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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21.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김성수 목사)

 

 

(요 17:11-12, 22-23)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시편 110편 1절과 누가복음 20장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원수의 머리를 밟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원수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는 도덕적 피조물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게 하고 하나님이 떠난 자리를 이 세상의 힘과 가치로 채우게 하는 힘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권능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은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힘과 가치들을 우리에게서 끊어내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 했지요?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지금도 대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교훈하시며, 왕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의 자리로 끌어 내리시는 통치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바로 그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대 제사장적 기도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에 전부 요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를 잘 공부하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가 될지 명확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에 쉐마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 사랑에서 필연적이며 자연적으로 격발이 되는 것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의 완성을 이웃 사랑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을 율법의 정수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인간들이 정의하고 이해하고 있는 국어사전 속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우리 성도가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세상 적 가치와 힘을 이웃에게도 똑같이 누리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한 몸이 된 교회의 본질, 즉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예수를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의 교회’로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 속에서 내 이웃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 속에서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강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훈계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웃 사랑입니다.

 

따라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 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취해 놓은 구원의 현실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한 몸으로 건져진 구원의 현실을 이해하고 깨달은 이들의 자기부인의 삶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인생과 역사 속에서 여전히 오염의 형태로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옛 자아를 열심히 부인하며, 이 세상의 힘들에게 가 있던 그들의 사랑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 하나님과 이웃을 참된 ‘나’로 인정하고 수긍하여 그들을 사랑하며 사는 자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님 나라로서의 완성의 자리를 연합, 혹은 오늘 본문의 단어로 ‘하나 됨’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이 되어 절대 순종과 절대 의존이 실현이 되는 그곳이 바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 됨’에 집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의 하나 됨, 성도와 예수의 하나 됨,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 됨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지요?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내용이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어주세요. 먼저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요 17:11)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구절에서 본문 해석의 키워드를 찾으라면 저는 ‘세상’과 ‘보전’ 그리고 ‘하나 됨’을 뽑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부재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시는 중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고, 그 세상 속에서 겪어내야 할 일들에 대해 주님은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그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전의 목적과 결과가 하나 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에 전제가 있지요? ‘우리와 같이’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셨던 것같이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성도의 하나 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22절과 23절을 함께 비교하며 보아야 합니다.

 

(요 17:22,23)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말씀이 나오고,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주님의 간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그건 우리가 17장 1절을 공부할 때 이미 살펴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은 십자가였지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투영이 되었으며, 그러한 철저한 순종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대접을 받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게 ‘독사,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난 것임과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위대한 영광의 결정체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철저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영광의 삶을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이제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완전한 인성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한계 속에 살면서도 성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할 과제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유혹을 당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았지만, 그분은 육신의 장막을 뛰어 넘어 영적인 존재로 살아야 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심으로 철야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새벽이면 버릇처럼 일어나셔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끊임없이, 간절하게, 친밀하게 기도로써 산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부 하나님의 뜻에서 분리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그분을 보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누구나 성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어 사는,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영광을 주시고 아버지와 당신과 제자들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은, 당신께서 이 땅에 내려와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좇아 아버지를 나타내어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임을 보인 것처럼,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잘 감당해 내어 아버지의 뜻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잘 살아내도록 도와달라고, 자기부인과 순종과 십자가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성도의 삶에 일어나게 될 십자가의 삶과 자기부인의 삶과 고난의 삶의 필연성과 확정성을 선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도우심의 은혜로 그 삶을 넉넉히 이겨내며 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삶이 성도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입니다.

 

이제 두 번째 ‘성도의 하나 됨’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23절과는 달리 11절과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십니다. 여기에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성도의 하나 됨’이라는 단어의 개념부터 재정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하나 됨을 정의할 때조차, 공통된 관심사나 공통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울타리를 쳐 버리는 식의 국어사전 속의 하나 됨의 개념을 가지고 교회의 하나 됨을 정의하곤 합니다. 주님이 지금 그런 하나 됨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당신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자기들끼리라도 똘똘 뭉쳐서 세상을 이겨내게 해 달라는 그런 배타적 하나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게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삼위일체의 하나 됨인가요?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을 본받아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이나 그것을 본받는 성도의 하나 됨이 그러한 종류의 하나 됨이라면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 됨이 깨지는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 됨이란 조직의 강화나 비슷한 점을 많이 만들어 내려 애를 쓰는 그러한 유사성의 추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통된 것을 찾아 똑같아 지자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unity, 연합이라는 것은 유사성이나 동질성에 관한 단어가 아닙니다. unity는 uniformity나 conformity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 됨이란 다양성과 다름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하나로 모아 결국 그 목적을 성취해 내는 하나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다양함과 다름으로 당신들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인간의 구원을 향한 각각의 역할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다름과 다양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그게 하나 됨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또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 됨을 양산해 내는 하나 됨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하나 됨과 같은, 우리 성도의 하나 됨이란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식하며, 서로를 품어 안고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성도의 거룩을 향해 자기를 비우는 것, 즉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성도의 이웃 사랑을 하나 됨이라고도 하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다양함과 다름 속에서 서로를 존귀하게 대하며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하나 됨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 됨의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전도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 됨의 삶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것처럼 성도의 하나 됨, 이웃 사랑의 삶을 통해 다른 이웃 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지고, 우리 이웃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이들이 이웃이라는 울타리, 즉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성도의 하나 됨은 바로 그 하나 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성도의 하나 됨이나 성도들 간의 하나 됨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사랑이라고도 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이라고도 한다고 했지요?(사도신경 강해 16번 참조)

 

그런데 그 하나 됨의 삶이 천국에서는 일반적인 삶의 원리인데 그 하나 됨의 삶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때 세상이 그 하나 됨의 삶을 공격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고, 품어 안아 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에게 하나 됨의 삶을 사는 이들은 약자로 보이게 되고, 세상은 그 약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에 남겨진 성도들에게 바로 그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모두 듣도록 하나님께 그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바로 그 기도를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 동생들을 보전하시어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 됨을 잘 지켜 내도록 도와주세요.’ 그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 됨의 기도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확실하게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 됨의 삶을 살게 될 때 겪게 되는 고난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말 성도의 고난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2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성도가 하나 됨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도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 자기 부인의 삶, 순종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심 같이 그 하나 됨의 삶을 사는 이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당신 안에 채우심으로 완전한 순종의 삶, 하나 됨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 고난으로 십자가로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세상은 ‘저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일리도 없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라고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참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을 보호해주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굶어 죽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왜 이런 일을 막아주지 않느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늘의 사랑은 하나님과 연합되는 지복의 상태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과 하나님이 절대적 순종의 상태로 연합이 되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목적지를 바라보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과 연합시켜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한 한 무리가 있으니 그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과 연합하여 영생을 살 존재들을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모든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생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해 이 세상의 힘들을 기각당하고 부정당하는 사건과 사고를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사람이 쫄딱 망해서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상황 자체는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하나님의 저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온 정성을 기울이느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소홀히 했던 사람에게 자식으로부터 큰 실망을 하게 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과 더욱 긴밀하게 교제를 하게 되었다면,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저주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신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과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였습니다. 그 상태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의 완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은혜를 입고, 하나 됨의 삶, 자기 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잘 살아낼 때에 세상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손가락질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세상에게 증거 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십자가의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같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가시라는 단어 ‘스콜롭스’라는 단어는 생선 가시나 선인장 가시 등의 작은 가시가 아니라고 했지요? ‘스콜롭스’는 전쟁 포로 중 영향력이 있는 적장들을 본보기로 뽑아서 쇠나 나무 꼬챙이를 가지고 옆구리를 뚫어서 끌고 다녔던 그런 무시무시한 말뚝을 말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울이 자신의 병을 ‘스콜롭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고후 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 이니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계신 삼층 천에까지 올라갔다 오는 등, 너무 많은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혹시 그가 교만해 질까봐 하나님이 적당한 병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질병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쳐 달라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 번 기도라는 것은 죽도록 기도했다는 의미라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교만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시기 위해 ‘스콜롭스’라는 무시무시한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성도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전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병을 앓고 있는 바울을 보며 ‘네가 믿는 하나님이 왜 그런 병도 하나 안 고쳐 주냐?’고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그와 하나님의 연합(사랑)의 도구로 쓰인 것이고, 그가 그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처사에 순종하도록 하셔서 하나님과 그가 하나가 되는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에 관한 본보기의 삶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이 땅에서 이 세상 풍속을 좇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길에 십자가와 자기 부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연합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 됨이며, 그게 바로 하늘의 사랑 속에 있는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23절의 내용이 이제 완전히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한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됨의 삶은 이미 창세기부터 계시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강조하려 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삶과, 하나 됨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의 필연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서 왜 그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지 아십니까?

 

(신 7:6-8)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모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언약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말합니다.

 

(창 22:17-18)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 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는데 아브라함의 씨, 즉 그의 후손을 크게 성하게 하여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씨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갈 3:16)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그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기 보다 예수님만을 사랑하신 것이고,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품으신 이스라엘의 대표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예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장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인 것이며, 진짜 장자이신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그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창세기 22장에서 그 후손은 대적의 문을 얻는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 언약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나왔던 언약입니다.

 

(창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바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오는 씨와 같은 인물입니다. 후손이라는 단어와 씨라는 단어는 ‘제라’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요한 계시록에도 나오지요?

 

(계 12:3-6)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에서 여자는 교회를 말하고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바로 요한계시록 12장의 철장을 든 아이인 것입니다. 교회인 여자가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교회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반드시 예수와 같은 하나님 나라 자녀로 새롭게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신 성자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지는, 십자가라는 해산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가 교회를 낳는다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창세기 22장에서 찾아 본 바에 의하면 대적의 문을 취하여 승리를 선포하게 될 아브라함의 씨는 문자 그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믿음의 후손, 즉 교회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걸 그대로 요한계시록 12장으로 가져가 대입을 해 보면 여자가 ‘교회’를 낳는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고 완성되는 것은 필연적이며 확정적이라는 걸 선언함과 동시에, 그렇게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데에는 성도의 삶에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수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작은 모형이 라헬의 죽음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창세기 강해 ‘예수 지옥, 김밥 천국’ 참조) 라헬이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지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임신도 할 수 없었던 라헬이 약속의 후손인 야곱의 선택과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의 어미가 됩니다. 그 옛사람으로서의 라헬이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완성하고(베냐민을 낳으므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주요지파를 완성한 것이므로)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 즉 교회가 탄생하는데, 거기가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걸 마태가 이렇게 인용합니다.

 

(마 2:16-18)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오심에서 기인한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의 살해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라헬의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라헬은 옛 사람을 입고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신부를 상징한다고 했지요? 그 라헬이 두 자녀, 즉 교회를 바벨론에게 빼앗겼습니다. 그건 예레미야 31장에 자세히 나오지요? 지금 이 마태복음 2장은 바로 그 예레미야 31장 15절 이하를 인용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 화 되어 있던 이스라엘이 라헬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다른 말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것을 마태가 예수님의 오심에서 인용하여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데에 라헬의 죽음이 전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하늘 백성으로 완성이 되고야 마는데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과 십자가, 즉 하나님의 해산의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이며, 우리 측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는, 성도의 하나님 나라 자녀로서의 완성이 옛 사람의 죽음(라헬의 죽음), 다른 말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나이에도 죄의 삯인 사망에 노출된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며, 통곡하고 있는 라헬이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잃었던 자녀가 돌아옴으로써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그 죽은 자들을 살려내셔서 완성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예수에 의해 구원을 얻은 이들 또한 예수가 겪으신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 35:16-19) “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라헬이 베냐민을 어떻게 낳습니까? 심히 신고하다가 낳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은 뒤에 이스라엘이 완성이 되고 옛 사람 라헬이 죽는 것입니다. 그 일을 베들레헴의 예수가 시작하시는 것이고, 예수에 의해 출생한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며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창 3:16)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바로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편만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과 완성에 관한 원시 모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짓고, 그들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지고, 결국에는 그들이 자식을 낳게 되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창세전의 작정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십자가도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 얻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사신, 그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게 이러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딤전 2:9-15)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 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권고는 일차적으로는 에베소 교회의 특별한 상황을 지적하며 여자들의 경거망동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서 여자는 절대 남자를 다스리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여자는 절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조용히 배우기만 해야 한다는 그러한 남성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신비한 은사를 가진 여자들이 그 은사를 자랑하며 교회를 소란스럽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에게 공개석상에서 곤란한 질문을 하는 등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여자들에게 남편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을 것이지 왜 공개석상에서 다른 남자들에게 질문을 해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느냐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걸 모든 여자와 남자에게 적용해서 여자는 절대 교회에서 입도 뻥끗하면 안 된다고 공식화하여 가르치는 건 잘 못된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나 유오디아나 순두게를 자신의 동역자로 부르며 그들의 사역을 지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에도 그러한 여자들의 경거망동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바울은 창조의 질서를 내세우며 여자의 잠잠함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아닌 여자가 먼저 죄의 유혹을 받은 것을 지적하며 여자들의 겸손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지막 절에서 여자의 해산을 들먹이며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아담과 하와를 예로 들어 에베소 교회의 여자들을 교훈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 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빠진 여자, 하와입니다. 그들은 절대 남편이신 하나님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여자의 죄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여 십자가를 진 것처럼 인생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여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구속사의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서 아담, 그리고 하와에서 짐승으로 이러지는 질서 체계가 제대로 잡혀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해산의 고통,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여자인 교회의 산고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멸망의 자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 17:12)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여기에서 멸망의 자식은 유다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식 유다는 어떤 무리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성경에서 예언이 되어있던 사람입니다. 쉬운 말로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을 배반하여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을 하는 한 개인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소품이었던 것입니다.

 

(시 41:9)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 55:11-12) “11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12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신뢰하던 친구요, 하나님과 함께 먹던 자인데 하나님을 배신한 최초의 인간이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죄를 내포하고 대표하는 존재가 유다라는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그 아담과 하와의 죄는 여인의 후손에 의해 머리를 밟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여자인 교회는 원수인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라는 멸망의 자식이 교회의 탄생에 앞서 배반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의 멸망의 자식이라는 단어가 사도 바울의 서신 데살로니가후서에 똑같이 등장합니다.

 

(살후 2:1-4)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멸망의 자식이 등장할 거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유다를 가리키는 멸망의 자식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딱 두 군데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는 하나님 위에 앉아서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그게 아담이며, 하나님을 팔아먹은 유다이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 죄 덩어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히 멸해질 것이고, 그 후에 순전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속의 순서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아담의 타락과 원시복음, 유다의 등장과 죽음 등이 성경에 설명용 교보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그러한 인본주의의 망령이 더욱 강력해져서 인간들이 그야말로 기고만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기고만장한 죄의 상징으로 어떤 인물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짓밟아 갈 것이고 지금도 그러한 배도는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될 때까지 당신의 일반 은총으로 그것들을 억제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모두 거두어 질 때 인간들의 자아숭배는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그게 사단이 무저갱에서 풀리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상징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죄를 모두 몰살시키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점층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살후 2:8) “8 그 때에 불법한 자(멸망의 자식)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이렇게 죄의 세력이 완전히 죽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들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 속에서도 일어나고, 성도의 인생 속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인생 속에서는 그 죄와 성령의 싸움이 전쟁처럼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과 마귀의 전쟁처럼 비유하여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자기부인의 삶이며, 하나 됨의 삶이며,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가 완전히 소멸되고, 우리는 순결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하나님 백성으로의 완성과정이 예수님과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그리고 십자가로 미리 교회에게 예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가 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무죄한 짐승을 죽여 덮어 주시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멸망의 자식이 나와 그 멸망의 자식이 죽고 교회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식이 죽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 속에서도 죄가 폭로되고 그 죄가 십자가의 삶에 의해 소멸 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완성지점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 완전한 심판이 올 것이라는 게 데살로니가 후서 2장 8절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타락과 짐승의 죽음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짐승에게 적용이 되어, 죽어야 할 아담이 짐승 안에서 죽고 아담이 살아나는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가 배신을 하고 그 유다가 죽음으로(멸망의 자식인 죄가 죽음으로) 교회가 완성이 되는 데, 그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 성도의 모든 죄가 죽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구속사의 완성이 우리의 자기부인의 삶과 십자가의 삶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탄생이 되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께만 의뢰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죄가 전부 사라진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모든 일을 경륜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성도의 삶 속에서 죄가 죽어가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왜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의 자식으로 택해놓고 그를 지옥에 보내시느냐?’라든지 ‘하나님이 다 계획해 놓고 지옥은 왜 만드냐?’는 식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면 안 됩니다. 유다는 하나님 백성들의 완전한 탄생이 어떤 과정 뒤에 이루어 질 것인지를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설명하기 위한 멸망의 자식, 소멸되어야 할 인간의 죄를 상징하는 소품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 유다처럼 소품으로 쓰이다 하릴없이 지옥 불에 타버릴 그런 티끌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멸망 받을 유다들과 구별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양육하시고 완성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유다가 불쌍하다느니,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라느니 그런 투정을 부릴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당신의 백성들만을 염두에 두시고 그들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멸망의 자식을 거론하기 전에 세상과 하나님 백성을 선명하게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요 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멸망의 자식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티끌들을 불에 태우시는 것은 절대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렇게 티끌로 지옥에서 함께 불탄다 해도 아무 불평 할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감격 속에서 찬양하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멸망의 자식들의 실체와 그들의 결국을 설명하기 위해 택해진 하나의 티끌일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성도의 삶이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지를 분명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창세기 때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작정이 되고 예정이 된 삶이므로 거기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 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시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이 세상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 됨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죄가 온전히 죽어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이겨내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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