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김성수 목사)
(요 17:6-8)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적 기도 중 ‘하나 됨’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부탁하시는, 성도와 하나님의 하나 됨, 성도간의 하나 됨이 전부 우리의 ‘자기 부인’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부인에 의한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성경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점층적이며 반복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역사가 하나님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의 우발적 범행에 의해 시작이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현실은 전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도덕적 피조물의 상태를 죄와 악으로 규정하시고, 그 죄와 악이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의 자식 유다처럼 소멸되고,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회복이 되어, 영원히 반역과 모반과 교만을 꿈꿀 수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결국 완성이 될 것임을 설명하시기 위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멸망의 자식 유다, 그리고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 그리고 인류 역사의 종국 등을 설명용 소품으로 사용하셔서 그 구속의 전 과정을 우리에게 설명하시는 것이라 했지요? 그게 우리의 삶 속에서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인류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 됨이 성취가 되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의 자아가 부인되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수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청사진을 작정이라 하는 것이고, 그 작정이 성취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계획되어지는 것을 예정이라 하며, 그 작정과 예정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섭리라 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섭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을 때, 그 목적이 있는 섭리를 특별히 경륜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중을 떠나서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능력과, 그 분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6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세상 전체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성부 하나님이 당신께 주신 사람들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창세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작정 속에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으로 택해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만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내려와 그 분을 나타내시는 것과 대조하여 예수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났다는 그런 표현인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이름이 그 사람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쓰인 동사의 시제들이 미래가 아니라 완료와 부정과거 시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교회는 그렇게 되어 질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켰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동사의 시제로 직설법 완료시제가 쓰였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6절의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제자들만을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얼토당토한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제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7절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의 행사로 알았다고, 역시 완료 시제를 써서 표현을 하시고 8절에서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았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도 알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쓰인 동사는 전부 부정과거시제입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분임을 알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님을 보내신 것을 믿은 사건은 이미 과거에 영 단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잠시 후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시 갈릴리로 고기를 잡으러 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모든 희망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눅 24:21)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의 제자였던 글로바와 그 아내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즉 유대인들의 민속메시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십자가에서 모든 희망을 다 빼앗겼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세상의 희망을 기각당하고 새 생명을 부여 받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도, 역시 제자였던 글로바와 그 아내와 별반 다를 바 없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모두 떠나 뿔뿔이 흩어졌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도 의심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조차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도 의심을 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도 갈릴리로 고기를 잡으러 떠났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갈팡질팡 이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자 모든 것이 퍼즐이 맞추어지듯 맞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 군데만 확인하고 가지요.
(막 16:13-14)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 하니라 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 일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이 믿었다고 하셔놓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의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지금 그들이 믿었다고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셔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당신과 제자들을 벌써 연합시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셨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전가시켜서 제자들이 한 것으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이 우리에게 거저 전가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의 구원과 성화와 영화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은혜로 진행이 되며, 은혜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납작 엎드려 순종을 하게 될 때, 성화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 영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 과정을 성경이 ‘믿음’이라 합니다. 제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어떤 분들은 조금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히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에서 믿음의 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가 ‘알케고스’입니다. ‘알케고스’는 ‘통치자,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이 믿음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번역이 된 ‘텔레이오테스’는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고, 예수님에 의해 지배되며, 예수님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쉬운 말로 믿음은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갈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후반부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라는 어구를 헬라어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며, 그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분량을 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구는 믿음이 좋다는 둥, 누구는 믿음이 적다는 둥, 이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믿음은 한 믿음이며, 한 번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엡 4:5)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왜 주님이 아직 십자가도 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이 믿었고, 알았고, 지켰다고 완료와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셨는지 조금 감이 잡히시지요? 감 잡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감 정도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을 확실하게 정리를 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그동안 제가 믿음에 관한 설교를 여러 편했습니다만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이 믿음에 관해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정리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우리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 믿음의 정체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들어서 믿음의 개괄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다음 시간부터 좀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믿음의 내용들을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불러서 그 오해를 풀어보며 믿음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눅 17:5-6)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마 17:19-20) “19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둘 다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에 관해 말씀을 하시는데 두 군데에 다 겨자씨가 소품으로 등장을 합니다.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그리고 산이 뽑혀서 그들이 가라는 곳으로 움직일 거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에도 그런 일은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말려 죽이신 곳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1:21-22)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여기도 보시면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면서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있으면 산을 들어 바다로 던질 수도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비롯하여, 역사를 살다간 모든 믿는 자들은 결국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이 살다가 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자씨는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보다 더 작은 것이 없을 만큼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종종 비유로 쓰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것은, 믿음이 아예 없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믿음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명확하게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엡 2:8)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보시다시피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사 이래로 모든 믿는 자는 겨자씨 같은 믿음도 없습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상기한 일련의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과 우리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곳에서는 믿음을 수식하는 말로 ‘겨자씨 같은’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겨자씨만한’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믿음의 분량을 말씀하신다고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믿음의 질을 설명하시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그 원어는 같은 것입니다. 그건 질이어도 상관없고, 양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호스’라는 부사는 두 군데 다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복잡한 설명들을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냥 단순히 그러한 어구는 공히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동시에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실 때에 사용되던 어구들이었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시면서 겨자씨 운운하신 곳이 있는데, 바로 변화산 아래의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 17:14-20) “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 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19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 에피소드는 변화산 위의 현실과 그 아래의 현실의 대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가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형상으로 변모하셔서 예수님의 출애굽(departure)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 변화 산 사건이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으심과 수난, 그리고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불안해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출애굽, 즉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로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미리 조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무력한 제자들 위로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져서 성취가 되는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 변화 산 사건인 것입니다. 참고로 이 변화 산 사건은 출애굽 사건 속에서의 시내산과 병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여 광야를 거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게 되지요? 모세로 대표되는 율법은 인간의 노력과 애씀에 의해 구원이 결정이 되는, 예수로 향하는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는 그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금송아지 사건의 죄악상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구절이 출애굽기 32장 1절입니다.
(출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 함이니라”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우리’입니다. 인간 중심의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신앙인들은 뭐든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자기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로 모형 화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져야 할 멸망의 자식, 죄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 죄에 다다르자 심판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 판을 깨버리지요? 그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이스라엘 백성 3,000명이 도륙을 당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변화 산은 율법의 산이 아니라, 은혜의 산입니다. 예수님의 출애굽,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은혜로 완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변화 산 사건입니다. 그 은혜가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거기에는 금송아지 사건과 똑같은 자기중심의 신앙, 즉 인간의 죄악이, 귀신들린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을 소품으로 하여 또 다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죄가 도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도륙이 되고, 귀신들림이 해결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공로 앞에서 무력한 자신들을 인정하고, 십자가만 꼭 붙드는 티끌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는 게, 변화산 아래의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사건이 함의 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가 생산해 내어, 우리 안에 쌓아놓고, 우리가 능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저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라는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 믿음을 곡해하고 있는 자들이 믿음을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이미 열두 제자 파송 때에 귀신들을 쫓아본 경험이 있는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믿음으로 존재하는 줄 착각을 하고 열심히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잘도 나가던 귀신이 이번에는 꼼짝을 안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려 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보고 있었고, 귀신 들린 아이는 여전히 그 상태였기 때문에 아마 등에 식은땀깨나 흘리며 열심을 부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을 리 만무이고, ‘믿습니다.’하며 자신들의 믿음을 들먹이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없는 믿음을 짜 내어서 연신 ‘믿습니다.’를 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장을 전부 아우르시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였습니다. 그 모든 행위와 시도들이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과 마찬가지로 도륙당해 마땅한 패역함이었다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을 다시 보세요.
(마 17:19-20) “19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냐고 주님께 묻자 주님이 ‘너희들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어구를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겨자씨처럼, 없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능력이 나오고, 남들에게 과시도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근거로 귀신을 쫓아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건 믿음의 본질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이고, 믿음의 정의도 잘 못 내리고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들은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능력을 발휘하고 자랑이 되는 그런 왜곡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들은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아닌, 능력이 발휘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오히려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주변에서 자기는 믿음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전제가 된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열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우리가 믿음 장이라고 하지요? 믿음은 이러한 것이다, 하며 믿음을 설명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 장에 나열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끌려가서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사라가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모세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음을 발휘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음으로 모든 일을 행했다고 합니다.
(히 11:7-8,11,24)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이렇게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질질 끌려서 자기들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모든 역사를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어인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작정과 예정이 다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그 과정을 주관적 믿음의 성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벧전 1:5)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한 순간도 저를 놓지 말아주세요.’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겨자씨가 되는 것입니다. ‘없음’이 되는 것입니다. ‘nothing’이 되는 것입니다. 그 없음 위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든 역사를 ‘믿음’이라 합니다. 그것을 원시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아벨의 사건입니다. 아벨이라는 단어 자체가 ‘nothing’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없음, 아무것도 아님, 겨자씨’가 이 땅에 내려와 티끌처럼 세상에게 맞아 죽고, 그 공로로 셋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연한 순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겨자씨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살면서 십자가까지 져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보잘것없는 겨자씨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없음’이 되어서 죽자,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예수의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예수의 믿음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에게도 예수의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우리를 완전히 비워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꾸 비워지다가 완전히 비워지게 되는 날(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과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귀신들린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폭로하시고, 그 귀신들린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귀신들림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귀신들림이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상태를 귀신들림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 산 밑에서의 제자들의 행위는 믿음의 발휘가 아니라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소품으로 사용하여 제자들의 상태와 세상의 현실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귀신들림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인간 측에서의 시도나 노력도 배제된 순결한 십자가만이 유일한 길임을 거기서 한 번 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믿는 자들은, 자신들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구속의 현실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막 9:21-27)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 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여기에 보시면 ‘죽음’이라는 단어와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26절을 보시면 귀신들린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리켜 죽었다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 때 그 아이가 완전히 회복이 되어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일으키다’라는 단어는 마가복음 14장에서 그대로 쓰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보세요.
(막 14:28)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여기 ‘살아난 후에’로 번역이 된 단어가 ‘에게이로’라는 단어로, 귀신들린 아이를 일으키실 때 사용되었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변화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하는 예수님의 사역이 모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앞에서의 신자는 ‘없음, 겨자씨, nothing’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24절에 아이의 아버지가 ‘믿습니다.’라고 해놓고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귀신이 나갑니다. 귀신은 믿음에 의해서 나가는데 ‘난 믿음이 없습니다’그랬더니 귀신이 나갔습니다. 그게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는 겨자씨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만 꼭 붙드는 사람에게 변화 산 위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침노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을 보면, 진짜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요한계시록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성취가 된 마당에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겨자씨가 되고, 없음이 되고, 티끌이 되어, 이 세상의 소원 성취나, 재화의 획득이나, 질병의 치유나, 비전의 달성 등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눈을 두게 될 때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 자(겨자씨 같은 믿음의 소유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산을 들어서 바다로 던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형식의 산, 율법의 산, 유대주의의 산, 인본주의의 산으로 상징되는 시온 산에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지요? 그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하지 않은 인간의 행위라 했습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저주받아 죽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모두 다 불타버릴 것들입니다. 그러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처럼 그 옛 성전의 산, 율법의 산, 인본주의의 산,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의해? 겨자씨의 믿음에 의해, 즉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그 시온 산이 바다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좀 읽고, 기도 좀 한 뒤, 자기에게 믿음이 좀 있는 것 같을 때, 산을 바다로 옮기려고 애를 쓰는 그런 시도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은 그 산이 아니니까요.
이제 멸망의 자식 유다가 왜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했는지도 이해가 가시지요? 십자가는 구원에 있어서의 모든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열심을 기각하고 소멸해 버린단 말입니다. 유다는 단순히 돈 30냥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돈 궤를 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 돈은 아무 때고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은 30냥은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공정하기로 유명한 로마 법정에 세워서 그 분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자기들을 데리고 로마를 전복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데에 걸림돌이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 예수님이 로마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응전을 하시게 되면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발휘가 되어 삽시간에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이 유죄 판결을 받으시자 돈 30냥을 집어던지면서 ‘그는 무죄’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전부 무서워서 숨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멸망의 자식 유다의 죽음은 십자가 앞에서의 인간의 지혜와 노력과 애씀, 즉 구원과 만족을 향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시도들인 죄악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 겨자씨 같은 믿음이 없어서 귀신이 나가지 않은 것’이라고도 하시고, ‘기도와 금식 이외에는 이런 것이 나가지 않는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믿음과 기도와 금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뭡니까? 기도는 자신이 정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앞에서 완전히 항복을 하는 것, 즉 완전한 자기부인을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먹 거리를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자기부인의 표현이 금식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자신을 자해해서라도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티끌 됨을, 겨자씨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자는, 기도할 때에 이미 받은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뜻과 그 분의 행하심 앞에 완전히 자기를 드리는 겨자씨들의 자기인정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있는 자들에게서 자기의 소원이나 비전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구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을 곡해하여, 의심치 않고 기도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다는 식의 유아적 해석을 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 역시 십자가 앞에선 겨자씨들의 티끌로서의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금식과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이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 사건 바로 밑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결론처럼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마 17: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 하더라”
그렇지요? 이렇게 변화 산 아래에서의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형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고는 귀신들려 있는 세상이 절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그 분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티끌 됨과 겨자씨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그 분의 능력과 그 분의 뜻, 즉 하나님의 믿음에 자신의 인생을 몽땅 걸어 버리는 것을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우리 자신이 겨자씨보다 작은, 티끌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난 왜 이렇게 믿음이 없지?’라든지 ‘난 아무래도 가짜인 것 같아’라든지 ‘난 왜 이렇게 성경이 믿어지지 않지?’ ‘나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라는 등의 고민을 하실 때, 여러분은 겨자씨 같은 진짜 믿음을 발휘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난 믿음이 참 좋아, 누가 나의 믿음을 따를 수가 있으랴, 나에게는 믿음의 능력이 있으니 나에게 와서 기도를 받으라’는 등의 교만을 떠는 이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적 판단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난 신앙이 좋은 사람, 난 신앙이 나쁜 사람’등의 판단을 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고,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이렇게도 의심이 들고, 저렇게도 실망이 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언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어이며,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고지를 향해 한발 한발 끌려가고 있는 중임을 잊지 마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완전히 항복시키셔서 우리에게서도 주관적인 믿음을 완성해 내실 그날을 소망으로 기다리십시오. 그게 연합입니다.
이 땅에서는 여러분에게 의심이 들고, 낙심이 되고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이 여러분을 이끌고 계신만큼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 같을 때에 조차 안심하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수지맞은 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실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용서를 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겨자씨의 믿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겨자씨 같은 믿음의 전제로 말씀을 하신 부분을 읽고, 왜 우리는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 확인 도장을 찍고 오늘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눅 17:3-6)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 같은 믿음이란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선행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겨자씨 같은 믿음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용서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나와 있지요? 그건 무한대의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셔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의 요구 다음에 겨자씨 같은 믿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무한대의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이지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여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이끌고 계신 하나님의 믿음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시고, 늘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하는 쉬지 않는, 기도에 힘쓰시며, 그 모든 일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우리의 범사에 감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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