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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I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4.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II)

 

(김성수 목사)

 

 

(엡 3:14-19)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 기도문 중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의 부분을 지금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 게으르고 나태한 신자들이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너무나 알지 못해서 별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보면 왜 사도가 그 당시 신자인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러한 기도를 했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나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통치권, 다스림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황금 보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와 함께 거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과 고난이 있는 이 땅에서도 우리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왜 굳이 그런 설명을 해 드렸느냐 하면 이 천국, 하나님 나라를 공간 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를 하게 되면 많은 부작용들이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원화시켜서 사람들을 미혹시킨 여러 이단들 중에 다미 선교회라고 있었죠? 지금도 여전히 존재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거기서 나오는 잡지에 러시아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지하 수천 미터를 파고 들어가다가 지옥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뿔이 달리고 꼬리가 달린 지옥의 사자들과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작이었지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되어서 겁을 먹고 다미 선교회로 빠지게 되었었지요. 또 한때 전 세계를 강타한 펄시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같은 책에서도 천국을 너무 공간적인, 영토 적인 개념의 아름다운 곳으로만 그려놓아서 진짜 천국의 의미를 많이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이런 견해들은 우리 주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천국은 “너무 너무 좋은 곳인데 거기 갔더니 덤으로 하나님과 예수님도 계시더라.” 는 식의 결론만 난무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혹시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 분들로 하여금 우리의 그 좋은 천국 삶이 조금 방해를 받을지도 모르겠어. 왜? 거기서는 그 분들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하니까...“이런 식 아닙니까?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천국을 놓치게 되고 자기가 상상하는 상상의 천국만을 그리다가 가게 될 것입니다. 그 상상의 천국은 아마 지옥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천국은 이 땅에서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자기가 세상에서 즐기던 많은 것들이 시시해 지는 경험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깊이 알고 ,그 예수와 함께 거하고 그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유치찬란한 개념의 천국도 이내 시시해 집니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사노라면”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2절 가사 중에 “비가 새는 판자 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죠? 세상 사람들도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한테 미안해서 간혹 어디라도 다녀오라고 하면 저희 집사람이 그 때마다 하는 말이 “당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그곳이 파라다이스라도 즐겁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과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곳일 겁니다. 그러나 거기가 그렇게 좋은 곳이라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꼭 천국을 맛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접 그 나라에서 할 일을 이 땅에서 미리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뭡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 분명 천국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건 천국에서 영원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예수를 누리는 그 곳의 삶을 미리 맛보는 공식 적인 시간이 바로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곳에서도 영원히 함께,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될 장자들의 총회가 모여서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주님을 자랑하며 찬양하며 섬기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배를 별로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지루할 거예요. 그곳에서 하는 것이 모두 예수를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인데 그게 기쁘겠어요? 그래서 저는 예배를 별로 기뻐하지 않고 작은 일만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를 빼먹는 사람들은 천국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천국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가 모이는 자리를 사모하고 사모합니다. 저는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예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천국도 그렇게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러한 강의를 듣고 지난 한 주간 “나는 성경을 하루에 적어도 5분 이상씩 읽었다”고 하는 분 한번 손 좀 들어주세요. 예수를 아는 길이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고 강조했는데. 여러분, 우리 교회는 수없이 많은 이 땅을 오고 간 인류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선택을 받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여러분의 천국을 준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 되겠어요.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7장 3절을 읽겠습니다.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러분의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인간들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하나님 말고,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과)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데에 그렇게 소홀하시면 어떡합니까? 여러분, 영생을 얻는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생이 뭡니까?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합니까? 영생은 단순히 시간 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영생은 거기에 더 손댈 것이 없고 더 진전될 여백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성의 극치, 즉 신적인 성품을 지닌 신적인 생명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혹 성경에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 그 분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 그리고 시편 같은 곳에는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나라’ 라고 표현을 하고 하나님의 의를 영원한 의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영원하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 더 이상 손 댈 것이 없는 그런 극치의 상태를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영원“은 완성과 완전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우리에게 한 번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얻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서 즉, 그 완성된 신적 성품을 포함한 신적인 생명을 향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을 수고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 속에서의 우리는 그 완전에 절대 적으로 도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생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발을 묶어놓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롬 6:22)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마지막 목표 지점이 어딥니까? 영생. 영생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그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길뿐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무시하면서 사세요? 영생이 별로 기대되지 않는 거예요. 그렇죠?

 

(요 17:21-24)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시고자 하십니까?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온전함의 수준까지 끌고 가시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라는 것이 뭡니까? 상대방의 모든 것을 내가 그 인격과 성품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아는 것을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기까지 끌고 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sting 이라는 사람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생년월일, 그 사람이 어디서 사는지, 어떤 음악 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압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을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고 그 사람 자체를 깊이 아는 것을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알게 되기까지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벌써 천국에 들어가 계셔야지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열심히 수고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영생은 완성과 완전을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그냥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그의 백성들과 그 완성의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왜 우리와 끝 날까지 함께 계셔야 합니까?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요 17:2)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보세요.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과 함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미 지셨는데 왜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서, 우리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 출생을 했지만 그 출생한 어린 아기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 아기들을 온전한 성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으로 키워 내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만큼 자라 가는 데 있어서 유일한 길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엡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골 2:2-3)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안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충만,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 그 “충만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깨달아 그 분을 몸서리치게 사랑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도착지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안 가고 전부 자기가 언제 어느 때 구원 받았다는 것만 자랑하고 다닙니다. 요즘 교회에 떠도는 간증은 전부 ”언제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다“입니다. 연예인들 불러다가 “자기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로 이렇게 구원하셨다”에 감동들하고 있습니다. 그 간증들 중에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알아가기 위해 이러한 수고를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이러한 평강과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난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 만나러 가고 싶다“ 이런 간증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증은 홍해를 건넌 것에서 멈추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계속해서 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already, not yet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세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불려 나왔습니다. 그 때 그는 전혀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림을 받은 그 시점이 그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번 부르신 자를 그의 자격과 행위를 보시고 탈락시키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림을 받은 날부터 그의 인생여정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를 벌벌 떨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됩니다.

 

“아 나를 이끌고 계신 분은 적어도 애굽 왕 바로 보다는 나으신 분이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에서 계속해서 그를 좇아가시면서 말씀을 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신뢰를 하게 되느냐하면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 일개 부족의 족장인 그가 318명을 데리고 다섯 나라의 왕이 연합한 군대와 싸웁니다. 누구를 믿고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의탁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어디입니까?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 산의 사건입니다.

 

(히 11:17-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가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 내셔서 그 약속을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신뢰했고 그렇기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께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기쁘게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에 기꺼이 순종하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지요?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의 천국이었습니다. 그 분이 어떤 분 이신지를 아는 자들에게는 아들을 잡아 죽이는 그 장소도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니까 그렇지”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여러분도 그 자리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들의 모델인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아는 데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 감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쁘게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기독교를 착한 일하고 선한 일 하게 하는 윤리적인 종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높은 윤리적 수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이루어 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음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숨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의탁한 그 자들을 데리고 함께 영생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시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착하고 선한 일”이 아닙니다. 이게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입니다.

 

(약 2:21-24)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아브라함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어떤 행함이었습니까? 이삭을 바친 행함이었습니다. 그게 착한 일, 선한 일입니까?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 분의 통치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 맡기는 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약 2:25)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라합의 행함이 뭐였습니까? 자기 조국을 팔아먹은 행함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왕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게 착한 일, 선한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시에 나라를 배반한 역적은 가장 극악한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리에서조차 그 다스림에 순종하는 천국을 경험했다면 라합도 그 나라를 팔아먹는 현장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그 곳이 천국이라면서요. 그러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행함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수 2:9-11)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보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자 “행함” “순종” “충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님 곁의 십자가에서 죽은 강도는 막 판에 죽기 전에 돌이켰습니다. 그는 평생 악한 일만 하던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행했습니까? 착한 일해서 구원 받았나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뭡니까? 자기를 주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그 분의 다스림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은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전부 합쳐봐야 우리나라 강원도 보다 작은 땅입니다. 3년 반 동안 수만 명의 인파를 몰고 다니시며 가르치신 주님에 대해 강도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그리고 그는 예수 님 곁에서 가상 칠언을 비롯한 그 분의 음성과 그를 못 박는 원수들에 대한 그 분의 행동을 직접 보았습니다. 점점 예수님에 대해 알아 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께 저주를 퍼부었던 그가 예수님께 자기 목숨을 의탁한 것입니다. “저런 분이라면 나의 목숨을 걸만하다“믿고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전에 내가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맞구나“ 우리가 정말 그 강도만큼이라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탁합니까? 그러면서 항상 그 강도를 걸고 넘어져요.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그 분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행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전부 던지는 기쁜“행함”을 이 땅에서 경험한 자들이 그런 순종의 삶, 행함의 삶을 영원히 살게 되는 천국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행함” “순종” “주님의 다스림에 완전히 자기의 삶을 의탁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믿음을 “귀신들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약 2:19-20)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이 땅에서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온전히 던지는 ‘행함’의 삶을 경험해야 하고 그 삶이 얼마나 기쁘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인지를 느껴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안 읽으실 거예요? 그런데도 성경공부 시간에 자꾸 빠지고 그러실 겁니까? 여러분은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된 특권을 가지신 분 들이예요. 왜 그 특권을 저 창고에다가 쳐 박아두고 계십니까? 교회가 아닌 사람들은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알 수 있게 되었는데도 전혀 그 비밀을 궁금해 하시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기를 힘써 기도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사탄이 오늘 날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것들을 너무 많이 우리에게 던져 놓고 우리를 기롱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주 자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가고 묵상해야 하는데 이 마귀들이 그 시간을 빼앗아 가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헬렐레 하면서 골프에 중독되고 비디오에 중독되고 사우나에 중독되고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시고 더 많은 수고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어요. 그 분은 영이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우리가 감히 인식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자신을 계시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히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골 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렇죠?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이 지금껏 배워 오셨던 것을 한번 함께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그 분을 보고 싶어 안달을 하고 그렇게 그 분과 함께 거하게 될 날을 오매불망 소망했는지 함께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잘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4:10)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물론 신성을 그대로 유지하신 채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그 중에 타락하여 아주 지저분하게 되어 버린 사람이 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육신의 몸을 영원히 가지시기로 한 것입니다.

 

(딤전 2:5)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런데 왜 그 분이 그렇게 낮아지셔야 했지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모두 한 혈통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전 인류를 대표해서 그 타락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행 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성경에는 그러한 대표의 원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패역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잘하면 이스라엘 전부를 칭찬하십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되고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하여 대적들과 싸웁니다. 아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많은 군사가 죽고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합니다. 이러한 대표의 원리는 우리에게는 좀 불합리해 보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사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clan society" 집단 부족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한 혈통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편만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표의 원리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아담의 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든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등의 개념이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혈통인 인류는 모두 하나님께 배역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가 없이는 둘 사이에 화평이 절대 이루어 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나서신 것입니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히 10:6-9)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시편40편에서 인용된 구절입니다.

 

(시 40:6-8)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과 죄인을 화평케 할 수 있는 것은 희생 제사로도 안 되고 어떤 인간의 노력도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드려지는 제사만 하나님 앞에 유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를 죽이심으로 “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단순히 죄를 지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삼상 2:25)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안 계시다고 성경이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라는 말도 잘 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사람인 아담이 지은 죄, 그리고 그 안에서 인류가 지은 죄를 담당하시러 오셔야 하기 때문에 아담과 똑같은 사람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성육신 인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해서 타락을 했고 두 번째 아담으로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중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품에 품으셨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큰 것을 보실 때도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 40:15-17)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는 열방이 한 방울 물 같고 섬들이 먼지 같습니다.

 

(욥 35:6-8) “6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시 113:5-6)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크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살피실 때도 스스로 낮추셔야 하는데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그것을 “수그카타 바시스”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 갈 때 쓰였던 말입니다. 누가 이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인성을 가지신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천사들도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고후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표준새번역]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영원이신 그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자원해서 가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비우시고 내려오셨습니다.

 

(빌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셨다. 'nothing'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신성을 다 내려놓고 오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요 2:11) “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그러면 자신을 비우셨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영광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어떤 존재나 사물의 내용이 드러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성품, 인격과 같은 그 존재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그런 내적인 영광 뿐 아니라 외적인 영광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현현을 표현할 때 “빛”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혹은 광야의 성막에서 나타난 구름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왕상 8:10-11)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렇게 하나님께는 성품, 속성, 인격 같은 내적인 영광과 겉으로 표출되는 외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사실 같은 것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 외적인 영광을 내려놓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을 몰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 보여 지는 능력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시기를 포기하시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성품이 제자들에게 드러난 것을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성”하면 자꾸 능력으로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셨는데 왜 십자가에서 아프셨느냐? 왜 죽음에서 스스로 살아나올 수 없으셨느냐?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시기를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과 이적도 성령께서 그 분을 통해 일하실 때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내적 속성은 그대로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좌절과 슬픔과 배고픔과 피곤함을 그대로 겪으신 것입니다. 신성을 가지시고 그 것을 인간처럼 겪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게다가 그 분이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아 4:9-11)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이렇게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과 함께 살고 싶으세요? 그렇게 스스로 낮아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손수 만드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도 감당키 어려운데 그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사 53:6-8)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가 죽으신 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을 백성들의 허물 때문인데 아무도 그것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자들을 위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희년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지만 누군가가 중보자가 되어 다른 이의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옵니다.

 

(애 5:7) “7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왕하 23:26-27)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간 이유를 므낫세 때에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삼하 24:10,15,17) “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는데 백성들 칠 만 명이 죽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단순히 나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어서 그들을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형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이야기에서처럼 백성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으로 말미암아 다윗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을 수 있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은 고통을 공유하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둘이 한 몸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자가 대신 형벌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위하여 죽어야 할 존재들과 먼저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들을 신부로 맞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인은 신랑이 신부를 위해 죽기 위해 치러진 혼인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부부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엡 5:25,31,32)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게 예수님과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먼저 하나로 연합이 된 것입니다.

 

(아 6:3)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우리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떠나 교회와 먼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한 몸이 된 뒤에 죽어야 그 상대방이 함께 죽은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교회를 그 분의 신부로 맞는 “선택, 예정”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불특정 다수를 위해 죽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알매니안 주의는 아주 비 성경 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선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 적인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그 한 몸 된 자들을 위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진짜 한 영이 흐르는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완전히 묶어 버리신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영을 소유하게 되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함께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신의 성품을 우리가 갖게 된 것입니다.

 

(벧후 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공동번역] “4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18절에서 3장 20절까지에 기록된 그런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하신 언약은 끝까지 지켜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이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엡 4:21-24)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신의 성품을 나누어 받은 자로서의 삶을 이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만큼을 너에게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을 달라는 반대급부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 신의 성품대로 살게 되면 우리 안에 놀라운 평안과 평화와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그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그 맛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다보면 우리 안에 평안과 위안과 확신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John owen목사님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삶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게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지지대와 받침대를 철저하게 의존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것들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해야 하는데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볼 텐데 그렇게 살아“”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이 나를 얼마나 바보 취급을 할 텐데 내가 그렇게 살아“ 해보지도 않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과감히 포기해 보면 진짜 평안과 자유와 기쁨과 확신이 오게 되는데 그것을 못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어떻게 하면 놓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 분이 내 안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만큼 그것들이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점점 커지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의 완성인 하늘나라를 점점 더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눅 2:28-29)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표준새번역] “28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에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자 무어라고 말 합니까? “이제 평안히 죽을 수 있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은 이렇게 죽음 앞에서 당당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전혀 그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여러분을 기대하십니까? 그렇게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은 ,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서의 여러분을 열망하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롬 8:23)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곤고한 사망의 몸이 다 없어지고 새 몸을 입게 되는 그 천국을 소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 예수님께서 그러한 사랑과 긍휼과 계획과 집요하심으로 지금까지 이루어 오셨다면 그 완성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예수님이 보고 싶으세요? 그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매일 매일 그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매일 매일 그 예수님을 확인하십시오. 사단이 주는 가짜 영광에 속지 마세요.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시험을 했다고 마태복음이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은 가짜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편안함과 평안함을 바꾸지 마세요. 여러분은 주님주시는 평안함을 추구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속지 마시고 더욱 더 예수님을 바로 알아가세요. 여러분의 수고가 반드시 동반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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