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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할렐루야!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9.

 

 

할렐루야!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김성수 목사)

 

 

(계 19:1-6) “1 이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큰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2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음행으로 세상을 망친 그 큰 창녀를 심판하셨다. 자기 종들이 흘린 피의 원한을 그 여자에게 갚으셨다." 3 그들이 다시금 "할렐루야, 그 여자에게서 나는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구나" 하고 외치니, 4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5 그 때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작은 자들과 큰 자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6 또 나는 큰 무리의 음성과 같기도 하고, 큰 물소리와 같기도 하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기도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분께서 왕권을 잡으셨다.”

 

 

이제 19장으로 넘어왔습니다. 보시다시피 19장의 시작이 또 ‘이 일 후에, 메타 타우타’로 시작이 됩니다. 이제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는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전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메타 타우타’는 시간 적인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음녀 바벨론의 처참한 최후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는 반면에 19장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장면인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무너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17,18장과 19장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를 향한 사도 요한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그러한 극명한 흑과 백의 대조는 우리 성도들에게 더욱 더 큰 힘과 격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잘 보면 요한이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이 요한 계시록을 얼마나 과학적이며 조직적으로 섬세하게 기록을 했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요한이 이 요한 계시록을 얼마나 과학적이며 조직적으로 썼는지는 요한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쓰는 용어들만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묘사할 때 늘 삼위 하나님의 숫자인 3과 안식의 숫자인 완전수 7에 맞추어서 기록을 합니다.

 

(계 4:9,11)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5:12)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 7:12)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오늘 본문 1절에서도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라고 삼중 적인 용어를 써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장 전체에서도 세 번의 할렐루야 찬양이 등장합니다.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1절과 2절에 나와 있는 허다한 무리들의 찬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찬양이 4절과 5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찬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6절 이후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하나님의 통치’와 세 번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한 찬양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찬양에 관해서는 조금 자세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문3절에서 보신 것처럼 그 심판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고 표현을 할 정도로 그 심판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계 19:3) “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입니다.

 

(사 34:9-10) “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이스라엘의 대적인 에돔의 멸망에 관한 구절입니다. 세상의 악은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찬양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 고소하다. 이제야 너희들이 벌을 받는구나, 하나님이 이제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구나, 할렐루야’ 이게 우리의 찬양의 내용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연결이 되는지를 정확하게 define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른 찬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발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 13:4-6)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장입니다. 6절을 보시면 사랑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습니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불의에 대한 심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들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악에 대한 심판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소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지고함을 깨닫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불의에 대한 심판이 우리 각자의 인생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악과 불의의 잔재들을 떨어버리는 작업이 지금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악을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까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불의와 악‘을 매일 매일 심판하셔서 죽여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때때로 고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때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실 수 있으세요? 하나님께서 나의 속에 있는 불의함과 악한 것들을 잘라내시느라 때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 속에 일어납니다. 그 때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실 수 있나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실제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상황을 기뻐할 수 있었는지를 배우면 우리도 그게 가능해 지겠지요.

 

(빌 1:15-20)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그 감옥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요 성경 공부 때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도 역시 옥중 서신입니다. 그 에베소서를 사도 바울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그 사도 바울이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뻐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18절을 보시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렇게 뭉뚱그려서 표현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첫 번째 ‘기뻐하다‘와 두 번째 ’기뻐하다‘는 각기 다른 절에 걸리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 ‘기뻐하다‘는 그 앞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에 걸리는 것이고 두 번째 ’기뻐하다‘는 19절에 걸리는 것입니다.

 

(빌 1:19)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더 편만 하게 전파되는 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상황이 자신의 구원의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을 어디에서 인용 해다가 썼는지를 알게 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욥 13:15-16)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16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19절을 여기에서 인용 해다가 쓴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런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지탄을 했을 때 욥이 친구들의 지탄에 자신의 상황을 친구들에게 변명하는 구절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15절이 조금 아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 것이라는 절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 구절은 원어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해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고 하여도 나는 잃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잃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욥은 그러한 자신의 상황이 ‘자신의 불경건함과 때를 제거하고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거기에 덧붙입니다. 16절의 ‘사곡한’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하네프’는 ‘불경건한, 때 묻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그러한 자신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경건함과 때를 제거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바로 욥의 그 고백을 인용 해다가,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기뻐하며,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나 욥은 그들의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들 속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구원의 과정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로 가보시면 더 확실해 집니다.

 

(빌 1:20)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 바울이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대와 소망에 의하면 자신은 지금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도 사도 바울이 구약의 시편34편에서 인용 해다가 쓴 구절입니다.

 

(시 34:3-5)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여기서 ‘광대하시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달’이라는 단어가 빌립보서에서 존귀하다로 인용)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시편 34편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자신이 왜 감옥 속에서도 기쁠 수밖에 없는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34편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도망갔다가 미친 척해서 겨우 살아난 뒤 쓴 시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난 부끄럽지 않다’고 시를 쓰고 있습니다. 사무엘서로 가서 그 상황을 한번 보지요. 그 상황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황인지.

 

(삼상 21:15)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잘 보세요. 다윗이 지금 누구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까?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두려워 미친 척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때려죽인 골리앗이 어디 사람입니까? 바로 가드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때려죽인 골리앗의 나라 가드에 가서 그 수모를 겪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드까지 보내셔서 그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가 골리앗을 때려죽인 일은 그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걸 다윗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다윗을 다시 가드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라고 외쳤던 맹장으로서가 아니라 미친척해서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는 겁쟁이의 모습으로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 속에서 그 분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살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미친 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상황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임을 깨닫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 일을 어떻게 결론을 맺고 있는지 보세요.

 

(시 34:19-22)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그의 부끄러움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완성시키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난 부끄럽지 않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과 연결시켜 보세요.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신 분,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지요? 우리는 고난과 수난을 통과하시고 죽으셨지만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윗을 통해서 본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또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바로 그 다윗의 삶을 인용해서 자신의 처지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가 어떤 곳입니까? 바울이 갇혀 있던 감옥 문이 열리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던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 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하자면 바울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 편지를 받아보는 빌립보 사람들이 ‘아니 여기서는 그렇게 감옥 문도 척척 열고 나가더니 왜 거기서는 여전히 갇혀 있나?’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바로 그 것을 하나님은 부수시는 것입니다. ‘그게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니 교만하지 마라’ 바울은 그 하나님의 심중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다윗이 그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이 모든 상황은 나의 구원에 유익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상황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범사가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혀서 부끄러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상황도 이렇게 기쁜데 다른 무엇이 그의 기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목표 지점이 정확히 설정이 되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상황 속에서도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가장 자신 있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까지 쳐내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른 말씀을 잘 배우고 실천하는 교회로 LA에 소문이 나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 공중 기도하시는 집사님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우리는 이렇게 잘 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못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은근히 남을 무시하는 기도를 하실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정말 그 말씀대로 잘 살아내고 계십니까? 잘 안 되지요?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하나님은 계속 쳐내십니다. 그게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렇게 실패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죄와 악의 잔재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더러운 옛 사람의 잔재를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막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물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까지도 더러운 똥 걸레 ‘filthy rag’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더러운 오물들이 잔재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심판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던져지는 심판은 죄인들에게 쏟아지는 심판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기 위한 거룩한 심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삶에 만사형통, 일사천리의 복만 쏟아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시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과 다윗의 고백처럼 부끄러워 하셔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던 천상의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의 목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의 완성이지 이 땅에서의 소원 성취, 문제 해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도 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 내며 기쁨의 찬송을 부르실 수 있는 참 성도의 삶을 배우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의 찬송처럼 그분은 우리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최상의 상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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