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김성수 목사)
(요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할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만일 당신이 성경 중에 한 권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로마서와 요한복음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복음의 진수가 잘 요약되고 설명되어진 책입니다. 아무쪼록 이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아직까지 복음에 대해 정리가 안 된 분들이 복음을 잘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아울러 아직까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한복음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예수의 수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입니다.
(요 21:20-24)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 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여기에 분명하게 요한이 이 요한복음의 저자라는 것이 나오지요? 그리고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도 그의 저서 ‘against heresies’에서 ‘주님의 제자인 요한이 에베소에 머무르는 동안 요한복음을 펴냈다’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요한은 어부였지만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막 1:20)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삯군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한 어부였던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요한은 사도 야고보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세배데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던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함께 부르십니다. 그 길로 요한은 형인 야고보와 함께 예수를 따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까지 함께 한 주님의 사랑 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사역자로서 평생을 복음에 투신하였습니다. 말년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설교와 저술 등의 일로 보내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는 보통 AD85년에서 90년까지로 봅니다. 그러니까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등의 공관복음이 다 기록된 이후에 이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20장 21절에 자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요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 ‘ 믿음’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 즉 ‘복음’을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요한복음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그 사역의 열매’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 요한복음에 일곱 가지의 표적이 나옵니다. 첫 번째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표적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이고 세 번째 표적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고 네 번째 표적이 5병 2어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이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이고 여섯 번째 표적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이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신 후에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이 표적들이 바로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표적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본문 주해를 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마는 그 표적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시면 아주 흥미로운 걸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작해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으로 끝나지요? 그 뜻은 그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구원’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적이 일곱 개인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숫자인 7의 의미를 표적에 담아서, 그 표적들이 하나님의 재창조 사건을 설명하고 있음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예수, 믿음, 생명’으로 해석의 결론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사도 요한이 이미 공관 복음서들이 쓰여 졌던 그 시절에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또 다시 설명을 해야 했을까요? 당시에는 케린투스의 케린티아니즘(Cerinthianism) 다른 말로 영지 주의(Gnosticism)가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세계를 창조하셨을 리가 없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지주의자들의 일부는 역사적 인간 예수는 단지 인간이었던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실체를 부정하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죄악 된 육체를 입고 오실 수 없으며, 또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이 두 가지 전제하에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하는 영적 인간과 일시적으로 결합하여 병존 상태로 있었을 뿐이고 십자가 처형 직전에 분리되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칠 때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이 직접적으로 요한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고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I am …….'라는 문장이 많이 나옵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는 샘물이다‘’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는 위에서 났다‘’나는 양의 문이다‘’나는 선한 목자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나는 포도나무다‘ 요한은 이렇게 ’I am'‘에고 에이미’라고 자신을 표현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군데만 찾아보고 가지요.
(요 18:4-6)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5절에서‘내로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가 ‘I am''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떨어지자 죄인들이 ‘핍토’ 땅에 고꾸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아주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것을 주제로 기록된 것인지를 확인하고 있으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조금 더 뚜렷해지겠지요. 먼저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던 진정한 메시야이시며 왕이시다‘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기록한 책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의 왕에 대한 경배가 서두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왕이 나셨도다’
마가복음은 수신자가 로마인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마가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으로 세상의 종이 되셨음‘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종‘이라는 것이 주제이기 때문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이 서두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서두를 잘 보시면 곧바로 1장부터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과 시험받으심,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 등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헬라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로서의 완전하신 인간’ 다른 말로 ‘인자’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 분의 탄생 과정과 목자들의 방문을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과 그 분이 ‘인자’로서 할례를 받으시고 결례의 날에 성전에 올라가셔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 그리고 ‘인자’로서 절기 때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소년 예수의 모습 같은 것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동방박사가 왕을 경배하러 오는 모습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말씀들을 역사적으로 기록해서 알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러한 사건들과 말씀들을 해석해서 그 영적 의미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해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분을 믿음으로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람으로서의 탄생 부분을 생략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 분을 믿음으로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데에 불필요한 부분인 주님의 탄생이나 세례 받으심, 시험받으심, 변화 산 사건, 최후의 만찬 같은 것들이 과감하게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은 4 복음서 중에서 가장 나중에 쓰여 진 책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그러한 사건들은 독자들이 이미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으리라고 가정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목적에 불필요한 것들은 다 쳐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렇게 공관 복음서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대신 중요한 주님의 말씀을 강조하여 세밀하게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짤막하게 하신 비유나 간단한 말씀은 거의 생략이 되어 있지만 아주 긴 강화(講話)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13,14,15,16 장에 걸쳐 있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이 배어있는 긴 강화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관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무대를 주로 갈릴리로 한정하여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유대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도 네 번이나 여행하셨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히려 갈릴리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니고데모의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등이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다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이 (1:1-18)까지의 서론 부분입니다. 두 번째 부분이 (1:19-12:50) 의 7가지 표적의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13:1-20:31)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마지막 기간 동안의 강화와 기도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부분이 (21:1-21:25) 후기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자신을 숨기셨다가 점차 점차 자신을 드러내고 계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부딪쳤을 때 그들과 싸우지 않으시고 피하십니다. 그런데 5장에 가면 안식일 문제로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십니다. 진리를 점차로 드러내시면서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신을 몰고 가십니다. 그리고 진리가 드러나는 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시험도 점점 커져 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고난도 예수님의 고난과 함께 비례해서 커져 갑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은 출교를 당하지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유대인들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당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빛에 의해 어두움이 구별되어 나뉘어 지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오병 이어의 기적 이후에는 모두 떠나가고 12명만 남지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이 요한복음을 주의해서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함께 볼까요?
(요 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요한복음은 ‘태초에‘로 시작이 됩니다. 성경에는 ’태초에‘’In the beginning'으로 시작되는 책에 세 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 일서’가 ‘태초에’로 시작이 됩니다. 그 것이 의미하는 것은 요한은 그의 서신 서에서 창세기를 떠올리며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장이 창세기 1장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것은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계시지요? 그 말은 창세기는 바로 요한복음을 그림자로 모형으로 힌트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의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흑암인 그들을 밝히시고 혼돈스러운 것에 틀을 세우시며 공허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시는 구속사역을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요한은 창세기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힌트하고 있었음을 자신의 서신 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성령을 보증으로 세우시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 1:2)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볼까요?
(렘 4:22-23)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땅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정확하게 창세기 1장의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창조를 시작하시는 창세기의 바로 그 장면은 성령을 보증으로 세우시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새 창조를 해 내시는 우리 하나님의 구속의 내용을 처음부터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6일 동안에 일어났지요? 그리고 마지막 7일 째에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도 창세기처럼 7일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과 창세기, 그 연관성을 간단하게 복습을 하고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를 보시면 첫째 날에 ‘빛이 창조 됩니다’
(창 1:3-4)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빛’이라는 것은 발광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 빛의 발광체는 4일째 가서야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이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은 어떤 빛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직 발광체가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그 빛은 어떤 빛이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이런 빛은 아닌 겁니다. 여기서 쓰인 ‘빛’ ‘오르’라는 히브리어는 구체적인 발광체나 발광현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에너지 원(源), 능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창세기 1장 3절의 ‘빛’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빛이 아니라,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으로 보았습니다. 저도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를 합니다. ‘빛이 있으라’에서 ‘있으라’‘하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에 쓰인 단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이라고 하셨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쓰신 단어가 ‘하야’입니다. 그러니까 그 창세기 첫째 날의 빛‘오르 하야’는 ‘참 광명이신, 유일한 발광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만물을 보살피시며 키우시는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시 36:9) “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여기 보면 두 개의 빛이 나옵니다. 하나는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이고 거기서 흘러나와 우리의 생명력이 되고 있는 또 하나의 빛이 있지요? 그러니까 태양 빛이 태양이라는 발광체에 의해 존재하게 되듯이 ‘하나님’이라는 발광체로부터 나오는 그 빛이 있는데 그 ‘빛’이 바로 하나님의 신적 능력이요, 만물을 창조하시고 존재케 하시는 생명력인 것입니다. 창세기를 잘 보시면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채소와 과일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1:11-12)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식물은 태양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비로소 자랄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창조되지 않은 때에 식물이 벌써 자란다는 것은 진짜 살아있는 것들을 존재케 만드는 힘은 따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게 바로 감추어진 빛, 진짜 만물을 생동케 하고 지키는 하나님의 능력, 신적 은사, 다른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력, 에너지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첫째 날 나타난 빛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포효인 것이지요. 그게 무슨 일일까요? 바로 그 능력이 밤과 낮을 갈라서 밤에 속한 자들을 영원한 어두움으로 몰아내시고 낮에 속한 자들을 건져내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곳에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통해서 무언가를 설명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의 첫째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그 감추어졌던 빛이 이제 ‘실체’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에 속한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빛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 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이제 진짜 빛의 실체가 오셔서 새 창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의 완성이 요한 계시록에 등장합니다.
(계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밤을 몰아내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참 빛이신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의 창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첫째 날에 바로 그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 증거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 1:6-10) “6 하나님께 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게 요한복음의 첫째 날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에는 물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갈라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구원을 받는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오지요? 홍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살아나고 나머지 죄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바로 홍해 사건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그 홍해 사건을 세례라고 부릅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구름, 궁창 위의 물이지요? 바다, 궁창 아래의 물입니다. 그 곳을 통과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에 빠져서 모두 다 심판을 받아 죽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이 새 사람이 되어 올라오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궁창 위의 물이 쏟아져서 궁창 아래의 물과 합쳐져서 땅의 기식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 버린 사건이 있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 ‘이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어떤 다른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이야기인데요, 어떤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쏟아 부어서 그를 심판하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은 모두 살려내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가 홍해 사건을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홍해 사건과 노아의 방주 사건을 종합해 놓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이 죄인과 연합하시는 사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회개의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죄인과 연합하여, 죄인들을 품에 안고, 죄인들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둘째 날에 예수님의 세례 사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 1:29-34)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저주의 세례, 불세례를 받으십니다.
(막 10:38-39)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품에 안고 하나님의 저주의 세례를 받아 내심으로 저주의 물을 가르고 있던 궁창이 찢어지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자주 하늘을 ‘curtain'’휘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궁창‘’하늘‘이 찢겨져야 우리는 삼층 천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언제 어떻게 찢겨졌습니까? 예수께서 저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궁창이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막 15:37-38)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그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던 휘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휘장을 찢어 버리시고, 일 년에 대제사장이 딱 한번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지성소를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의 둘째 날이며 요한복음의 둘째 날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셋째 날에는 물과 뭍이 나뉘고 식물이 창조되었습니다.
(창 1:9-10)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에서는 보통 ‘바다’는 ‘악’을 상징하고 ‘뭍’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계 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을 때 저주의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땅이 드러났다‘라는 표현을 하지요?
(출 14:21-22)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시 114:2-5)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4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이렇게 성경에서 바다가 물러가고 그 바다가 마른땅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와 구별된 그 뭍에 저주받은 땅에서 자라게 되는 가시와 엉겅퀴와 대조적으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를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바다에는 ‘탄닌’이 들어 있습니다.
(창 1:21)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서 큰 물고기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탄닌’입니다. 이 ‘탄닌‘이라는 단어는 ’용‘’뱀‘’바다 괴물‘ 등의 의미로 쓰여 지는 단어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쓰여 진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사 27:1)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 51:9-10)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물론 창세기 1장 21절에서는 고래나 커다란 물고기를 상징하고 있기도 하지만 구속사 안에서의 ‘바다‘라는 관점으로 볼 때는 ’용, 뱀, 바다 괴물‘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한 해석입니다. 이렇게 바다는 ‘어둠, 죄악, 더러움‘등을 상징하는 것이고 뭍은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러운 죄악을 물리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살며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런 관점에서 요한복음의 삼일 째 날을 보세요.
(요 1:35-39)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요한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안드레와 다른 제자와 함께 서 있다가 그 두 제자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했습니다. ‘서서 보라‘하면 언뜻 생각나시는 장면이 없으세요?
(출 14:11-13)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격이요, 양옆에는 까마득한 절벽이었던 믹돌 사이 홍해 바닷가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 날 너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한 것은 ‘제자들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출 받아 나오듯이 이제는 어린양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주의 택한 자들을 구하러 오신 어린양,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복음의 선포입니다. 그랬더니 그 두 제자가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두 제자에게 ‘너희들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자신을 좇아오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누구를 찾느냐?’라고 묻는 것이 정상적인 질문인데 주님은 ‘티 제테이테’ ‘what do you want?' 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그 두 제자의 마음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은 여전히 ’누구를 좇느냐?’ 보다는 ‘그를 좇아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들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괄호 안에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라는 해설까지 곁들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제자는 분명 스승인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실 분이신 지를 암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의 죄를 들여다 본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을 소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그저 뭔가 배울만한 학식이 있는 선생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10장 38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죄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와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come and see' 주님의 초청으로 제자들이 주님을 좇아갑니다. 그리고는 요한이 뜬금없이 거기다 시간을 기록합니다. 그 때가 ’제 십 시’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제 십 시가 무슨 뜻이 있는가를 궁금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제 십 시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 때가 몇 시 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된 그 때가 바로 그들의 인생이 변한 시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본 자들이 그 분이 메시아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자기형인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요한복음의 셋째 날입니다.
요한은 창세기의 셋째 날처럼 무지의 바다, 죄악의 바다, 저주의 바다가 물러가고 가시와 엉겅퀴가 아닌 씨 맺는 채소와 과실 나무가 자라나는 마른땅이 드러나는 사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과 함께 거하며 그 분을 듣고 그 분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셋째 날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혼돈을 질서로 잡아 준비된 틀에다가 아직 남아 있는 공허를 채우는 것이 창세기의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인 것입니다. 넷 째 날에는 첫째 날의 공허를 채우지요? ‘해, 달, 별’로 첫째 날의 공허를 채웁니다. 다섯째 날에는 둘 째 날의 공허를 채웁니다. 궁창에는 새들로 채우시고 궁창 아래의 물에는 물고기로 채우십니다. 여섯째 날에는 셋째 날의 공허를 채우십니다. 땅에다가 육축과 짐승과 땅에 기는 것과 인간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넷째 날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채우시는 주님이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 1:43-46)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상징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요 2:1)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그러니까 창세기의 창조는 구속사 안에서,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불완전한 창조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완전한 모습이 요한 계시록21장 22장에서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 하늘이 찢기고, 바다가 물러가고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더라‘ 가 이루어지는 그 새 창조를 향해 첫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저주의 물을 홀로 맞으시고 저주의 바다를 그 양 어깨에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그 전체 구속사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구속사의 관점에서 영적으로 설명이 된 책이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두에 살핀 것처럼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예수, 믿음, 생명’을 울타리로 하고 한 절 한 절 공부를 해 가면 이처럼 은혜로운 책도 없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 해석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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