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흉배를 붙이라
(김성수 목사)
(엡 6:14)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진리의 허리띠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허리띠라는 것은 고대 시대 때, 사람들이 전투뿐만이 아니라 행동의 자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가장 기초적인, 그러나 필수적인 무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허리띠‘가 없이는 다른 무장을 그 위에 붙일 수 없을 만큼 ’진리‘는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실 ‘진리‘라는 허리띠는 그 나머지 모든 무장들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오늘부터 공부하는 나머지 무장들을 잘 연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머지 무장들은 ‘진리’라는 허리띠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인 ‘의의 흉배’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에베소서를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는 양손이 쇠사슬에 묶였고 양쪽에서 두 명의 군사가 쇠사슬로 그 죄수와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울이 편지를 구술했고 누군가가 편지를 대필했을 것입니다. 아마 로마 군인 중에 한 명이었겠지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감옥 안에 적어도 3명 이상의 로마 군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신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투구를 쓰고 있었고 허리띠를 매고 있었고 흉배를 차고 있었고 단단한 군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패와 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그대로 인용해서 묘사하면서 바울은 이 에베소서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허리띠 위에 흉배를 대고 있었습니다. 흉배는 가슴과 배를 모두 가리는 가죽이나 혹은 얇은 철판으로 만든 보호 장구입니다. 벤허나 스팔타커스 같은 영화에 보면 로마의 군인들이 앞부분을 가죽이나 철로 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러니까 흉배는 가슴과 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가슴과 배에는 심장이나 간, 창자 같은 내장이 들어있는 곳입니다. 당시 고대 사람들은 그 내장 안에 사람의 마음과 기분과 감정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애 2:11)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예레미야가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표현하면서 ‘내 창자가 끊어지며 간이 땅에 쏟아졌다’라는 표현을 쓰지요?
(합 3:16)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사 6:11) “11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번역이 된 ‘메에’라는 히브리어는 ‘창자, 심장, 내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시편에는 ‘신장’ ‘콩팥’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빌 2: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스플랑크논’은 ‘내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대 사람들은 동정이나 자비, 긍휼 같은 개념들과 ’내장, 심장‘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썼습니다. 바로 그 내장을 보호하는 것이 ’의의 흉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의 흉배’는 어떤 공격에 대한 보호 장구입니까? 감정과 기분과 양심과 욕구와 의지를 공격하는 사단의 공격에 대한 보호 장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의의 흉배’에서 ‘의’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를 해 놓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그걸 입고 우리의 감정과 기분과 양심과 욕구와 의지를 공격하는 사단의 무기를 막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단순히 ‘righteousness'나 ’correctness'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네페쉬‘ ’존재‘로 많은 관계를 맺고 살게 되는데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것을 ’의‘ ’자다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던 ‘의’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그 ‘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시키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깨어져 버린 의의 관계를 온전히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니까 ‘의’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 ‘의’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인간이 자신을 수양해서 회복시킨 것도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빌 3:4-9)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우리 개신교에서의 ‘의’는 ‘전가된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요구와 표준은 워낙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회복시킬 수 없는 ‘의’입니다.
(마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거든요. 우리가 정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의무와 책임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의 회복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홀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간들에게 ‘전가’(imputation) 시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롬 8: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교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칫 우리가 ‘방종’에 빠질 수가 있지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 이러한 은혜를 악용한 ’무 율법주의‘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구별하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홀로 완성하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 속에서 그 ‘전가된 의’를 삶으로 경험해 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라는 씨앗이 주어져있는데 우리의 육신 전체에는 타고난 ‘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전가된 ‘의’가 시간 속에서 ‘경험’이라는 것을 통하여 육신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청교도들은 ‘전가된 의’와 비교해서 ‘나누어주시는 의’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미 완전하게 의롭게 만들어 놓으신 후 그들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의’가 역동적으로 역사 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삶 속에서 주관적인 ‘의로운 삶’을 체험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언젠 가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게 되며,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그러한 ‘관계가 요구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신학에서는 그러한 ‘전가된 의’와 ‘나누어지는 의’의 부분을 ‘질료의 창조’라는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물 등의 질료가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질료를 가지고 창조를 완성시켜 나가셨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우리 성도에게 ‘의’라는 질료가 전가되어 그들의 인생 동안에 그 ‘의’가 완성이 되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입된 의’에 우리의 행위를 보태서 ‘완성된 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전가된 의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의’를 주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체험시킨다는 말입니다.
(빌 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래서 우리는 방종에 머무를 수가 없으며 점점 의를 행하는 자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육신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 2:11)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거듭난 사람의 속에서도 육체의 정욕, 육체의 욕심이 쏟아져 올라옵니다. 그래서 간혹 실패나 실수를 하게 되지요. 그 때 마귀가 참소를 합니다. ‘너 같은 인간이 무슨 성도냐?’ ‘하나님이 너 같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실 것 같아?’ ‘넌 구원받은 사람 아니야’ 이렇게 참소를 합니다. 그 때 만일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홀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이라는 ‘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넘어지지요. 그래서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분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의’는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근거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실수로 인해 마귀가 참소해 들어올 때 ‘그래 맞아, 네 말대로 내 행위에 근거한다면 난 지옥가도 싸, 그런데 그런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배제해 버린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셔서 나에게 거저 전가해 주셨어, 그래서 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 거야’라고 말씀에 근거해서 반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의 흉배’입니다. ‘이러고도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라는 기분과 감정에 넘어지지 않고 다시 분투할 수 있게 하는 보호 장구가 바로 ‘의의 흉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구원의 취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지만 우리가 구원받고 난 후에 짓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의 죄인 것입니다. 그 것은 징계로는 나타날지언정 정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여전히 죄에 노출된 자신을 보며 실망될 때에 이런 구절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의의 흉배’를 가진 사람이 분명하지요.
(롬 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는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그 동안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 낸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노라고 한 것은 ‘자기 의’는 항상 하나님의 의를 공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자기 의를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열심히 제사를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 버렸고 결국 그들은 그들의 ‘의’를 지키기 위해 참된 의를 선물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신앙생활 내내 불안하고, 절망하고, 심지어 자폭하게 되거나 자기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교만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초조하고 고단하고 기쁨이 없지요.
여러분이 지성소 안에 들어 있는 법궤를 생각하시면 그 전가된 의가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해 집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것들은 모두 인간의 실패와 실수를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실패와 실수를 법궤가 감쌉니다. 그리고 그 법궤 위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부어집니다. 그 것은 그 법궤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실패와 실수가 전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어떤 죄 없는 대속 물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뒤로는 인간들의 실패와 실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덮고 있는 어린양의 피롤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보시기로 하신 것이 바로 ‘전가된 의’인 것입니다. 법궤 안의 인간들이 뭐 한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들이 모여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3:4-9)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곡해하면 자칫 ‘죄책감’ 때문에 더욱 더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절대 죄를 짓지 않고, 심지어 죄를 짓지 못 한다‘라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마귀의 수하에서 죄만을 일삼던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표면적으로 죄를 짓더라도 그건 죽은 자의 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은 이제 그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우리의 외적 행위만을 들고 나옵니다. ‘너 이런 거 잘못했지? 이런 파렴치한 일을 하고도 네가 성도냐? 분명 성경에는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고 했는데, 넌 계속 짓고 있잖아?’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 다른 말로 ‘생명’을 꺼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씨, 생명은 우리를 방종에 머무르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그 생명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요일 5:18) “18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 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히 7:24-25)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더러운 우리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요일 1:6-10)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런 구절도 우리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 즉 구원 못 받아놓고 구원받은 것처럼 속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항상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해석들을 합니다. 정말 부담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똑같은 메시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6절과 7절 그리고 8절과 9절 그리고 10절 이렇게 세 부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혼돈 하는 구절이 6절과 7절인데, 6절의 내용과 7절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움의 나라에 있으면서도 ‘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리새인들처럼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의로 말미암아 자기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의 나라로 옮긴 사람들 가운데에도 외적 행위로는 죄를 짓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더러운 외적행위에도 불구하고 빛의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행위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라 할지라도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왜? 나라가 옮겨졌으니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외적 행위들은 예수님께서 그 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실 것이며, 지금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씻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7절의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그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8절과 9절 10절의 내용과 맥이 같아지지요. ‘너희가 죄 없다 하면 너희는 속이는 자다. 그러나 너희가 죄를 자백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사람들의 죄를 예수께서 씻는 것이다’가 8절과 9절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를 믿게 된 ‘전가된 의’를 받은 사람들은 전혀 죄를 안 짓는 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짓기는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빛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가 어떤 행위라 할지라도 그들은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되어서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게 되고,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들여다보면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감히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적으로 깨끗하게 씻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사람이 정말 같은 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해서 ‘죄 죽이기’의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의의 흉배’를 착용한 전투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의롭게 살아 보겠다는 시도는 늘 죄책감과 고통과 속박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의롭게 살려고 하는 막무가내의 노력’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는 것‘입니다.
(벧후 3:17-18)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이 우리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게 ‘기분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의의 흉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죄를 지을 때 그 외적 행위를 들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가 죄 지을 때 뿐 아니라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려 할 때도 공격을 합니다. ‘너 같은 인간이 무슨 기도를 해? 너 같은 인간이 무슨 예배를 해?’라고 우리의 과거의 죄나 현재 저지르고 있는 죄, 그리고 자격지심 등을 동원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럴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무슨 자격이 있어서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난 자격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그 분이 홀로 의를 완성하셔서 나에게 전가시켜 날 의롭다 칭해 주셨다, 그래서 난 기도하고 그래서 난 예배 한다‘ 로 반박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요? 자격이 있어서 기도하고 자격이 있어서 예배하고 자격이 있어서 헌금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공중기도 하는 것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공중기도를 하냐, 빼 달라’고 마치 겸손한 것 같은 요구를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야베스, 전 세계 크리스천들과 가톨릭 신자들 심지어 불교인들에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도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전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의 곳간에 저장되어 있는 우리의 복을 얻어내자,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야베스를 보라‘ 이게 야베스의 기도이지요? 정말 야베스의 기도가 그 뜻인지 한번 보지요.
(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와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불리 우는 책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서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역사를 공히 기록한 것에 반해서 역대기서는 남 유다의 역사만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의 이야기가 바로 역대기서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대기서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들의 족보가 죽 나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창 49:8-10)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언약이 유다의 왕들과 유다 백성들의 행위를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여전히 불가능하고 패역하지만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대기서입니다. 그 유다의 족보 중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그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실제로 그 기도응답을 받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험상 성경이 갑자기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내용을 삽입해서 ‘열심히 간구 하면 복 준다, 존귀한 자가 되면 복 준다.’ 이런 이야기하는 책이 맞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로 말미암게 될 구원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뜬금없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역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역대상 4장 9절을 보시면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고 칭한 후에 그가 존귀한 자로 칭해지는 이유에 대해 나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유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는 그러한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절대 야베스가 다른 사람보다 열심을 더 부려서, 더 부르짖어서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10절 보시면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여기서 등장하는 복에 복을 ‘바라크, 바라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필연적 강조 용법입니다. 이 필연적 강조 용법이 어디에서 처음 나왔었지요? 창세기 2장 17절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 이게 바로 ‘죽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필연적 강조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죽어야만 했던 자들 중 어떤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필연적 강조 용법을 써서 ’복에 복을 주리라‘라고 은혜의 언약을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기 2장 17절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구절입니다.
(창 22:17)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자기가 죽어야 할 나무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시는 예수를 상징하는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의 사건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큰 복이라고 번역이 된 ‘바라크, 바라크’가 바로 역대 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베스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는 어떤 사람이었다고요?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잘 연결해 보세요. 이 야베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고로이 낳은 존귀한 자식들인 성도들의 기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의 복을 구하고 추구하는 자들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고 완성하신다는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수고로이 태어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의 자격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구원에 관한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베스의 이야기입니다.
(잠 15:29) “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만 들으세요. 그런데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지요? 그럼 누구의 기도만 하나님께 들려지는 것입니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분 중에 유일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만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13-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이 간절히 간구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들을 내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건져 올리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는 모두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도 궁극에 가서는 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보면서 ’난 이런 거 할 자격이 없어‘라고 판단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난 기도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라고 자폭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드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쉽게 무너지는 구원의 확신 문제도 바로 이 ‘의의 흉배’와 관련이 있는 대목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의 기분이나 감정을 좇아 구원의 확신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는 경험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구원 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구원받은 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분명 그 때에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다거나 여느 때와는 다른 특별한 기분이나 감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러한 특별한 경험이나 기분, 혹은 감정은 수시로 흔들립니다. 특별한 체험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사람은 그러한 특별한 체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불안해 집니다. 그리고 기분이나 감정이 흔들릴 때는 구원 자체가 함께 흔들리기도 합니다. 거기에 의의 흉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가해 주시는 의’라는 것은 우리의 체험이나 감정이나 기분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물론 나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에 뭔가 달라지는 ‘나’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고 눈과 귀가 열려 그 때까지는 비밀로 감추어 졌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은혜가 깨달아지면서 점점 자신의 구원이 확인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관적인 체험에 우리의 구원을 근거하게 되면 우리는 늘 마귀의 미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을 흔들어 버리면 우리는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은혜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더욱 진지하게 알고 배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선행되지 않은 경험이나 체험, 기분, 감정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지 정 의 의 순서로 의가 성도에게 경험됨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롬 6:17)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절을 보시면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사람들은 전하여 준바 교훈(지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감정) 순종하여(의지)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의 흉배를 잘 입기 위해서는 지식이 먼저 앞서는 것이고 거기에 감정이 유발되는 것이며 그 다음에 순종이라는 의지의 발동으로 순서가 매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앎에서 기분이나 감정도 나오는 것이고 의지도 앎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 4:6)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 ‘앎‘은 행함이 수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너희가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삼상 2:3)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참된 지식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시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먼저 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사모하며 연구하며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순종은 그 다음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을 먼저 앞에다 놓아버리면 그 건 낭패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근거하지 않은 체험 그것은 절대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거짓 체험들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만 좇다가 어느 날 그런 느낌과 흥분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이내 ‘난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지도 몰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모트가 찬송가 539장에서 한 고백은 이것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의 보혈과 의 위에 세워져 있네. 나는 가장 달콤한 기분들, 감정들조차도 신뢰하지 않네. 오직 예수의 이름만 의지할 뿐이네 나는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위에 서 있네. 다른 모든 토대는 무너지는 모래일 뿐이라 다른 모든 토대는 무너지는 모래일 뿐이라 주님의 사랑스런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질 때, 나는 그 그늘을 보지 않고 그의 변치 않는 은혜를 의지하리라. 높고 거친 풍랑이 일 때마다 나는 나의 닻을 그 은혜에 두리라‘
우리가 ‘의의 흉배’를 잘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 경험 같은 것에 흔들리게 되고 마귀는 거짓 기분, 거짓 감정, 거짓 체험으로 우리를 미혹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은 이빨이 금이빨이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들에 심취하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의 장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고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 온 사망의 증상들인 질병과 귀신들림 같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몰아내시고 사망을 죽여 버리실 것이라는 하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사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지요? 여기서 질고 ‘호리’가 질병입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증상인 질병을 다 짊어지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이 마태복음에서 성취됩니다.
(마 8:26-2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계시의 차원이었지 사도들에게 임한 어떤 능력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바울 같은 사람은 사랑하는 디모데의 위장병도 못 고칩니다. 성경이 완성이 되면서 그러한 기적들이 무엇을 의미한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귀신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을 모두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러한 사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구속의 메시지가 그 기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쫓겨 가고 질병이 치유되는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되는 사망의 세력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현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러한 질병의 치유나 축귀, 기적 같은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즉 구원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질병과 귀신들림, 죽음 같은 것들은 사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귀신들림 하면 벌벌 떨면서 입에는 거품을 물고 예수님을 욕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건 정신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림의 정확한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풍속과 원리를 좇아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불치병에 걸리는 것을 질병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 적 관점의 질병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 영적 감염자들을 질병을 가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교회에서 ‘귀신이 나갔다. 질병이 치유되었다.‘ 라는 것은 단순히 암이 낫고 정신병이 치유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를 알게 되는 사건을 ’질병치유, 축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노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뭡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감정과 기분을 자극해서 진짜 은혜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귀신 들린 자들입니다.
(마 12:39) “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보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시는 모든 표적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우리가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나요? 정신이상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영원히 삽니까? 오히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결국 육신은 썩어질 유한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진정 소망해야 하는 곳은 저 하늘나라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배웠다면 그게 복인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영적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침으로 우리가 마땅히 영적으로 얻어 누려야 할 기쁨을 육 적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면 그게 어찌 귀신들린 자가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 적 기쁨을 세상에 쏟아 부음으로써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보이는 기적들 좇아 다니지 마시고 의의 흉배를 입으세요.
마지막으로 시련과 환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봐’라고 절망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나 부귀영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룻기를 통해서 거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십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에 이민을 갔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죽게 놔두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거지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룻 1:20-21)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시고 치셨다고 했습니다. 풍족했던 자기를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룻이 그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룻은 지금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하나님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어떻게 처참하게 만들었는지를 곁에서 다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적인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를 망하게 만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외적인 환경의 몰락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것들, 남편과 두 아들을 의지하던 나오미에게 ‘나만 의지하라’고 그녀가 세상에서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그게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시련과 고난 앞에서 절대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겸허히 순종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처참하게 망해버린 나오미의 삶 속에서 다윗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우리의 목표지점이 그 하나님의 목표지점과 맞아 떨어지기만 한다면 도대체 뭐가 우리를 미혹할 수 있으며 무엇이 우리를 낙담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목표지점과 우리의 목표지점이 서로 다른 곳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잘 정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에게 넘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항복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의를 알고 깨달은 사람은 마지막 때의 의인의 부활을 소망하며 반드시 자신의 손발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행 24장 15절과 16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행 24:15-16) “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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