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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믿음의 방패(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25.

 

 

믿음의 방패(I)

 

(김성수 목사)

 

 

(엡 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믿음의 방패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저희가 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는 잘 확인하고 계신 거죠? 우리에게는 대적들이 있고 하나님은 그 대적들의 공격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행한 후에‘라고 번역이 된 ’카텔가조마이‘는 ’완수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분명 무언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성도가 완수하고 성취해야 할 그 것을 잘 완성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13절에 ’서기 위함이라’에서 ‘서다’라는 단어는 ‘히스테미’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붙잡다, 고정하다, 이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구원이라는 선물을 이 시간으로 제한 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이성과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며 맛보며,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기 위해, 다른 말로 꼭 붙들고 고정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마귀의 공격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소에서 ‘모의 전투’라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을지훈련’이나 ‘화랑 훈련’ 같은 가상 전투 훈련도 합니다. 그러한 가상 전투 훈련은 병사들이 실전에서 용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가상 적군’을 부대로 투입시켜서 전술과 전략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경계를 소홀히 하거나 그 가상 적군들에게 당해서 작전 상황실에 모의 수류탄이 들어오면 그 부대는 징계를 받게 되지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훈련과 성숙을 위해 구속사 속에서 ‘가상 적군’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 전쟁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이 된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싸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고지를 점령한 승리자들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신 갑주의 내용이 방어 무기 일색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할 것이 있어서 전신갑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치르시고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승리의 전리품을 잘 지키는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히스테미’‘고정하다, 확고히 붙잡다’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마귀의 공격은 단순히 우리로 범죄 하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범죄를 하게 만들거나 의심, 타락, 절망 같은 것을 불어넣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며 불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선물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데에 최종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마귀를 잘 이기고 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실제로 죄로부터 자유 함을 누리고 거룩한 생명을 잘 누리고 있는 상태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면 그 전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전히 범죄하고 다투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절망하는 삶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에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그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계신 분이신 지, 아니면 ‘전신 갑주‘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계신 분이신 지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구원‘이라는 것을 믿으며 누리며 경험해 나가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냥 무턱대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난 멍청하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싸움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의 이런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퍼부으셔서 애굽에게 항복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어서 이 애굽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소리를 듣고 ‘이왕 할 거면 끝까지 다 해주세요. 난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까 하나님이 날 들어서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집어넣어 주세요.’ 이게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지요? 요단강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건너라고 하시니 건너겠습니다.’하고 건너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다 갈라서 마른땅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주시기 전까지 전 절대 못 움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어떻게 결론을 맺으실 것을 알기에 난 그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실행에 옮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옮기실 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원망하고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광야에서 다 죽여 버리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려고 할 때 인간이 반응을 안 하면 그 구원은 취소시키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손발을 움직이게 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은 그러한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을 다중 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전혀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의 빛을 비추시고 좋은 것을 좋은 줄로 알도록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복됨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동의와 간절한 열망과 주관적 의미의 믿음을 만들어 내시는 ‘설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복음의 빛에 비추임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손발을 움직여서 그들의 인생 동안에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네 번째 장비인 믿음의 방패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찬이 겸손의 골짜기를 지날 때 무저갱의 사자 아볼리온이 다가오지요. 그 때 크리스찬이 겁을 먹고 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아차 내 가슴에는 흉배가 있고 내 손에는 방패도 있지만 내 등에는 갑옷이 없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크리스찬은 아볼루온과 맞서기로 했습니다. 아볼루온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나는 멸망의 성에서 살다가 그 성을 떠나 지금은 시온 성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볼루온이 ‘그럼 넌 내 밑에 있던 놈 아니냐? 다시 내게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너를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 때 크리스찬이 ‘난 이미 참된 왕에게 나를 바쳤기 때문에 너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볼루온이 크리스찬에게 불화살을 쏟아 붓지요. 크리스찬이 방패를 들어서 다 막아냅니다. 존 번연이 바로 이 에베소서 6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 장면을 쓴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믿음의 방패‘라는 구절 앞에 ’모든 것 위에‘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나 의의 흉배나 평안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썼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나머지 모든 것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는 방패는 아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이 살던 시대의 로마 군인의 방패는 ‘스쿠툼‘이라 불렀는데 가로가 0.7미터 세로가 1.2미터였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덩치의 군인은 조금만 숙이면 그 방패 안에 자기 몸을 다 감출 수 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나무판에다가 가죽을 붙이고 앞면은 철판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그 방패는 각개 전투를 할 때는 너무 커서 들고 싸우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어떨 때 주로 썼느냐 하면 불화살이나 불창이 날아 올 때 그 걸 막는 것이 ‘스쿠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의 방패’를 언급하면서 ‘악한자의 화전을 막기 위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화전’이 바로 불화살입니다.

 

전쟁에서 ‘화전’은 주로 먼 거리에서 본격적인 공격에 앞서 공격의 길을 닦는 목적으로 쏘는 불화살이나 불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로 막아야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향해 툭툭 던져 보는 그러한 공격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소, 의심, 악한 생각, 잡념, 불순종, 배반의 마음, 탐욕과 악의,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 원치 않는 것인데 가끔 불쑥 불쑥 우리 마음에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있지요? 바로 그게 마귀가 던지는 화전들입니다.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마귀가 그러한 화전으로 파상 공격을 해 올 때 믿음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지요.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내가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뭘 어떻게 하라는 명령일까요? ‘믿음의 방패’를 들라는 명령은 믿음을 만들어서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 안에 부어 넣으신 ‘믿음’을 행사하라, 발휘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에 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라‘고 하지요. 거기서 ’소멸하다‘’스벤뉘미‘라는 단어는 ’즉시 꺼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화전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는 하루 이틀 그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미 마귀의 의도대로 헛되이 분노하고 헛되이 범죄하고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좋지 않은 생각이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별 의심 없이 그저 자기 생각이려니 하면서 그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곰곰이 되 씹습니다. 한참 그런 생각에 몰두해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은 공연히 분노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좌절과 낙망에 빠지거나 또는 더러운 생각을 깊이 받아들여 더러운 행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골 3:10) “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지식까지도 새롭게 창조해 놓으셨고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오는 생각들은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연 의심과 허무함과 절망과 좌절의 생각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그 것이 ‘악한 자의 화전’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인 양 속이는 것입니다. 그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대적의 실제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악한 자‘’포네로스‘는 실존하는 인격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존하시는 인격체로 믿는다면 악의 실체에 대해서도 실존하는 인격체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지은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가사를 잘 보면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래 영어 찬송가는 ’이 땅에 마귀 가득 차’입니다. 루터가 볼 때는 이 땅에 실존하는 인격체인 마귀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또 그게 사실이고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을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거기서 ‘악’이 바로 ‘악한 자’라고 했지요? 주님께서도 마귀들이 우리 성도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기도를 다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루터는 실제로 마귀하고 밤을 새워 자기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논쟁을 주고받았는지 나중에는 진땀이 나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루터가 그 논쟁의 마지막에 마귀더러 ‘그래 난 그런 사람이야. 네가 말한 것처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거룩한 마귀야 나를 위해 기도해 주렴’ 루터의 말에 따르면 마귀는 자기를 조롱하는 말이나 비아냥대는 말을 무척 싫어 한답니다. 그건 뭐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여튼 루터는 마귀를 비아냥대면서 겨우 겨우 하루의 논쟁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귀는 실재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귀의 실존에 대해 너무 무지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에게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마귀가 어떻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흔하게 사용하는 화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집중이 잘 되십니까? 꼭 마음먹고 기도만 하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들지요? 집에 가스 불은 끄고 왔나?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우리 아이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을까?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잡생각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저는 예전에 청년 부 때 새벽 기도를 하는데 새벽기도 시간 내내 떠나지 않고 저를 괴롭히는 생각이 ‘혹시 사찰 집사님이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기도 다 끝내고 나만 남겨두고 문 잠그고 가면 어떻게 하나’ 이 생각하느라고 괜히 소리 높여 기도하고, 일부러 부스럭거리고 그러느라고 기도를 못 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저를 덮는 거지요. 결국 이렇게 기도하려면 뭐 하러 기도는 하러 나오니?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고는 새벽기도를 그만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펴면 꼭 그 때 잡생각이 들지요. 그렇게 잡생각 5분만 하다보면 피곤해서 잠이 들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성경을 펴면서 잠이 드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슨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미처 다 읽지 못하고 ‘태초에 천지를, 태초에 천지를’에서 머무르다 결국 곤히 잠이 들어 버리지요. 여러분 신문이나 잡지를 보시면서 잡생각 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 땐 너무나 정신이 또렷또렷하지요? 완전히 ‘달고 오묘한 그 잡지‘ 아닙니까? 청소년들이 성경 공부하느라고 밤은 못 새워도 포르노 사이트 서핑하면서는 3박 4일도 꼬박 새운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누구 험담하면서 잡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그럴 땐 너무나 집중이 잘되지요? 그런데 왜 꼭 기도만 하려고 하면,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잡생각이 떠나질 않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의 대적이 살아서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몽’ 같은 드라마 볼 때는 초롱초롱 밤을 새우는 데 설교 시간만 되면 잠이 오는 사람들 있지요? 그것도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이번에 시애틀에 집회를 갔을 때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 곳 LA에 계신 분들도 참 고생들 많이 하시지만 그 곳에 계신 분들은 거의 하루에 12시간에서 16시간씩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토요일을 쉬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집회에 참석하시겠다고... 그 중에 장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런데 설교시간에 조셨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저에게 ‘목사님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처음부터 졸겠다고 마음먹고 조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앞으로 끄덕 끄덕 숙여 진답니다. 그런데 졸지 않으려고 애는 쓰는데 정말 불가항력 적으로 조는 사람들은 머리가 뒤로 넘어간 대요. 그러면서 자기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거 보셨냐고 애교스러운 변명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오랫동안 끊었던 ‘중독, 집착‘ 이런 것들을 다시 저지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술을 아주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전혀 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술로써만 해결되었던 내 마음속의 공허가 이제 다른 것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옛 날에 마셨던 그 술맛과 냄새가 뇌 속에서 재생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가 말씀 준비하다가 술 생각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모습. 상상만 해도 웃기지요? 그러한 것들이 바로 사단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의 방패가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마귀는 그렇게 우리에게 화전을 던져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아 난 정말 참 신앙인이 아닌가봐. 어떻게 내게는 기도와 성경이 이렇게 멀기만 할까?’ ‘그래 내가 무슨 성경을 읽어’ 이렇게 절망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에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렇게 마귀가 기도와 성경 읽는 것을 방해 할 때 ‘아냐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 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을 폈다. 그런데 지금 실존하는 마귀가 나에게 화전을 쏘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이라도 열심히 외우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마귀가 자주 쓰는 화전이 ‘의심’과 ‘터무니없는 생각들’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찾아와서 ‘의심과 불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이나 마틴 루터 같은 훌륭한 목사님들도 자주 자기의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내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진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건가?’‘괜히 있지도 않은 하나님 믿는다고 아까운 청춘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마귀는 이런 의심과 불신을 마구 불어넣습니다. 멀쩡하게 신앙생활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의심이 들지요? 그게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이상하게 예수님에 대한 욕도 막 나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예전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예수님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절망했지요. ‘내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맞다 면 어떻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한 욕이 머릿속에서 하루 종일 맴 돌 수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정말 절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책을 읽다보면 그 훌륭한 분들이 똑같은 경험들을 다 하셨더라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화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 마귀가 자주 쏘는 화전이 상상력의 화전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광경도 그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과 욕망의 상상을 실제로 어느 정도 현실화도 시켜 줍니다. 마귀는 성도의 마음속에 갑자기 욕정을 불어넣고 그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도 넌지시 던져 줍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근거 없는 열정과 희망에 사로잡혀서 흥분을 하게 되고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게도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이런 내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냐’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마귀는 물리적인 박해를 가함으로 화전을 쏘기도 합니다. 마귀는 장기간 혹은 단기간의 국가적 박해 혹은 집단적 박해를 가해서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시도를 합니다. 역사상 기독교를 핍박했던 악한 통치자들이 다스리던 시절에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정말 그들의 믿음 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그러한 핍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고 그 화전을 이겨내었습니다.

 

(벧전 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보세요. 마귀의 공격이 ‘고난’으로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의 방패를 높이 들라는 것이지요.

 

(요일 5:4-5)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렇게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더러 믿음을 만들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 부어진 믿음을 얼마나 발휘하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부어지는 마귀의 화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들은 믿음도 없는 불신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는 절대 불신자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냥 놔둬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공격합니다.

 

(벧전 1:12)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당연히 마귀의 화전이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자만이 그 화전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믿음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한 답이 데살로니가 후서 3장에 나옵니다.

 

(살후 3:1-3) “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여기 보시면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을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부 악한 자의 화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바로 그 앞에 보시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한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뭡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발휘가 크면 클수록 마귀도 더 거센 공격으로 달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매일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내용에 관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간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는 당연히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실체’가 없는 믿음은 ‘환상이나 상상’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체인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보이지 않는 실체가 계시 화되어 어떤 존재에게 믿겨 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믿음에는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실체가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계시를 통해 그 믿음의 대상인 실체를 ’실존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신념이나 지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나 결심, 지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의 중심에 놓고 오직 ’나‘만을 믿으며 ’나‘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을 계시를 통해 사실로 알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입으로 삶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믿음의 발휘‘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표현하면 ’믿음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의 발휘를 도출해 내는 그 계시는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이 된 후에는 그 성경 말씀만으로 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라는 직분 자체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직통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벽에다가 글을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인 벨사살 왕의 잔치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벽에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쓰시지요? 그렇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 사람들을 ‘선지자’‘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예언자’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라 ‘맡길 예(預)’ 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순히 앞일을 예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 중에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있지요? ‘하나님께서 오늘은 신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신장에 문제가 있으신 분들은 거기다 손을 대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고치시겠답니다.‘ 이러는 사람들 있지요?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는 자들은 100% 가짜입니다. 그 사람들 사실은 무당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속지 마세요.

 

예전에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 어떤 무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부산에 사는 무당인데 얼마나 용한지 부자들, 정치인들이 줄을 잇는 그런 유명한 점집이었습니다. 보통 큰 굿 한 판에 5 천만 원 정도를 받고, 액땜을 하는데 2억에서 4억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사기전과 5범이었고 또 지명수배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채를 현찰로 받았습니다. 수사관들이 그 집을 들이닥쳐서 수색을 하는데 커다란 이민 가방 몇 개에 만 원 짜리 현찰이 수북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현찰이 수십억 원이 나왔습니다. 심지어 불상 안에도 만 원짜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그 사기꾼한테 4억을 뜯긴 사람이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그 사기꾼이 액땜을 하려면 굿도 굿이지만 실제로 그 액운을 가진 당사자가 영험한 신과 함께 그 액운이 다 가실 때까지 그 신에게 봉사하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공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매한 사람이 그 무당에게 매를 맞으면서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찍 소리 못하고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 액운만 나가면 난 행복해 질 거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고 몇 년째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액 땜, 자기의 행복, 자기의 출세‘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앞일에 대한 예언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것을 주겠다고 하는 자에게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람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상대방의 말에 꼼짝을 못하지요. 무당들이 점치러 오거나 굿하러 온 사람에게 존대 말 하는 거 보셨어요? 전부 반말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그 무당 짓거리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하면 일단 교인들이 그 앞에서 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한테도 아무한테나 반말 지꺼리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람한테 기도 받기 위해 줄을 섭니다. 여러분 성경의 예언은 절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언자들이 한 예언 중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그런 경우에라도 단순히 인간의 앞날,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미리 약속하시는 것을 ‘예언(預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 15:12-17)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4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이고 그 후에 큰 재물을 가지고 애굽을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분명하게 이루어졌지요. 성경은 이러한 것을 ‘예언‘이라 하는 것입니다.

 

(출 6:3-9)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보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평생 종살이하게 내버려두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반드시 성취라는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신 18:15-22)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그러니까 진짜 선지자들, 진짜 예언자들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예언의 말씀 전체를 ‘계시’라고 하고 그 것이 사실로 믿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의 화전을 막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휘하는 것을 ‘믿음의 발휘, 믿음의 방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음 시간에 조금 보충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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