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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평안의 복음의 신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24.

 

 

평안의 복음의 신

 

(김성수 목사)

 

 

(엡 6:13-15)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우리는 지난주에 진리의 띠와 의의 흉배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 주시는 ‘의’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의 복을 누리기는커녕 불안한 마음과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게 된다고 했지요. 그러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은혜의 ‘의’를 힘입은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마틴 루터의 전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고 도망을 다니다가 어느 성에 숨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하고 있을 때 루터는 마귀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루터의 말에 따르면 마귀는 성도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나 공포를 여지없이 타고 들어와서 그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평소에 이교나 무당들에게서 나타나는 귀신들에 대한 공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고 복음을 깨닫고 거듭난 이후에도 그 두려움과 공포가 완전히 씻겨 지지 않고 그냥 습관처럼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실제로 그 공포를 이용해서 자기를 공격하더랍니다. 성경을 번역하다가 잠을 자러 침대에 누우면 옷장에서 어린아이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답니다. 그리고 이불 속에는 시커먼 개가 날카로운 이를 내 놓고 자기를 물어뜯으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고 해요. 루터가 그 개를 들어서 창밖으로 집어던지면 그 개는 떨어지면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옷장을 열면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어린아이도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리고 없더랍니다. 루터의 전기 내내 자주 나오는 말이 ‘마귀는 나의 방에서 나와 함께 늘 붙어 다녔다. 한 시도 나를 떠나지 않는 그에게 ’나 이제 자려고 하는데 너도 가서 자‘라고 조롱해 주었다’입니다. 한번은 너무나 집요하게 ‘너는 죄인이야, 너 같은 것이 무슨 종교 개혁이야, 네가 진짜 옳아?’ 라고 속삭여서 그 속삭이는 마귀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지기도 했고, 글을 쓰던 펜을 집어 던져서 나무 벽에 그 펜이 꽂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루터가 죽기 3개월 전까지 ‘하나님 정말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요? 제가 한 일이 옳은 것입니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니 사단의 미혹은 정말 집요하기 그지없습니다. 루터가 진리를 몰랐을까요? 루터가 ’의‘를 몰랐겠습니까?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그라티아’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종교개혁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도 그 정도로 시달립니다. 마귀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그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확인하지 않으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언젠가 칼럼에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라는 글을 썼지요. 그 말은 회의론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단이 역사를 타고 내려오면서 언제 어떻게 진리를 왜곡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쑤셔 넣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철썩 같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조차도 ‘혹시’라는 열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연구하고 공부하자는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군사 된 자로서의 무장이며 갑주 인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어떤 여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뇌종양을 앓고 계신데, 거기에다 신부전증과 갑상선 암까지 앓고 계셨습니다. 의사도 이제 길어야 3개월 정도 살 거니까 준비를 하라고 호스피스를 집으로 보내주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선고를 받고 나니까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더랍니다. 남들은 하나도 걸리기 힘든 병을 몇 가지씩이나 고통 속에서 앓다가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기도 하고 해서 매일 매일 울면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병문안을 오셔서 저희 교회 설교 테잎을 열 개정도 가져다 주셨대요. 그래서 그 분이 가신 다음에 테잎을 틀었는데 제가 하는 첫 마디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여러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 불만 있으십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대뜸 ‘불만 있습니다.’ 그랬대요. 그러고 나서 너무 신경질이 나서 테잎을 끄고 곰곰이 생각을 했답니다. 그 동안 자기가 너무나 자신의 신세타령에 몰두하고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며 자신이 받은 선물이 어떤 것이며, 구원받은 자기가 가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너무나 오래 동안 자기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어서 그 문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 못했답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을 복음을 묵상했대요. 왜 예수님이 오셨으며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했으며, 나를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잘 정리를 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손해 본 것이 하나도 없더래요.

 

그런데 왜 그 동안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이렇게 복음을 머릿속으로 정리만 하고 있어도 이토록 평안이 임하는데 도대체 뭐가 나를 그토록 복음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을까? 생각하다보니 얼른 ‘아 나에게는 대적이 있지’하는 생각이 드시더랍니다. 그러고 나니 소름이 오싹 끼치더래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그 사이를 삐 집고 들어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투정이나 부리고 눈물 속에서 그 귀한 세월을 보내게 한 그 마귀가 자기 곁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랍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설교에서 귀신같은 게 나타나면 그건 단지 거짓말과 속임수로 성도를 속이는 존재이니까 박치기로 받아버리라고 그랬다나요. 그래서 큰 소리로 ‘저리 꺼져‘ 그러고 계속해서 설교를 들으시고 성경을 공부하시고 하신대요. 지금은 너무나 평안해서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 만날 날을 기다리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만일, 제 처지라 하더라도 목사님 그렇게 용감하실 수 있지요?‘그러고 끊으셨는데 제가 대답을 못했어요. 별로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크게 아파 보지 않아서, 사단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마구 쏟아 넣을 때 제가 어떻게 나올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항상 무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복음의 신‘하면 생각나는 구절들이 있지요?

 

(사 52:7)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리고 이 구절을 인용한 로마서10장15절도 생각납니다.

 

(롬 10:15)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분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복음의 신’을 단순히 전도에만 국한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이런 구절들과 연결시켜서 해석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마귀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전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마귀와의 싸움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 3:8)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보세요. 복음은 나 혼자 구원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을 받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까지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일부러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곳에 가서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깨달은 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른 마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이들에게 그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삶과 언행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관계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흘리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다는 구절의 의미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타지로 떠나는 선교나 전도 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은 사람과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이 마귀와 싸우며 지속해 나가는 신앙생활 바로 그 자체가 전도이고 그 전도가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그 복음의 신에 대해 자세히 한번 살펴볼까요.

 

우리가 아무리 허리띠를 잘 매고 흉배를 잘 대었다고 해도 발이 부실해서 자주 미끄러지거나 제대로 뛸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그 군인은 절대 전투를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투에 임하는 군사가 신는 신발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현대의 군대에서도 그 군대가 전투를 치를 곳의 지형과 기상 그리고 전투의 종류와 양상 등에 맞추어서 군화를 제작합니다. 순발력이 필요한 전투에서는 발목을 천으로 만든 군화를 지급합니다. 베트남전처럼 게릴라전이 주를 이루는 전투에서는 발바닥에 징과 철판을 깐 군화를 지급합니다. 부비트랩이나 못, 송곳 같은 함정에 적합한 군화지요. 당시 월남 전에서는 베트콩들이 밟으면 발바닥을 뚫고 들어오는 대나무 못이나 철 못 같은 것으로 함정을 많이 만들어 놓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산악지대가 많은 곳에는 발목까지 단단한 가죽으로 덮은 군화가 필요합니다. 뛰다가 돌이나 나무뿌리에 쉽게 발목을 다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군화, 신발은 기동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전투에서 기동력은 승패를 좌우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그리고 징기스칸 같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그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공히 빠른 기동력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전투에 맞게 자기의 군사들에게 신을 만들어서 제공해 주었다고 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알렉산더가 제작한 신발을 그대로 모방해서 신은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그 로마 병정들이 신었던 징이 박힌 딱딱한 밑창에 가죽 끈으로 단단히 붙들어 매게 되어있는 샌들을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입었으면 이제 일어서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은 이후에 가만히 유유자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고 뛸 신발이 필요한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신앙생활에는 기동력이 필요하다니까요.

 

(겔 37:1-10)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우리의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군대’로 만드십니다. 그 말은 살려낸 자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쓰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자로 만들어 놓으신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공부할 때도 살펴보았지만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144,000명을 계수 할 때 굳이 민수기의 군대 계수 장면을 인용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민수기에서도 이스라엘을 계수 할 때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만을 계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싸워야 하는 군사들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살아난 것으로 잔치만 벌이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급히 신을 신고 어디로 가야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전쟁터로. 바울은 그렇게 전쟁터로 달려야 하는데 꼭 필요한 신발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아무리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대었어도 복음이 없이는 옴짝달싹 못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진리’나 ‘의’나 ‘복음’이나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신어야 할 신이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은 ‘예비 되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라고 나오지요. 거기서 ‘예비’라고 번역이 된 ‘헤토이마시아’는 ‘준비’ 혹은 ‘장비’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늘 준비되어져 있어야 하는 ’진행형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안 그러면 마귀가 그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하게 되고 우리는 기동력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는 착한 일로, 혹은 종교 행위로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준비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준비된 복음의 신을 신고 있지 않으면 사단이 만들어 놓은 뾰족한 함정에 빠져 언제든지 발을 다칠 수 있게 되고, 그 발을 다친 병사는 전투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전우들에게 폐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 된다‘ 혹은 ‘준비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먼저 우리가 복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를 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오늘은 신명기로 가서 복음을 찾아보겠습니다.

 

(신 27:11-26)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올라 어떤 맹세를 하게 하십니다. 레위 지파를 시켜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계명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이 모두 어떻게 끝나는가 하면 ‘이거 안 지키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하고 마쳐집니다. 그게 하나님의 행위 언약입니다.

 

(겔 18:20) “20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내야만 합니다.

 

(신 28:1-35)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25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 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33 네 토지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신 28:58-62)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행위 언약 아래 두십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전 7: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 낼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다 저주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무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깨실 수 없는 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디아데케’ ‘유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유언은 약속은 약속인데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상속해 주는 약속이지요. 그 언약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아데케’는 약속과 유언이라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언약을 주시면서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 두 마리를 쪼개 놓으라고 하시고는 그 사이로 혼자 지나가신 것이 바로 이 ‘디아데케’ ‘언약’ ‘유언’의 내용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약속은 약속인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켜내시는 약속.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한 복을 거저 주셨습니다. 그 복이 어떤 것인지 한번 보자고요.

 

(히 1:2)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표준새번역]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상속받으실 그 분의 장자이십니다. 앞으로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만물도 그 분께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장자라 불러주십니다. 장자는 항상 상속과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히 2:23)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만물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롬 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표준새번역]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확실성을 ‘양자’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해 줍니다.

 

(롬 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쓰인 ‘양자‘ ’휘오떼시아‘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산 상속을 받게 되는 법정 적 용어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적자, 친아들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되었지만 양자에게는 반드시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반드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의지를 ‘양자’ ‘휘오떼시아’라는 단어를 통해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엡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도 ‘아들‘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 ’휘오떼시아‘ ’양자‘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반드시 주고 말겠다.’ 그게 양자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단어들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우리는 의붓아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함께 공동상속한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드는가?

 

(빌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고 번역이 된‘에피에이케스’는 히브리어의 ‘아니’와 같은 단어인데 그 단어가 스가랴서에 나옵니다.

 

(슥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여기서 ‘겸손하여서’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아니’입니다. 그러니까 ‘관용‘ ’에피에이케스‘는 구원과 관련 있는 단어이고, 그 구원을 위해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에피에이케스‘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성도에게 그 관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살고 있는 것은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억울하게 빼앗겨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용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는 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용’을 보이는 자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 삼으시는 그러한 구속 사건을 반드시 피로써 완성시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속은 그냥 구속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려내는 구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레 17:11)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살아나게 되었고 이렇게 소망 속에서 우리 하나님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디서든 그 복음을 잘 준비하고 있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꺼내서 확인하고 내 놓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5분대기 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5분 만에 그 상황 속으로 침투해서 그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5분대기 조에 걸리면 일주일이고 이 주일이고 신발을 못 벗습니다. 잘 때도 신발을 신고자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5분대기 조처럼 늘 복음의 신을 신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단이 어떠한 모양으로 공격해 올지라도 신속하게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기동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복음으로만 무장하는 기동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을 때에 사울이 그의 갑옷과 큰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 다윗에게 맞지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이 그 사울의 갑옷과 큰칼을 들고 골리앗 앞에 나갔다면 절대 골리앗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맞는 물맷돌 다섯 개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부차적인 무기들을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김용옥 씨 같은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열심히 철학을 공부해서 철학으로 김용옥 씨를 누르고 그에게 기독교를 변증하겠다는 시도들을 합니다. 그리고는 망신만 당하고 슬그머니 도망치지요. 어떤 사람들은 과학으로 하나님을 변증하겠다고 과학자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절대 이 세상 학문으로 하나님을 변증하거나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그건 거추장스러운 사울의 갑옷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만을 신고 기동력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신’입니다. 거추장스러운 프랑켄슈타인의 신발은 다 벗어버리세요. 그렇게 복음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시고 베드로가 사형 집행일 바로 전 날에 감옥에서 코를 골며 잘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평안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오직 복음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평안입니다.

 

(렘 6:14)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표준새번역] “14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고쳐주며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요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세상 적인 평안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병이 낫는다든지 소원이 들어진다든지 기적이 일어나 사업이 회생된다든지 하는 그런 데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는 평안은 그와 정 반대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12:50-53)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분명히 ‘내게 있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으면서 여기서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라고 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아예 평안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평안, 예수님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그 평안을 지니게 되셨나요? 아니면 아직도 여전히 불안하세요? 여러분이 지금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을 하나씩만 다 떠 올려 보세요. 무엇 때문입니까?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세상 것들 때문이지요? 평안의 복음으로 예배한 신을 신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불안함, 좌절, 절망 속에서 자폭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안의 복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롬 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렇게 하나님 주시는 평안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 되는지 볼까요?

 

(고후 5:18-20)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에게는 다른 이들을 화목케 하는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롬 12:16-21)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6절에 보면 복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는 지에 대해 나옵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 마음을 두면” 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찾아 온 돌연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높은 데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복음을 알면 알수록 나는 자꾸 죄인중의 괴수인 것이 판명이 나는데 어떻게 높은 데 마음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사 1:13-17)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를 책망하시는 장면인데 ‘너희들은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행위 하지 말고 학대받는 자들 도와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봐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인간의 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의 결론이 고와와 과부를 돌보라는 명령으로 끝이 날까요? 고아와 과부라는 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고아와 과부를 허락하실 까요? 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삭을 주워서 먹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있게 하실 까요?

 

(레 19:9-10) “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아니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난한 자를 생기게 놔두실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일을 막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들어와서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고 거지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를 받은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서 그들이 받은 은혜와 긍휼이 무엇인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는 ‘우리는 원래 이렇게 나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은 그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고, 고와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원래 저렇게 고아와 과부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렇게 생명을 얻고 복을 얻게 되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받은 긍휼과 은혜를 가시적으로 이 땅에서 재현해 냄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나의 구원에서 끝이 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복이 전달되는 것까지 인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지니게 된 사람들은 그 평안으로 다른 이들을 평화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 된 신을 신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빌 2:2-4)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깨고 들어옵니다. 사단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화평한 것을 눈뜨고 못 봅니다. 그래서 늘 그 관계를 깨고 들어와서 우리를 다툼과 분열과 시기와 이기심으로 자폭시키려 하지요. 그 때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서 어떠한 유혹과 미혹이 여러분을 흔들어도 절대 흔들리지 마시고 늘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주위가 화평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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