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된 자의 개안으로 본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
(김성수 목사)
(요 9:8~41) “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 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 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 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24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는 7장과 8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객관적 진리 선포에 사람들이 전혀 반응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9장은 그러한 마른 뼈와 같은 죄인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러한 내용들을 훑으면서 구원은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자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그렇게 이 요한복음 9장은 단순히 예수님의 질병치유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이 그대로 용해되어져 있는 상징적 사건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역시 오늘 본문을 통해 구원의 시작과 끝,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구원의 즉각적이며 점진적인 다소 이율배반적인 양 면도 함께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5절과 36절을 보겠습니다.
(요 9:35-36)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날 때부터 눈이 멀어있던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죄인의 대표로 선 그가 부르심(소명)을 입은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부르심(소명)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상태를 구원이 완성된 구원받은 상태로 봅니다. 맞습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실수나 실패 없이 그 부르신 자를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세우고야 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작은 곧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그 상태가 구원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의 완성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구원의 즉각 성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보시는 바와 같이 이미 눈을 뜬 그 소경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어서 감사는 해야겠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실 때에는 그가 여전히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시면 눈 뜬 소경이 ‘내가 믿고자 합니다.’하고 말을 합니다. ‘믿습니다.’도 아니고 ‘믿겠습니다.’도 아니고 ‘믿고 싶습니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눈을 떠서 이제 그 눈을 뜨게 해 준 대상을 믿고 싶은데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매니안 주의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선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많이 다르지요? 지금 눈을 뜬 소경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보고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엡2:1)상태에서, 우리를 살려주신 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통해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눈을 뜬 소경이 ‘내가 그를 믿고 싶은데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은 이후에야, 다른 말로 눈을 뜬 후에야 예수에 대해 배우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마지막에 ‘내가 믿습니다.’라는 온전한 신앙고백을 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숙되어지는 과정을 신학은 구원의 점진성이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구원을 즉각적이며 점진적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이렇게 구원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천 년 만 년 이 땅에 사시면서 계속해서 가르치시지 왜 죽으십니까? 7장과 8장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십자가 복음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데 듣는 이들이 하나도 못 알아듣지 않았습니까? 구원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소경을 찾아오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주님이 신랑이 되어서 신부를 아무리 끌고 가려해도 신부가 말을 안 들어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신부 속으로 들어가 그 신부와 한 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렘 31:31-33) 어떻게요? 자신이 죄인들과 이겨지셔서 물에 빠져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신부인 우리 성도 안에 거처를 잡고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소경의 눈이 빛을 보게 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7장과 8장은 십자가 사건 이전인 구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9장은 십자가와 그 십자가로 인해 눈을 뜨게 되는 교회의 모습인 신약, 즉 새 언약의 성취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 소경의 개안 사건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한 죽은 자들의 소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떤 분이 그 본문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있느냐고 조금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 오셨는데 오늘 본문 35절을 보시면 거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힌트가 나옵니다.
(요 9:35)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께서 눈을 뜬 그 소경을 만나셔서 당신을 인자라 칭하시며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거기서 쓰인 ‘인자’ 는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자는 구약의 어딘가에서 인용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다니엘 서 7장의 ‘에나쉬 바르’ ‘인자’를 받는 말이라 했지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분을 받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실 때 항상 십자가를 예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인자의 들림 받음’이라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합니다.(3:14, 8:28, 12:32,34)
(요 3:14)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고 공관복음은 주님의 죽으심을 ‘인자의 넘겨짐, 혹은 버려짐’으로 표현을 합니다.(막8:31, 9:9,12,31, 10:33,45, 14:21)
(막 8:31)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이렇게 인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왕으로 등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승귀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막 10:45)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이렇게 ‘인자’라는 단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기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을 뜬 그 소경에게 ‘너에게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다니엘서 7장의 인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거든요. 네가 바로 그 인자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표본이라는 것이지요. 39절을 보시면 조금 더 분명해 집니다.
(요 9:39)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그렇게 당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오신 인자’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당신은 심판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심판이라 하면 좋은 것이 나빠지고 성한 것이 망가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의 심판의 내용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이 심판이 될까요? 물론 보지 못했던 자들에게 보게 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은혜가 입혀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신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바로 인자이신 주님께서 소경들 대신에 심판을 받으시고 소경들의 눈을 뜨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내용 중에 보지 못하는 자들이 눈을 뜨는 것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개안 사건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사망에서 살아나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소명과 중생 뿐 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성화의 부분과 영화의 부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그 때부터 신앙생활이라는 구원의 여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잘 보시면 처음에는 눈을 뜬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이라 부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선지자(17)’라 부릅니다. 그런데 33절에 가서는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자’라고 고백을 하고 38절에서는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눈을 뜨고 난 후 점차적으로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에 대해 이해하고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신앙의 성숙은 다름 아닌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유대인들이 몰려와 그의 개안을 시기합니다. 그리고는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끌고 갑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에 대해 설전을 벌입니다. 그는 ‘난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에는 내가 안보였는데 지금은 보인다는 사실이다’라고 하며 ‘내가 지금까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맞다’고 바리새인들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이제 눈을 뜬 그 소경이 세상과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출교를 당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가족과 친지와 이웃과의 이별을 의미했으며 직업도 가질 수 없는 잔혹한 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사람도 죄인으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교당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거나 나그네로 이리 저리 떠도는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그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도 외면 아닌 외면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부모는 자기 자식이 아침에 눈 먼 상태로 나갔다가 저녁에 눈을 뜨고 들어 온 것을 분명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출교가 무서워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로 전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모르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출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들은 살겠다는 것이지요. 보세요. 그냥저냥 동냥이나 하면서 한가롭게 살던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자마자 그의 삶에 폭풍이 몰아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향에서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쫓겨나서 가게 된 곳이 어디였습니까? 예수님의 품이었습니다.
(요 9:35)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그리고 그는 그러한 쫓겨남과 외면당함의 수난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진의를 알게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내가 믿나이다.’라는 성화의 완성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서정은 칭의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영화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며 그러한 성숙에 긴요하게 쓰여 지는 것이 바로 고난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이 ‘거룩(separate)’이라 부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이제 눈을 떠 진리를 인식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보게 된 이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적대시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멤버들 중에 조금 더디게 가는 사람이나 아직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정죄하거나 가짜로 매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너희 아빠가 누구야? 이 중에서 골라봐’ 내지는 ‘밥 먹을 때는 쩝쩝 소리 내면 안 된다’는 식의 요구를 하는 것과 똑같이 우매한 짓인 것입니다. 우리는 설사 그가 가짜라 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려 주고,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안아주며,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한국에 계신 한 성도님께 전화를 받았습니다. 팔순이 다 되신 할머님이신데 저를 아들처럼 사랑해 주시고 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분을 어머님이라 부릅니다. 그 분과 그 자제분들은 모두 우리 서머나 교회 설교를 한 편도 빠짐없이 들으시는 것뿐 아니라 저의 책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를 가지고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성경 공부를 해 오신 분들입니다. 그 가족들 모두가 얼마나 열심히들 하시는지 작년에 저희 교회 웹사이트가 한동안 공사 중일 때 그 어머님께서 큰 아드님과 손자를 미국의 저희 교회로 보내셔서 설교 CD를 구입해 가셨을 정도입니다. 보내시는 분이나 보낸다고 오신 분이나 그 열심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 가족의 큰 아드님께서 주위 분들을 모아서 역시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를 가지고 또 다른 성경공부를 만들어서 열심히 가르치고 계신데 그 성경 공부 멤버 중에 한 분이 지난 달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뜨셨다는 전화를 해 주신 것입니다. 이번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그 분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를 부인하셨던 분이고 기독교인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그렇게 질문을 많이 하시더랍니다.
저희 교회 설교도 누구보다 열심히 들으시고 책도 정말 열심히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셨답니다. 그러다가 약 두 달 전에 후두암 판정을 받으시고 한 달 간 투병을 하시다가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병상에서 말을 못하시니까 작은 white board에다가 써서 질문을 하시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들으시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래요. 그러다가 평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면서 세상을 뜨셨답니다. 그것을 본 그 가족들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절대 놓치지 않으시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다가 ‘내가 믿습니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받아내시고는 하나님 품으로 데려 가신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불과 얼마 전까지 누가 봐도 유기된 자처럼 보였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위 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경 공부에 초대하시고, 그 분을 위해 기도하시고, 기다려 주었더니 그 분이 누구보다 평안한 모습으로 제일 먼저 졸업학점을 채우시고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자기 신앙이나 성경지식을 자랑하지 마세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마가복음 8장으로 가볼까요?
(막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역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는 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눈을 뜬 그 소경이 사람들을 보면서 ‘나무 같은 것들’이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안수해 주시니까 그가 비로소 만물을 밝히 볼 수 있었습니다. 눈을 뜨는 것과 눈을 떠서 본 것을 인식하는 작업과의 사이에는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의 과정 간에는 상당한 시간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뜬 사람이 자기가 보는 것, 즉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것들을 인식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배워서 스스로 믿어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언어도단이지요.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칠(七)병(餠) 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자 바리새인들이 또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막 8:11-12)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2절의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는 어구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결연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대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이 표적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표적이 뭡니까?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표적은 십자가 복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미 충분하게 그러한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표적들을 단순히 신기한 이적의 수준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표적조차도 분간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표적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구원은 무엇을 보고, 경험하고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전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적을 한번 멋지게 보여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아닙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대에게 표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탄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제자들 더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신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해로운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을 수 있다는 바리새인들의 교만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시니까 자기들이 빵을 한 개밖에 안 가져 와서 나무라시는가 보다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 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나 칠(七)병(餠) 이어로 많은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의 생각처럼 이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실 메시아 왕국의 전주곡이 아니라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영적 굶주림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려 했던 것인데 제자들이 여전히 이 땅의 떡으로 다투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아니 우리 교회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역시 침을 뱉어서 그 눈에 바르시고 (그 죄인과 연합 되셔서) 그 눈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소경이 잘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고도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안수해서 또 치료해 주십니다. 그제 서야 잘 보이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다 치고 눈을 떴다고 하는 주님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어서 그들에게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괜찮다는 것이지요. 눈을 뜬 자들도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방 다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매하고 더딘 제자들의 영적 진보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환하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진리 앞에 세우실 것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눈을 뜬 성도들은 실수와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점점 오롯하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배워가는 것이며 복음에 대해 깊이 이해를 하게 되고 비로소 주관적 믿음을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어서 구원 받았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사 53:1-11)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여기에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일을 시키신 하나님과 그 일을 수행하신 예수님 말고 다른 등장인물이 있나요? 우리는 6절의 말씀에 단 한번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게 우리가 한 것이고 나머지는 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유기된다는 알매니언 주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참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확실히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아니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는지, 어떻게 그 분이 물 위를 걸으셨는지, 어떻게 그 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 언제 어떻게 그 분이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수많은 회의와 의심 속에서 믿음의 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때로 의심이 들기도 하고 때로 회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뜹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그 뜬 눈을 가지고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은 며칠이 걸립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알게 되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것입니다.
1862년 James Clerk Maxwell이라는 학자가 발표한 '전자기파 스펙트럼'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elements)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태양빛은 매우 다양한 요소들을 품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뿐입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은 전체의 빛 중에서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외선(the infrared)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과 자외선(the ultra-violet) 밖에 있는 많은 종류의 빛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빛들은 다른 방법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듣고 계시는 이 마이크로폰도 실은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한 것이고 라디오나 티브이 방송도 볼 수 없는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 우리 눈에 빛이 보인다고 해서 다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반짝입니다. 그 별빛을 보고 우리는 "아, 저 멀리에 어떤 행성(planet)이 있겠구나!"라고 추측합니다만, 천문학자들(astronomers)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별들 중 적지 않은 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행성으로부터 우리 지구까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행성에서 출발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가 되면 이미 그 행성은 소멸되어(destroyed)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우리 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허상(phantom)이고 무엇이 실상(reality)입니까?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입니까? 우리 눈의 능력이 이렇게 제한된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실상과 허상을 가려낼 수 있단 말입니까? 과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은 태도입니까? 그리고 눈에 보인다고 해서 존재한다고 단정하는 것을 옳은가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으며 보고 있는 것이 실상인지 허상인지도 잘 알 지 못하는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있는 실상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는 데에도 아주 긴 시간이 걸립니다. 하물며 그것이 영적인 것일 때는 어떠하겠습니까? 구원의 과정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 침투작전에 의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제 서야 그의 눈과 귀가 열려 하늘의 비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상을 또렷이 보기 위해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며 그 과정 또한 아주 서서히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회의하고 의심하며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진보가 이렇게 더딘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80년대부터 유행했던 ‘구원의 확신’을 묻고 확인하는 일부 대학 선교단체의 운동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경험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이 안 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자신이 확신할 수 없을 때부터 이미 우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 앞에서 침을 뱉으시고 그 침으로 진흙을 이기실 때 소경은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러한 행위는 이미 소경에게 일어날 개안(開眼)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뜬 후에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분을 믿고 싶었음에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을 얻은 후에 예수님에 대해 너무 모를 수 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확신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님을 배우고 알아가게 되는 것이며 결국에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 9:38)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fact로 볼 때와 direction으로 보아야 할 때를 잘 구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진흙을 눈에 바른 후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눈을 씻고 눈을 뜨게 된 후 유대인들에게 출교를 당하고 주님을 만나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소중한 fact이기도 하지만 구원의 서정을 담고 있는 direction으로 보아야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대할 때 그 표면적인 사건에만 머물지 말고 그 속에 상징을 담아 전체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약도 속에 그려져 있는 각 지점들은 하나의 상징적 표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 또한 실제 거리의 몇 백분의 일, 혹은 몇 천분의 일에 해당하는 축약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것은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순서와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고백까지의 시간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참 고백이 나오기 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눈이 먼 소경이 눈을 뜨고 결국에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 성도의 시작과 결국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성도가 그에게 맡겨진 신앙의 여정을 통과하여 두 번째 주님을 만나는 그 부활과 영화의 자리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 13:12)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소경이 두 번째 예수님을 만나 ‘내가 믿나이다.’하고 그 분을 온전히 믿은 사건은 바로 이 영화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객관적 믿음을 부여받아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하는 주관적 믿음의 완성의 자리는 우리 주님의 재림 때, 다시 말해 우리 몸의 구속이 완성되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것으로 부활이 될 때인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신앙 고백을 하겠지만 우리가 이 죄의 몸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그 고백이 불완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성경을 통하여 또한 인생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를 배우며, 죄로 인해 소경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날 때부터 소경된 자리에서 누가 어떠한 일을 통해 우리를 건져내었는지를 배우며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영화의 자리로 한발 한발 걸어가면서 참된 주님의 종으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세상으로부터의 출교와 외면과 공격과 위협이 수단과 방법으로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서의 삶을 기꺼이 살아내며 오로지 목표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온전한 고백을 하는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여야 합니다.
다음 주에는 우리가 구원 받기 전의 상태, 즉 소경되었을 때의 상태와 눈을 떴을 때의 상태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살펴보고 우리는 과연 진짜 눈을 뜬 사람들인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눈을 감고도 눈을 뜬 자들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까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하고 함께 결단을 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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