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의 나그네
(김성수 목사)
(창 21:22-34) "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 이니라 24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지난 시간에 공부한 21장 전반부를 잠깐 복습을 하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는 약속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삭보다 더 먼저 할례를 받은 것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창17:23) 그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다 유효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초청에 응하는 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보편적 부르심(외적소명)과는 다른 효과적 부르심(내적소명)이 적용이 되는데 이삭처럼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만이 그 효과적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4장 말씀을 통해 이스마엘은 인간의 행위와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의 상징이었고 이삭은 은혜와 믿음으로 대표되는 새 언약의 상징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행위와 은혜, 율법과 믿음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하게 되고 결국 행위와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추방이 되고야 만다는 것을 우리는 이스마엘의 추방 사건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이 세상의 힘을 모아 고통과 허무에서 벗어나려 하는, 다른 말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열매는 모두 다 기각이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길만이 참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고 그렇게 달려가는 이들을 약속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다보면 이 땅에서 젖먹이 이삭과 같은 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데 세상은 그러한 어린 아이 이삭들을 18세 소년 이스마엘의 주먹으로 후려치고 조롱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이며 하나님은 그러한 약함 속에서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어 온전한 승리를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한편 이스마엘은 그렇게 유기될 옛 언약과 그 옛 언약의 산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될 이방인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끔 이중적 상징을 함의하는 것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렇게 옛 언약의 대표로 상징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행위와 열심을 근거하여 힘의 원리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을 먼저 믿는 자들을 통해 구원하시는 구속사의 역사적 순서를 힌트 하는 인물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의 우물곁에서 눈이 멀어 우물을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고 있던 하갈의 눈을 뜨게 하셔서 생수를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힌트로 스크래치 되고 있는 것입니다.(창 21:19)
죄인들은 눈이 멀어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우물도 발견하지 못하고 방성대곡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면 하늘의 생수마저 발견할 수 있는 은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 그 브엘세바로 이사를 와서 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자손인 아브라함과 이삭이 세상과 한 곳에서 더불어 살고 있는 형국입니다. 간혹 혹자들이 오해하는 것이 성도는 믿지 않는 자들과 상대도 하지 말고 어디 깊은 산 속에 사는 사람처럼 그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전 5:9‐10) "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6:14)고 하신 것은 그들과 격리 되어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되 그들의 삶의 방식을 좇아 그렇게 살지 말라, 다른 말로 죄와 격리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그 브엘세바에 살면서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낸 것 같습니다. 얼마 후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인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던진 말에서 우리는 브엘세바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21:22) "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2절 후반부를 직역하면 ‘네가 하고 있는 모든 일 안에(in everything you do)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 보여 졌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으면, 얼마나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게 되었으면 그랄의 왕인 아비멜렉이 동맹을 맺자고 까지 찾아왔겠느냐며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잘 믿어 이 세상의 힘을 복으로 받아 세상이 우리를 깔보지 못하고 동맹을 맺으러 오게 만들자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성경은 그와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21:24‐25) "24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칭찬을 했는데 정작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허구한 날 자기가 판 우물이나 빼앗기며 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강한 자입니까? 누가 부자입니까? 허구한 날 우물이나 빼앗기면서 사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까? 세상을 상징하는 아비멜렉이 강한 자요, 더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세상의 힘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뛰어남이나 이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한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여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나 자신의 뛰어남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열심을 부려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함에서만 나오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과의 구별됨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세상은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 섬김의 삶, 사랑의 삶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의 다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근거로 아브라함이 우물을 늑탈 당한 사건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 후 세상에게 늑탈 당함으로 승리를 쟁취하신 분이 계십니다.
(막 15:37‐39)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날 때부터 보잘 것 없었던 주님은 죽는 날까지 고난과 수난과 배신당함의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결국 완전히 벌거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벌거벗은 주님의 모습은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비워 주셨음도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철저한 낮아짐과 비워짐의 절정 앞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성도는 바로 그러한 구별됨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한 구별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힘을 추구하는 이 세상은 절대 자신의 것을 털어 전혀 아무런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불특정 외인들을 전심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에게 바로 그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행 2:43‐47)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4:34‐35)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비골에게 칭송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칭송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칭송의 이유가 뭡니까? 자기 것을 내어 놓아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힘을 포기하는 것으로 세상과 구별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속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적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판 우물을 빼앗겨 주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인 것입니다.
(요일 2:8‐11)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잘 보세요. 여러분이 지난 시간에 갈라디아서를 통해 공부하셨다시피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은 새 언약 속의 약속의 자손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새 언약, 즉 새 계명 속의 약속의 자손의 특징을 ‘사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새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사랑을 발휘하며 세상과의 구별된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을 받아내는 새 언약의 백성의 모습을 교회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비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에게 당해주면서도 힘으로 대항하지 않는 그런 모습, 바로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을 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칭송하는 아비멜렉과 언약을 하는 장면을 잘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하는데 아브라함이 암양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 일곱 개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브엘세바라는 말은 ‘맹세의 우물’혹은 ‘일곱 개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맹세’ ‘솨바’는 ‘일곱’이라는 의미의 ‘쉐바’에서 나온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언약 혹은 맹세’라는 단어는 ‘완전성과 불변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기에 그 ‘언약, 맹세’라는 단어가 히브리 사람들이 완전수라 칭하는 ‘일곱’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의수, 4방위와 삼위 일체 하나님)
아브라함은 그 언약의 불변성과 완전성을 의미하는 일곱(쉐바) 암양을 아비멜렉에게 주고 일곱(쉐바) 개의 우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맹세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땅이 반드시 자기와 자기 후손들의 소유가 될 것임을 확신 속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땅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완전히 주어진 것은 그로부터 430년 후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윗 왕 때 그 경계가 모두 완전하게 접수가 되었으므로 그로부터 1,000년 후라고 해야 옳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확신한 것입니다. 이 땅이 지금 블레셋 사람들의 소유이고 나는 이렇게 내가 판 우물조차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수시로 빼앗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내 후손들에게 이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이 땅은 반드시 우리의 땅이 될 것이라는 신앙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거기에 에셀 나무를 심었다고 하지요?
나무라는 것은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래 살 생각이 없으면 나무를 심지 않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자기가 맹세함으로 얻은 우물곁에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우물에 대한 소유권의 표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우물이 있는 땅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셨다는 약속의 성취를 내다본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 최남단 경계선이 되었습니다.(삿20:10) 그렇게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을 하나님 나라로 굳게 믿고 있었고 그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구별되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블레셋의 땅에서 아직 오지 않은 약속의 땅 정복(하나님 나라)을 내다보며 하나님 나라 백성처럼 살고 있었지만 그 곳이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본문 34절을 보시면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적어도 그 곳에서 75년 가까이 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어 헤브론에 장사지내고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는 죽는 날 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땅을 블레셋의 땅이라 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오래도록 그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처럼 살았지만 그 곳을 최종 목적지로 삼아 살지 않고 그 땅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히 11:13)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젖먹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섬겨주며, 사랑해 주며, 오래 참아주며(복수의 반대말), 안아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됨을 어떻게 보였나요? 그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확실히 알고 그 본향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감으로 세상과의 구별을 보였습니다.(히11:13‐16) 그 아래로 우리의 이름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도 바로 그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좇아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 3:18‐20)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 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라고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성도가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부자 되고 병 안 걸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단 말입니까?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 나그네로, 순례자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그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산제사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저는 굳이 오늘 본문의 요절(腰節)을 하나 고르라 하면 33절을 고르겠습니다.
(창 21:33)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으로부터 일곱 우물의 소유권을 받아내는 맹세를 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성과 불변성을 확신하는 신앙고백을 한 후 그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던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라고 번역하는 어구는 대부분 ‘의지하다, 헌신하다. 예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축약하면 ‘예배하다’입니다.
(고전 1:2‐3)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2절을 보시면 교회의 정의가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자,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입니다. 거기서 ‘부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칼레오마이’가 바로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 ‘에피칼레오마이’라는 단어는 ‘도움을 구하다, 헌신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을 모두 함의 하는 단어입니다. 그 전체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구약에서는 그 예배라는 단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라고 번역이 되곤 합니다.
(창 4:10)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여기서 ‘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마르’가 바로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형에게 죽임을 당했던(히11:4, 요일3:12) 아벨이 죽은 뒤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죽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지요. 요엘서 2장 32절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의 뜻도 직역을 하면 ‘구원을 얻은 자는 여호와를 예배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산다면 죄인들은 무엇을 예배하며 사는가?
(창 4:17)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 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아담의 범죄 함으로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항상 죄인들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용이 되는 가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쫓겨나 성(도시)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좀 더 히브리 원어에 맞게 직역을 하면 ‘가인이 성을 쌓고,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그 성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과 성읍의 이름을 불렀고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성과 아들을 예배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은 자기 존재의 확장(extension)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자기 자신을 숭배했고 세상의 힘을 예배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죄인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힘을 예배합니다. 돈에게 예배하고 명예에게 예배하고 자신의 배를 예배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의 라인인 아벨 대신에 태어난 셋은 어떠했는지 볼까요?
(창 4:26)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의 라인인 셋과 에노스와 그의 후손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더라는 것입니다. 극명하게 드러났지요? 세상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르러야 하기에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살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힘을 숭앙하며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늘 본문 말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worth 와 ship의 합성어입니다. 어디에다 가치를 두고 사는가? 즉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을 예배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사는 것이고 죄인들은 이 세상의 힘과 자기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과 천지 만물의 창조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새 창조를 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얼마나 존귀하시고 크신 분이신가를 올바로 인식하여 그 분 앞에 온전히 항복하며 그 분의 발산적 영광을 반사적 영광으로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창 1:1, 2:4)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창세기 1장은 우리 성도들의 새 창조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창조는 그 자체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강해 참조) 그 창세기 1장을 창세기 1장 1절과 2장 4절이 샌드위치의 빵처럼 싸고 있다는 것을 아세요? 두 구절을 원어로 비교하여 보면 ‘에레쯔(땅), 솨마임(하늘들), 엘로힘(하나님), 바라(창조하다)’등의 똑같은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기법 중에 수미(首尾)일치법(inclusio)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쪽에 주제를 두고 가운데에서 그 양쪽을 덮고 있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기법입니다. 지금 창세기 1장은 바로 수미일치법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잘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의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 틀(structure)을 만드시고 공허(empty)를 내용(contents)으로 채우셨습니다. 그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담고 있는 내용이라 했지요?(그런데 contents가 structure(언약)를 무너뜨린 것이 타락, 그래서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심으로 셋째 날까지의 structure와 언약을 회복시키시는 것임)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창조의 후렴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안식, 즉 일곱째 날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신학자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이 깨졌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지 한 번 안식에 들어가신 하나님은 절대 그 안식에 실패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시니까요.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의 사역이 너무 힘들어서 숙소로 돌아가 쉬셨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안식이라는 단어 ‘솨바트’는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다, 제 자리에 앉다’라는 뜻입니다.
(사 66:1-2)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가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아우르시며 좌정하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앞에 예배하는 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에게 예배를 받는 것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안식입니다. 따라서 참 된 안식은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서 자기가 왕인 줄 착각하고 자기를 숭배하며 살던 자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참 된 행복이며 참된 안식인 것입니다. 그 참된 안식을 우리가 주일날 모이는 공 예배 시간에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여 그들을 이끌고 일곱째 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오늘날 예배의 모형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엿새 동안 열심히 살아서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하게 되면 우리에게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지요? 그래서 예배의 요소 중에 헌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엿새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열심히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세상(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세상을 정복하여 이렇게 결실을 맺었습니다. 여기 저의 엿새 동안의 삶이 있습니다. 받으시옵소서.’가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나의 순종과 복종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헌금인 것입니다.
하와가 다스려야 할 뱀에게 오히려 유혹을 당함으로 질서가 깨지고 예배의 삶이 금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이 세상 것들에게 우리가 명령을 받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첫 번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자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의 대표 격인 돈을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돈 때문에 예배를 거르는 것은 돈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골프에게 명령을 받고, 피크닉에게 명령을 받고, 게으름에게 명령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며, 지키며, 정복하여 하나님 앞으로 끌고나와 예배하게 하는 worship leader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안식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이 안식이지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안식의 나라이니까요.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매 순간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일 공 예배이고요.
우리는 주일 날 온 교회가 모여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그리심 산이나 시온 산이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거기서 신령은 성령이요 진정은 ‘알레떼이아’ ‘실체’라 했지요? 히브리서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에서 ‘실상’이 바로 ‘알레떼이아’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던 그림자로서의 제사장이나, 제물이나, 제사나, 성전 등의 모형이 아닌 실제 예수님이라는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의 모형들로는 우리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히10: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근거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자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배의 자리에서 구원의 감격과 함께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위대하심 앞에 납작 엎드려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 분께 순종의 제사, 경배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그 것이 바로 성도의 안식입니다. 주일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빼먹을 수 없는 감격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처럼 요리 조리 피해 다닐 궁리만 하는 이들은 아직도 진정한 안식이 뭔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어떠한 존재인지,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일로 예배를 빼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유일한 안식의 자리인 예배를 아무런 가치 없이 여긴다는 것은 그가 지금 다른 것으로 안식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여러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오직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데에서 안식을 얻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여러분 자신과 이 세상의 이름을 부르며 그 것들을 숭배하고 예배하며 살 때 여러분은 끝없는 다툼과 갈등과 고통 속에서 한 시도 쉬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섬기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예배하다’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세상과 아니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을 둘 다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오롯이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부인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야망, 꿈, 욕심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좇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셔야 합니다. -창세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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