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정체
(김성수 목사)
(계 13:9-15)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 지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로마나 바벨론, 바사, 헬라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정치적,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하는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마귀의 세력들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유형적인 조직이나 세력, 인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무형적인 것들, 정신과 철학과 이념과 유행과 시대정신으로 오기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그 세력의 정치적이며 물리적인 힘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세력은 ‘핍박과 미혹’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매력적인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게 하고 결국은 허망한 신기루를 좇다가 죽어가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세력인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그 세력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어린양의 피,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말 예수 그리스도였지요? 우리는 이 땅의 힘을 가지고 우리를 누르며 우리에게 ‘너희도 억울하면 이런 힘을 키워’라고 미혹하며 핍박하는 그 짐승의 세력에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섬김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을 함께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지는 것 같고 핍박당하는 것 같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 같지만 그게 바로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비결이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비결임을 성경은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핍박과 미혹에 당하지 않고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추구하는 대신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늘의 보물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요한 계시록 21장,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보물을 닦고 닦아서 순전한 빛을 발해야 한다는 것까지 지난주에 공부했습니다. 그게 8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9절을 보시면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어라’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일곱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구절입니다. 귀가 없는 사람도 있나요? 그 말씀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이 요한 계시록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들려집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요한은 다시 한 번 지금까지 공부한 ‘성도들의 고난과 핍박의 사실성과 확실성’에 관해 도장을 찍습니다. 10절을 함께 보지요.
(계 13:10)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말씀이 어떻게 ‘성도들의 고난과 핍박의 사실성과 확실성’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렘 15:2-3)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함 앞에서, 반드시 그들을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신 구절입니다.
(렘 43:11) “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자는 칼로 칠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정복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니까 반드시 이루어지겠죠? 그리고 이루어졌고요. 요한은 이러한 구절들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의 필연성과 사실성과 확실성” 그리고 그 환난의 무게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짐승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의 최종 결정권자는 하나님도 막을 수 없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0절은 지금 성도들에게 ‘너희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로잡히게 되고 칼에 죽게 될 것이다‘’그만큼 고난을 당하게 된다.‘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핍박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0절 후반부가 어떻게 끝나죠?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무슨 말입니까? ‘참아라, 믿음으로 이겨라’가 해답입니다. ‘너희가 사로잡히게 되고 칼에 맞아 죽게 될 때 내가 막아 줄께’가 아닙니다. ‘참아라, 믿음으로 이겨내라’입니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럼요. 실제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사로잡히기도 하고, 칼을 맞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히 11:36-38)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지금은 문명이 발달하고 지성이 발달해서 그 핍박의 양상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 뿐이지 지금도 똑같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고 칼로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의 공격을 안 말려 주실까요? 왜 안 말려 주시고 지켜보시면서 ‘인내해라, 믿음을 가져라 ’그러십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이 병 걸리면 무조건 다 낫게 해줄게, 너희 사업이 어렵니? 내가 일으켜 줄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어디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잘 못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견디라고 하십니다. 참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 보셨습니다. 분명 스데반이 돌에 맞기 전에 ‘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안 말려 주시고 돌에 맞아 죽게 놔두십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나무 톱에 켜 죽을 때 주님이 안 말려 주시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서 문둥병이 걸려 죽어갈 때 왜 하나님께서 그 문둥병을 고쳐 주지 않으시고 그냥 죽게 놔두셨습니까? 왜 사자 굴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초대 교회 성도들을 다니엘처럼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왜 착한 여러분의 병을 안 고쳐 주시고 그냥 놔두십니까?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게 뭡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형식상 모세가 앞장을 섰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인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그저 좇아갔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앞장서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홍해입니다. 그 홍해는 폭이 32km나 되는 큰 바다입니다. 32km면 50마일이 훨씬 넘습니다. 앞은 그렇게 넓은 망망대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믹돌 사이에 진을 쳤다고 했습니다. ‘믹돌’이라는 것은 깎아지른 절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병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절대 그런 곳에 진을 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몰살을 당하게 되는 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껏 이스라엘을 이끌어다가 그런 진퇴양난의 곳에다가 쳐 박으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가나안에 넣으시기까지 그 광야에서 도대체 우리를 이끌어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왜 우리는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광야를 통해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얼바인까지 걸어서 가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족히 한나절은 넘을 겁니다. 지금 그만큼 넓은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길이 생긴 것입니다. 시편 78편에 보면 양쪽으로 물이 섰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천연 aquarium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먼 거리가 다 질퍽한 개펄처럼 되어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 길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개펄에서 한번 걸어보셨어요? 푹 푹 빠져서 힘 있는 장정들도 100미터 200미터 가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보면 그 바다 밑이 마른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바다 밑을 50마일씩 걸어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바다를 마른땅을 밟으며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은 바다도 꼼짝 못하게 주관하시는 분이구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서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계속 이렇게 어렵습니까? 이스라엘이 배가 고팠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뿌려 주셨습니다. 그 하늘에서 쏟아지는 식량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아, 하나님은 하늘도 주관하시는 분이구나’ 또 구름기둥을 좇아갑니다. 가다보니 이번에는 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또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시편78편에 보면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 나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00만 명이면 웬만한 직할시정도의 규모입니다. 그 300만 명의 식수와 용수를 대기 위해서는 작은 시내도 부족합니다. 강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목마름 속에서 땅에 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때 이 땅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 크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는 홍해가 열리고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강같이 흘러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지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쪼개지심으로 죽어야 할 자들이 그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구속의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애굽 쪽에서 보면 옛 사람들이 다 바다에 빠져서 죽는 것이고 가나안 쪽에서 보면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서 올라오는 사건이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만나는 무엇입니까? ‘내가 바로 하늘의 떡’이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반석의 물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실 때 ‘내가 그 반석 위에 먼저 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반석을 칠 때 먼저 맞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반석의 물은 하나님께서 수난을 당하심으로 그 백성이 목마름에서 해갈이 되는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 1절에서 ’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 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믹돌 사이 홍해 앞에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계십니까?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지 않지요? 여러분 배고프세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좀 체로 면해지지 않으시지요? 목마르십니까? 여러분의 반석에서는 물이 솟아오르지 않지요?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홍해는 이미 갈라져 있습니다. 하늘의 만나는 이미 여러분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반석에서는 벌써 물이 강같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보세요. 우리는 영원히 그러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땅을 떠나는 그 순간 그 모든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해방되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예수 님 때문에 그 믹돌 사이에서, 신 광야에서, 목마름 속에서 건져 올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 환난과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 우리를 그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과 핍박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사로잡히게 되고 너희는 칼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칼입니다. 그 사로잡힘은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로잡힘인 것입니다.
(롬 8:35)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분명 우리는 칼을 맞습니다. 환난과 곤고(困苦)와 핍박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사랑 아래서 이유 있는 환난을 당하고 이유 있는 핍박을 당하고 이유 있는 기근을 당하고 이유 있는 칼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환난과 핍박은 분명 우리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니까요.
(시 139:17-18)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 말씀을 좀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을 하면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은 어찌 그리 깊고 심오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도저히 이해를 하거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심오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힘이 들어, 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그 때도 주님은 주무시지 않고 저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보다‘고 울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 자식을 키워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아니, 자식이 없더라도 여러분의 부모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땅의 육신의 부모들도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군사령관 비서실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군에는 군법회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재판하는 군 법원입니다. 군에서 제일 큰 범죄는 하급자가 상급자를 구타하거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상급자를 살해하는 ‘하극상’이라는 죄입니다. 보통 상급자를 살해한 사람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습니다. 간혹 그 사형수들의 어머니들이 어디에다 줄을 대었는지 모르지만 군사령관 사무실로 찾아옵니다. 그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대신 죽을 테니 우리 아들 목숨만은 좀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하십니다. 그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제가 군에 있는 3년 동안 항상 밥상에 제 밥을 퍼놓으셨답니다. 그리고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아들 생각을 하시며 식사를 하셨답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우리 가족은 과일과 고기를 못 먹었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우리 아들은 군대에 가서 과일도 못 먹고 고기도 못 먹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편안한 후방에서 과일과 고기를 맘껏 먹겠는가?‘ 그래서 제 동생들은 제가 휴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게 아비의 마음입니다.
제가 작년에 열흘 동안 금식을 했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이 월요일이었는데 그날이 공휴일이었습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six flag엘 가자고 졸랐습니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그 놀이공원에 가서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놀아줬습니다. 아이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생전 안 타본 ‘롤러코스터’도 함께 타고, 바이킹도 탔습니다. 게다가 막내 녀석이 걷는 게 힘들다고 ‘아버님, 업어주세요’하는 바람에 거의 반나절은 그 녀석을 업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몸이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아이들 샤워를 시키고 피곤해서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우리 아들들이 저에게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운전해서 데리고 갔고 입장권도 제가 샀고 밥도 제가 사서 먹여줬고 샤워도 제가 시켜줬고 이부자리도 제가 봐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제게 해 준 것이라고는 그냥 제 곁에 건강하게 있어준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바로 이 시편 139편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도 그 잠자는 모습도 지켜보고 싶은 것,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이십니까?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실 수 있는 그 아버지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더러운 피를 뒤집어 쓴 자들이었는데 우리의 피를 완전히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혈연적, 법적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자녀‘테크논’은 혈연적 자녀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갈 3:2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여기서 아들‘휘오스’는 법적인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혈연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완벽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질병을 허락하시고, 가난을 허락하시고, 억울한 사기를 당하게 놔두시고, 가정이 깨지는 것을 안 말려 주시고 우리가 세상의 칼을 맞을 때 그냥 두고 보실 때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뎌내고 잘 참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1절을 보겠습니다.
(계 13:11)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1절부터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새끼 양 같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parody했었죠? 역시 이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도 어린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은 용처럼 말을 합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면 그가 무엇을 숭배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계 13:12)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그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처음 짐승,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자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하나님이 아닌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추구하게 만드는 그 세력을 추종하게 만드는 이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정체는 계19장과 20장에 가면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계 19:20)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 19:10)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의 정체가 뭡니까? 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가짜 목사들을 포함해서 잘 못된 가르침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그림을 그려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둠의 세력의 맨 꼭대기에는 용, 옛 뱀, 사단 마귀가 있습니다. 그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에게 권세와 힘을 주어 세상을 핍박하고 미혹하게 합니다. 그 마귀의 세력을 추종하고 경배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인데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 즉 다른 종교, 철학,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들, 가짜 신학자들, 가짜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종교나 다른 이단 종파 그리고 이 세상의 철학 같은 것은 접어두자고요. 어차피 그런 것들은 틀렸다는 것을 아니까요?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 온 거짓 선지자들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확인한 것이 있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항상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좋은 것들을 보여주며 그 것들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찾으라고 미혹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순교의 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의 힘과 보물을 얻게 해주고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에서 면류관을 얻게 해 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전부 땅에서 올라 온 짐승들인 것입니다.
(요일 4:3-4)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라 합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다.’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그가 정말 메시아라면 그는 이 땅에 그렇게 초라하게 와서는 안 된다’ 이게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뭡니까? 예수 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는 힘 있는 자로 왔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자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들 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벌써 요한의 시대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 천년 역사동안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앞으로도 올 것이고 아주 강한 놈이 결론을 낼 것입니다. 그 모든 자들과 그들의 사상과 철학과 가르침이 모두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적 그리스도가 올까? 그가 누구일까?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마세요. 궁금해 하지도 마세요. 그게 왜 알고 싶으세요? 그 적 그리스도가 언제 올 것인지 왜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 적 그리스도가 오면 세상이 끝난다고 하니까, 그 때 바짝 신앙생활 열심히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평소에 열심히 하세요.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수업시간에 시험 언제 보냐고 제일 먼저 물어 보죠. 공부 잘하는 애들은 그냥 그 시간에 공부해요. 그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는지 볼까요?
(계 13:13-15)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들은 큰 이적을 갖고 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세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게 시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줍니다. 여기서 생기‘프뉴마는’ 성‘령, 영혼, 호흡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 흉내를 내는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성령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고 곡해되어지고 있습니까? 성령, 그러면 기적이나 치유,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 이런 것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성령 집회랍시고 사람들 모아 놓고 쓰러뜨리고 거품 물게 하고 통곡하게 만들고 합니까? 정말 성령이 그런 것이나 하는 분이십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의 진의를 깨닫게 해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가는 길을 조명해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심판이 뭔지 설명은 안 해주고 그저 기적 같은 신앙생활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땅에서 올라 온 짐승들입니다.
여러분에게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진지하게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한번 읽어보신 분들 마음속으로 손을 좀 들어보세요. 지금 손을 못 드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당에 와서 무엇을 믿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 이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어보고 지금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도 이 앞에 서있는 목사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 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는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적은 정말 조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살후 2:9-10)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기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멸망하는 자들,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라고 성경이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막 13:22-23)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turn your eyes)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너희는 기적이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단도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서 병도 고치고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어떤 것이 사단이 하는 일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까?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시다면 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기적이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하시고 ‘이런 건 내가 하는 기적이고 저런 건 사단이 일으키는 기적이다’고 구별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기적이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라고 말씀하시고 더 이상 말씀이 없으신 것은 이제 하나님은 기적으로 일을 안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믿음‘이라는 것이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선물이 주어지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도저히 이성으로 이해 될 수 없는 것들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어도 전혀 요동 없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는 것들은 전부 성경에 기록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합니까?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은 난 아직 믿음이 없어서,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적은 절대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시지요? 부자와 나사로가 죽어서 나사로는 천국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너무 괴로워서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눅 16:27-31)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자들은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죽은 조상이 무덤을 열고 살아 나와도 절대 믿지 못 한다’ 이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적 론’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과 그 기적 자체를 숭배하지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가지 않습니다. 목사가 안수해서 여러분의 사업을 기적처럼 회생시켜주면 여러분은 안수 기도를 해 준 목사를 숭배하지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은 뭡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수요 성경 공부시간에 여러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해 드렸으니까 다시 설명할 필요 없겠죠?
여러분, 오늘도 거짓 선지자들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을 추종하도록, 힘과 이 땅의 보물을 추종하도록 강대상에서 기적을 동원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별해 내셔야 합니다. 다른 것은 보지 마세요. 누가 얼마나 큰 교회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는지 그런 것으로 진위를 가리려 하지 마세요. 사단은 언제나 광명한 천사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성경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단호하게 배격하십시오. 여러분, 모든 목사가 다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분명 이렇게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추종하게 만드는 땅에서 올라 온 짐승,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짜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중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기적들 좇아 다니지 마시고 여러분들은 “내 병을 고쳐 주시지 않아도, 내 사업이 회복되지 않아도, 내 자식이 기적처럼 좋은 대학에 붙지 못해도” 여전히 그 하나님만으로 평안하고 그 하나님만으로 행복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오. 절대 평안은 이 땅의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은 오직 하늘로부터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평화는 어디서부터 내려옵니까? 여러분의 금고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건강에서 나옵니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으로 평화를 가장한 ‘편안’을 추구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시고 하늘의 평화를 배우십시오, 하늘의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요? 그 분이 어떤 평화를 이루어 내셨지요? 도대체 어떤 평화를 이루어 내셨기에 노벨 평화상을 받으신 것입니까? 한반도의 평화는 오히려 김정일의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과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 다음 해에 로빈 수상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평화입니까? 이 땅의 모든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평화를 이루어냈습니까? 이 세상이 정말 평화스럽습니까? 평화는, 평안은 오직 하늘로부터만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평안을 세상에 선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인 들 뿐인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 는 자여, 그대의 이름은 화평케 하는 자이니라’ 이게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평안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오직 예수 안에만 평화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만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짐승이 지금 여러분을 사로잡아 끌고 가고 있습니까? 짐승이 지금 칼로 여러분을 마구 후려치고 있나요? 그들은 이 땅의 것으로 우리를 괴롭게 만들려고 하지만 우리는 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늘의 평안 속에서 빙긋이 웃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힘내십시오. 이 세상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의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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