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II)
(김성수 목사)
(엡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아래 있음을 성경을 통해 공부를 했습니다. 인생과 역사에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인간의 관점에서 인생과 역사와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던졌던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다음 주까지 더 고민해 보세요. 오늘의 성경공부는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스승님의 강의에서 상당부분 발췌를 한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이 인생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셔서 우리를 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거저 천국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정확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시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세밀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 32:8)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너에게 지시하고 가르쳐 주마. 너를 눈여겨보며 너의 조언자가 되어 주겠다."
(잠 16:9)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요리 조리 데리고 가셔서 목적지에다 편안하게 데려다 놓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드시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이율배반 적인 진술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람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너희의 구원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공부한 우리에게 성경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요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갈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 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서는 모두 우리가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이러한 이율배반을 대하게 될 때 이것을 어떻게 종합하여 이해를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마세요. 그 각각의 내용이 모두 진리임을 인정하시고 겸허하게 그 말씀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인 진리를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때는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책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창세전에 너를 택하고 예정해서 너를 구원하였고 너의 구원을 영원히 완성시키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바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방종에 빠지고 죄에 빠지고 게으름에 빠질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주 예수를 믿어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둘 다 맞아요.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역동성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때 다른 각각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조금씩 익숙해지실 거예요.
오늘은 제가 연역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설명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십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인생을 구원을 향해 다른 말로 하면 성숙을 향해, 거룩한 삶을 향해, 순종하는 삶을 향해 이끌어 가십니다. 분명 거기까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거기까지 가는 길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갈림길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진짜 구체적으로 야곱에게 식구들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가라. 혹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애굽으로 피신해라”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가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 일은 구속사의 획을 긋는 큰 사건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주 드물기 때문에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이 ”도대체 기도의 응답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겁니다. 명쾌하게 대답을 안 하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 놓고도 때로는 잘 못된 선택으로 혼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느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하나님 어디에 취직할까요? 하면 하나님께서 “팬컴으로 가거라. 아니면 삼성전자로 가거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배우자 기도를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요렇게 생긴 어느 집안 규수를 찾아 가거라“ 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내일도 점심시간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더러 “내일은 짬뽕을 먹어라 자장면을 먹어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 한 후에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과 취향, 선호에 따라 여러분의 배우자를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의 연륜과 가치관을 총동원해서 최선을 다해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선택해서) 인생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한 발 한발 이끌어 주시지 않고 이렇게 미련한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만드시는가?
우리가 잘 구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선택을 잘 해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면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분에 맞는 삶을 가르쳐서 우리에게 자유로운 사랑을 받고 싶으신 것이 목표입니다. 죄를 못 짓게 꽁꽁 묶어 놓고 하나님이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닌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고 인격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면 위험한지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선택을 해서 그들의 길을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멋모르고 난로에 손을 댔다가 뜨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면 그 다음부터 아기는 그 난로에 손을 대지 않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하나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늘 옳은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쪽을 향해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을 했는가하면 우리 안에 있는 “통제성향”과 “자기 보호”에 의해 선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을 집착과 중독이라고도 표현 한다고 했지요? 통제 성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내 기분에 맞도록 조절하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고 말을 안 들으면 화를 내고 주변 상황을 나한테 가장 살기 좋도록 만들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어도 역시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자기를 보호해 주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내 감정을, 내 자아를 내 환경을, 내 몸을 보호해야 합니다.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미움, 시기, 다툼, 증오, 살인 같은 것들입니다. 나를 해칠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움과 시기, 다툼 같은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유익하게 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가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리가 없지요?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그 통제성향과 자기 방어의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잘 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낭패를 당하고 고통을 당할 것을 하나님은 아시지만 선택하게 놔두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잘 못된 선택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죄의 가공할 위력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을 했는데 이것은 정말 하나님과 이웃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구나, 이것은 아픔을 주는 죽음의 길이었구나.” 하고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게 되고 선한 것을 사모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이 형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갑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애굽으로 도망을 칩니다. 잘 못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잘 못된 선택이 그의 인생의 결론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브라함의 삶은 그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아브라함은 얼마 있다가 또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또 잘 못된 선택으로 혼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는 애굽왕 바로도 벌벌 떠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이신지 배웁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을 해 가면서 결국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아들을 바치는 성숙한 자로 만들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한번 볼까요.
(창 47:8-9)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원래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25장에 보면 리브가가 이들을 배었을 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일을 하기도 전에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도록 예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의 꾀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가만히 있어도 엄청 복을 받고 살 사람이었는데 잔머리 쓰다가 고행만 진탕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아도 그는 장자의 권리를 가지게 될 하나님의 택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야곱은 자기의 꾀로 부를 축적합니다.
(창 30:37-39)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라반의 말대로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기로 하셨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 나무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양 떼가 먹는 물구유에다가 안 세워도 야곱은 거부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꾀가 자기를 심히 고단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레아를 선택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레아의 아들인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아보다는 라헬이 예뻤습니다.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말은 얼굴이 못 생겼다는 의미도 있지만 눈길이 부드럽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는 어구입니다. 레아는 눈길이 부드러웠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예쁜 라헬을 택했습니다. 결국 7년을 더 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30년 동안 꾀를 써서 부자가 되고 자식이 많아지긴 했지만 심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노라고 자신이 시인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잘 못된 선택을 하는데 왜 하나님이 그냥 놔두셨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이 이 땅에서 몇 명의 자녀를 두고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세요. 하나님은 사기꾼 야곱을 승리자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데에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참 복을 받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야곱이 그 잘 못된 선택들을 통해 배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늘도 여러분의 의지를 발동하여 선택을 하시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참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아이들이 자유롭게 선택을 훈련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선택을 잘 못해서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고 그 책임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자식들의 문제를 대신 선택을 해줍니다. 먹는 밥까지도 부모가 정해주는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자기의 선택과 관계없이 피아노, 바이올린, 발레를 해야 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전공도 부모의 의견에 따릅니다. 직장도 부모가 원하는 곳엘 갑니다. 배우자도 부모가 반대하면 이루어지지 않지요? 아주 바람직한 부모 자식 관계처럼 보이지요? 천만에요.
자식을 로봇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가면 아이들을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켜 놓았는지 애들이 서너 살밖에 안 되었는데 부모가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아이들 있습니다. 그건 잘 못 키워도 한 참 잘 못 키운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합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삶 속에서 인격은 성숙하게 훈련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훈련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신 연령이 열 살에서 열두 살에 머문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체격만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갖게 되고 남들에게 괄시(恝視) 받으면 안 되니까 껍데기만 교양 있는 척 하고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드디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일단 서로에 대해서 체면치레나 위선적인 가면 같은 것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내면의 열 살짜리 미성숙한 인격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기의 앞길에 바른 선택을 내려주기를 기대합니다. 자기 짐을 상대방이 맡아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대에 못 미치게 되니까 자꾸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이나 학교나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 있지요? 너무 어려서. 그 사람들이 그런 미성숙한 인격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입니다. 선택을 하면서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선택을 하면서 살도록 훈련이 된 사람은 자기의 일에 반드시 책임을 질 줄 압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되면 분명 잘 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다음에는 그런 결과를 초래한 잘 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밥을 안 먹으면 굶기세요. 그래서 “심통 부려봐야 배만 고프구나.”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좇아다니면서 떠먹이지 마세요. 그건 자식을 사회의 흉기요 애물단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책임회피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선택을 하지 않고 충동에 의해서 습관에 의해서 시대의 조류에 의해서 자기 방어와 통제 성향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러분이 무엇을 선택해서 한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학교에 왜 가셨습니까? 왜 직장에 가셨지요? 아이들 학교는 왜 보내셨어요? 밥은 왜 아침 점심 저녁에 드세요.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의식하던 하지 못하던 계속해서 선택을 하시면서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을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아니에요. 여러분은 끊임없이 여러분이 좋은 것을 선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자각하시고 여러분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자각하고 바른 선택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때로는 잘 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고배를 마셔 본 사람은 자기의 시행착오에 대해서 인정하고 분명한 반성을 하며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분 냄, 폭력 분명 우리가 선택한 것 들 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러한 것을 기반으로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자유롭게 바른 선택을 하면서 성숙한 삶을 살아내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너무 들 잘 못 가르쳐 가지고 나가서는 개판으로 살고 교회에 와서만 거룩한 척 하는 가짜들만 양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30-40년씩 해서 집사 장로 권사들 되었는데 여전히 인격적으로 비 성숙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숙을 훈련하셔야 합니다. 바른 선택과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 자유의지 하는데 거듭나기 전의 사람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지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의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지라는 것은 선택의 기능입니다. 사람은 의지를 발동해서 이러 저러한 행위를 선택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의지“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내가 이것보다 저것을 더 좋아한다.”라는 선호함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완벽한 중립의 상태에서는 선택과 결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지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며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을 결심시키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는 무언가에 예속된 예속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자유의지라는 단어 자체가 무리가 있는 말입니다. 무엇에 예속되어 있을까요? 자신의 이성의 논리나 양심의 목소리 또는 정서의 충동 즉, 한마디로 자신의 지식과 감정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 것을 우리는 ‘마음, 생각‘이라고 하지요. 여러분의 의지는 마음과 생각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수요 성경공부를 갈까? 집에서 숙제를 할까?”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학생으로서의 의무감이요 뼈 빠지게 일하셔서 학비를 대주시는 부모에 대한 존경심 등이 작용을 해서 그 쪽으로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학교에서 인정받고 좋은 직장 얻어서 폼 한번 잡고 살아보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고 하늘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들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어져 가는 것인가? 오늘 중요한 것을 한다고 하는데 잠을 조금 못 자더라도 오늘 밤 새기로 하고 교회에 가서 성경 공부하고 기도하고 오자” 이렇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여러분은 “교회 가자” 하고 선택을 해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분명 여러분의 지성이 동원이 됩니다. 추론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지는 그 지성과 추론과 경험에 근거해서 선택을 내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의지는 자유 합니까?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죄인들은 그들의 이성과 지성과 정서가 모두 타락되어 있습니다. 그 의지가 무엇을 선택할까요? 항상 통제성향과 자기방어에 근거해서 자신의 God illusion을 깨지 않을 수 있는 선택만을 합니다. 의지는 마음과 생각에 의해 예속되어 있고 그 마음은 더럽게 부패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렘 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러니까 타락한 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선택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의지는 모든 방면으로 자유로웠습니다. 그들은 무죄 상태로 창조 되었지만 거룩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타락을 한 후 인간은 이제 한쪽 방향으로 편향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악의 방향으로만 자유롭습니다. 죄인은 이제 선과 악에 대한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언제나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만류인력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제가 들고 있는 이 책을 1M 상공에 떠 있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들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자연스럽게 죄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요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엡 2:2-3)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렇게 인간은 죄, 육신, 집착, 중독에 따라 자신의 God illusion을 지키기 위한 선택만을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늘 염려에 빠져 있습니다. 염려와 평안 중에서 왜 염려를 선택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없이 살도록 길들여진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앞일에 대해서 염려를 하게 되지요.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늘 두렵습니다. 자신을 지켜 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죄책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얼굴이 철면피라서 죄책감을 안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죄인들은 죄책감을 아주 강하게 갖습니다. 그게 뭐가 나쁜가요? 이렇게 질문하실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우리는 분명 죄에 대한 인식을 하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정죄를 하는 것은 죄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벌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정죄 하시고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이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완전히 한쪽으로 편향이 된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자유 의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해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만류인력을 거스리고 공중에 머물도록 꼭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의 실존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불가항력적으로 저절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의 얼마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져 올리신 것이 바로 성도들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만져서 의지를 발동케 하십니다.
(빌 2:13)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스 1:1-5)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바사 왕 고레스 왕이 성전을 재건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했는데도 그냥 거기가 편해서 안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수의 땅에 머무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켜 준 사람들만 일어서서 성전을 재건하러, 고생하러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자유 한 의지를 소유한 성도들은 바로 그 육신과 성령의 요구 사이에서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갈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식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습관에 따라 죄 만을 선택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 나는 이렇게 불가능한 존재구나. 난 이렇게 매일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됐습니다. 이제 한발 더 나가셔야 합니다. 그 사실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계속 출발 지점에서 텐트치고 야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그 신앙의 출발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죄인이고 불가능하고 실패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이제 서머나 교회 2년 차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여러분에게 조금 당황스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 이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분들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삶의 매 순간에 그 사실을 인식하시고 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물론 여러분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의로운 삶에 대한 소원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 성령을 좇아 행하셔야 합니다. “난 안 돼, 난 못 해“”난 이상하게 죄가 좋아“ 여전히 이 상태에서 머물고 계신 분들 있지요? 여러분 확실하게 알아두세요. 게리 토마스에 의하면 그것은 거짓된 욕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우리의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열망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죄를 사랑하는 자라고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죽을 몸(사륵스) 육신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경향 습관이 마치 우리인양 우리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이제 우리는 완전하게 새롭게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자꾸 확인하고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속임수에서 한 발 한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속으시면 안 돼요.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갈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군대에 있을 때 제 바로 위의 고참이 저보다 나이가 세 살이 어렸습니다. 애가 어려서 그런지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고 하니까 “제대하면 마음껏 조롱해 줘야지“ 그러고 제대를 했는데 제 동생하고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그 고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갑자기 경례를 하면서 ”충성“ 했습니다. 습관입니다. 그러고는 자기도 겸연쩍은지 반말도 못 하고 서먹서먹하게 헤어졌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링컨에 의해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흑인들은 자기 옛 주인을 만나면 그렇게 쩔쩔 매고 오히려 다시 그 집에 노예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조르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런 것들이 바로 육신(사륵스)라고 하는 것이고 집착이요 중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우리에게 훈련되어지고 힘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인생동안에 잘라내고 새롭게 창조된 영이 열망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한 성숙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그 힘을 더 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 서울대학 가게 해 주세요. 하고 백일기도합니다. 출세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부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정확하게 통역을 하면 “하나님 저 하나님 없이 살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져야 하고 내가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그런 것만이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그런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안수 해주면서 도와주는 목사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이 바른 선택을 위해 확인해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바른 선택을 해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냈을 때 사람들은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바른 선택에는 생명력과 기쁨과 힘이 실리기 때문입니다. 바른 선택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것을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선택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힘이 실리게 됩니다. 여러분, 왜 학생 운동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자기 몸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 불을 켤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학생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 덩치 좋고 힘 센 사람 보셨어요? 다들 비리비리 하지요?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옳던 그르던 자기가 무엇을 선택했고 자기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 사람은 생명력과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른 길을 선택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생명력과 힘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해보신 분들만 알아요. 예전에 800만원이 수중에 생겼습니다. 그런데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당시 타고 다니던 차가 별로 낡지 않았었는데 ,이 돈을 조금 보태서 차를 바꿀까? 동시에 “동철이 어머님 위암 수술 비” 둘 중에서 갈등하다가 수술비에 보탰습니다. 수술비가 넘치게 모아졌고 저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돈을 버려보는 연습을 통해 결코 그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배우고 충만한 기쁨을 느껴 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른 선택이 왜 성도의 삶에 중요한지도 배우며 또 다시 바른 선택을 하고픈 열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신앙의 사상성이 형성이 됩니다. 그것을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세계관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죄인들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 종교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다른 말로 하면 “정확한 성도의 목표지점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제가 지난 1년 동안 서머나 교회에서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강조한 부분입니다. 목표지점이 정확하게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 종교는 혼합주의라고 합니다.(syncretism)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와 무속신앙이 합쳐져서 어떤 게 무속신앙의 부분이고 어떤 게 유교의 부분이고 어떤 게 기독교의 부분인지 구별이 안 가는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계관의 변화 없이 그냥 무작정 무속신앙의 기복만 좇아 가다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잡교가 된 것입니다.
세계관은 세상과 사물을 보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모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능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나는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설명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사물을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성되고 지금도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경험이 또 다시 나에게 닥칠 때를 대비해서 그 경험을 해석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험한 것이구나. 어, 아프네. 조심해야지” 그러면서 어느 정도의 방어를 준비합니다. 그런 경험을 자주 하면서 경험과 이성의 합리와 작용에 의해서 저 내면에 하나의 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은 아주 강하고 공격적인 세계관이 생기게 되고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방어적이고 거칠게 됩니다. 자기의 경험이 “세상은 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내면에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사람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경험과 이성의 합리화 작용에 의해 인간의 세계관이 생기게 되고 자기 세계관이야말로 무조건 옳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세계관을 무시하고 자기의 세계관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고집불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한번 형성이 되면 견고한 성처럼 깨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 것이 깨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손을 대셔야 그 세계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정도”라고 믿었던 그 인간의 삶에 그 것을 뒤집는 사건들과 경험들이 들이닥치게 되면 인간의 견고한 세계관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어, 이거 아니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면 처음에는 잃어버린 지갑도 기도만 하면 척 찾아지고, 택시가 필요하면 어디선가 택시가 탁 나타나고 하다가 곧 기도 응답도 안 들어지고 인생에 어려움들이 닥치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잘 못 쌓아진 세계관을 조금씩, 조금씩 붕괴 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무슨 신비한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의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관 즉, 바른 신앙관을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가 왜 여러분의 인생에 필요했으며 그 예수는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주셨는지 그러한 경험들을 동원해서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예수를 알아가고 바른 선택을 하며 성숙한 자로 만들어져 가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동양식이나 가치체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이 바뀌어야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신앙인들의 올바른 세계관이냐?
(골 3:1-10)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날 기독교의 세계관은 어떻습니까? 땅의 것으로 배 터지게 먹자. “하늘의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에 생각하자“ ”천국은 무슨 얼어 죽을 천국이냐? 거기가 뭐 좋다고 벌써 가, 이리와 병 낫게 해 줄게. 복채만 두둑이 줘“ 이게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성경 적인 경험을 자꾸 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신자의 삶을 자꾸 살아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경 적인 삶이 경험되어지면서 이성의 합리화 작용으로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왜 성경에는 그렇게 실천하라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받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우기 위해 말씀대로 살아내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선택을 했을 때 오는 좌절감, 부끄러움, 죄스러움 그래서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기쁨을 주는 삶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으며 바른 선택을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과 기쁨과 평안을 맛 보며 “아,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주는 삶이구나.” 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 여러분은 말씀대로 성경대로 선택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바른 선택을 했을 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를 믿고도 늘 우울하다면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뻐야 합니다. 예수 믿는 즐거움을 느끼셔야 합니다. 무슨 우울한 게 매력 있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바른 선택을 하시면서 기뻐하세요. 즐거워하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기를 힘써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장사를 해?” “한번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목표는 이 땅에서 손해를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배우고 하늘나라를 배워 성숙하게 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도록 선택하세요. 미움대신에 사랑을 선택해 보세요. 남을 위해 나를 내어 주기를 선택해 보세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들, 우리가 집착하고 중독하고 있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버리는 선택을 해 보세요.
(눅 17:33)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러분이 여러분을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대신으로 대체하고 있던 것들을 끊어버리셔야 합니다. 훈련하고 연습하셔야 합니다. 돈, 가끔 손해 보세요.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거기다 목숨 걸어서는 안 되겠구나. 다른 중요한 것이 있구나. 우리에게는 이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자유” 하면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립니다.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개 같은 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안전하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됨의 조건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에는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요 8:32-34)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성경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를 즐겁게 만족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의해 거기서 벗어나서 진리를 따르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자들을 “자유하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죄는 죄인들을 실컷 부려먹고 월급으로 사망을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에서 삯은 헬라어로 ‘옵소니온’입니다. 그 말은 로마시대 때 용병들에게 주던 월급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열심히 용병으로 써 먹고 나서 월급으로 사망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자유 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 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를 들어 물고기가 가장 자유로울 때는 물 안에서 열심히 헤엄칠 때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지겹다고 밖으로 튀어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굴비라고 합니다. 농구 선수가 “왜 우리는 손으로만 공을 집어야 하나? 발로도 차자” 우리는 그것을 반칙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지으신 가장 이상적인 삶을 그대로 따라 살 때 가장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면서 “요렇게 살면 너희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 단다.“ 하고 인간에게 주신 삶의 원리가 바로 율법입니다. 물론 죄인이었을 때는 그것을 절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정 죄의 칼날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정말 복되고 기쁜 삶이구나.“ 라는 것을 경험으로 자꾸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바른 선택을 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복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노력하시고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이 이해가 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삶이라는 것이 인식이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바른 선택을 내리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악간의 문제가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택이 요구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 가령 선교 지를 정할 때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음성을 들려주소서.“하고 기도하는 큰 선교 단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그렇게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도 대부분의 선교 여행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할 때는 열심히 기도한 후에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 신앙 관, 인격을 총 동원해서 선택을 하고 선택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배우자를 잘 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후회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선택을 한 이상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교환 안 돼요.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화장을 지우고 자는 모습을 보니까 “완전 속았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성격이 좋은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성질이 너무 못됐어요. 그래도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교환은 안 됩니다. 그런 것은 after service도 안 됩니다. 사용자 부주의로 고장 난 것은 사용자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이 성숙한 삶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라이프스타일도 바르게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신 8:11-20) “11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12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13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14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5 주님께서는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고,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16 광야에서는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당신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다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당신들이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7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18 그러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당신들에게 힘을 주셨음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19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다짐합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참으로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며 절한다면, 당신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20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당신들 앞에서 멸망시킨 민족들과 똑같이, 당신들도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여러분이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God Illusion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것을 자극시켜 줄 부나 명예가 찾아오면 얼른 제 자리로 복귀를 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축복입니다. 그러면 전부 가난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아니죠. 부와 명예를 쥔 사람은 다 구원 못 받습니까? 아닙니다. 부와 명예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힘듭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따로 그 속에서 광야의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늘 기도와 말씀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님 이외의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으실 수 있도록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소한 삶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100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 70정도만 누리고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그 부와 명예가 여러분에게 끊어졌을 때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그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매일 매일 고민하세요.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계속해서 여러분이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검소한 삶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삶의 규모를 늘려가면서 자꾸 그 편안함에 중독되시면 안 됩니다. 검소하게 나누면서 그 것이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로 사는 게 더 힘든 거예요.
(엡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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