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방패(II)
(김성수 목사)
(엡 6:13-16)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지난주에 믿음의 방패에 관해 다 마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믿음의 방패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악마의 화전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항상 믿음을 굳게 붙들고 있어야 믿음이 발휘될 수 있으며 그 믿음의 발휘를 가리켜 ‘믿음의 방패’라고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계시’를 통해 오게 되는데 그 ‘계시’는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해되어 질 때 비로소 그 성경 말씀은 계시로서의 효과를 발휘 할 수 있음을 주지시켜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계시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냥 도덕과 윤리, 혹은 허구를 기록해 놓은 허무맹랑한 잡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시비를 걸고 들어간 것이 어떤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시비를 걸다가 시간이 없어서 끝을 맺지 못했지요? 왜 제가 믿음의 방패를 설명하면서 그러한 계시와 예언을 끌고 들어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도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아서 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을 무지한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치 그런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인 양 허세를 부리지요.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미리 예(豫) 자가 아닌 맡길 예(預)자 예언(預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불가불 세상에 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예언자를 히브리어로 ‘나비’로 표기합니다. 그 ‘나비’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라는 의미의 ‘나바’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예언자’를 헬라어로 ‘프로페테스’라고 표기를 하는데 이 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라는 의미의 ‘프로페테우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이라는 말은 앞일을 예견하는 predic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달하는 prophecy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예언은 모두다 ‘죄인들의 멸망과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이게 예언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모두 ‘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가?’를 깨우치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선지자, 예언자들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에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구원’이라는 울타리 밖의 예언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예언과 비교해서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이 받고 있다는,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점 쳐주는 그러한 가짜 예언은 오히려 믿음과 전혀 상반되는, 믿음의 방패를 부수어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이 세상 것은 다 멸망할 것이니까 하늘의 것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자‘로 결론이 나야 하는데, 혹자들이 한다는 그런 유의 예언은 여전히 이 세상 왕국에 눈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더욱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액운을 피하고 길한 삶을 찾아 갈 수 있을까?‘를 충족시켜 주는 마귀 적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절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진짜 믿음은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종말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닫고 그 계시를 삶 속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계시가 이해되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의 생겨서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자기 앞날이 왜 궁금하지요? 왜 또 다른 계시와 또 다른 예언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 성경의 예언을 통해서, 이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분토‘처럼 여기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항복하는 삶을 입으로 전하고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니고 새 세상이 온다. 너희는 그 새 나라를 준비하라’ 그게 올바른 예언을 깨달은 성도들의 지향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예언자이며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올 나라로 믿고 있고, 그러므로 그 나라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살다간 모든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힘을 쌓아서 자기들 힘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 그 꿈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늘 쫓겨 다녔습니다.
(사 50:4-6)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해서 전했더니 사람들이 돌로 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 예언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 예언자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렘 20:7-10)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이게 바로 믿음의 방패를 들고 의심과 낙심과 고통의 화전을 막아내며 ‘예언’을 하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사 20:1-6) “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5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하나님께서 애굽과 구스를 멸망시키실 것을 이사야를 발가벗겨서 그의 몸과 삶을 통해 예언을 하십니다. 이사야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예언자들의 삶은 모두 다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돌을 맞지 않으면 이렇게 자신의 삶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 부끄럽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과 계시의 삶이 어디에서 완성이 됩니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지요. 발가벗겨져서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닙니까? 그 분이 바로 참 선지자요, 참 예언자이십니다.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이사야나 예수 그리스도는 발가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던 인간의 도모를 낱낱이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부나 명예나 지식으로 너희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애를 쓰고 살고 있지만 너희는 결국 이렇게 발가벗겨져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군데 더 찾아보지요.
(사 21:1-4) “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 왔도다 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주께서 가라사대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3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 내 마음이 진동하며 두려움이 나를 놀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할 때도 이사야가 요통으로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여기서 요통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할할라’라는 단어는 ‘꼬이다‘라는 뜻의 ’훌‘이라는 단어의 파생어입니다. 그러니까 극심한 허리 통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의 아픔을 몸으로 겪으면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멸망하게 될 것인지를 예언자가 자신의 몸으로 겪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돌이키지 않는 세상의 심판, 그리고 결국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예언으로 토해내는 선지자들은 그 구속의 내용을 인생 속에서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소리도 듣게 되고, 때로는 돌에 맞아 거반 죽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이 하는 예언은 100% 다 맞아야 합니다. 99%만 맞아도 안 됩니다. 진짜 그런 은사 받은 사람 있으면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없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서 올바로 전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예언은 성도의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14장에서 ‘예언하기를 힘써라’라는 구절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 줄 아시겠지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이 많이 오해하고 계신 고린도 전서 14장을 조금 설명을 해 드리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14:1-9)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는 예언하기를 힘써라’하고 권면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예언은 우리가 배웠다시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는 아직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그 것을 예언과 방언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방언은 모든 방언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역이 된 방언은 곧 예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방언이나 예언이 모두 다 채택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제재를 받았고 예언도 교회의 분변을 통해 걸러졌습니다.
(고전 14:27-30)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많아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여기까지만 정리를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아직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초대 교회에 예언과 방언으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계시였고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방언에는 통역을 붙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방언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었고 예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방언과 예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걸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냥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만 주시면 되지 방언을 함께 주셔서 통역을 붙이게 하셨을까요? 구약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은 항상 ‘너희는 심판 받을 존재다’라는 것을 보일 때 등장했던 것입니다.
(사 28:1-3,11-12) “1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구절은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 에브라임을 심판하실 것임을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을 치러 들어 온 앗수르 군사가 한 말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방언‘은 심판을 그릴 때 등장했던 단어였습니다. 그 내용을 바울이 인용 해다가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전 14:21-22) “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 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공격하게 할지라도)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2절 보시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나오지요?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방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될 자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진노의 심판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라는 표적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요.
(창 11:6-9)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도 나오지요?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게 방언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을 알아듣고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바로 초대 교회 때 방언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은 자기에게는 덕이 될지언정 교회에는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린도 전서 14장 4절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고전 14:14-15)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잘 보시면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들이 기가 많이 죽었었지요? 그러나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방언으로 찬양을 하는 것은 전 인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인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다른 말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바울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구절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영’이라고 번역이 된 ‘프뉴마’ 앞에 ‘나의’ 헬라어로는 ‘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영’‘프뉴마’가 사람에게 쓰이게 되면 그 단어는 ‘영’이라는 뜻보다는 ‘원초적인 능력’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누스’라는 단어는 ‘정신 혹은 내적인 성향, 도덕적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14절 15절의 정확한 내용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긴 하지만 나의 전인격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방언이 아닌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고 찬양함으로 전인격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것이다’입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 주어진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지만 어떤 제한적 목적을 위해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모두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예언은 교회 전체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고전 14:19)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다섯과 일만을 대조하고 있지요? 여기서도 방언과 예언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이해하고 깨달은 다섯 마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 풍성한 방언의 은사가 자기들에게 왜 주어졌는지는 생각지 않고 단지 방언을 하는 것을 자랑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것을 심지어 ‘악’이라고 부릅니다.
(고전 14:2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바울은 은사를 자랑하는 그러한 이기심과 자랑을 이렇게 악으로 규정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은사를 추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성숙을 놓치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예언을 통한 영적 성숙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증거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을 ‘신앙이 좋은 사람 혹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는 무슨 신유은사나 방언, 예언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둔갑을 해 버렸습니다.
(고전 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 사도는 그렇게 은사가 풍성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은사는 오히려 어린 신앙인들에게 힘내서 교회의 자라남에 기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지 결코 자랑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를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나 방언이나 예언을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의 방패가 담고 있는 내용과는 정 반대의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제가 믿음의 방패를 설명하면서 ‘예언과 계시’를 끌고 들어왔는지 아시겠지요? 분명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의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그러한 예언과 계시는 믿음과는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준비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계시와 예언은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이지 절대 사람의 길흉화복이나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고전 14:23-25)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 예언은 죄인들을 책망하고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히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방언으로 듣던 자들이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슥 8:22-23)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예언을 입으로 삶으로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예언 (prediction)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언, 방언‘이러한 것들을 무슨 이상한 소리하는 것이나 앞일을 점치는 것 정도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방언을 하신다면 그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리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면서 어떻게 나에게는 그 방언이 이렇게 이해가 되어지게 되었는가를 감사하시면 되는 것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누군가가 방언을 하거든 ’나는 어떻게 저러한 방언으로 들려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는가?’ 감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을 통해 믿음을 더욱 공고히 다지셔서 어떠한 마귀의 화전에도 쓰러지지 않는 용사가 되셔야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어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방언이 되어갈 것임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암 8:11-14)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어디에 붙어있는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수많은 재앙들을 선포하셨습니다. 불을 보내어 궁궐들을 사르리라고 하시고 적이 침략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구하려 비틀거리며 찾고,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로 곡식들과 과일들을 다 먹게 하시고, 전염병과 칼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재앙들은 돌아오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자기들은 제사장이 있고 단과 벧엘에 제단이 있고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악기로 노래하는 것과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샤 같은 제사장이 나라와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마음 든든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북 이스라엘에 황 충과 불과 다림줄과 여름실과의 환상을 통하여 그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황 충과 불의 심판은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면서 중보를 하자 그 심판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다림줄의 환상과 여름실과의 환상과 9장에서 마지막 환상인 기둥머리를 치시는 것에서는 더 이상의 돌이킴이 없습니다. 심판이 그대로 시행될 뿐입니다. 이것은 갈수록 재앙이 그 강도가 세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앙의 끝, 다른 말로 가장 심각하고 무시무시한 재앙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게 지금 읽은 아모스 8장 11절 이하인 것입니다. 한 날이 이를 것인데, 그 한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두어 버리셔서 말씀의 기갈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의 가장 큰 재앙입니다.
(겔 7:1-6,26-27)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4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5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 지어다 임박하도다 6 끝이 났도다, 끝이 났도다, 끝이 너를 치러 일어났나니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27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왜 사람들이 굶어죽습니까? 먹을 것이 모자라서 굶는 건가요?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하지요? 모두다 그들의 죄와 탐욕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이 그들의 죄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고 멸망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다할지라도 자기들 취향에 맞는 하나님 말씀만 구합니다. 아모스 8장 14절 보세요.
(암 8:14) “14 무릇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로 단으로 브엘세바로 말씀을 구하러 다녔지만 그 곳에서 그들이 섬긴 것은 금 송아지였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을 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든든한 우상을 붙들고 안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 예언을 비롯한 엉뚱한 기적과 신비를 좇는 것이 믿음의 방패를 갖는 것과 상극인지 아시겠지요?
(딤후 4:1-4)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다른 사람들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를 한 번 보자고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고 있나요? 혹시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방언으로 들리는 그 심판 받을 사람들과 방불하게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도 혹시 그 대 재앙에 노출되어 계시지는 않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방패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궁금해 하시고 알려고 노력하시고 신앙생활에 더 진지해지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후서 10장 5절과 6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고후 10:5-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We shall overcome (김성수 목사) (0) | 2013.12.28 |
---|---|
[스크랩]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그리고 기도 (김성수 목사) (0) | 2013.12.27 |
[스크랩] 믿음의 방패(I) / 김성수 목사 (0) | 2013.12.25 |
[스크랩] 평안의 복음의 신 (김성수 목사) (0) | 2013.12.24 |
[스크랩] 의의 흉배를 붙이라 (김성수 목사) (0) | 2013.1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