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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은사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6.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은사

 

(김성수 목사)

 

 

(엡 4:7-13)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급기야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복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8절과 9절 10절은 괄호로 묶어서 이해를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제 11절부터 그 선물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보시다시피 11절에는 여러 가지 은사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총 다섯 군데에서 하나님의 은사, 선물을 열거합니다. 여기 에베소서 4장과 베드로전서 4장, 그리고 로마서 12장과 고린도 전서12장입니다. 그 구절들에서는 수많은 하나님의 선물 중에 대표적인 것들 스무 가지 정도를 나열해 놓았는데 그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다 모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구원“ ”영생“입니다.

 

(롬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표준새번역]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선물의 내용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구절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는 전부 구원이 어떤 것인가, 구원받은 자들은 어떻게 사는가를 이 땅에 가시 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라는 결론이 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가시적으로 세상에 보여주며, 그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우리가 장차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이르리니“”카탄타오“는 ”획득하다, 만나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한 구원이 주어져 있는데 ”장차“ 획득할 것이고, 장차 그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한 3절을 보면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는 말도 나오죠?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운명적 신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3절의 말씀처럼 힘써 지켜, 유지되어야 하며, 동시에 획득해야만 하는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이미 획득한 사람은 그 구원을 힘써 지키려는 노력이 나타나야 하며 심지어 그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냄으로 그 구원을 획득하려는 자의 삶과 방불하게 치열함과 진지함이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구원의 획득은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visually, 그리고 fully 획득되어지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획득의 과정에 필요한 것이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선물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자들이 자기들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받은 선물들을 잘 선용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visually 잘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선물을 주심으로 어떤 결과를 기대하시는가가 나오지요?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하찮은 것 같은 은사라도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은사들이 잘 발휘되어야만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숙이 되어지고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건강하게 성숙하고 유지됩니까?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발의 도움을 받아 갑니다. 눈으로 음식을 보지요. 그리고 코로 냄새를 맡습니다. 냄새는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고 우리는 손의 힘을 빌려 음식을 입으로 밀어 넣습니다. 음식은 이에 의해 잘게 부수어 지고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갑니다. 위에서 그 음식물은 소화가 되고 장을 통과하면서 영양분이 체내로 흡수됩니다. 흡수된 영양분은 혈액을 타고 간으로 가지요. 간에서는 여러 가지 화학반응으로 그 영양분을 해독합니다. 그리고 그 영양분은 각종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콩팥에서 질소 노폐물을 걸러주고 전해질을 조정해 줍니다. 그리고 내분비기관에서는 각종 호르몬을 만들어서 신체 여러 기관의 기능을 자동적으로 조정하게 해 줍니다. 심장은 신체의 각 부분에 필요한 만큼의 피를 공급해 주고 폐는 산소를 불러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 보내 줍니다.

 

예전에는 맹장, 충양돌기는 인체에 전혀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서 개복을 하게 되면 덤으로 그 것까지 잘라주곤 했습니다. 편도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붓고 아프면 수술을 해서 잘라버렸습니다. 우리가 진화되어진 동물이고 그러한 기관들이 진화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남게 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잘라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필요한 것들을 창조해 놓으셨을까요?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몸에 반드시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지요. 이렇게 인체의 모든 기관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건강하게 유지되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잘 세워지기 위해서는 교회의 멤버 어느 한 사람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하나님의 선물 중에 다섯 가지가 선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짚어 보지요. 여기에 열거된 은사들 중에는 교회의 설립 때 임시적으로 주어졌던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의 설립 후 그 유지를 위해 지금까지 내려오는 은사가 있습니다. 먼저 “사도“입니다. 사도는 여기에 기록된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사도 직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창안하신 직분입니다.

 

(갈 1: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그리고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본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라야 합니다.

 

(고전 9:1)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표준새번역]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행 1:21-22)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그리고 두 번째로 사도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갈 1:11-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엡 3:2-3)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그리고 사도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입니다.

 

(히 2:4)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초대 교회 시대에는 거짓 사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분법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고후 11:13-15) “13 이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입니다. 14 그러나 놀랄 것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15 그렇다면,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가짜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추천장을 주고받았습니다.

 

(고후 3:1) “1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치켜올리는 말을 늘어 놓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사도는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뵌 사람이어야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 기적을 행할 수 있었으며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도가 존재할까요? 아니면 사라졌을까요?

 

(고전 15:8-9)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맨 마지막에, 맨 나중에 (에스카톤) 사도 바울에게 보이시고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필요했던 임시적인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비되기 전에는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후계자를 세우지만 나중에 교회가 세워지고 정비가 된 다음에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했을 때 그의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교황제도는 이것을 오해한 데서 생긴 것입니다. 로만 카톨릭은 베드로가 로마에 정착해서 고정된 사도요 감독이었으며 베드로는 후계자를 임명했고 그 베드로의 사도직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비 성경 적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잘못 된 것입니다. 사도직은 초대 교회에 한하여 임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혹은 선지자로“의 선지자 직입니다. 선지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꼭 보아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 하에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복음 2장에 보면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에게 예언을 하는 딸 넷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등장합니다.

 

(행 21:8-10)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

 

(행 11:27)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리고 구약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은 모두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을 받고 이스라엘에게 예언을 전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해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렘 23:16-22) “16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17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18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 19 보아라, 나 주의 분노가 폭풍처럼 터져 나온다. 회오리바람처럼 밀려와서 악인들의 머리를 후려칠 것이다. 20 나 주는 나의 마음 속에 뜻한 바를 시행하고 이룰 때까지, 분노를 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이 오면, 너희가 이것을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21 "이런 예언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달려나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 데도 스스로 예언을 하였다. 22 그들이 나의 회의에 들어왔다면, 내 백성에게 나의 말을 들려주어서, 내 백성을 악한 생활과 악한 행실에서 돌아서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선지자는 하나님의 회의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땅에 내려 꽂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되는, 그런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선지 동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데 그건 잘못된 호칭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신약 성경이 아직 없었고 진리가 아직 글로 기록이 되기 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교회가 안정되어진 후에 쓰인 목회 서신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에 와서는 더 이상 선지자의 직책이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는 이제 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목사와 교사 같은 다른 직책들에 대한 소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자칭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2세기에 일어난 몬타누스파들이 대표적인 이단들입니다. 그리고 로만 카톨릭은 이 선지직의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이단들입니다. 카톨릭은 신약성경을 떠나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대부분 그런 것들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종교 개혁시대에 유럽에 일어났던(Zwikau prophets) 쯔비카우 예언자들이라고 불렸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터와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와 계속 충돌했던 집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선지자들이라고 우겼고 성경은 거의 무시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영국에서 시작된 퀘이커 교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지폭스는 처음과는 달리 점차 성경보다는 성령의 내적 조명과 직접적인 지도를 강조하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약 성경 적 의미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끝난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이상의 하나님의 계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딱 알맞은 만큼의 계시가 이미 완성이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시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요한이 성경의 말미에 기록을 하고 성경을 닫은 것입니다.

 

(계 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가 정비되고 성경이 완성 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임시적 은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열거된 은사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입니다. “목사와 교사”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을 보아서 바울은 이 직책을 하나로 본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는 곧 교사입니다. 이제 완전하게 계시되어져 있는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고 풀어서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한다면 그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이 목사와 교사의 은사는 지금까지 지속되는 은사이지요. 지금 살펴본 이 다섯 가지 은사는 그 은사들이 임시적인 은사이건 지속되는 은사이건 간에 전부 가르치는 사역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 중에서 이 다섯 가지를 뽑아 열거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이 가르침이 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이 직분들, 직책들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11절을 보세요.

 

(엡 4:11)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헬라어 원문은 “아우토스 에도켄”으로 시작됩니다. 영어로는 “He himself gave some” “그가 친히“라고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부르십니까?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직분들을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교회주의는 틀린 것입니다. 교회는 행정 조직도 필요하고 직분과 직책도 필요합니다. 그 것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직분과 직책을 통해서 그 직분 자 자신이 온전케 성숙되어져 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며, 그 직분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함으로 다른 지체들이 온전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데 쓰시기 위해 직분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목사와 교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사로 세워지는 것이고 장로와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던 사도들이 교회의 필요에 의해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집사라는 직분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는 곳마다 장로를 세웠습니다.

 

(행 14:21-23) “21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제자를 얻은 뒤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고,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님께 장로들을 맡겼다.”

 

(행 20:17)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딛 1:4-5) “4 나는, 같은 믿음을 따라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게 하고, 내가 명령한 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디도서와 디모데 전서에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렇게 반드시 직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직분이 필요합니까?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그 직분을 통해서 자기의 성숙과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직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 집사를 항존 직이라고 부릅니다. 항존 직이라는 것은 “한번 장로는 죽을 때까지 장로다“라는 의미에서 항존 직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야 하는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항존 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직분들은 봉사를 하고 섬겨서 상대방을 온전케 세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을 잘 이해하고 계신 분들은 이런 직분을 맡기려고 하면 손 사래를 칩니다. “내 몸 하나도 못 가누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의 온전함에 제가 기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른 태도죠.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종교와 정치가 손을 잡게 되면서 귀족들과 힘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 자리를 차고앉게 되면서 “서임(敍任)권”이라는 말도 생기게 되고 교회의 직분이 무슨 벼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직분이 나를 알리고 나를 증명하는 방법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도 사람들이 저마다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냥 앉아서 듣는 것보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폼 나잖아요.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가르치는 은사는 우리 주님의 선물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너도 나도 자기 목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했죠?

 

(약 1:1-2)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무서운 소리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때 많이 인용하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영혼 소멸 설을 주장하고 있고 지옥의 부재를 주장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령 론을 읽어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은 사도직이 아직까지 계승되고 있다고 열심히 우기고 계십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성경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든 생각이 혹시 나는 잘못 가고 있는 부분이 없는가? 심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인간의 영생이 걸린 문제인데 혹시 내가 잘 못 가르친 것이 있으면 어떡하나, 지난주에는 심각하게 “목회를 그만둘까“까지 생각했었습니다. 가르치는 직분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워치만니 책 몇 권만 읽으면” 할 수 있는 우스운 직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가르치고 싶어 한다고요? 존경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직분은 전부 나는 죽고 남이 살아나는 기독교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 함께 거룩하게 성숙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 직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분 자들은 전부 합격점수를 받은 완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저런 사람도 직분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아, 교회의 장로는 저런 분이 되셔야 하는구나.”라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든 교회에 유익이 되면 됩니다. 제가 요즘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교회 직분 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직분 자들의 자격 요건은 참 높습니다. 디도서나 디모데서에 나오는 직분 자들의 자격을 보면 제가 다 얼굴이 붉어집니다. 저도 거기서 해당되는 게 몇 개 안 되요.

 

그런데 목사하고 있거든요. 그걸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서 직분 자를 세운다면 아마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한 명도 못 세울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력을 어떻게 신뢰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잘 속아요.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제일 기도 잘 하시고 사회 봉사활동도 제일 많이 하셨고 돈도 많으시고 덕망도 높으셨던 고 모 장로님이 지금 원불교 포교원 원장이 되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놀래서 가슴을 다 쓸어내리면서 진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만날 그날까지 누가 진짜인지 누가 가짜인지 섣불리 판단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그 상황과 환경들을 우리의 거룩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선용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워 놓았더니 매일 하는 일 마다 실수요, 하는 일 마다 시험거리를 만든다고 쳐보자고요. 우리가 그 분을 보면서 “정말 사람 잘못 뽑았다”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도 그 실수와 실패를 통해 얼마든지 성숙의 자리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고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직분을 맡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다가 볼에 밥풀이 묻으면 사람이 참 우습게 보입니다. 그 밥풀 하나로 그 사람 전체가 우습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밥풀로 그 존재의 명예를 실추시킨 볼 전체를 잘라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까짓 밥풀 같은 실수 때문에 볼 전체를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밥풀 때문에 볼을 잘라내면 그 다음부터 밥은 다 먹는 겁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가 실수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를 보면서 용서하고 품어주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12절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세운다.”는 단어는 “부러진 뼈를 맞춘다.”는 뜻입니다. 잘라내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추어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위골 된 상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태에서 위골 된 서로 서로를 잘 맞춰서 제 자리를 찾게 해주고 건강하게 자기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도록 이렇게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직분을 맡은 분들은 재지 마세요. 고을 원님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모두가 자기를 보고 절을 하는 줄 알고 호랑이한테도 “이 놈” 그랬다가 뼈도 못 추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직분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해서 주신 그야말로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난 척 할 수 없지요.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왕이면 훌륭한 사람, 힘 있는 사람 뽑아서 하시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시는지, 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늘 하나님이 맞고 우리는 늘 틀립니다. 작은 개집을 지을 때는 그 집의 모양이 금방 나타나지요? 그러나 커다란 빌딩을 지을 때는 아주 오랫동안 그 집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골격만이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그 것이 완성이 되면 “아 여기가 거기였고, 거기가 여기 였구나.” 이렇게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큰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해를 못합니다. 정말 큰 원은 직선처럼 보이는 것을 아십니까? 지구가 그렇죠. 산 위에서 지평선을 바라보면 직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평선은 거대한 원의 한 부분입니다. 달에 가서 보면 모든 땅이 동그랗게 휘어져 있습니다. 사진으로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그렇지만 너무 커다란 동그라미는 작은 존재한테는 직선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중에 밝히 밝혀질 것입니다. 이거 한 가지만 놓치지 말자고요. 하나님은 맞고 우리는 틀립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완성을 위해 이렇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사람들을 직분 자로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직분을 맡은 사람이 그 직분을 통해서 자기의 권위와 권세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 같은 일입니다. 직분은 우리의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직분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얼토당토한 일입니다. 그까짓 직분 없으면 어떻습니까? 인품과 성품, 인격으로 존경을 받으세요. 다들 그거 자신 없으니까 직분으로라도 어떻게 자기 존재를 좀 과시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대학 시절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분이 사찰 집사님 이셨습니다. 오죽하면 담임 목사님께서 그 분께 늘 “형님, 형님”하셨겠습니까? 누가 보던 안 보던 정말 열심히 교회를 가꾸시고, 청년들이 밤늦게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고 하면 계란을 삶아서 살짝 놓고 가시고 하십니다. 보통 사찰 집사님들은 빨리 불 끄고 문 닫고 쉬려고 평일 날 아홉 시만 넘으면 눈치 주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분은 나이 어린 청년들이 밤늦게 까지 신앙으로 고민하고 서로 부등켜 안고 기도하고 하는 것이 너무 보기 좋은 거예요. 누구에게나 아버지처럼 대해주셨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청년들이 목사님은 아버지, 사찰 집사님은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 사회 저명인사 장로님들이 많이 계셨지만 늘 군복 바지에 빗자루를 들고 다니시는 그 집사님을 우리 청년들은 가장 존경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존경받고 싶으세요? 늘 겸손하게 섬기세요. 그게 진짜 존경받는 지름길입니다. 이건 단지 직분 자들뿐만 아니라 교회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벧전 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우리 각자의 부르심, 선물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분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 합격 통지서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버드대에 합격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 대학에 들어가서 앞으로 그가 배울 학문과 그가 받을 혜택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에게 주어질 가능성, 이런 것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지 입학한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장영주의 리사이틀 티켓을 샀으면 그 리사이틀 장에 가서 그 공연을 봐야죠. 그리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해야지. 표만 갖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교회가 여러분을 통해서 온전하게 서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엉뚱하게 다른 거 하느라, 무슨 운동이니, movement니 이런 거 하다가 진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태권도장의 목적이 열심히 태권도 가르쳐서 다른 도장과 싸우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열심히 관원들 태권도 가르쳐서 다른 도장하고 싸워서 지면, 다시 갈아치우고 다른 사람들 훈련시켜서 또 싸우고 이런 게 태권도장 아니지 않습니까? 태권도장은 도장에 오는 관원들의 정신 수양과 인격 연마를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거룩의 문제를 제쳐두고 어떤 일들에 열심을 갖게 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동원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를 동원해서 우리의 힘을 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섬기시고 열심히 자라 가십시오. 우리는 교회에서 그걸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빠지는 만큼 손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니스를 배운다고 해 보세요. 매일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한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세 달에 한번 가서 연습하는 사람과 누구의 실력이 월등히 나아지겠습니까? 매일 가는 사람이지요. 예전에 제가 중학교 때 과외를 했는데 어떻게 하다가 하루를 빼먹었어요. 그런데 그 과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너 만일 어제 배운 것이 대학 입시에 났는데 네가 어제 빠짐으로 해서 그 문제를 틀렸다고 생각해 봐라. 그런데 네가 안타깝게도 1점 차이로 서울대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봐. 너는 어제의 그 불성실 때문에 평생을 망칠 수 있는 거야“ 그 후로 그 과외에 한 번도 안 빠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도 신림동에서 반포까지 매주 수요일에 택시를 타고 성경공부에 갔습니다. 혹시 내가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시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서요. 열심히 교회들과 모여서 여러분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십시오. 아껴주고 품어주고 사랑해 주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이라고 했지요? 사랑도 훈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왜냐고요? 맛있으니까? 그러나 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호는 개를 좋아합니다. 맛있으니까.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지영이는 개를 사랑합니다. 내가 그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간도 내야하고 똥오줌도 치워야 하고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나에게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호야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수두룩할 것입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식, 내 형제, 내 자매 그렇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쿠폰이 생겨서 월요일에 아이들과 함께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곳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쇼의 90%이상이 전부 마귀, 귀신, 머미, 드라큘라 같은 흡혈귀 이런 것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다는 것이 귀신 복장을 하고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니까 나중에는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무서워 죽겠는데 자꾸 시커먼 놈들이 놀라게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 지옥인 것 같았습니다.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어떤 곳에 수많은 벌거벗겨진 채 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가 낮에 본 그 모든 귀신들이 전부 살아서 실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한 사람 씩 불러서 커다란 원판에 묶어 놓고 그 원판을 돌리면서 도끼로 그 사람들 퍽 퍽 찍었습니다. 팔 다리가 쩍쩍 찢어지고 피가 튀는데 묶여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제 차례가 오는 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하나님 저 좀 구해 주세요. 제발 여기서만 벗어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려서 잠이 깼습니다. 그게 꿈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방에 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모두 천사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토록 무시무시한 사망에서 나를 건져 주신 것이구나, 참 실감이 가는 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경고를 오히려 재미삼아, 놀이 감 삼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중에 우리는 그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심판에 던져지게 될 텐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그 것들을 놀이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서 건져진 것입니다. 거기서 건져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서 건져주신 그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훈련하는 것, 그거 외에 우리가 무엇에 욕심을 두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초가 모여 일분이 되고 이 일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우리의 일생,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내는 이 일초, 일 분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어떤 것과 계속 바꾸시면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생명을 무엇과 바꾸시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할 교회와 여러분의 성숙에 더욱더 매진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더욱 더 진지해 지십시오.

 

(엡 4:7,11,12)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끝

 

2013.11.26 0시 41분 김성수 목사님 설교 문 편집 끝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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