니다.
(요 17:9-18) “9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13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3)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17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다 가신 그 모습 그대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모습 그대로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그 모습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군사적으로 보잘 것 없으셨지만 그가 왕이셨던 것 같이 여러분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 진다해도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사신 그 삶을 살아내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왕 노릇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운명 지어진 그 영광과 기쁨과 승리와 평안을 ‘삶의 내용으로, 과정으로 누리고 있는 가‘’믿음으로 지켜내고 있는 가‘를 확인하셔서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성경의 그 확실하고 명확한 언약을 마음에 새겨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어 평안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일곱 영,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는 어떠한 은혜와 평강을 사도 요한이 설명하려 하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사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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