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김성수 목사)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표준새번역]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우리는 지난주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의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왜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시 갈구해야 하는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인지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것이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인지도 지난주에 공부를 했지요?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은 그 객관적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인 믿음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한 자들의 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그 안에 예수께서 거하시는 자들은 어떤 표지가 나타나게 됩니까? 헌금을 많이 하게 되나요? 열심히 교회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게 되나요? “아프리카를 내 품에“ 하면서 선교에 힘쓰게 됩니까? 어떤 것으로 우리가 그 표지를 삼을 수 있습니까? 절대 이러한 외적인 나타남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가짜들도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진짜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표지가 뭡니까? 인격의 변화입니다. 그의 마음 밭이 갈아엎어져서 그 이기 적이고 계산 적이었던 죄인의 인격이 다른 인격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번 공부한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충성, 그런 것들입니다. 그 모든 열매를 한 단어로 축약하여 표현하라고 하면 어떤 단어를 쓰시겠습니까? 사랑이지요.
(롬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내용은 전부 사랑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의 표지는 바로 이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나 구제나 헌신 같은 것은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의 자랑을 위해 연극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혀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되지 않는 겉만 번드르르한 행위를, 자기도 스스로에게 속으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을 아프리카에 가서 헌신한 슈바이처의 삶을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선한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은 늘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그저 자신의 자랑과 만족을 위해 하는 어떤 선한 행위도 모두 “죄”입니다. 그것은 왜곡된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새벽 기도 때 공부한 요한복음 18장을 한번 보고 넘어가지요.
(요 18:28)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빌라도의 법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이미 사형 언도를 내려놓고 총독인 빌라도에게 형식 적 재가를 받기 위해 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엉터리 같은 재판을 거쳐서 로마의 총독 앞으로 끌고 간악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정결하게 지키겠다고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열심이 있는 자들이 눈앞에 있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마 23:3-7)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말 2:13-16)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 와서는 “왜 하나님 이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하고 울고불고 야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안 받는지 아니? 그 이유를 말해줄까?”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종교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서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 분의 성품을 닮고 싶고 이어받고 싶은 간절한 염원이 그 종교 행위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행위는 하는데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거짓말이나 하고 서로를 학대하고 하는 인격의 변화가 없는 그런 자들이 바치는 종교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눈꼬리는 점점 마귀할멈처럼 변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한 두 시간 새벽 기도 하고 눈 퉁퉁 부어서 나가면서 불쌍한 콩나물 장수 할머니한테 콩나물 더 안 준다고 삿대질하는 말도 안 되는 가짜 종교행위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인간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마땅히 부모님을 섬겨야 할 책임과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책임을 어떻게 악용을 했는가 하면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고르반으로 하나님께 한번 드리고는 부모님께 드릴 것도 하나님께 드렸으니 난 내 할 일 다 했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당구를 1000을 치십니다. 그래서 간간이 교회 앞 당구장에서 교인들하고 내기 당구를 치신답니다. 그런데 실력이 워낙 좋으니까 치는 족족 이기시는 겁니다. 그 중에 자주 이 목사님께 돈을 잃던 한 교인에게 목사님께서 미안해서 “김 집사 이거 너무 자주 잃어서 어떡하지? 우리 핸디 조정을 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아니에요 목사님, 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그래서 이 목사님이 속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참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왈 “목사님한테 잃은 돈은 십일조에서 까요” 그러더랍니다. 어차피 목사님한테 잃은 거는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거니까 쌤쌤 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거죠. 부모도 공경 못하는 인간들이 고르반이다 뭐다 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인격입니다. 나의 거룩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그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임무와 목표를 말씀, 기도, 전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전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만하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풍토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묵상하라 하시고 기도하라 하시고 전도하라 하시는 것은 그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자로, 거룩한 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만들어 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말씀, 기도, 전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지 그 것 자체를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부모가 다그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에서가 아닌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다 돈을 잘 벌지는 않습니다. 그 공부 자체가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망나니처럼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더 부자가 많습니다. 더 잘된 사람이 많아요. 공부는 돈을 잘 버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느냐? 그 나이에는 공부가 성실과 책임을 훈련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수학 시간에 배운 미분 적분, 집합 같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전혀 일상생활에서 써먹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애써서 그 미분 적분을 공부해야 합니까? 수학은 우리 뇌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미분 적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라는 것은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기 위한 방법이요 길일뿐입니다. 그 것 자체를 행했다고 해서 그걸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 이렇게 평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있느냐,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리신 위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요 17:13-22)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올바른 교회의 특징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올바른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을 닮은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진리 위에 바로 서야 한다고 합니다. 네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하나 됨, 연합에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랑을 근거로 나와야 하는 것들입니다. 기쁨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자신의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엉터리 쾌락주의. 거룩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자기 자랑, 자기만족밖에 남는 것이 없지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거룩의 표준에 도전을 하시니까 그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사랑이 빠진 거룩의 결과입니다. 진리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냉혹한 정통주의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옳은 가르침이지만 사람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교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게 무엇입니까? 제국주의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습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개신교를 전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노예 취급하고 , 우민 정책을 쓴다고 아기의 뇌의 발육에 꼭 필요한 소금의 양을 제한 시켜 버리는 잔혹한 인간들이 전하는 예수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연합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대장이 되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 근본적인 인격의 변화 없이 행해지는 모든 것은 사상누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거룩”입니다. 다른 말로 “성숙”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감”입니다.
(롬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뭡니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4:3)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삶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막연하지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사랑을 정의하자면 사랑은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상대방의 성숙을 목표로 두고 끊임없이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잘 못 오해하고 있는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랑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게 되면 한동안 자기와 주변 세계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내가 아닌지 모릅니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자신과 외부를 구분합니다. 그것을 자아경계, ego boundary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엄마와 자기가 하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배가 고파도 엄마가 밥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다른 존재인 것을, 그리고 외부 세계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라 깨닫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간은 배고파서 울면 무조건 밥을 주니까 자기가 전지전능한 자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배가 고파서 우는데 엄마가 곁에 없기도 합니다. 내가 오줌을 싸서 불쾌한데 엄마가 갈아주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아이는 자기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의 제한성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 자아의 영역을 분명히 인식해 나갑니다. 그렇게 자기 자아의 영역을 인식하게 되면서 사람은 고독하고 외롭게 됩니다. 외부와 나와의 경계가 명확하게 인식이 되어 갈수록 인간은 점점 고독하고 외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소위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그 고립감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지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억누르고 감추어 왔던 성적 충동이 밖으로 표출 되게 됩니다. 그것은 몸속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일 뿐입니다. 그래서 급격히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욕망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단시간에 서로에게 빠져 버리는 사랑은 그 성적 욕구가 사라지게 되는 순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함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의존감도 사랑이 아닙니다.“난 그 사람이 없으면 못 살아요” 굉장히 좋은 말 같지만 그것은 집착 혹은 의존이라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연애 할 때 상대방이 “난 당신 없으면 죽어 버릴 거야”그러면 은근히 흐뭇해 하지요? 경계하셔야 합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같이 느끼는 것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안 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철없는 행동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안 된 비 성숙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의존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남편이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하나가 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어떤 목적을 향해 한 마음이 되라는 것이지 내 인생이 네 인생이고 네 인생이 내 인생이라는 식의 맹목적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향한 멀고 험한 길은 혼자 가는 것입니다. 곁에서 기도로 삶으로 도울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보면 사단장 사모님은 자기가 사단장이에요. 연대장 사모님은 자기가 연대장 사모님이에요. 저희 부대에 작전 참모의 사모님이 참모장 사모님의 고등학교 선배님이었어요. 그런데 자기 후배 앞에서 쩔쩔맵니다. 신발도 닦아 줘요. 상대방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을 함으로 해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게 자기의 삶까지 의탁해 버리는 집착과 의존을 성경은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을 혼돈 하는 것을 나르시즘이라 합니다. 나르시즘은 “어머 어떡해, 난 너무 예뻐” 이런 것을 나르시즘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귀여운 애교죠. 나르시즘은 무서운 것입니다. 치마 바람의 주인공들 중에 그런 나르시즘 환자들이 많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자식은 잘 돼야 한다는 집념이 그런 치마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식의 진정한 필요와 성숙을 위해서가 아닌 나의 자랑을 위해서 자식의 출세를 꽤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곧 나이니까.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서 야단을 칠 때도 아이의 성숙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부끄러워서 야단을 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놈이 쪽 팔리게 F가 뭐야?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정신병입니다.
세 번째로 무조건 적인 자기희생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의 어머니들, 얼마나 희생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찬밥만 먹고 늘 윗목은 어머니들 차지였고 허드렛일들은 전부 어머니들의 것이었습니다. 재떨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불러서 재떨이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들의 삶을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상대방에게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희생만 하는 것은 병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학대를 당해주면서 그 학대를 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거나 모욕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상대방을 용서하고 있다’라는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학대받는 위치를 즐겨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학대받는 위치에 서서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feeling이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 감정이 동반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그러한 감정만으로는 정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이트클럽에 놀러 갔다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서 그 날 밤 잠 자리를 같이 했다고 쳐보자고요.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들어서 그렇게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제 대학 동창이 LA에 삽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아내가 얼마나 괴팍하고 지저분한지 몰라요.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아내의 얼굴만 보면 화가 난답니다. 어느 날 자기 마음속에 그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더래요. 그동안 자기가 좀 너무했다 싶어서 꽃을 사들고 카드를 써서 아내를 기쁘게 해 주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초인종을 눌렀답니다. 자기 아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옷에는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져 있고 입에는 뭘 씹고 있는데 보니까 총각김치 무가 반쯤 삐져나와 있더래요. 그 순간 그 꽃으로 한 대 후려갈기고 나가고 싶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사랑은 감정만으로 정의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진짜 사랑은 그 대상의 성숙을 위해,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넓혀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확장하고 자신을 넓혀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진짜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그 대상을 어떻게 유익하게 할까 많이 연구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좋아하던 여행도 자주 안 갑니다. 그 강아지를 혼자 있게 놔두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어딜 가도 얼른 시간을 당겨 집에 들어가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먹일까, 털은 어떻게 깎아 줄까? 많이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는 코코스페녈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코코스페녈은 귓병이 잘 걸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귓병이 안 걸리게 되는지 인터넷으로 찾아서 그렇게 잘 관리를 해주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 대상의 어떤 부분이 나의 존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나의 존재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거기에는 나의 의지를 동원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방의 성숙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를 발동한 선택과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인간적인 매력이나 성적인 매력이나 동정심이나 , 아니면 우연한 만남이나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저절로 사랑이 생겨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에게서 어떤 사랑할 만한 근거나 조건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누구, 누구, 누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을 하신 후에 그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하셨습니다.
(시 139:1-4) “1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그 혀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큰 관심으로 우리에게 집중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사랑하시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죽이셨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아까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 거룩한 백성 됨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시기 위해, 그렇게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국어사전의 사랑의 개념과 많이 다르지요?
그렇게 상대방의 성숙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 해주는 쪽이 덜 성숙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사랑 해주는 쪽이 더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나의 성숙까지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숙은 어떻게 챙길 수 있습니까? 똑같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으로 성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닥치는 고난으로 그 자신이 성숙해 집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떠나서 사랑을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나는 예쁘니까 나는 영원히 사랑 받을 거야, 나는 부자니까 우리 아내가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거야. 그런 사람들 있는 것 같아요. 천만에요. 그런 매력들은 금방 시들게 마련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12년 전에는 저렇지 않았습니다. 인형 같았어요. 척키 말고 바비 인형.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장모님이 옆에 누워 계세요. 저도 예전에는 꽤 괜찮았어요. 그런데 요즘 새벽에 문득 거울을 보면 거울에 저희 아버님이 와 계세요.
만일 사랑을 그런 외적인 것에 대한 매력이나 그 매력으로 인한 호감 같은 감정으로 정의한다면 그러한 매력이 떠나게 되면 사랑도 함께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태기라는 것을 겪는 것입니다. 이제 쓴물 단물 다 빨아먹고 나니까 상대방이 싱거운 헐랭이 오이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러한 매력들이 떠나도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로 결정했고 선택했으므로 최선을 다해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 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어요. 신앙 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쉽게 싫증을 냅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 대상의 유익과 성숙을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commitment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태도, 반응, 질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무조건 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commitmen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여전히 이렇게 원수 짓을 하고 있는데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은 내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 내가 나의 에너지를 동원해서 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때로는 책망과 질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고 늘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기 위해 나쁜 길로 가는 데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궁극 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성숙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옳지 못한 길로 갈 때는 책망하고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3:6)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불의 앞에서 절대 침묵하지 않습니다. 따끔하게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방의 영적 성숙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끔 오해도 받게 됩니다. 진짜 사랑은 그러한 오해도 감수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영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코치 가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실화입니다. 캘리포니아의 리치몬드 고등학교 농구 부 스타 레이어 출신인 코치 카터가 자기 모교에 농구 부 코치가 되어서 순 날 건달들로 구성된 그 농구부원 들을 잘 훈련 시켜서 주 대항전까지 올라가는 내용입니다. 코치 카터는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농구부원들이 대학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학교 시험 점수도 관리합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하던 농구 경기를 완전히 중단하고 그 아이들 점수가 올라갈 때까지 경기를 안 시키고 공부만 시킵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가 운영하는 스포츠 용품점에 돌이 막 날라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 속에서도 자기 농구부원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나 겨우 졸업하고 마약 중독자나 갱 단원이 되고 마는 그런 운동선수들의 미래를 이 사람은 뻔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이 한 사람의 코치의 사랑이 농구 부 전체를 대학에 보냅니다. 나중에야 코치 카터가 자신들에게 그렇게 혹독하게 한 것이 진짜 자신들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때로 오해도 사고 욕도 먹습니다. “사랑“ 하면 아름다운 순애보 만들 떠 올리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치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대 하실까?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독립성과 인격성을 성숙시켜 가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오해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삿대질도 받으시면서 우리의 성숙을 위해 묵묵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이다 같은 환희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저희 집사람을 들들 볶습니다. “비디오 보지 말아라, 성경 읽어라, 혹은 책 사다주고 언제까지 다 읽어라”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면 제가 설거지, 청소 다 해줍니다. 그리고 성경 읽으라고 합니다. 기도하라고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제 아내가 다른 것 안 하고 제 시중 들어주고 제 심부름이나 해 주고 하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훨씬 편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상대방을 자기에게 복속시키는 것은 폭력입니다. 당장은 짜증을 내고 당장은 힘들어해도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적 유익과 영적 성숙을 위해 잠시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감정뿐만이 아니라 의지의 발동이며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서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는가?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이게 새 계명입니까? 그 전에는 없던 계명인가요? 아닙니다.
(마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결국 무엇을 나타낸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도 결국 사랑이지요? 그러면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가 뭡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면 우리도 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들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을 목숨 바쳐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해 낼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와서 다시 새 계명이 주어집니다. 역시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해 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예수의 사랑을 한 자로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인생 속에서 그 사랑을 연습하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즉,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뭔지 알아야 따라하지요. 그래서 말씀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분은 어떤 분이신지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 궁극에는 그 예수님처럼 되라고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복음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모든 사랑은 먼저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 분명히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제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엡 5:28)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을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간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가 세속적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과 사회는 계속해서 진보하고 발전해서 인간을 잘만 가르치고 계발하면 급기야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지나치게 인간을 높이 평가하는 사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악한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보는 비관적 사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인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면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근본적 사실주의라고 하지요. 우리는 망가진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성, 부패성, 불가능함 같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이며 장차 예수님처럼 변할 것이라는 이중적 평가를 합니다.
(골 3:2-4)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새로운 실존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숙해 질 것입니다. 그 때는 그 때고,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렇게 더러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점차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아마 죽는 날까지 마음속으로, 실제 삶으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짓고 있는 우리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구원받은 여러분의 실수나 실패를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여러분을 보십니다. 망고 땡이죠?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야비하고 치사한 사기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야곱이 개과천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후로는 그를 이스라엘로만 봐 주십니다. 야곱의 실수와 실패는 모두 어딘 가로 감추어지게 되고 야곱은 거룩한 이스라엘로만 하나님께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근본 적인 실존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맏아들 예수의 동생들인 작은 예수로만 평가되는 분들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진정한 영적 실존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세상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 하면 그가 가진 조건과 배경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의사 아무개, 국회의원 아무개, 변호사 아무개, 거지 왕 김춘삼 이렇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과 배경과 환경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범은 사도 세자의 증손입니다. 왕가의 세력다툼으로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원범은 오랜 세월을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았습니다. 자연히 학문과도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원범이 19살이 되었을 때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어 버렸습니다. 유일한 왕족이었던 이원범은 농사꾼에서 졸지에 조선 25대 왕 철종으로 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무꾼이었을 때의 이원범과 철종 이원범이 다른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신분, 환경, 조건, 배경이 모두 달라졌지만 이원범은 여전히 그 이원범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하면 우리는 진짜 “나”가 누구인지 정말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을 꼬집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면 속에 있는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환경과 조건과 배경을 가지고 ‘그 사람은 행복할거야, 그 사람은 불행할거야’하고 추측을 합니다. 그 환경과 배경과 조건이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런 것으로 정의하시면 안 됩니다. 아울러 나의 몸도 ‘나’는 아닙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일부분입니다.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던 이지선이라는 학생이 화상으로 온 전신이 자신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화상을 입기 전의 이지선과 화상 후의 이지선이 다른 사람입니까? 아니요.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 육신도 “나”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사상, 지위, 얼굴, 직업, 학벌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데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그런 모든 조건과 환경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면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마 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지요?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바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짜 “나”는 여전히 멍청하게 죄에 끌려가고 죄를 추구하고 죄에 빠져 있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이제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서에서 두 줄 걸러 한 번씩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우리는 절대 불가능한 자들임을 사도 바울은 절감한 것입니다.
(롬 7:14-17)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바른 인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이 지금 짓는 모든 죄는 여러분이 짓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죄가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 안에 죄의 습관과 경향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순결한 삶을 살아 낼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들을 이제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진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맞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짓는 우리를 보고도 “너는 존귀한 사람이야”라고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냐, 하나님이 이런 파렴치한 자를 어떻게 사랑하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사랑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늘 조건 적인 사랑만 보아왔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 그러면 먼저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수처럼 살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적으로 지속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좋은 사람, 나에게 잘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귀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 속에 뒹굴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직시하게 될 때 반성은 하시되 죄책감은 가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렇게 지저분한 죄 속에서 뒹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3:1-7)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나”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을, 구스를, 스바를 주고 바꾸실 정도로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지만 난 이제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버린 너의 그 옛 사람을 절대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보는 내 자녀들은 모두 예수라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나의 맏아들 속에 들어있는 존귀한 자들뿐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애굽을 구스를 스바를 불태워 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나의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실제로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사랑하신 존귀한 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여러분을 인식시켜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표지들로부터 빠져 나오셔서 진짜 여러분을 보셔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저를 남들에게 인식시켜주던 모든 표지들을 다 떨쳐 버리고 맨 몸으로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 교실에 앉아서 한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가수 김성수도 아니고 투사 김성수도 아니고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다 떨어버리고 나니 “나”가 누구인지 저 자신도 모르겠더라고요. 한참을 생각 하던 중에 하나님 안에서 진짜‘나’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귀한 사람인지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조건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진짜 ‘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진짜 ‘나’를 인식할 수 없도록 ‘가짜 가치’라는 것을 만들어서 ‘나’를 포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 가짜 ‘나‘를 치장하기 위해 공부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다가 결국 인생을 헛되이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나”를 직시하고 그 “나”를 받아들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진짜 나‘를 발견하고 그 “나”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를 많이 얻은 사람은 그 ’가치‘를 자랑하다가 죽고,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한탄하다가 죽고 전부 그렇게 속절없이 가는 것입니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잘 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와 같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로서의 “나”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남보다 잘 되려고 노력하고 남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느라 시간을 허비합니까? 혹시 기대하는 바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기 자신에게“에이 이 빙신아, 나가 죽어라” “너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자기를 학대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껍질을 벗고 진짜 “나”를 보십시오. 황금같이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보세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귀한 “나”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또 똑같이 그렇게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다른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롬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그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며 모임입니다.
(롬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 뭡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 4:20-24)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들은 모리아 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남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린다고, 어디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예수라는 진리에 근거하여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거룩한 삶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게 진짜 예배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자랑하는 시간이 우리가 모이는 공 예배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으니까 예배가 지겹고 지루하고 시간 때우기가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배우세요. 그리고 그 사랑이 뿌리와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 삶을 사십시오.
(요일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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