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김성수 목사)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 시간까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확인하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사랑은 감정으로만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기분도 아닌 선택이며 의지의 발동이라는 것도 공부했지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는 절대 그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3장 17절 18절 19절은 모두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살펴 볼 것입니다. 여러분, 1977년에 퓰리쳐 상을 수상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 기억나십니까? “뿌리” “Roots"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자신의 조상 쿤타킨테의 이야기를 소설로 그려 놓은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고단한 노예의 하루를 마치고 쿤타킨테의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쿤타킨테의 할머니로부터 자신들의 뿌리,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만딩고 족의 얼마나 용맹스러운 용사였으며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도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노예로 팔려오게 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쿤타킨테는 아주 자긍심 있고 용기 있고 지혜로운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한 뿌리에 대한 의식과 소속감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안정감을 주고 자긍심을 줍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의식도 주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강한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 소속감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씁니다. 그래서 힘없는 어떤 무리를 편을 갈라 소속감을 주고 그 편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만들어 주면 금방 그 무리는 힘이 생기곤 합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뿌리를 찾아 올라가서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밝히 확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작업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큰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함께 하는 성경공부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그처럼 이웃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로마서를 처음부터 쭉 리뷰를 해드릴 것입니다. 성경의 백미 하면 누구나 “로마서”를 듭니다. 이 로마서가 복음에 대해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을 간략하게 리뷰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어떤 사랑으로 어떤 은혜를 부으셨는가를 함께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낸 로마의 교회는 누가 세웠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섞여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글라디오스 황제 때인 AD49년에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로 황제 때 다시 유대인들이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이렇게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게 되어서 안식일 문제라든지, 할례 문제라든지, 먹는 음식 문제 같은 것들로 다툼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닌 로마 교회에 복음을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하면서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은 너희들이 그런 사소한 것들로 분쟁을 해서 되겠느냐? 하고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1-17절까지 서론에서 복음에 대해서 개론적인 설명을 합니다.
(롬 1:1-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전할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이다.“라고 서론에서 개론적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장18절부터 왜 인간들에게 “구원“이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받아야 할 자가 어떤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이죠? 어떤 위험입니까? 우리는 어디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saved from what?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진노하시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죄 때문이지요? 그 인간의 죄에 대해서 3장20절까지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 1:18-3:20까지를 조금 세밀하게 나누어 보면,
1:18-32절까지에 “이방인들”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장 전체와 3장 8절까지 유대인에게는 왜 복음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1-16까지에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죄가 기록이 되어있고 2:17-29까지 에서는 유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세세한 죄를 샅샅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8까지에는 “그러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택해서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오셨다. 유대인들의 특권과 할례의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3장9-20 절까지에서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전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구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인이 없기 때문이다”하고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롬 3:9-12)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이어서 3장21-3장31절, 3장 마지막까지에서 “그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럼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거기에 ‘이신 칭의’가 등장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하면서 그 유명한 ”그러나 이제는“ ”누니 데“의 구절이 나옵니다.
(롬 3:21)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리고 4장으로 넘어가서 “선민이라고 자처해 왔던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롬 4:9-13) 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동안에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12 그는 또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기까지 한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 된 것입니다. 23 "그가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이렇게 4장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에 관해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5:1-11까지 에서는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해서 진술을 합니다.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이 어떤 것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진술을 해 줍니다.
(롬 5:1-5,1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5:12로부터 마지막 21절까지에서 “그럼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까지 빠졌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그 답인 즉은 ”아담 안에서 그렇게 되었다“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타락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대표의 원리를 설명하고서 “그러므로 그 대표의 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롭게 된다.”가 5장 후반부입니다.
(롬 5:17-19) “17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지배할 것이 아닙니까?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8절에서의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하고 바울이 5장까지에서 강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당장 어떤 질문이 나오게 되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6장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이야기가 6:1-14까지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바울은 단호하게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롬 6:2,11-13)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6:15-7장6절까지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해 줍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의의 길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우리가 율법과 혼인한 사이였으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에 합법적인 이혼관계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절대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7장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롬 6:15-19)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자기를 누구에게나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되거나, 아니면 의로움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롬 7:2-6) “2 결혼한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을 따라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게 매여 있던 그 법에서 해방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인은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에 따른 죄의 정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7장7절부터 마지막25절까지에서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우리 안에서는 이러한 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가? 왜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이 나오지 않고 왜 내가 원치 않는 악한 것들이 내게서 나오는가? 그러니까 로마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대답을 해 주는 책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자들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 본성과 옛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신랄하게 묘사를 한 다음에 “그럼에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를 쏟아 놓습니다.
(롬 7:21-25)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보세요. 여기까지는 여전히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에 대한 한탄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25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그 구원은 그럼에도 취소되지 않는다니 아,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냐“ 이게 7장 후반부입니다. 그리고 8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8장이 성경의 진수라는 로마서 안에서의 진수입니다.
(롬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8장에서 “그 구원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원은 확실한 것이다”라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체험이나 경험 같은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 역사적 사실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앎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롬 8:31-35)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그 확실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그럼 유대인은 뭐냐?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은 뭐냐?’ 그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 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해 오셨다. 만일 그 약속도 안 지키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약속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도전이 당연히 생기겠지요? 그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모든 약속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녀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약속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9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증거로 이삭과 이스마엘을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장남인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만을 택하지 않았느냐? 하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혹시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겠죠? ”그건 이스마엘이 적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냐?“ ”이스마엘은 서자라서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신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바울은 이어서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다. 서자니 적자니 따질 게재가 없는 쌍둥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의 자손 중에 야곱만 택하시지 않았는가?“하고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신학 용어로 그것을 예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롬 9:10-16)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럼 또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아니 뱃속에서 아무런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신다면 그 하나님의 행사는 불공평한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당연히 들겠지요? 그 때 바울은 모든 인류는 원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다 죄인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다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무리를 거기서 건져내셨다면 그게 왜 불공평한 것이냐? 그리고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설명해 줍니다.
(롬 9:19-21)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러고 나서 “그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도 주셨고 약속도 주셨고 그들을 이끌어 오셨는데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 9장30절에서 10장 마지막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를 의지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롬 9:30-32) “30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9장과 10장을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9장은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런데 10장을 언뜻 보시면 마치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경이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롬 10:8-10)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는데 10장에서는 “믿어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럽니다.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그 밑의 구절들을 잘 보시면 10장이 절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롬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세요. “맞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듣지 못하고 어찌 믿겠는가? 그리고 누군가가 보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와서 전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누가 보냈는가? 하나님” 이게 어떻게 알매니안 주의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으시면 전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음도 없을 것이고 들음이 없이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는가? 10장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10장은 9장을 더욱더 확실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 “그럼 유대인은 다 버림받은 것이냐?” 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아니다”하고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전체 구속사의 단계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언약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와 율법과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에게 온 메시야를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죽여 버렸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급속히 전파되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게 착착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시기해서 그들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11장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이 12장부터입니다. 12장부터 몇 가지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 위정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종해라. ‘신앙으로 그들에게 본을 보여라, 상전들아 노예들을 형제처럼 대해 줘라, 노예들아 상전의 일을 네 일처럼 해라, 세금도 꼬박 꼬박 내라‘ 이런 내용들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찬양을 부르고 끝을 맺습니다.
(롬 16:25-27)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게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의 열여섯 장중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속의 원리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11장을 함께 읽으면서 이 복음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며 그 구속사의 비밀은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한번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9장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과 예배와 언약을 갖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르려 했기 때문에,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 망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10장으로 넘어와서 믿음은 그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 10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롬 10:19-21)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고 하나님을 나타내셨는데 이스라엘이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11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다 버리신 것이냐?”
(롬 11:1)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덤으로 은혜의 시대를 허락하셔서 이방인들을 건져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의 수가 차게 되면 나중에 7년 대 환난을 전기로 민족적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신다는 시나리오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 11장1절 한 절의 말씀이 세대주의자들의 그러한 주장을 일축해 버릴 수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날 봐라, 내가 유대인이다. 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다“ 그러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스라엘 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 교인들의 대부분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습니다.
(행 2:38-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삼천 명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 신자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야고보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 21:18-20)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몽땅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계속해서 구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바울이 피력하는 것입니다.
(롬 11:2-5)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이스라엘이 모두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구약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서 남은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께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들,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사람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말고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은 어떻게 된 거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라고 바울이 7절부터 설명을 합니다.
(롬 11:7-10)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은 헬라어로 “레임마”입니다. 7절에서도 남은 자가 나오지요? 여기서의 남은 자는 “로이포이“(the rest)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입니다.
(8-10절) “8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멀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다“ 이 말씀은 신명기29장과 이사야6장의 인용 구절입니다.
(신 29:2-4)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사 6:9-10)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게 뭡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굉장히 나쁜 일을 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귀가 멀고, 눈이 멀고, 혼미한 영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그냥 놔두셨다”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모두 그렇게 눈멀고 귀 막힌 채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 중의 얼마를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귀를 열어서 하나님을 듣게 하고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습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쫓아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금 먹다가 맙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식사 때가 되어도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끼, 두 끼, 세끼 아이는 계속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배가 너무 고파서 자기가 알아서 밥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옆 집 아주머니가 “저 녀석 요즘 밥 잘 먹네.” 하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응, 저 녀석 밥을 사흘 굶겼더니 밥을 잘 먹네” 하셨습니다. 그 어머니가 밥을 굶긴 것입니까? 아이가 안 먹은 것입니다. 단지 어머니가 쫓아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안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악 하게, 혹은 강퍅하게 하셨다“라는 표현도 쓰지만 ”우리가 강퍅하다. 완악 하다“라는 말도 씁니다. 사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악 하게 하셨다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면 ”지금은 너희가 그런 멸망의 상태이지만 내가 장래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라는 구원사적인 역사를 예고할 때 ”하나님께서 완악 하게 하셨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완악 하게 놔두시고 귀를 멀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하신 것입니까?
(롬 11:25)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이 마음이 완악 하게 되어 그들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들이 이렇게 줄어들게 놔두신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도시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을 때 요나는 거부했습니다. 요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외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에게는 말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악 하게 놔두시고 이방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충만히 전파되도록 하신 다음에 이스라엘도 구원을 하시는 그런 구속의 단계를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9절과10절에서도 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롬 11:9-10)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시편 69편을 인용한 것이지요?
(시 69:21-23) “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22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이지만 메시아에 관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지요? 그러니까 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복, 밥상이 그러니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것과 율법과 할례와 제사와 그런 것들이 모두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유익한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그 복된 것들을 오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지금 그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한 번 11절에서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전부 회생가능성이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롬 11:1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넘어지기까지” “핍토”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라는 것은 ”그들이 회생 불가능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대답이 뭡니까?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이 잠시 넘어짐으로 해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어, 저거 원래 우리 건데?”하고 시기가 나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에 예언이 되어있던 것입니다.
(신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셨는데 그들이 안 받아들여서 교회를 덤으로 구원하셨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논리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시고 그 계획, 하나님의 청사진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차근차근 완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 구속사의 단계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합 2:14) “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슥 14:20-21) “20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결과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 와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 구속의 역사를 이렇게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구속사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6절을 보시면,
(롬 11:16)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지금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들은 원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7절-24절에 접붙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의 가지를 잘라내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단계인데 곧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다시 줄기에 붙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롬 11:25-26)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완악 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되면 이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구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전체가 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유대인 집단이라고 푸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원의 대상이 사람의 혈통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성경 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 견해가 갈 6:16말씀에 근거해서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온 교회를 말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9장부터의 이야기 전개내용이나 11장의 문맥을 보면 여기 11장에서의 ”온 이스라엘“에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것이 아주 어색합니다. 특히 11장 상반 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남은 자를 대조하는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런 구절들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세 번째 견해가 “온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유대인 전체”라는 것입니다. Lenski 나 robertson, john murray 같은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저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도 잘 연결이 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고 또 아울러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렇게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우리 인간들 전체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인가? 바울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해 줍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key point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구원의 발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롬 11:30-32)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인 하나님의 구속 사,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긍휼’ ‘엘레오’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난 형태입니다. 은혜는 은혜인데 은혜 안에서도 특별히 죄로 인해 망가지고 더러워진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긍휼‘ ’엘레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멸망, 저주, 불이익 등을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시 51:1)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합니까? 긍휼을 구합니다. 긍휼은 그렇게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 103:8-14)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떳떳하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감정을 직접 하나님께 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 마땅함과 수치스러움과 지기 혐오를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해서 내가 내 자신이 미워지면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래넌 매닝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악을 용인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분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근거를 찾아내셔서 그 것을 근거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자꾸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해서 하나님도 나를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야“하고 불안해하고 숨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 뜨거운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택하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뻔뻔스러워 지세요.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오. 이 복음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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