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흥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김성수 목사)
(요 3:16-36)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10)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11)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정죄') 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20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22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12)세례를 주셨다. (또는 '침례') 23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14)세례를 받았다. 24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요한의 제자들과 13)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유대 사람들') 26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14)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또는 '메시아'.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는 둘 다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함)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15) (해석자에 따라 36절에서 인용을 끝내기도 함) 31 위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서, 땅의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32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다. 3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16)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영') 35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 36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에는 기독교의 주옥같은 교리들이 무수하게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자세하게 공부하려면 적어도 서너 편 정도로 나누어서 설교를 해야 할 분량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에베소서를 공부하시면서 교리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자세하게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강해에서는 교리 부분을 너무 깊이 다루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를 간단 간단하게 핵심만을 설명하고 넘어갈 테니까 주의 깊게 들어주세요. 오늘 3장을 다 마치고 다음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이 무엇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고 하나님은 여전히 죄인이었던 원수 같은 그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셔서 죽이셨다는 ‘은혜의 복음’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요한은 구원, 즉 거듭남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여러 에피소드들을 연결해서 강조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도 바라보셔야 합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처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무시무시한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을 합니다.
본문 16절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독생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만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는 하나도 빠짐없이 멸망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이 ‘멸망하다’라는 단어‘아폴뤼미’는 요한이 아주 즐겨 쓰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만 10번이 나옵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은 ‘잃다, 상실하다, 없어지다, 파괴되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가 기록한 서신서인 요한 이서에서 그 단어를 ‘마땅히 받아야 할 어떤 것을 잃어버리다’의 의미로도 씁니다.
(요이 8)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마가는 이 단어를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의 의미로 씁니다.
(막 3:6)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여기서 ‘죽이다’라고 쓰인 단어가 ‘아폴뤼미’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존속(存續)’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씁니다.
(고전 1:19)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이 단어 ‘아폴뤼미’의 의미를 종합해서 3장 16절의 ‘멸망하지 않고’를 해석해 보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난 자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과 상실과 죽음과 멸망과 끊어짐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경이 다른 말로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본문18절을 보시면 ‘예수를 믿는 것‘을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도 표기를 합니다.
(요 3:18)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면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름’을 풀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예수‘’Jesus'라는 이름은 ‘야훼‘’Jehovah'라는 단어와 ‘구원’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Jesus'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이름을 풀어 준 곳이 있지요?
(마 1:21)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정리를 하자면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행하는 모든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18절은 그들이 이미 이 땅에서 ‘심판을 받았다‘라고 완료 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심판을 받은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사 53: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도 보시면 이미 모든 인간들이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라고 과거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각기 제 길로 간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시편으로 가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 14:1-3)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이미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다 더러운 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멸망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어떤 무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떨어져야 할 멸망의 자리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밀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리로 떨어진 예수의 품속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예수의 멸망 속에서 이미 멸망을 당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여기서 적용이 되었습니다. 동일 사건에 대하여 다시 공소제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이지요?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죄 값을 치른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그 것이 예수의 이름이 가진 내용)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예수’(Jesus)의 이름을 믿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게 된 것이 우리의 공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의 모습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라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요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보시다시피 성경은 ‘영접하는 자’를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 10:40-42)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잘 보시면 주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인데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은 ‘너희’를 영접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너희’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말하는 ‘너희’를 단순히 복음 전도자나 선교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입으로 살아내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몸으로 입으로 살아내는 자들을 영접한다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상의 기존 질서의 틀을 깨는 모습으로 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기존 질서와 틀로부터 늘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은 기존 세상의 질서와 틀을 깨는 자들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고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러한 권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마 10:21-23)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렇게 기존 세상의 질서와 틀에 ‘엇’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세상은 거부하고 공격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세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고 나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이기에 세상의 기존 질서나 틀이 그들을 그렇게 공격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마 10:5-15)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 모습이 지금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시고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라는 기존 질서의 틀을 깨러 들어가면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들어간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믿는 자들이 영접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힘의 원리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원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믿는 자들이고 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힘의 원리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멸망한자, 심판을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 사도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유대인들이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서 그 일행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와 일행은 급히 몸을 피했고 대신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이 불량배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때 불량배들이 관원들에게 야손과 신도들을 어떻게 고발하는지 보세요.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행 17:6-7) “6 그러나 그들을 찾지 못하고,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성읍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7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성경이 야손을 가리켜 어떻게 묘사를 합니까? ‘세상을 소란하게 한 자, 다른 말로 세상의 기존 질서와 틀을 깬 사람들을 영접한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기존 질서와 틀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삶이 옳다고 인정하여 그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가리켜 영접하는 자,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욱 확실한 증거를 대 드리겠습니다.
(눅 24:25-32)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시니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친절하게 성경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두 제자는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말씀을 받아들인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 홀연히 주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가신 것일까요? 성경이 독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요?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 자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접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세상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땅에서 심판을 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된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 3:19-21)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렇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바로 심판 받은 자들의 삶이며 정죄 받을 짓이라는 것을 성경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부터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세 번째로 등장합니다. 1장15절 이하, 그리고 19절 이하 그리고 오늘 본문인 3장 22절 이하에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교회에게 증거 하는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시면 세례요한은 당시 꽤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 3:5-7)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의 엘리야와 모세의 예언에 나오는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그가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사람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사두개 인들까지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분봉 왕 헤롯까지 세례 요한을 초청해서 설교를 들었을 정도로 세례 요한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인물이었습니다.
(막 6:20)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똑같이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 버렸습니다. 그 즈음에 어떤 한 유대인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결례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례란 정결 예식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을 중요시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가 더 나으냐? 예수의 세례가 더 나으냐? 라는 토론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사뭇 못 마땅해서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당신의 별이 지고 있습니다.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에게로 사람들이 다 몰려가고 있습니다’라고 불만 어린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불만 섞인 보고를 받고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준 대답 속에 성도의 삶의 원리의 정수가 들어 있습니다.
(요 3:27-30)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이 오히려 자기의 시대가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오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 까요? 요한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확고한 신앙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고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음에도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성도의 역할 론에 관해 잘 정리를 하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시기와 질투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특히 사역자들 사이에 그러한 시기와 질투가 자주 시험으로 찾아오는 걸 왕왕 볼 수 있습니다.
선교 지에 가보면 현지 선교사들 사이에 그야말로 불꽃이 튀는 경쟁의식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유치원을 짓고 있으면 그 옆에다가 초등학교를 지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누가 강냉이 공장을 지으면 다른 선교사는 그 옆에다가 빵 공장을 짓습니다.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업적 싸움이 왜 생깁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교리의 이해도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 목사는 큰 교회 목사를 부러워하다 못해 시기를 하고 큰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 목사를 무시하다 못해 경멸합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부 교역자들끼리의 인기 다툼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인기를 좇다보면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험담을 일삼게 되고 그러한 경쟁이 심화되면 패거리 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목회자들이 비교의식을 갖고 경쟁으로 돌입하게 되는 그 순간 목회자는 자신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을 꽂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전부 ‘티끌’ ‘아파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난 자들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보고 멸시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알 맞는 환경과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대상 29:10-13) “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시 16:5-6)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 사울의 집 족속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그토록 모독하는데도 겸허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하 16:5-13)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후에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신랑이시며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비유를 들어 예수님을 높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 중에 특이한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신랑의 친구의 역할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예식에서 신랑의 친구의 역할은 대단한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결혼식을 주관하고 혼인 예식 날에는 신부의 방 앞을 지키다가 신랑이 오면 기쁘게 신랑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러한 신랑의 친구를 가리켜 유대인들은 ‘쇼쉬벤’이라 불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그 ‘쇼쉬벤’에 비유하여 예수님의 높으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이어서 그 유명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흥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흥 한다‘라고 표현을 하나요?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흥한다‘라고 하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 의 흥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무엇을 하러 오셨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흥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저주를 받아 죽는 것으로 성공을 하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흥함은 세례요한의 쇠함을 발판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흥하기 위해 나는 쇠해야 한다’ 그 짧은 구절 속에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흥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모든 자들은 이 땅에서 쇠함의 삶을 살게 된다는 역설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성도의 쇠함을 딛고 골고다에 성공적으로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흥함을 위해 성도들도 이 땅에서 흥해야 하고 흥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흥함을 가로막고 섰던 제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마 16:22-24)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베드로는 자신의 흥함을 위해 예수님의 흥함을 막아섰던 사람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외치셨습니다. 그게 바로 사단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흥함과 관계있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속 썩이는 남편이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말 안 듣는 자식이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원치 않는 지병이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 의 흥함과 관계있는 자들은 이 땅에서 ‘죽음’으로 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자기 부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삶은 내 옛 자아가 품고 있는 죄에 대한 오염과 부패성과 집착과 중독 등을 죽여 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구절이 담고 있는 진의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세례 요한의 죽음을 딛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세례 요한의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선 세례 요한이 자신의 쇠함으로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왔다 간 사람이 또 있지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했고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죽을 때에 그의 모습이 천사와 같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와서 한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세상이 어떻게 때려죽이는가를 보여준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데반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바로 그 역할을 하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그 사랑의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게 될 때 성도의 하나 됨이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삶을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놓는 삶(worship) 예배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루하루 죽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어 가는 그 길에 선교와 전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여러분이 쇠하여 질 때, 다른 말로 죽어질 때 그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디로 선교를 떠나려 하기 전에 자기가 죽는 훈련을 먼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선행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선교는 내가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하는 아주 악한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선교는 내가 흥하고, 다른 말로 내가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쇠하는 선교인 것입니다. 그냥 자기 자리에서 부지런히 죽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뛰려고 하지 마십시오.
(눅 17:7-10)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것은 그 일을 통해 너희의 쇠함, 즉 너희 옛 자아의 죽음을 이루어 가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례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봉사를 하고 과분한 헌금을 하고 몸을 바쳐 선교에 힘쓴다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사례를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절 보세요. ‘종이 주인이 명한 대로 다 했다고 해서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쇠함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쇠함의 길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빌리셔야 할 만큼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돈과 힘을 빌려서 나중에 이자 쳐서 갚아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헌신하고 봉사한 만큼 하나님께서 돌려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데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 하는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진심 어린 사랑을 보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내가 죽고 아버지가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바로 그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글라스 맥 밀란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는 책에서 성도의 헌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투신과 헌신은 죄인의 가슴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절인 31절과 32절을 보시면 왜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가가 명확하게 증명이 됩니다.
(요 3:31-32)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위에서 오신 분이 직접 위의 것을 보고 듣고 증거 하셨는데도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땅에 속하여 땅에 있는 것을 말하는 우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 증거를 받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증명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33절입니다.
(요 3:33)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여기서 ‘인치다’라고 번역이 된 ‘스프라기조’는 ‘밀봉하다‘의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재가(裁可)하다‘'증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옳다’ ‘하나님은 참 되시다’라고 증명해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 구절을 유진 피터슨이 이렇게 의역을 했습니다. ‘주님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조건 옳으시다 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맞습니다. 정확하게 그 뜻입니다. 주님의 증거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줄타기의 명인인 캐나다의 코크란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반신 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코크란은 정말 가볍게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했습니다. 그 때 코크란이 외쳤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이 나이아가라를 횡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맞아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고 환호를 했습니다. 그 때 코크란이 ’그럼 당신들 중에 내 등에 업혀 저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널 사람이 있으면 지금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한 꼬마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나왔습니다. 코크란은 그 아이를 등에 업고 나이아가라를 건넜습니다.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할 수 있니? 무섭지 않았어? ‘ 그 때 아이가 대답했습니다.’난 우리 아빠가 날 업고도 무사히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실 수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여러분 이렇게 믿음은 자기가 믿는 대상에게 자신의 삶을 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을 치는 행위 ‘스프라기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그의 삶에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이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에 대고 코페르니쿠스는 외쳤습니다. ‘하늘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인생에도 바로 그러한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필요합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하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뢰할 때 가장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피조물에 티끌로 지어진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은 지금 영생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요 3:36)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영생이 있고‘와 ‘머물러 있다‘가 현재형입니다.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그 행복 속으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이 땅에서 자꾸 쇠하여 가십시오. 그게 궁극 적으로 여러분이 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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