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그리고 기도
(김성수 목사)
(엡 6:13-24) “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3)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사 11:5; 59:17) 15 4)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사 52:7; 나 1:15) 16 5)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어떤 경우에든지') 17 그리고 6)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사 59:17) 18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19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7)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복음의'가 없음) 20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21 사랑하는 형제이며 주님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내가 지내는 형편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그밖에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알릴 것입니다. 22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또,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고, 나는 그를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8)성도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그, '형제들에게')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9)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절 끝에 '아멘'이 있음)”
우리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믿음의 방패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주어진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 했지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믿음을 선물해 주시지만 성령이 우리 대신 믿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온전한 믿음을 연약한 이 육신과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발휘하여 악마의 화전을 즉시, 즉시 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벧전 1:21-25)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참 믿음을 거스르며 악마가 거짓으로 던지는 것이 바로 기적이나 신비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악마는 눈에 보이는 성취감이나 만족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기쁨을 대체시켜서 성도들이 진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입각해서 설명을 해 주어도 그렇게 한 번 길을 잘 못 들어선 사람들은 좀처럼 바뀌지가 않습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라는 책을 보면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고 있던 것과 사실이 충돌을 일으킬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자신의 믿음에 꿰어 맞춘다는 이론입니다. 원래 미국의 ‘레온 파이닝거’ 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만들어 진 이론인데 그 이론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예전에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12월21일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 재산, 직장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날이 닥쳤는데도 휴거가 안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그들이 몹시 부끄러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소리치기를 ‘자기들이 열심히 세상에 빛을 퍼뜨린 덕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들에게 기회를 더 주셨다’고 자신들의 믿음을 합리화 시켰습니다. 그 것을 보고 레온 파이닝거가 ‘인지 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왜 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박사가 사기꾼임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 ‘황우석 살리기’를 외치는 지 아십니까? 인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합리화시키려는 악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자신들이 잘 못 믿었다고 고백을 하는 대신에 자신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주력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들은 다릅니다. 올바른 믿음으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이렇게 신비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많이 돌아서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만을 오히려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지난번에 강수자 전도사님께서 저에게 ‘목사님처럼 강하게 복음만 설교하는 데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적입니다. ‘오직 믿음‘’오직 성경‘은 사람들에게 별로 매력적인 구호가 못 되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열심을 내어 그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오늘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그리고 사도가 그 모든 전신 갑주 위에 얹어 놓고 있는 기도에 관해 공부를 하고 에베소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많은 혼란의 시간을 맞게 됩니다.
‘이게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맞나?’ ‘왜 예수를 믿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예수를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일까?’ 이러한 많은 질문들이 때때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혼란스러운 머리, 혼란스러운 생각을 보호하는 것’ 그런데 그냥 ‘구원의 투구’ 그러면 사실 막연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어떻게 쓰라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다른 서신 서에서도 구원의 투구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을 찾아보면 그 의미가 조금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살전 5:5-8)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서는 ‘구원의 투구’에 뭐가 하나가 더 붙지요? 뭡니까?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투구는 소망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염두에 두시고 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내용에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집어넣었는지 차근차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도가 예수를 믿고 난 뒤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애초에 손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유사시에는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육신은 소유한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면 누구나 지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혼란이 찾아오지요. ’이게 정말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 맞나? 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이런 것 하나도 막아주지 못하실 까? 이런 기독교가 정말 나에게 영생을 허락해 주기는 하는 걸까? 그리고 왜 나만 이렇게 져 주고 섬겨 주고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 온 내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이런 의심과 혼란이 성도를 괴롭힙니다. 그러한 혼란 끝에 어떤 사람들은 다시 방종한 삶을 살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 자체를 부인하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라고 단언해서 말을 하지요.
그러나 성도들도 종종 오랜 인내 끝에 의심이나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척 알아보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도 보았던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당신이 메시아가 맞다 면 왜 내가 이렇게 여전히 감옥 속에 갇혀있는 것입니까?’하고 항변한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고난의 강도가 너무 깊어지고 그 기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 누구나 다 인내심의 한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마귀가 성도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초대 교회에서 실제로 그러한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이 여러 곳 등장합니다.
(벧후 3:3-4)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 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 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곧 다시 오마 하고 가셨던 예수님이 그들의 생전에 꼭 오실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10년이 갔는데도 예수님이 안 오십니다. 게다가 박해는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그 때 마귀가 기롱 하는 자들을 시켜서 미혹을 했습니다. ‘다 거짓말이야, 오긴 누가 온다고 그래, 오지도 않는 주님 기다리지 말고 네 마음대로 살아’ 구약에도 그러한 혼란을 겪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기록해 놓은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시편 73편이지요. 오랜만에 한 번 보고 갈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아삽의 시입니다.
(시 73:1-14)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어떠세요? 우리가 한 번쯤은 다 해 보았던 투정 아닙니까? 하박국도 똑같은 투정을 부렸었습니다.
(합 1:2-4,13)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이렇게 우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구원’이라는 소망스러운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었는지 한 번 볼까요?
(벧후 3:8-18)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확인시킨 후에 베드로가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는지 보세요.) 14 그러므로 (너희는 절대 좌절하거나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인내심의 한계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 그 구원의 소망을 놓지 말고 끝까지 성도다운 삶을 견지하라는 권고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환난은 어느 시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환난이라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데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죽는 날까지 죄의 오염과 싸워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끝까지 고난과 환난이 붙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싸워야 하고 ‘끝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서 우리 성도들에게 끝까지 고난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히 10:32-34)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고난의 이유가 나옵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여기 보시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뭐라고 나옵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알다’‘기노스코’라는 단어를 ‘헤아우토이스’라는 단어가 수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스스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34절 후반부를 보다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너희 스스로 앎이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고난이라는 것은 이 시간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이성 안에서 그 하늘의 소망을 ‘스스로’, 다른 말로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주관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데에 ‘고난’이라는 것이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에는 성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란함 속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굳건하게 쓴 사람들은 끝까지 견뎌내게 되는 것이고 가짜들은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의 박탈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뎌내게 되는 것이고, 보이는 것만을 소망하는 가짜들은 결국 걸러지게 되는 것이지요.
(히 6:10-12)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3:6)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마 24:12-13)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계 2:25-26)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우리 성도의 삶은 이렇게 끝까지 전투인 것입니다. 10년 20년 해서 끝나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위해 생의 끝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긴 전쟁을 끝내고 나면 우리에게 멋진 소망의 나라가 주어지기에 그 소망을 바라보며 참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인 것입니다.
(고전 1:8)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보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는 그러한 훈련의 사건들이 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죽는 날까지 그 전쟁을 하다가 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은 단순히 복음의 전파를 위해 안 당해도 될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후 4:7-9)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이렇게 늘 우겨 싸임과 답답한 일 당함과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확실하게 쓰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4:13-18)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새 몸을 입고 서게 될 그 소망의 때를 확실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고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 15:31-34)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죽으면 끝이니까 살아 있을 때 즐기면서 살자)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마귀는 우리의 혼란을 타고 들어와서 우리의 행실을 더럽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하박국의 혼란은 어떻게 결론이 났지요?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시편 73편의 기자인 아삽은 어떻게 그 혼란스러움을 해결하는지 볼까요.
(시 73:17-28)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마귀가 혼란스러움과 의심으로 공격을 해 올 때 하늘로 눈을 돌려 구원의 소망을 굳게 잡아 그 상황들을 이겨내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많이 힘드신 분들이 계실 줄로 압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그 상황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늘의 소망으로 눈을 돌리세요. 물론 힘이 든다는 거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순종해야지요. 절대 왜 나만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투정부리지 마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기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딤후 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 문장에 ‘판타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모두’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끌려가게 되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여러 모양의 ‘핍박’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확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가 처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소망을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러한 상황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이모저모로 스트레스를 풀어 보려 애를 썼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면 풀릴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도 그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우리 성도들이 겪어내야 하는 것이고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의 빛이 더욱 더 찬란하게 비치게 될 것임을 잊지 마시고 잘 견뎌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어떤 사람은 나보다 고난을 덜 받고 있는 것 같고 나만 극심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모두 다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설사 남이 나보다 고난을 덜 받고 수월하게 간다고 하더라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결국 목적지는 한 곳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전에는 네가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고 남이 너에게 띠를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요?’ 그랬지요? 그 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나 잘해, 남이 어떤 길을 가든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그러십니다. 맞습니다.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너무 불행해,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해’하시지 말고 그냥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겠거니‘하면서 묵묵히 인해하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적당한 인생을 허락하시는 것이니까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가 이 에베소서의 전신 갑주 부분을 주해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단의 공격이 얼마나 거세며 지속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사단은 일방적으로 성도를 두들겨 패고 있으며 성도는 전신 갑주를 입고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오래 참음이 필요한 것이다’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사단은 쉬지 않고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공격 무기인 ‘성령의 검’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시면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성도를 거짓과 위장으로, 속임수로 공격을 합니다.
(요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한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속임수를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14절의 ‘진리의 허리띠’와 오늘 본문의 ‘성령의 검’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진리의 허리띠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오늘 본문에 쓰인 ‘말씀’이라는 단어는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입니다. 사실 로고스라는 단어와 레마라는 단어는 큰 차이가 없는 단어입니다. 굳이 그 차이를 따지자면 ‘로고스’는 ‘전체’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고 ‘레마’는 ‘부분’의 의미가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는 ‘전체로서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령의 검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단이 예수님을 미혹하는 장면에서 사단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들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응수를 하신 것이 바로 ‘레마’인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바로 말씀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4:3-10)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으로 ‘기록되었으되’라고 응수를 하시니까 결국 마귀가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말씀의 진의를 왜곡해서 예수님을 속이고 격동시키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때마다 정확한 말씀으로 응수를 하시며 흔들림 없는 순종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마귀의 유혹이나 공격이 왔을 때 여러분이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로 인용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요 10:31-36)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악한 자들의 공격을 말씀으로 다 받아 내시자 악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을 힘으로 때려잡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예전에 마이크 타이슨이 경기 도중에 도저히 힘으로 안 되니까 상대방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지요? 그래서 판정패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속임수로 밀고 들어오는 마귀에 대항해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언제든지 꺼내어 응수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딤후 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배우고 확신한 그 말씀 안에 거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전 2:12)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성령을 받은 자들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하고 주의해서 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벧후 1:19-21)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전 1:10-11)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렇게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하여 올바른 진리를 소유하고 참 된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게 되면 마귀는 그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지식으로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마귀에게 당하지요.
(행 19:12-16)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저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와서 참지를 못하겠어요.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연극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여전히 마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제가 자주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나는 정말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를 점검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대할 때에도 그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도록 늘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조명을 간구 하면서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또 너무 성령께 치우치게 되면 퀘이커 교도들처럼 이상한 쪽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우회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같은 사람은 영국의 훌륭한 개혁자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기록된 말씀을 무시하고 내적인 빛, 성령의 조명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바람에 나중에는 온통 성령으로부터 오는 즉각적인 영감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주 이상한 쪽으로 빠져들었지요. 그러니까 올바른 균형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시 119:97-100)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98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100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령의 검, 말씀이 어떤 힘이 있는지 보세요.
(시 119:101-105)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렇게 말씀 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에 있어서도 주의를 하게 됩니다.
(벧전 4:11)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골 3:16)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의 말은 치명적인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히 담기 전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증명하도록 본능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입만 열면 자기변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높이기 위해 남을 욕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 속에 풍성히 담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말이 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나올 수 있도록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말 많이 하는 사람들 보세요. 참 실수 많이 하지요?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꽃아 놓고도 자기가 몰라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담길 때까지 말을 조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성도들이 입어야 하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해 자세해 설명한 후에 그 전신 갑주 위에 ‘기도’를 얹어 놓고 있습니다. William Gurnall의 책 중에 ‘완전 무장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을 주석 해 놓은 책입니다. 거널은 이 9 구절의 내용을 무려 1,200 페이지에 걸쳐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그 중에 기도에 관한 부분이 300페이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칼빈도 말했습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이다’ 여러분, 기도는 연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가 그 누구도 비교할 자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 바울이 본문 18절 한 절에 ‘파스’‘모두’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엡 6:18) “18 모든 기도 (파세스 프로슈케스)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판티 카이로)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파세 프로스 카르테레세이) 힘쓰며 여러 성도 (판톤 톤 하기온)를 위하여 구하고”
여기서 ‘모든 기도‘라는 것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는 강조용법입니다. 그리고 무시로 (판티 카이로)라는 것은 (all occasions)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 모든 경우에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파세 프로스 카르테레세이)은 (always)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기도’라는 것은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성도(판톤 톤 하기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모든 성도’(all saints)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지요? 그 말은 ‘기도’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천국 형제자매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 강조를 하면서 19절에서 예를 들어줍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엡 6:19-20)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천국을 직접 보았던 사람이고 논리 정연한 복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만들었던 사람이고 그가 쓰던 손수건만 가져다 얹어도 앉은뱅이가 벌떡 벌떡 일어났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도 바울도 자기가 가르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살아 갈 힘은 오직 주께 드리는 기도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질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삶인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면 그 것을 아는 분께 물어보면서 가야지요.
여러분, 혹시 모르는 길을 가게 되었을 때 어떻게 가십니까?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서 가시지 않습니까? 어떤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열심만 부리면 베드로처럼 ‘사단’이라는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로 우리 신자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확인하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신자의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 ‘거룩’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면 어떻게 되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만을 붙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는 바로 ‘기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리와 지식’으로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건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 못 된 것입니다. 교리와 성경지식은 반드시 ‘기도’로 결론이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와 지식’이 기도를 우습게 여기게 만들고 있다면 그 것은 결코 올바른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도는 하나님을 자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전투입니다. 이 점을 늘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항상 무장을 하시고 늘 기도로 간구하며 치열하고 진지하게 그 전쟁을 치러 나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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