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강. 예수와 함께 띠 띠고 가는 길 (요 21:18-23)
요 21:18-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 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 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오늘로서 요한복음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런데 끝이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영 쓸쓸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건 마치 전쟁 포로를 압송할 때 포승줄로 손발을 묶고서 강제로 끌고 가는 장면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건 과거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의 모습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자 바벨론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굴비 엮듯이 쇠고랑을 채워서 바벨론으로 이송 하였어요.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나라 잃은 슬픈 멸망의 길이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띠 띠고 끌고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 아니라 복되고 영광스러운 영생의 길이에요.
그러니 절망이 아니라 소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소망으로 들려지지 않음을 왜 일까요?
이는 우리의 복에 개념이 달라서 그래요.
또한 우리의 바램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우리 성도들을 대표로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은 운명에 처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적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씀이에요.
우린 우리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서 사용되어질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띠를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에게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분명 소망의 말씀임에도 우리에게는 절망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우리 맘대로 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간섭으로 살겠느냐? 라고 묻는다면 우린 모두가 내 맘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 맘대로 살고 싶어 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이게 어디 우리가 항변 한다고 포기 되어질 일입니까?
턱도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용하겠다는 일방적인 통고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쓰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다.
우린 그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린 이러한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의 원함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피조물의 원함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창조주의 원함으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8=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그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신 예수에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아들의 나라로 옮겼어요.
우린 그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구요.
왜? 그가 우리를 구속하고 죄사함을 주셨는지 아세요.
이는 그가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고자 하심입니다.
즉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위하여서 입니다.
애초에 창조 목적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죄가 이 목적을 바꿔 버렸습니다.
창조주의 원함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 자신의 원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뒤 틀려진 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구원 후의 삶이란? 죄인의 본성과 반(反)하는 싸움을 살도록 간섭 당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걸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삶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고 해요.
이게 우리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일을 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자기 인생이 날마다 차압당하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일컬어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전쟁이에요.
다른 말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입니다.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네 맘대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끝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젊다! 늙다! 라는 말은 성령이 오시기 전(前)과 성령이 오시고 난 후(後)를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베드로처럼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끝내는 도망을 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누구에게 띠에 매여서 간섭 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로는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을 관리하고자 하심입니다.
이걸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합니다.
띠를 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간섭을 하는가 하면 베드로 맘대로 살 수 없도록 간섭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인생이 예수님에게 차압당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렇게 사용하겠다는 통고에요.
시나리오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싫든 좋든 이 일에 사용이 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옛 이름입니다.
이는 시몬은 이제 끝났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인 젊어서는 시몬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성령이 오시고 나면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로 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띠를 띠워서 베드로로 살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에 선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다고 하고!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고 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다고 하고!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어서 이삭을 낳았다고 합니다. 온통 “믿음으로” “믿음으로” 입니다.
각 사람 앞에 한결같이 “믿음으로” 라는 말씀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믿음으로” 가 주어(主語)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요.
이는 곧 믿음이 주인이 되어서 이들을 끌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이로보건데 신약의 성도들만 띠 띠고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로 동일하게 띠 띠고 끌려 다녔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에게 구약에 성도들도 이렇게 띠 띠고 다녔으니 신약을 사는 너희들도 믿음이 이렇게 간섭을 할 것이니까 각오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 기분이 좋으신가요?
아니면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이 드나요?
아마도 썩 좋은 기분은 안 들지요?
난 뭐냐?
나는 뭐! 예수님 시다바리냐!
그럼 내 인생은 뭐냐! 라는 항의가 나오지 않나요?
항의가 나와야 정상이에요.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인생이 살아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면 그와 정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소가 고삐에 끌려가듯이 끌려간다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감지하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이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어있어요.
성령께서 깨달아지게 해 주십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는 다를 수가 있지만 말이에요.
이 사실을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로 살았습니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자기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고서는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자 그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선 예수님 곁은 떠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베드로를 찾아 갑니다.
그리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하십니다.
요 20:21-22=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럼에도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떠납니다.
떠나서 예전에 자신이 하던 일인 고기 잡는 일을 다시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 곁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설령 그가 부활을 하였다고 하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어도 떠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간들 입장에서 이해를 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합니다.
산 사람은 이승에서 살고, 죽은 사람은 저승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러한 인간들의 죽음 사관(史觀)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한 부활이 아니에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그런 부활이 아니고 세상과 하늘나라를 구분치 않고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면서 살아가세요.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과 하늘나라는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하늘나라나 이생은 다 같아요.
이젠 역사와 묵시를 넘나드는 분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에 속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말이에요.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난 후 이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나타나신 것입니다.
나타나셔서 실제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 일에 개입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있어요.
이를 알려 주시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 와서 야! 베드로야!
난 너를 떠난 것이 아니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네 인생을 책임진다는 뜻에서 네 인생을 내 띠로 묶어 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의 인생은 예수님의 띠에 묶이고 마는 것이 됩니다.
이걸 한 몸으로서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 강림 후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자기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고 이것은 내가 고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라고 세상에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실제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고상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에요.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삶이라구요.
제발 신앙생활을 정형화 시키지 마세요.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시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주께 감사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주께 감사하고!
해가 뜨면 주께서 또 해를 뜨게 해 주셨구나 하고 감사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내가 사는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이런 죄인이 또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주어진 용서로 살고 있구나!
그래서 하루 하루를 주가 허락 하신 날이라 생각하고 자족하면서 감사하면 살면 된다구요.
관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론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추상이 아니고 실상이에요.
이게 믿어지느냐 믿어지지 않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사실을 관념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이원화 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믿는데 손과 발은 안 믿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사도 바울은 입술로는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마치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입으로는 성경적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삶은 공허해요.
마치 축구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같아요.
아나운서는 축구에 관하여서는 전문가인데 실제 축구는 하지 못해요.
이처럼 머리로는 예수에 대하여 빠삭한데! 심장으로는 예수로 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설교는 잘하는데 예수로 사는 것은 없어요.
마치 설교 잘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어요.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 하고 예수로 사는 것은 달라요.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은 예수와 한 몸이 아니더라도 잘 알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예수로 사는 것은 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지만 가능해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이 오류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예수에 대한 담론은 무성한데 정작 예수로 살아내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는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세요.
이 사실이 믿어지는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서 예수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를 가늠 할 수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으면 자기 인생으로 살지 않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예수가 관념이고 죽었으면 자기 맘대로 예수와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한 번 확증을 해 보세요.
나는 지금 내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간섭하심으로 예수님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내가 예수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는지?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너희가 스스로 믿음을 확증해 보아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은 누구 눈치 볼 것이 아니에요.
목사 눈치도 보지 말고 교인들 눈치도 보지 마세요.
그들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어지면 믿어지는 것으로 살고!
믿어지지 않는데도 괜히 믿는 척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믿는 자를 원하지, 믿는 척 하는 자를 원하지 않아요.
아무리 우리가 믿는 척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걸 믿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요.
이익(利益)을 바라는 삯꾼 목사들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들에겐 여러분이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중요치 않아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에는 상관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수중에 있는 돈이고 열심이고 충성이에요.
여러분이 소유한 것들을 여러분 수중에서 교회로 이관만 시키면 되어요.
교회를 위하여 내어 놓도록 하면 끝이에요.
그래서 저는 예수가 믿어지지 않으면 믿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도 굳이 교회에 다녀야 마음에 안심이 된다고 하면 말리진 않아요.
취미삼아 다닌다는 데서야 말릴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저는 다만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듣기 거북스러우면 안 와도 상관없어요.
교회는 사람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니까요.
분명히 말합니다.
수만 명이 모여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 자기 백성만 찾아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그러니 사람의 수(數)의 중다함을 가지고 교회다 아니다 판단하지 마세요.
수십만 명이 모여도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없다면 절간과 같은 종교단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받은 성도가 두 세 사람이 모여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사람의 수에 있지 않고 예수 믿음에 있어요.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없어요.
내가 믿는 그 예수가 진짜이면 그것으로 족해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이걸 노름판에 장땡이로 비유했어요.
내가 장땡이를 들고 있으면 안심이에요.
남에 눈치 살필 필요가 없어요.
누가 공갈을 친다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할 일이 없어요.
그냥 내가 가진 패를 보고 든든하게 있으면 되어요.
그럼 누가 진짜 장땡이를 가지고 있는지 나중에 다 드러나요.
믿음도 이와 같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그 주님이 진짜인가에요.
진짜 주님과 사귐을 가진 성도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있기 때문에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퉁이돌” 블로그에 (http://blog.daum.net/asthouwilt) 좋은 글이 있어 인용을 합니다.
제법 값을 치르고 목도리 하나 샀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이름 있는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목도리 끝에 섬유 조성표와 함께 붙은 상표가 전체적인 실루엣을 망치는 것입니다.
갈등이 시작 됩니다.
멋을 위해 상표를 포기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난 이만큼의 돈을 주고 샀다는 자기 과시를 할 것인가?
이런 갈등 민망하고 우스운데 살다보면 자주 부딪치는 자리입니다.
성표를 떼어내도 그 제품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장인의 정신을 가진 회사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만든 고급 목도리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그것을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에 표식을 두고 겉으로 드러내고 “나 예수 잘 믿어요” 라고 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주님은 아는 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럼 됩니다.
넉넉하고 여유롭습니다.
난 이미 진짜 제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도 넉넉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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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글이지요.
얼마나 간결합니까?
이게 우리들이 토하여 내야 할 신앙고백이에요.
난 이미 진짜를 가지고 있다고 하잖아요.
가짜를 가지고 있으면 불안하고 남에 눈치를 살피지만 진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에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다면 이마에 나 예수 믿어요! 라고 써 붙이지 않아도 되어요.
일부러 신자 티를 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이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어 말합니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우산을 챙겨 가지 않았습니다.
하교(下校)를 하는데 비를 맞게 생겼어요.
그래서 부모가 하교 시간에 맞추어서 우산을 챙겨들고 학교에 갑니다.
가서 누굴 찾아서 데리고 옵니까?
자기 자식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만 찾아오면 되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어요.
왜? 보냈는가 하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 수많은 어부들이 있었지만 베드로만 찾아 간 것입니다.
오직 창세로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만 찾아갔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 믿음이 예수를 믿게 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자기 신앙을 감추지 않아요.
누구 눈치 보지 않아요.
남에게 “나 예수 믿어요” 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묻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중에서 내가 준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렴!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저요 하고 나가요.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예수 믿는 것이 어렵지 않아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즉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특징이 있단 말입니다.
그 특징이 바로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운명으로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처럼 말이에요.
이들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믿음이 소 고삐처럼 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입니다.
사무엘상 6장을 봅시다.
삼상 6:1-15=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4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엘리 시대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겼어요.
이는 법궤를 우상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 법궤를 빼앗아 가긴 했는데 이 법궤 때문에 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새 수례를 만들고 그 위에 법궤를 싣고 젖 나는 두 마리 암소를 끌어다가 법궤 실은 새 수레를 끌게 합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내린 재앙이 진짜로 법궤 때문에 당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모성애(母性愛)가 가장 강한 동물인 소를 그것도 금방 새끼를 낳은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사람도 타지 않고 법궤만 싣고 말이에요.
블레셋 사람들은 어미 소에게서 갓 낳은 새끼를 떼어 놓으면 어미 소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소는 새끼가 없으면 안 움직여요.
자기 눈 앞에 새끼가 있어야 움직여요.
그만큼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에요.
두 마리 암소가 만약에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곧장 가면 자신들 땅에서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이 일으킨 것이 맞고 암소가 다른 곳으로 가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점(占)을 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 실은 암소는 울면서 벧세메스로 갔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이에요.
그리곤 하나님께 제물이 되어서 바쳐졌어요.
이건 우리 이야기에요.
법궤란? 언약을 상징해요.
예수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암소의 등짝에 언약 즉 예수가 실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가 암소를 이끌고 간 것입니다.
‘벧세메스’ 라는 말은 태양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는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에요.
태양의 집이고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란 영적으로 말하면 천국을 상징해요.
천국은 태양의 집이에요.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 사는 나라에요.
성도가 제사장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등짝에 언약을 실어놓았어요.
예수가 타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등짝에 타고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인도 하세요.
그런데 그 천국 가는 길이 울면서 가는 길이에요.
아프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끌고 가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데리고 가겠어요.
천국이지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암소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다 뒤로 한 채 울면서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국에는 암소들처럼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소 ‘코뚜레’ 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멍에를 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소에 코뚜레를 하면 그 때부터 그 소는 고삐를 잡은 사람의 손에 끌려 다니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곧 예수님이 스스로에게 하신 약속이고 의지에요.
베드로의 반응 여부는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흥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너를 이렇게 쓸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 원함과 상관없이 십자가에 달리는 삶으로 이끌림 받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인생을 살도록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값을 주고 사 온 것입니다.
값을 주고 사 온 것은 예수님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서 우리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어요.
하나님 나라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관심이 없이 살았습니다.
이게 죄 아래서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베드로를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던 것 같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까지 끌려 온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세요.
이게 믿어지고 인정이 되신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우리 인생도 우리의 원함으로 살아지지 않고 예수님의 원함으로 살아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그렇게 살게 하세요.
그러므로 우리 앞에 이런 인생이 펼쳐진다고 해서 놀라지 마세요.
모두가 예수님이 자기 띠로 우리를 묶어서 끌고 다니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말씀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내용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을 우리 몸으로 풀어내고자 하심입니다.
말씀 속에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을 우리 삶 속에서 끄집어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을 육신으로 풀어내는 삶을 살도록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성경적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고상한 말을 하고!
어떤 논리를 개발하여서 이론을 말하고!
고상한 척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첫째로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사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자기 육신으로 풀어내는 삶을 사셨어요.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코뚜레를 당하고 끌려가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행한 것과 같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이론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어요.
실제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서 나타날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띠를 띠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와 연합이 되어서 사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깥에서 구경하고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고 직접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너희를 지키신다고 알려 주셨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어요.
들에 백합화를 보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저들이 살고 있는 것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먹이고 입히고 돌보신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저기 있는 백합화 보다 귀하고 공중 나는 새 보다 더 귀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내가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이 믿어지십니까?
까마귀를 먹이듯이 나를 먹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오늘로서 요한복음을 마감합니다.
몇 년 동안 132강이라는 긴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요한복음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천부께서 들에 백합화를 입히고 공중에 새를 먹이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간섭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 믿어져야 해요.
요한복음의 내용을 세세하게 다 몰라도 괜찮아요.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전후좌우를 두르시고 간섭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욥에 고백처럼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어야 합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신 흔적들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흔적들을 아로새겨 놓았어요.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믿어지시나요?
그냥 성경에 나와 있는 성결 구절을 의미 없이 주문 외우듯이 읊조리지 말고!
정녕 이 사실이 믿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믿어지면 두려움 없이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감사로 살아질 것이고!
믿어지지 않으면 입술로 아무리 예수 예수 하여도 불안하고 감사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과 내가 타자(他者)여서는 안 되어요.
예수님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어요.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할 때 믿음이 관념이 아니고 실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쌓는 ‘지식쟁이’도 되지 말고!
말만 하는 ‘말쟁이’도 되지 마시고!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 ‘예수쟁이’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내 삶에 적용시키고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어요.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어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여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으로부터 추궁당하지 않아도 되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추궁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시면 됩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였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사셔야 해요.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살지 말고 영적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산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오실 때 왜? “예수” 라는 이름으로 오셨나요?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죄가 뭐라고 했나요?
창조의 목적을 어그러지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은 어그러진 창조 목적을 올 바르게 환원시키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다가 결론 부분을 너희는 이제부터 너희 맘대로 살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띠 띠고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끝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 맘대로 살 수 없는 것!
예수님의 것으로 끌려 다니는 것!
이게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에요.
구원 속에는 우리를 위한 것이 없어요.
그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체를 하나님이 행사하는 것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시고!
과정도 하나님이 이루시고!
결과도 하나님이 이루세요.
자연히 구원 후에도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으로 생각 할 때 구원이란? 구원을 받는 입장에서는 좋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주권이 완전히 구원 하신 분에게 이첩이 되어서 인생을 장악 당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고 있어요.
네가 지금까지는 네 맘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네 인생을 장악하고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꺼꾸러 십자가에 매 달려 죽는 지경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그러니 베드로 입장에서는 자기 원함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삶이에요.
세상의 영화나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영웅호걸이나 성공신화와 같이 입지전적(立志傳的)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흥행이 되어요.
그러자만 당연히 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진감래(苦盡甘來)하는 것으로 연출이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성공신화가 그려지면 안 되어요.
숱한 어려움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끝내 우뚝 서는 모습으로 그려져야 관객들이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지금은 비록 삶이 지치고 힘들고 고생스럽다 하여도 앞으로 좋은 날이 올 것이니 참고 살라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잘 살게 될 거야!
그러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氣) 죽지 말고 신데렐라가 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펴면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여지없이 기각(棄却) 시킵니다.
한마디로 누구 맘대로! 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행복한 “해피엔딩”이 아니에요.
육적으로 보면 슬픈 “세드엔딩”이에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슬프고 비극적 종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두 길이 있다고 봅시다.
한 쪽은 “해피엔딩(행복)”이고 다른 한 쪽은 “세드엔딩(슬픔)”이라고 합시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사람은 미래가 다가올수록 신이 나고 설레고 기쁠 겁니다.
그러나 미래가 세드엔딩으로 가는 사람은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미래를 말해주는데 해피엔딩이 아니라 세드엔딩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팔 벌리고 죽을 것이라고 하고 있잖아요.
알다시피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을 친 자에요.
이런 자에게 십자가에서 팔 벌리고 죽는다는 말은 경악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 들으면 베드로 입장에선 재수 없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어요.
누가 자기 앞 날이 불행하다고 하는데 좋아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자기 혼자만 불행 해 질 수 없다는 뜻으로 곁에 있는 요한을 끌고 들어갑니다.
나 혼자 당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요한의 미래를 묻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남과 비교하여서 행복의 척도를 삼고자 하는 습성이 있어요.
상대적으로 결핍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해요.
즉 남이 갖지 못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으면 우월감을 느끼고,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하면 결핍을 느껴요.
혼자 불행한 것 보다 함께 불행하면 위안을 삼아요.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요한의 미래도 궁금한 것입니다.
요한도 자기와 같다고 한다면 위안을 삼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곁에 있는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본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그를 염려해서가 아니고 요한이 자기보다 좋아질까 봐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너는 너 갈 길이나 가면 되지!
왜 남의 인생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요한을 머물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요한과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의 길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즉 베드로가 갈 길이 있고 요한이 갈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각자 맡은 배역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필요에 의하여 선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부르신 분이 알아서 해요.
각자 배역을 맡겨주어서 사용을 하세요.
베드로가 팔을 벌리고 죽어야 할 배역을 맡았다고 한다면, 요한은 천수(天壽)를 누리는 배역을 맡았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일찍 죽임을 당하지만, 요한은 수명(壽命)을 다하고 죽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베드로와 요한은 용도가 달라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부르실 때 상황이 다르고 죽을 때도 상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지고 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참고로 이해하세요.
제 해석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아요.
그러니 참고 하세요.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5장을 봅시다.
마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눅 5:3-8=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베드로는 그물을 던지다가 부르심을 입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던진 그물은 찢어졌어요.
그러나 요한은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심을 입었어요.
베드로의 그물은 찢어졌는데, 요한의 그물은 찢어지지 않아요.
두 그물은 두 언약으로 이해해 보세요.
찢어진 그물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기운 그물은 새 언약을 상징해요.
이건 마치 깨어진 처음 돌 판과 보관이 된 두 번째 돌 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한 두 그물은 두 예수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그물이 찢어지듯이 십자가에서 찢어졌어요.
그러나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는 찢어진 그물을 기워서 온전케 한 것처럼 율법을 완성하신 분으로 오셨어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두 예수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상징하고,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를 상징해요.
죽음을 그물이 찢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활은 찢어진 그물은 기운 것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는 팔 벌리고 죽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요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머물러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요한도 죽었어요.
하지만 요한이 천수(天壽)를 누린 것은 영적으로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과 같아요.
베드로와 요한은 부르실 때도 다른 모습으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르게 나타나요.
다르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뜻이에요.
참 재미있는 것은 12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품에 유일하게 안긴 사람이 사도 요한이에요.
품에 안겼다는 것은 신부(新婦)란 말입니다.
성경은 요한을 그냥 요한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말할 때 주님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요한이 베드로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 주어요.
유월절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찬을 하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 중에서 자기를 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전부 뜨악해 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판단 말이냐 라면서 웅성거립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요한에게 고개 짓을 하면서 좀 알아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야! 요한아!
예수님에게 좀 물어 봐라!
그 놈이 누군지!
이에 요한이 예수님에게 묻자 가룟유다 라고 알려 줍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을 하여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 가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이 때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몰라보아요.
그래서 요한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자 벗고 있던 베드로가 옷을 입고 첨벙거리면서 예수님 앞으로 나왔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을 밝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는 성령이 오시기 전에 사람을 말하고 요한은 성령이 오시고 난 후의 사람으로도 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으로는 예수를 알 수가 없고 성령이 오셔야지만 예수를 알 수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제자들 모습이라고 한다면 요한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제자들 모습이라고도 볼 수가 있어요.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새로운 이름 속에도 의미가 있어요.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라고 하였어요.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라는 이름을 주었어요.
보아너게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뢰란? 하늘에 소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태초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성경을 쓴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요한서신서인 요한 일서 1장 1절에서도 태초에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은 천국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천상의 소리인 우뢰를 울렸던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그가 행한 모습이나 기록한 성경 자체가 하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으로서 교회의 기초를 세웠다고 한다면 요한은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에 천국에 비밀들을 알려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두 언약으로도 이해 할 수가 있어요.
베드로가 팔 벌리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옛 언약과 같이 깨어지는 것을 상징하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머물러 있는 요한은 온전하게 보존 되는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이 있어요.
이게 에덴동산에서는 두 과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먹으면 죽을 선악과와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죽이는 과실로 옛 언약인 율법을 상징하고, 생명과는 살리는 과실로 새 언약인 은혜를 상징해요.
옛 언약을 율법으로서 깨어진 언약이고, 새 언약은 은혜로서 온전한 언약이이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에요.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두 사람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어요.
우리도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두 사람이 있어요.
옛 사람은 찢어진 그물처럼 후패하지만, 새 사람은 온전한 그물처럼 새로워요.
옛 사람은 베드로처럼 팔 벌리고 죽임 당하지만 새 사람은 요한처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머물러 있게 되어요.
앞서서 말씀드렸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동원이 된 배우라고!
각자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행보가 극명하게 다른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요한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너 갈 길이나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갈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르게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베드로나 요한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정해졌어요.
그 정해진 코스대로 예수님이 간섭을 해 가세요.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의 운명은 후천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고 한다면 요한처럼 죽지 않는 길을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두 팔을 벌리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길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쁜 것은 피하고, 편하고 좋은 삶을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편하고 좋게 살 팔자가 아니고 나처럼 팔 벌리고 십자가에 죽어야 할 팔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를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찾아와서 너는 앞으로 죽는다고 하니 싫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이 시대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예수를 믿는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듣고 배워왔어요.
그럼에도 실상에는 고난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복음대로 살다보면 당연히 고난을 당하는데도 우리는 막상 고난을 당하게 되면 이건 아니지 라고 원망을 하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따로 구분하고 있어요.
이원론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처럼 시험에 드는 이유는 성경이 증거하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같은 운명으로 살아간다는 말인데도,
우리는 그와 반대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와 같은 편이라 생각하고 예수와 같은 길을 가게 하는데도 우리는 예수와 다른 길을 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믿음이란? 믿는 자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잘 보세요.
자녀란 유업을 이를 후사란 말입니다.
자녀가 얻을 유업이 뭔가요?
천국이에요.
그런데 그 천국이 어떻게 주어진다고 합니까?
즉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합니까?
고난으로 와 있다고 하지요.
여기서 고난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버림당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버림당하는 것이 곧 고난인 것입니다.
왜? 버림당합니까?
이는 예수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이 세상에서 안주하고 복락을 누리고자 합니다.
이는 모두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두지 않고 자기 식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경의 예언에 귀를 기울여야 실족하지를 않아요.
요한복음 16장과 15장을 봅시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 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른다는 말은 실족할 수 있는 환경에 넘겨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 때문에 욕을 먹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닥치는 것은 모두가 예수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로 묶어서 대하세요.
마치 어미가 아이를 포대기로 띠를 매고 업듯이 말이에요.
엄마의 등에 업힌 아이는 엄마가 가는 곳에 함께 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결론을 도망을 간 제자들을 예수님이 기어코 찾아 가서 조반을 해 먹이고 내가 이제 너희들을 나와 한 몸으로 묶어버린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한마디로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보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더라도 당황하거나 시험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수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니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 되게 띠로 묶어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이므로 예수님의 운명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성도에게도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이렇게 예수님과 한 몸으로 띠를 띠고 묶이게 된다는 것을 결론으로 맺는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에요.
결국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것에서도 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한 몸으로 띠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세드엔딩”이 아니고 “해피엔딩”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기억하시고 사단의 참소를 이겨내시고 또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하면서 사세요.
그리하여 하루 하루가 주의 은혜 가운데 감사함으로 살아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요한복음을 강해해 오면서 우리의 죄인 됨과 그럼에도 이러한 죄인을 끝까지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는 그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풍성한 그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더 많이 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첫 사랑을 회복케 하시고 구원에 즐거움을 회복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 하루를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동행케 하옵소서. 혹여 그동안 요한복음을 강해해 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거나 예수님의 피를 훼손하는 것으로 잘못 증거 된 것이 있거들랑 다 잊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만 오롯이 마음 속에서 달음질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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