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김성수 목사)
(엡 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찬양과 기도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겠습니다. 개혁주의 적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이 부족한 것이 이 기도입니다. 참 기도 안 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신앙을 너무 “지적인 충족”으로 편중하는 것입니다. “난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 그런데 기도 안 한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 고 하는 것은 그냥 지식적인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그것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의 네페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짜 “아는” 사람은 기도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진짜 “아는” 사람들은 감사해서 기도합니다. 감격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니면 내 인생은 단 1초도 바르게 갈 수 없음을 알기에 기도합니다. 조금 맛 본 그 하늘의 영광을 조금 더 맛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천국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고 바르게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종교 개혁을 하고 루터가 이야기했습니다. “난 너무 바빠졌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이 기도 한다”
여러분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저는 지금 우리 교회로 인해 주위가 조금씩 소란해 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아주 반갑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함이 참 된 복음에 관한 궁금증이 우리로 하여금 더 널리 퍼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 여러분 기도 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를 함으로 천국 백성들의 참 모습을 느껴보자고요. 우리는 두 달 가까이 “인간과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졸업을 하기 위해서 꼭 필수로 이수해야하는 것이 field education이라는 과목입니다. 직접 목회 현장에 나가서 목회 실습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하신 목사님이 오셔서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field education강의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큰 교회 목사님들 중에서도 인텔리로 인정을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끼리니까 얘기해 주는 거야” 그러시면서 몇 가지 조언을 하셨는데 (1)절대 정확한 선을 긋지 마라. 사람들은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설교를 하면서 어떤 금을 그어버리면 혹시 그 금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자기의 주장을 이야기 하더라도 살살 달래가면서 해라 (2)절대 설교 길게 하지 마라. 아껴서 두 주에 나눠서 해라(3)좋은 인사이트가 있으면 놔두었다가 사람 많이 모이는 주일설교 때 써라 (4)부흥회는 항상 강사 불러다 써라. 부흥회 한번 하면 몇 달치 설교거리 다 날라 간다. (5)죄에 대해 설교하지 마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죄에 대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죄에 대해서 3주만 계속해서 설교하면 교인들 반은 나간다.
저는 참 나쁜 학생입니다. 이 분이 하라는 대로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으니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이 분이 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가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처음에는 반성하는듯하다가 이내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세요” 그럽니다. 아니요. 그 사람은 죄에 대해서 듣기 싫은 것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 받는 것을 그토록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벌써 두 달 째 이 지긋지긋한 “죄”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2장 4절의 대 반전 “호 데” “But" ”그러나“에 대해서 공부를 할 예정이었습니다.(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러나“가 빠져있다) 그렇지만 그 감격스러운 대 반전을 짧은 시간에 다 설명을 할 수가 없어서 다음 주로 미루고 오늘은 우리가 거듭난 자로서 죄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짧게 살펴보고 죄 론을 마치겠습니다. 지난주까지 설교를 들으시고 혹시 “거듭난 사람들도 다 그렇게 죄를 짓고 살고 실패하는 삶을 산다면 난 이제 안심하고 죄를 지을 테야” 하고 생각하신 분 안 계십니까? “오히려 우리가 저지른 그 죄가 우리 육신의 불가능한 실존을 깨닫게 하는 선한 기능까지 있다고 하니 정말 우리는 열심히 죄를 지어야겠다.” 혹시 그런 분계십니까? 그 분은 정말 복음을 잘 이해하신 것입니다. 네, 이제 맘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거듭나신 여러분은 절대 지옥에 못 갑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롬 6:1-23) “1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3 1)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2)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또는 ('침례', 또는 '침례') 4 그러므로 우리는 3)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또는 '침례')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4)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5)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또는 '무기', 또는 '무기')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6)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그, '육신')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11절은 지금 앞부분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살려냈다. 그래서 너희는 이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었다. 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을 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몸, 육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처럼 하나님 없이 자신이 왕이 되어 자신만을 위해 살도록 잘 훈련된 인격, 기능, 능력 모든 것을 우리는 몸, 육체,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몸이 새롭게 태어난 영과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날 설명해 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탄식한 그 몸입니다. 그 불쾌하고 더럽고 무섭고 추악한 시체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몸은 여전히 죄에 익숙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 비로소 이 죽을 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몸이 죽습니까? 몸은 계속 죄를 짓지 않아요? 죽지 않는 것은 영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는 그 몸에게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죄가 옛사람, 육신을 자꾸 넘어뜨립니다. 죄는 우리 육신에 너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죄 인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괴롭고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그래서 죄는 자꾸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더러 싸워서 이기라고 합니다. “아니 지난주에는 우리는 절대 못 이긴다고 해 놓고 이번 주에는 또 싸우라고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분명 우리는 이제 not able not sin에서 able not to sin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죄와 싸울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요. 그런데 계속 집니다. 도대체가 이겨 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에게 실망하고 좌절하지요? 거기서 끝납니까? 아닙니다. 거기서 우리는 얼른 십자가로 도망갑니다. 그래, 십자가가 없었다면 정말 난 큰일 날 뻔했구나. 내가 이 모양인데도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리고는 곧 감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거기까지 가셔야 합니다. 구원이 정말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에 실망-십자가- 감사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죄를 짓습니다. 또 십자가로 도망갑니다. 이번에는 그 감사가 더 커지겠지요? 그 다음에 또 같은 죄를 짓습니다. 이번에는 감사가 더 커지겠지요? 그 다음에 또? 아니요. 계속해서 변치 않고 같은 죄를 짓는 사람은 정말 감사를 못 느껴 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실수를 하면서 그 행위를 반드시 고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렇게 감사하게 해 주신 분이 요구하시는 삶이 있는데 그렇게 살아내야지. 하고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시스 쉐퍼나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 같은 기라성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화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자들이 되었고 은혜와 감사와 믿음이 우리를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합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지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렇죠?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들어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팔 다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보세요.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함에 있어서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우리의 불가능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삶이 조금 씩 변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그러면 우리가 실패하는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나 전부 무엇입니까? 전부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좋은 촉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원리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월드컵4강에 올랐을 때 거기 출전했던 선수들은 모두 군대를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그 때 어떤 분이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군대에 간다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 울타리를 쳐주고 나의 권익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에 대한 섬김의 기회인가?” “내가 만일 나의 젊은 날에 군 입대를 면제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면 왜 나에게서 나라를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가는가? 하고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거나 백범 김구 선생 일가친척 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고 선행을 하며 사는 것이 하나의 의무로 우리에게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말씀을 읽으면 온통 거기에 묻어 있는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은 자로서 기꺼이 선한 삶을 사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만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렘 2:13)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을 얻기 위해 웅덩이를 파는 것을 “악이다, 죄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당신만이 “생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목마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갈이 됩니다. 칸트가 말한 인간 안의 뻥 뚫린 구멍이나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심심함이나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권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가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적셔보려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웅덩이를 팠습니다. 남편을 갈아치워 봅니다.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봅니다. 여전히 목이 마릅니다.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봅니다. 명예를 좇아 삽니다. 자식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봅니다. 그런데 누구도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를 정복해 본 자도, 아방궁을 짓고 불로초를 구해다 먹고 천년만년 살고자 했던 자도 아무리 예쁜 와이프를 얻었던 자도 곧 싫증을 냅니다. 인기를 얻어 봐도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만족한 삶을 살다간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쁘게 떠나갔습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만족하게 일을 마치시고 가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카타콤에서도 그들은 밖의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밖의 세상이 부러웠으면 언제든지 나가면 그만입니다. 왜 그들은 거기서 죽는 날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고도 그렇게 거기서 죽음을 맞았을까요? 뭔가 그들에게 만족을 주며 존재케 하는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선하게 살아보려 노력하면 하는 족족 실패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되면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 씩 조금 씩 순종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감사함을 아시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정말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성경이 요구하는 이 정도는 하고 살자고요
(12-13절)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성경은 우리더러 우리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여러분의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가 되게끔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이런 말씀을 듣고 또 죄에 속수무책으로 넘어져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기가 된다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싸워보지도 않고 넘어갑니까? 성경은 우리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눈, 코, 입, 손, 발 모두 의의병기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시는 분들만 알아들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눈을 의의 병기로 드리세요. 악한 것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인터넷으로 음란 사이트나 악한 것들 보지 마세요. 우리 마음을 죄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눈을 불의의 병기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보암 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발을 불의의 병기로 내어주지 마세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마세요. 여러분의 인내심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가면 넘어집니다. 여러분의 손을 의의 병기로 드리세요.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은 만지지 마세요. 여러분의 혀를 의의 병기로 드리세요.
(약 3:2-6)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지난주에도 강조했지만 여러분의 혀가 여러분을 불사를 수 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혀를 조심하세요. 절대 남 욕하지 마세요. 남 시기하지 마세요. 나쁜 말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공손하고 다정한 말을 연습하세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의의 병기로 드리세요. 모든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마음부터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셔야 합니다.
(잠 4:23)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항상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위에 열거한 다른 지체들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늘 좋은 것만 보시고 좋은 이야기만 나누시고 좋은 곳에 가세요. 잘 안 되겠지만 노력은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염려와 근심에 내어 주시면 안 됩니다. 염려와 근심이 가장 악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건과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요일 4:17-18)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왜 우리는 이렇게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까?
(사 43:1)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상력과 사고력과 손과 발과 눈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저 죄를 안 짓는 소극적인 대처에서 적극적으로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셔야 합니다. 생각을 하나님으로 채우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 나의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던 일들, 하나님의 선하심, 그러한 것을 생각하세요.
(시 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야로, 늘, 24시간, 순간순간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세요. 경건 서적, 좋은 신앙 서적 많이 읽으세요. 그렇게 우리의 지성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우리에게는 육신과 영이 있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된 거듭나기 전의 인격, 기능, 능력 등을 말합니다. 영은 오직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인 육신을 죽여가고 새로운 영의 자라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은 죽었다가 태어났기 때문에(아노덴) 이제 자라나야 합니다. 그런데 영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영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강연이나 훌륭한 소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이 새사람이 자라면서 옛 성품이 조금 씩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런 신분임을 알았으면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그것이 성경의 요구입니다. 다음 주에는 이제 4절로 넘어가서 대 반전“그러나” 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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