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I)
(김성수 목사)
(요 6:15-21)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이 요한복음 6장의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았고 그 전체적인 주제를 토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세상의 떡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신 하늘의 떡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에 바로 붙어 있는 또 하나의 기적(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기적)인 주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복음서가 이 한 가지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육지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떨며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다가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는 말은 있지만 제자들이 풍랑으로 두려워했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는 그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자마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는 것으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이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풍랑에 밀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풍랑을 꾸짖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곧’이라고 번역이 된 ‘유떼오스’라는 부사는 ‘즉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는 사건과 그 배와 제자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동시의 개념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그 모습이 조금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 14:33-34)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마가복음에는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볼까요?
(막 6:51-53) “51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보시다시피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즉시’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 두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만은 요한복음에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자마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거나 ‘영접’ 등의 상징적인 표현들과 단어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를 가지고 각기 다른 대 주제 하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보여 지는 차이입니다. 만일 사 복음서가 똑같은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똑같은 주제 하에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복음서가 네 권일 필요가 없지요? 그냥 한 권으로 통합을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 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각기 다른 주제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기에 네 권으로 갈라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확인한 이러한 차이들을 종합하여 볼 때 마태는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그러한 그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공포에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한 것이고, 마가는 그 이야기에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그러한 ‘믿음 없음에 대해 책망을 내리시는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과 함께한 배가 가려던 곳에 즉시 도착하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구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오병이어의 기적의 주제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요한복음의 물 위를 걷는 사건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오병이어의 사건과 같은 이야기를 다른 그림으로 그려놓은 사건인 것입니다.
요한은 이 다섯 번째 기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영원히 지내게 될 목적지인 영생의 나라를 주러 오신 분이지 우리의 자랑이나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증거가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마가복음 6장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막 6:52) “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
여기보시면 분명 제자들이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히 놀란 이유가 그들이 주님께서 떡을 떼셨던 오병이어의 사건조차 깨닫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 말은 두 사건이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도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것’이라는 복음을 그 주제로 담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럼 한 절 한절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좇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요 6:15)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유대신학의 민속 메시아사상에 근거한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주님을 찾아 왕 삼으려 한 것이고 주님은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을 가신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냥 산으로 도망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피하셨던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 14:22-2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렇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무슨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현설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 보여 지셨던 것도 아니고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이셨지만 큰 스승으로 이 땅을 살다 가신 현각 자에 불과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인간을 대표하신 것이고 완전한 하나님으로 우리들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대표라는 것은 종류와 질이 같은 것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고(원숭이를 대표하는 코끼리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대신이라는 것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수반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고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신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보면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셨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신성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께서 일으키신 기적들도 당신께 임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이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 14:10)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렇지요? 주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이나 모든 행위를 스스로의 신성을 동원하셔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셨어야 했나요?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자랑이나 당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그저 연극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안 아픈데 그냥 아픈 척하는 드라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철저하게 인간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의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그 시험을 모두 이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매 순간을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지탱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상황을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예수님은 그야말로 인기 절정입니다. 세상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의 이름을 연호하며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의 마음이 흔들렸을까요? 안 흔들렸을까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도 간혹 아버지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마 26:38-44)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 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 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고민을 호소하십니다. 저는 과거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에게 참 실망을 많이 했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형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매달려 절명할 때까지 길어야 삼 일이라는 데 그게 무서워서 이렇게 아버지께 졸라대고 있나 하고 내심 실망스러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과 두려움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몽땅 받아내야 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일체(一體)의 관계인 아버지 하나님과 잠시 단절이 되어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시기에 마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과 단절이 되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렇게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그 분의 진노의 불이 한꺼번에 떨어진 심판과 저주와 은혜와 구원이 동시에 담겨 있는 인류 역사의 핵(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와 AD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만을 추측하고 상기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좇을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을 인식하고 그 분의 고통을 생각하며 ‘나도 이제 예수님을 좇겠습니다.’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성경에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야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단 한 구절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로 밖에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로마 병정이 날카로운 뼈가 달린 채찍으로 때린 데 또 때리고 찢어진 데 도 찢어서 피가 튀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그랬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은 우리의 구원과 크게 관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주님이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잠깐 지옥에 내려가셨다 오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겪어야 할 지옥의 고통을 그 십자가에서 겪어 내셨다는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단절, 그게 바로 지옥이며 그게 바로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은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할 수 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좀 내게서 옮겨 주시면 안 되겠냐’고 피가 땀이 될 때까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의 응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안 된다‘였습니다.
주님은 그 응답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받아내야 할 시험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광야 40일 금식 후에 사단으로부터 받았던 시험, 나에게 절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노라는 바로 그 시험을 똑같이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소서’ 그래서 주님은 산으로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분이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기도에 게으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거룩한 삶, 신실한 삶,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요 6:15)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다시 기도하러 올라가셨답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기도생활이 반복적이고 습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고 또 다시 기도하시고 또 다시 기도하시는 습관적인 기도생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눅 22:39)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처럼 기도를 하심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영위해 가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혼자’라는 단어입니다. 그 혼자라는 단어 ‘모노스’는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따로 구별하여’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기도는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히 새벽에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셨지요? 여러분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내셔서 억지로라도 기도의 생활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가 ‘산’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어디로 올라가셨다고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은 단순히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을 보시고 기도는 꼭 산에 가서 해야 하며 산에 가서 해야 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는 산은 세상과 구별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과 구별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산속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온통 이 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기대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이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세속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기각시킨 후에 기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걱정들로 가득 찬 기도는 산 속의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산 속의 기도는 긴 호흡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산으로 기도를 하러 올라가신 주님이 기껏 몇 시간에 걸쳐 산에 올라가셔서 5분이나 10분 만에 내려오셨을까요? 주님께서 기도를 하시기 위해 동산이나 산을 찾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 기술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오병이어의 현장이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빈들’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는 반면 요한복음에는 ‘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지요? 그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단어 하나하나에 메시지를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는 문학적 기법을 즐겨 사용했고 특히 요한은 그러한 기법을 아주 즐겨 쓴 사람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출발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상세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 배경을 이해하기기 조금 어렵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시면 그 상황을 조금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막 6:45-48)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촉에 의해 날이 어두워질 때 떠나서 밤 사경까지 (새벽 세시 이후)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밤을 새워 풍랑과 싸운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큰 바람은 원어로 ‘아네무 메갈루’입니다. 그 것을 Living bible은 ‘gale'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 ’gale'이라는 바람은 초속 14미터에서 29미터의 강풍을 일컫는 말인데 기상학에서는 초속 20미터 이상을 태풍으로 분류를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엄청난 태풍 속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잘 보세요. 주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내 인생의 폭풍이 가라앉고 잔잔하고 평온한 태평성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분께 순종했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비밀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제 하늘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사람이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배워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인생에 폭풍과 같은 사건들과 상황들이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폭풍 속으로 손수 몰아넣으시고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기록을 읽게 될 교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풍랑에 빠져 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를 친절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린 것처럼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그 것이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졌지요? 그 굶주림이 예수라는 하늘의 떡으로 풍성하게 채워지는 모습으로 구원을 설명한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와 심판의 바다에 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그 속에 다 빠져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물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폭풍의 바다 속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을 밟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해내시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 여러 모양으로 예언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시 77:16,19-20)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욥 9:8)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시 18:16)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은 죄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예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와 홍수, 즉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 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0절로 가보세요.
(요 6:20-21)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새벽 세시가 넘도록 밤새 노를 저었는데도 그 풍랑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얼른 그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풍랑이 잔잔해지고 자신들이 탄 배가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절에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바로 출애굽기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은 지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물을 밟으시고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1절의 ’영접‘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장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에서의 영접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동일한 단어를 써서 이 그림 속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의 그림으로 그려드리면 이러합니다. 홍수로 다 죽어 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영접했더니’ 그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세상 것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달라고 좇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를 먹는 길밖에 없다‘ 다른 말로 ’나를 믿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고 진정한 안식과 행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자신을 좇아온 자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시는 모습으로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림이 바로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과 폭풍 속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그림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그림에서 역시 앞의 그림과 똑같은 메시지를 담아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가며 노를 저어 ‘가려던 땅’에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다른 말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힘을 의뢰하여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이라는 것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에 폭풍이 일어나거든 하나님께서 또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폭풍을 허락하신 것일까 하고 기대와 소망 속에서 받아들이셔야지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런 폭풍이 일어나는 거야‘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의 충족이나 세상 힘의 획득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회복되어지는 영생의 복 속에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봐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렇게 세상의 복만을 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4:27-31)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 ‘에고 에이미’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하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건 다분히 이생의 자랑과 세상의 정욕에 기인한 요구였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부와 명예를 얻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죄악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자신을 증명하며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저주의 바다, 풍랑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빠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심판의 바다,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좇은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자들과 배 위에서 여전히 세상의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에 빠지게 될 것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노아의 홍수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그 곳에 네피림과 용사, 세상의 왕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저주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네피림과 용사와 세상의 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용사가 되어 자신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게 아담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에 진노의 물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저주의 홍수, 분노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왕을 삼으려 하는 자들을 피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는 자리,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인간을 잘 대조해 보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이용을 하려 하는 자들이지만 주님은 그런 삶은 저주받을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주님은 산으로 도망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네가 믿음이 없어서 빠졌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왜 갑자기 거기서 믿음이 등장할까요? 믿음만 있으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좇아 물위를 걸으려 하는 자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과시함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저주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세상에서 물 위를 걸으려는 성공주의, 물질주의, 거인 숭배 사상에서 빠져나와 믿음으로 죄악의 바다 위를 걷는 진짜 물 위를 걷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 그 속에 메시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저주의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서어서 예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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