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temology
(요한복음 5장으로 보는 기독교 인식론)
(김성수 목사)
(요 5:31-47)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 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오늘은 이 5장 마지막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기독교의 인식론에 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기독교를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난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우리 주님께서 하실 더 큰 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루실 더 큰 일은 21절과 22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심판과 생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더 큰 일은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의미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선한 일이 나타나게 되는 데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그 선한 일은 구원을 얻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길에 그들 속에 나타나는 열매들이며 그러한 열매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는 복음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고, 바로 그 복음의 삶과 복음의 전파가 성도의 삶 속에서 구원과 심판의 더 큰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신 사건은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인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선물로 영생을 선물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안식 일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고 그 일을 행하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다 증거물을 제출하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왜 지정하셨는지조차 모르고 안식일 운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마치시는 새 창조의 완성을 성경은 참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안식과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안식인 새 창조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마치실 것이며 그 안식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그 안식일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안식일에 참 된 안식의 완성을 위해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을 완성하고 계신 주님께 안식일을 어겼다는 죄목을 붙여 죽이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구약의 안식일과 그 안식일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희 년, 그리고 유대인들의 절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공부를 하고 넘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야 말로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출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십계명의 제 사 계명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문학 양식에서 중요한 어떤 것들을 나열할 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들은 활자의 양을 많이 할애를 해서 썼다고 했지요?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에 관한 계명에 아주 특별히 촉각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출애굽기에 창세기의 단어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창세기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신 말씀입니다.
(창 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렇게 어떠한 날, 시간에다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시간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제가 굳이 확인을 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셨음을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 31:14-15)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율법이 있지만 그렇게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이 처형이 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이 상징하고 있는 어떠한 것이 범해질 때 그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패역 한 일을 할 때마다 ‘너희가 안식일을 어겼다’라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행위의 대명사로 유독 안식일을 강조해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겔 20:10-13)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로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그 안식일이 확대된 것이 안식년제도입니다.
(레 25:2-5)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4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5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일과 안식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년을 어겨도 이스라엘은 혼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 이유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500여 년 동안 그들이 지키지 않은 안식년 70번을 한꺼번에 지키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포로로 보내신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게 되면 땅이 저절로 안식을 하게 되니까요.
(대하 36:20-21)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안식년을 지키는 것에 관해 지나치다 생각될 만큼 집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과 안식년의 개념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희년 제도입니다. 이 희년 제도를 살펴보면 안식일과 안식년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레 25:8-12)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 갈지며 11 그 오십 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희년은 모든 빚이 다 탕감이 되고 생활이 어려워 땅을 판자들은 다 되돌려 받게 되는 해입니다. 이스라엘은 토지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땅을 팔았을 때는 중간에 돈이 마련되면 다시 찾아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 땅을 찾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것을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빚을 진 사람이 자기가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 누군가 나서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고 누구도 그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희년을 주심으로 모든 빚을 탕감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년을 설명하는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레위기 25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레 25:26)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희년이 되기 전에 누군가가 대신 토지를 무르는 제도를 고엘 제도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고엘에 의해 토지를 무른다 할 때 ‘무르다’가 ‘가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구속’ 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redeem’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희년은 하나님의 ‘구속’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 되지요? 희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구속의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희년이 되기 전에 희년의 효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다른 말로 구속의 이야기를 힌트하고 있는 고엘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가알’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욥 19:25)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여기서 구속자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바로 ‘무르다’ ‘가알’입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대속 되는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과 안식년도 역시 구속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도였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주님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당신께서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 4:16-21)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 61:1-3)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이렇게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가 대속이 되어 온전한 안식이 오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도 역시 안식일의 내용이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까도 읽어보았지만 창세기 2장으로 다시 가서 최초의 안식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우리에게 설명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창 2:1-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별한 그 날에다가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놓으셨다고 성경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이렇게 안식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하고 오랜 역사 동안에 안식이라는 것이 등장하지 않다가 출애굽기 20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아까 읽어보았던 출애굽기 20장의 제 사 계명이 바로 그 것입니다. 다시 가보겠습니다.
(출 20:10-11)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를 창조기사로 대십니다. ‘내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칠 일째 쉬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 아무 일도 하지 마라’ 그리고 딱 40년 후 신명기에서 다시 안식일을 명하시는데 신명기에서는 그들이 ‘애굽 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 5:12-15) “1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안식을 취하셨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은 같은 내용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될 이제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새 창조와 그 새 창조의 완성으로 오게 될 진짜 참 안식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 또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참된 안식의 땅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공히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복’ ‘바라크’가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진짜 안식 즉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복입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그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 중의 어떤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 거룩한 시간에 복을 부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거룩‘’카다쉬’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처음 거룩(카다쉬)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거룩’은 공간과 물질세계에 처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처음으로 쓰였습니다. ‘거룩한 시간’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력, 즉 복이 회복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원은 시간이 아닙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가진 단어들로 설명을 하려니까 시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천국은 장소 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기에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주지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출 31:16-17)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할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그 언약의 표징이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안식일도 바로 그 언약의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될 진짜 참 안식과 영생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찾아 읽었던 골로새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성을 쌓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그러한 나라가 아닙니다. 참 안식이 이루어진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영원한 생명력, ‘복‘을 받아 행복을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온전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자기를 위해 일을 하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 4:3)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의 일을 쉰다고 합니다.
(히 4:10)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여기서의 자기 일이 뭡니까?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 복이 회복되어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선한 일이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안식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너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4:11)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 너희 삶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나타나지 않거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절대 함부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다면 내 안에 선한 일이 시작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셔야 합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안식일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도 몰랐고 그 분이 하신 일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하는 세 가지 증거를 대 주십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무지했으면 주님께서 증거까지 대 주셔야 합니까? 그 첫 번째가 세례 요한의 증거이고 두 번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그리고 세 번째 증거가 하나님의 증거인 성경 말씀입니다. 스스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시지 않으시고 다른 증인과 증거물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세 가지 증거를 대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법정에서 어떤 사실을 확증하려면 율법에 의해서 반드시 증인을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을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 19:15) “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오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주님은 그러한 유대 율법의 절차를 그대로 따라 세 가지 증거를 대신 것입니다.
(요 5:33)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였느니라”
먼저 주님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첫 번째 증거로 내 놓으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님 앞에 보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죽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요 1:6) “6 하나님께 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증거 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 3:28)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마 11:10) “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주님은 지금 세례 요한이야말로 주님의 하나님 되심 메시아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시비를 거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 자신의 ‘역사‘입니다.
(요 5:36)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여기서 ‘역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르곤’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본 단어지요? ‘착한 일‘’선한 일‘이 ’에르곤 아가똔‘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고 계시고 완성하실 그 ’역사’에르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지실 십자가의 사건과 그 십자가의 사건을 예표 하는 주님의 이적들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이적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그 것들을 증거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통해 주님만이 혼인 잔치를 잔치답게 만드실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을 통해서 주님만이 죄를 이기시고 죄의 증상인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영적으로 불능자인 죄인들을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죄인들을 건져내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우리가 다음 시간에 공부할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죄인들의 -이 세상의 제한된 자원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데서 오는- 곤고함과 결핍을 해결하시고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하늘의 떡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표적을 통해서는 자연 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고, 소경으로 난 자가 보게 되는 이적을 통해서는 영적 소경인 죄인들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실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이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영생의 원천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적의 내용을 하나로 농축시켜 골고다 언덕 위에 박아버린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이적 중의 이적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죄인들과 연합하시고 그 죄인들의 죄를 몽땅 짊어지시고 저주받아 죽으심으로 그 죄인들의 죄가 전부 사해지는 초유의 기적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결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비로소 잔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모든 질병과 죽음의 증상들이 사라진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된 것이고, 영적 소경인 자들이 눈을 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고, 세상 속에서 곤고함과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던 죄인들이 이 시간 속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게 되었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주님이 증거로 제시하신 ‘역사’ ‘에르곤’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바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확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제시하신 증거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 즉 성경입니다.
(요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약 성경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그 저자는 자신에 대해서만 기록을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후 1:20-21)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21절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라는 어구에 쓰인 ’감동하심을 입다‘’훼로메노이‘라는 단어는 원래 ’인도하심을 받다‘’이끌림을 받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구절을 몇 개 찾아보면 그 단어의 진의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행 27:14-15,17)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7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여기서는 ‘훼로메노이’가 ‘쫓겨 가다가‘라고 번역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배가 바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바람이 움직이는 대로 흘러갔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말하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성경을 성경의 기자들이 자신들이 속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전망을 가지고 기록을 하긴 했지만 그 성경 기록의 주도권은 사실 성령 하나님께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다’ ‘훼로메노이’라는 단어가 가진 참 뜻인 것입니다. 폭풍 속의 배가 자력 항해를 포기하고 바람에 의해 이리 저리 이끌려 다니듯이 성경의 기자들도 성령에 이끌려 성령하나님께서 기록하라는 것만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그 분의 정체에 대해 기록해 놓으신 것이 구약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핑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상징하는 일이 주님에 의해 벌어졌는데도 그들은 그 일로 인해 주님을 송사를 한 것입니다. 본문 37절로 가보겠습니다.
(요 5:37)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을 증거 하셨음에도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고 그 분을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하늘을 난다든지 불 말과 불 병거로 무장한 천사들을 부르시든지 해서 그들에게 이해시키실 수는 없었을까요? 왜 그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성경과 주님의 일과 그들이 잡아 죽인 세례 요한을 증거로 제시하십니까?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5:31) “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 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증명하는 기적대신 당신이 하실 일을 예표 하는 일과 당신이 하실 일, 즉 십자가를 지시는 일만을 하고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만 발생되고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이적 외에 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이적들은 전혀 일으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들이 전혀 하나님 나라의 전파나 완성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와의 대면에서도 주님은 전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 8:12-14)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 하느니라”
여기서는 보시다시피 주님께서 오늘 본문 31절과 전혀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5장 31절 말씀을 들어서 반박을 합니다. 주님이 그들의 반박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보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나를 증거 하는 것은 참된 증거가 되지 못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러 왔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하신 말씀이고, 8장 14절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해 증거 해도 내 증거는 참되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15절 16절을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요 8:15-16)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님께서 ‘내가 나에 대해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그 존재와 뜻에 있어서 하나이시고, 지금 주님은 그 하나님과의 통일성 안에서 자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증거가 ‘참되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8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와 뜻이 존재와 뜻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증거 하신 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한 번도 스스로의 힘을 발휘하거나 스스로의 언변으로 자신을 증거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주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그 분이 하신 일이 전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나타내는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구약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에게도 그 세 가지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그들은 그 것들을 전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세 가지 증거가 다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요한복음 5장 24절 25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대조하여 등장하는 일련의 무리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요 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렇게 모두 소경인 암담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24절의 ‘듣고‘’아쿠온‘과 ’믿는‘’피스튜온‘은 병행 구로서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표현을 해 놓은 어구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과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 주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이신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송사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빗대어 교회의 출현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그렇게 전혀 알아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자들 속에 있던 저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눅 24:25-27,31-32)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께서 엠마오 마을로 낙심하여 내려가고 있는 글로바와 마리아에게 성경에 기록된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셨더니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31절의 ‘밝아져‘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노이고‘는 ’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해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 똑같은 단어가 32절의 ‘성경을 풀어 주실 때’라는 어구의 ‘풀어 주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44절에 또 똑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눅 24:44-47)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여기도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자 그들이 주님의 사역과 성경의 내용을 그때서야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고 마음이 열려 성경이 이해가 가려면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누가 복음 24장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 3:23)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여기도 보시면 믿음을 마치 인격체처럼 ‘믿음이 외부로부터 온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지요? 이렇게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오늘 본문의 내용을 비교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의 증거요, 다른 하나는 주님의 역사요, 다른 하나는 성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증거를 대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왜 이러한 명백한 증거를 못 알아먹느냐‘는 책망이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주님께서 그렇게 전부가 소경인 가운데에서 일련의 무리들의 눈을 열고, 성경에 대한 이해를 열어서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주님께서 만들어 내실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아울러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도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44절을 보세요.
(요 5:44)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끼리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들이 피조물로서의 사람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소 요리 문답 1번 질문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입니다. 답이 뭡니까?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삶이 그렇게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요 12:28)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이렇게 주님은 그 분의 삶으로 또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가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죄인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다른 말로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 것들로 예수를 믿는 유익을 얻고 싶어 합니다. 예수를 믿어 내가 남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고, 예수를 믿어 내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예수를 믿는 가짜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 믿음의 증거를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의 영역 안에서 찾으려 합니다. 내 삶에 어떠한 유익한 결과가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이나 삶의 질이 개선되기를 원합니다. 혹은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고 없고‘를 측정합니다. 혹은 방언이라든지 예언 같은 은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믿음의 척도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든 예수를 잘 믿으면 이 세상 인간의 영역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들로 증명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건 다 틀린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은밀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유무는 이 역사 속의 어떤 것들이나 인간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로 증명되어지거나 지탱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병을 고칠 수도 있고, 방언을 할 수 도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을 확실하게 소유한 사람이 그러한 외적인 은사를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기죄로 감옥에 가 있는 저의 고등학교 동창은 중학교 삼 학년 때부터 방언과 예언과 신유의 은사를 받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 졌을 때 술자리에서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자기가 이제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회나 기도원을 시작해서 사람들 병이나 고쳐주며 돈을 다시 긁어모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결국 이 사람 저 사람 등치다가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은사의 유무는 일관성이 없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눈에 보이는 이 인간 영역 안의 어떤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그 것은 정치적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 줄 메시아를 기다렸던 바리새인들의 민속 메시아사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주님께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빵 점짜리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 선택된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이 땅의 것들로 보상해 주세요, 그게 물질이든 신령한 은사든 상관없으니 이 땅의 것들로 나의 믿음 있음을 증명하게 해 주세요‘ 그게 민속 메시아사상이지 뭡니까?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로만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요 15:8)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여러분의 영광을 도모하고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여러분의 영광을 구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절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요 5:42)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지금 주님을 범법자로 몰고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져야 하는 참 열매들이 아닌, 자신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인간 영역 안에서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며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종교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자랑과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이 잘 지키고 있다는 모세의 율법이 그들을 고소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5:45-47)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가 기록한 성경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모두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 9:28-29)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라 자처해 왔고 그 하나님께서 그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는 모세의 글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모세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모세는 너희를 율법으로 고소하고 있음에도 너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하는구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잘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라고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하나님의 요구를 절대 충족시킬 수 없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를 갈망해야 한다. ‘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주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갈 3:10-11)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누구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약 2:10)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 속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 오경 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필연성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말씀 속에서 자신들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메시아 도래의 필연성을 깨닫기는커녕 자기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이루어낼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게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전혀 불가능한 38년 된 병자와 같은 죄인들을 구하러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5장 27절을 보면 그와 정 반대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요 5:27)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여기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이 어구를 헬라어로 보면 ’호티 휘오스 안트로푸 에스틴‘입니다. 그 말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27절의 말씀은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 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기 인자 앞에는 정관사도 없습니다. 정관사가 있으면 메시아를 가리키는 다니엘서의 ‘그 인자’라고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텐데 관사까지 없어서 이 구절의 해석에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님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판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주님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면 주님은 심판하실 권세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고등 종교들은 둘로 갈라집니다. 이슬람교와 같은 이신론과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범신론으로 갈라집니다. 이신론은 초월적 신을 인정은 하지만 그 초월적 신이 이 세상에 전혀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신론으로 하고 있습니다. 범신론은 모든 만물 안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는 신론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범신론에서는 초월적 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처한 상태는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공급이 되는 풍성한 생명력이 차단이 되어 이 땅에 갇혀 버린 상태입니다. 따라서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그 생명력의 공급이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절대 인간이 당면한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초월적인 존재이신 신이 인간들이 갇혀있는 땅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월적인 신은 인간들이 눈으로 귀로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초월적 신은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모습과 신분으로 이 땅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러오는 구세주는 온전히 초월적인 신이심과 동시에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신론과 범신론으로는 절대 이 땅에 갇혀버린 인간들의 구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구세주는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셔야만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범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초월과는 상관없는 이 땅에 갇혀버린 신들은 인간의 구원에 전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이 땅과 전혀 상관없는 초월적 신도 이 땅에 갇혀 있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세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 ‘누구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은 부자지간이라는 의미보다는 ’그 사람의 특성을 공유한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우레와 같은 성질을 소유한 자’를 ‘우레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도 당신은 온전한 사람이셨음을 밝히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다니엘서의 메시아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 것입니다. 인자는 다니엘서의 그 메시아 인자를 가리킴과 동시에 참 사람이신 사람의 아들 예수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내야 하고,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율법을 다 수행해 내야 하기에 그 분은 사람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그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하기에 그 분은 그러한 자격이 있는 하나님이셔야만 한 것입니다. 그 것을 신학에서는 ‘내포적 대신’ ‘inclusive representative'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가 되심으로 심판을 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기독교 인식론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이렇게 끝냈습니다. 잘 이해 하셨습니까? 잘 이해하셨다면 모쪼록 여러분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엉터리 신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비우는 참 신자의 삶을 잘 경주하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상받으려 하지 마세요. 그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인간 영역 속의 것들로 주눅 들지도 마시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나에게 잠시 허락하신 역할이 이런 것이라는 올바른 인식을 하시고 열심히 현재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내는 삶을 잘 살아내시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십 수 년 만에 아내와 함께 발레를 보러 갔었습니다. 저는 무용 감상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현대 무용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무용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어제 본 발레의 제목이 'the sleeping beauty'였습니다. 거기에 보면 제 1 막이 40분 정도 되는데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40분 내내 서 있는 무용수가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american ballet theater에 오디션을 보고 입단한 무용수라면 대 부분 세계적인 무용수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병사1, 병사2, 하인1, 하인2 이면 그들은 그 발레 공연에서 절대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의 일가친척이 와서 보고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춤을 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그 정해진 자리에서 이탈을 하여 춤사위를 넣는 순간 그 발레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서 있으라면 서있으세요. 하나님이 기라고 하면 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잘 살아내야, 우리가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이 구속의 드라마가 아름답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여러분이 처한 상황 속에서 많이 사랑하고, 많이 인내하고, 많이 용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열심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그 삶을 잘 살아 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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