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
(김성수 목사)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요한복음은 1장부터 줄곧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고 기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7장부터 초막절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과 강화들은 율법의 행위로 자신들의 선민 됨을 자랑하고 증명하려 하는 유대인들과, 구원은 오직 참 생수이시며 참 빛이신 당신으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웅변하시고 선포하시는 주님의 대조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조금 복습을 해 볼까요? 너무 앞에서부터 복습을 하면 시간이 길어지니까 6장부터 간단하게 살펴보지요. 역시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영생은 이 땅의 떡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로 몰아넣으시고는 약속의 땅은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저주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어가는 곳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7장으로 넘어와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와 절기지킴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기대를 생수와 빛을 소재로 하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커다란 촛불을 밝히는 예식을 행한다고 했지요? 주님은 그들의 종교행위에 등장하는 물과 빛을 예로 들어서 자신이 바로 율법과 성전 제사의 원형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즉 내가 물이니 엉뚱하게 제단에다 물 갖다 붓는 수고 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참 생수이신 주님의 정체와 그 생수가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는지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을 합니다.
그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민수기 5장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 물을 티끌과 섞어 여인에게 마시우게 하는 민수기의 그 이야기는 바로 생수이신 주님이 저주받은 티끌과 연합이 되어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십자가 복음이 그 속에 힌트 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나 택한 자들만이 그 티끌 섞인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생수이신 주님이 죄로 인해 저주 속에 던져진 흙과 이겨져서 죄인들에게 제시가 됩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들은 그 은혜의 복음을 피해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오갈 곳이 없는 사형수인 간음한 여인은 그 은혜의 생수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8장 초두에 삽입이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고 선언하십니다. 그 선언은 자신들의 종교 행위로 빛을 밝히려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일갈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주님을 죽이려 했고 주님은 그들을 피해 숨어서 성전을 나가셨습니다. 그게 8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그 문맥을 놓치지 마시고 잘 연결해 보세요. 오늘 본문인 9장 서두의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는 생수이신 주님을 설명하는 8장 서두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8장에서 선포된 빛이신 주님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설명용 에피소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이야기를 단순한 질병의 치유나 기적의 측면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소경인 죄인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빛은(요9:5) 창세기 1장의 빛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창세기 1장 3절의 빛과 창세기 1장 16절의 태양이라는 발광체에서 나오는 빛은 다른 빛입니다. 3절의 빛은 히브리어 ‘오르’이고 16절의 빛은 ‘메우라’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3절의 그 빛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상징되는 창조의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되고 있음을 고지하는 빛인 것입니다. 그 빛을 시작으로 흑암에 낮이 생기고 혼돈(formless)에 틀(structure)이 세워졌으며 공허(emptiness)가 충만(fullness)으로 채워집니다. 그 빛은 요한복음 1장 서두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이 됩니다. 바로 이 빛입니다.
(요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빛, 바로 그 창조의 빛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인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생명과 광명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구원의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흑암 속에 빠져있는 죄인들을 광명으로 인도하시는 참 빛에 대한, 다른 말로 새 창조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 9:2-7)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 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6절에 보면 흑암과 사망에 갇힌 백성들을 건져 내시는 참 빛의 정체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빛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 지고 있는 것이며 오늘 그림은 골고다의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흑암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광명으로의 초대는 인간들의 공로나 자격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열심으로만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이야기가 그대로 오늘 본문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7장과 8장에서 참 생명수이시며 참 빛이신 주님은 오직 당신의 은혜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던데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빛을 꺼서 땅에 묻어 버리려 한 것입니다. 진리의 객관적 제시만으로는 인간들이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을 죽이려 하는 무리 속으로 주님께서 들어가 그 무리를 대표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차분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미움과 죄까지도 하나님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창세전에 당신께서 구원해 내시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성취하십니다. 그게 7장과 8장과 9장의 문맥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우리의 배경이나 상황이나 자격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 진리를 공부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7장과 8장을 통해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근거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이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예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개집을 하나 짓더라도 설계도를 만드는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시는 데에 아무런 계획과 설계도도 없이 시작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맡겨 놓으셨다면 우리 중 누가 우리 실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 씩 하나님을 배반하고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실체 아닙니까?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완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을 받은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거룩을 향한 감사의 열심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절 한절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한 구원의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요 9:1)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소경이 먼저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소경을 보셨습니다. 여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이도’는 ‘알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종종 ‘알다’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불쌍한 소경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으며 알고 있는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이 오신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주님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신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소경을 죄인들을 총칭하여 상징하는 단어로 자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주님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 유독 소경이 고침을 받은 사건이 특별하게 많이 기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사건은 귀먹은 벙어리가 고침 받은 경우가 하나 나오고, 중풍 환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이 하나, 열병을 앓던 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이 하나, 그리고 문둥병이 고침을 받은 경우가 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건이 셋이 나옵니다. 그런데 소경이 고침을 받은 경우는 다섯 번이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소경의 상태를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의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줌으로 해서 주님은 그러한 영적 어두움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광명한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분임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 속에서 갈길 몰라 헤매며 살고 있던 거지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 태속에서부터 죄인이었던 자들이기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 하던 죄인들의 대표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눈을 값없이 치유해 주심으로 당신의 하실 일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소경을 찾아가셨을 때 주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요 9:2)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고난과 불행과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를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죄의 결과 인간들에게 찾아온 사망의 증상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아름답게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고난과 불행과 질병이 찾아온 것의 그 근원적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들의 현재에 겪고 있는 모든 고난과 불행과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을 당사자의 죄라고 이해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욥을 보세요. 욥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고난을 당했나요? 욥에게 닥친 고난과 질병은 욥의 범죄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의 철학과 신학에 이교 사상이 많이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인들과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주장된 것이 환생의 교리였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윤회(輪廻) 체계의 범주 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다음 생에서 많은 고통과 질병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이론은 유대인들에게조차 편만하게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환생의 교리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불행과 질병을 전생의 죄 때문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선생인 랍비들은 그 이론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랍비들의 주장도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장 5절의 ‘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20:5)’라는 구절을 근거로 죄의 유전으로 고통의 문제를 이해했습니다. 부모의 죄로 자식이 질병을 앓거나 불행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근거하여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창 25:22) “22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 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시 58:3)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 하는도다”
유대인들은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큰 죄를 지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욥의 예를 들어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은 욥이 의인이라고 전제하신 후에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질병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환생의 교리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이론이나 모태 속에서 지은 죄의 결과에 의한 질병 등의 이론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엉뚱하게도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요 9: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구절을 곡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들을 장애자로 만들어 버리시는 아주 끔찍한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은 헬라어 성경의 원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엉뚱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이 원문에 충실하게 이 절의 뉘앙스를 잘 살려 놓았는데, 그 번역이 이렇습니다.
"No, it wasn't!" Jesus answered. "But because of his blindness, you will see God work a miracle for him."
우리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하지만 그의 보지 못함으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것이다."
The Message라는 번역 성경을 편찬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도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You're asking the wrong question. You're looking for someone to blame. There is no such cause-effect here. Look instead for what God can do."
우리말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는 지금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구나.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 사람의 불행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눈을 돌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바라보도록 해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결과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보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 아프지 않아도 될 사람을 아프게 만드시거나 불행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편만한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에게 닥친 여러 가지 고통과 고난과 불행과 질병들의 증상들을 사용하여 그 분의 일을 드러내시는 것이지 그러한 고통을 조장하시고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좀 전에 이사야서 9장에서 찾아 읽었던 흑암과 사망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어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요 9:4)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도 번역이 좀 잘 못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사실 ‘I must work’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번역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일까요? 요한복음 6장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바로 이 일입니다. 아버지가 살려내라고 한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려내시는 일, 바로 이 일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통해 그림으로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의 거듭나는 사건을 비유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 3: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죄와 허물로 죽어 소경의 상태에 떨어진 자들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이고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하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십자가로. 주님께서 그 소경을 어떻게 고치시는 지 보세요.
(요 9:6)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주님께서는 소경뿐만이 아니라 많은 각양각색의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지저분하게 진흙을 침에 개어 환부에 발라주고 가서 씻으라는 식의 치유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하면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자들을 말 한마디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혈루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만 유독 흙에 침을 개어 눈에 발라 주신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그 아래 구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이 반드시 하셔야 할 일’을 설명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공부한 것처럼 성경에서의 흙, 티끌은 저주받은 죄인들과 그들의 죄를 총칭하는 소재입니다.
(창 2:7)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흙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창 3:14, 17-19)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의 범죄 후에 흙은 이렇게 저주받은 인간의 현실과 종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처럼 자신과 흙을 섞어서 개버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침과 흙이 섞이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무죄한 성자 하나님과 저주받은 죄인들이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것은 다른 말로 죄인 속으로 성자 예수님이 전가되시고 성자 예수 안으로 죄인들이 전가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주님의 성육신 자체가 구원의 방법인 십자가를 이미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주받은 흙 속에 주님이 뚫고 들어가심으로 창세기 2장의 그 영광스러운 흙에서의 첫 창조가 새롭게 회복되어 재현되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흙에서 첫 사람 아담이 창조 되었을 때처럼 저주와 사망의 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화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치유 방법이 참 뜨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주와 심판 속의 죄인들의 대표요 상징인 날 때부터 소경된 이의 환부에 더러운 저주의 흙과 하늘의 성자가 결합된 진흙이 발라집니다. 그 것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처럼 하늘의 생명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이 땅의 더러운 죄와 육신의 결합인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의 환부에 발라지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처럼 여전히 자신의 힘과 가능성을 의지하는 세상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자각한 이만이 그 생명수와 티끌이 섞인 물 앞에 남아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날 때부터 소경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그 거지 소경이 그 예수라는 생명수 앞에 남아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눈 먼 거지같이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입니다’를 인정하고 그 분의 은혜 뒤로 숨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야 할 자의 환부에 발라져서 그 자신이 그 사망을 흡수하여 품어 안아 버리고 물에 씻겨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그 천형 같은 질병에서 놓여나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 뒤에 붙어 있는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잘 보시면 8장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과 9장의 소경에게 일어난 일이 정확하게 같습니다. 8장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가 세상의 빛임을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하자 유대인들이 득달같이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입니다.
(요 8:12-13)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 하도다”
9장에서는 눈을 뜨게 된 소경이 거짓말쟁이로 몰립니다.
(요 9:18)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아울러 8장에서는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 하심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아버지의 증거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요 8:18-19)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 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반면에 9장에서는 소경의 부모가 아들에 대해 증거 하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않습니다.
(요 9:19-20)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뿐만 아니라 8장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요 8:59)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반면에 9장에서는 소경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소경을 쫓아 내 버립니다.
(요 9:34)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신을 가리켜 보내심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요 8:16-18)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예수님에 의해 실로암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요 9:7)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어떠세요. 아주 흡사한 구조로 8장과 9장이 대조가 되고 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에고 에이미’라는 단어를 쓰시는데 소경이 자기를 가리켜서 ‘에고 에이미’라 칭합니다.
(요 8: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여기에서 ‘내가 있느니라’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 9:8-9) “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9절의 ‘내가 그로라’라는 어구 역시 ‘에고 에이미’입니다. 요한은 지금 의도적으로 이 같은 단어들과 내용들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다른 말로 더러운 티끌(흙)과 이겨지셔서 죄인의 환부에 붙여지시고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셔서 실로암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주님께 보내심을 받는 소경이 그대로 판박이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그 눈에 지저분한 진흙을 이겨 붙임으로 ‘나는 소경입니다’하고 광고를 하는 낮아진 모습으로 실로암으로 갑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자기를 보내신 분의 명령을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지까지 가면서 진흙을 눈에 이겨 바른 소경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로암 연못에 도달합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에서 흐르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여 있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실로암은 기혼 샘의 가장 낮은 곳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거기서 더러움을 씻으라는 보내신 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소경은 가장 낮은 곳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고는 도무지 눈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내려 보내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다니다가 수난과 고난을 통과하여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무릎을 꿇으시고 결국 보내신 분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처럼 우리 성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 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바로 이러한 보내심을 받은 성도의 모습과 그 성도들과 연합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수치를 마다않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주님의 모습이 오늘 실로암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더러운 진흙을 씻어내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그림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우리도 우리를 위해 처절하게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본받아 세상의 낮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소경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고백하는 상한 심령으로 매 순간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 받은 자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 천대와 억지 등으로 두들겨 맞으며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기 부인의 삶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시 116:5-6)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재물과 권세를 한 손에 쥐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세상의 힘으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낮은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그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자들의 표지는 낮아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침에 이긴 진흙을 바르고 있다고 생각이 되시거든 감사하십시오. 비록 그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라도 잘 참으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통하여 낮아지십시오. 그렇게 낮아지다가 가장 낮은 실로암에 가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보내신 이의 명령을 수행하십시오.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 명령은 우리가 낮아졌을 때만 실행 가능한 명령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가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이로 살아가십시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이 그가 가진 지식과 명예로 자신을 자랑하거나 거들먹거리지 않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섬겨 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돈 많은 부자가 그 돈으로 자기의 잘남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나를 진심으로 섬겨 줄 때 우리는 얼마나 큰 행복을 느낍니까?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이가 그 상황과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치 감긴 눈에 덕지덕지 진흙을 붙여서 실로암으로 걸어가던 그 소경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 할 때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얼마나 큰 감동을 받습니까? 우리 그렇게들 사십시다.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작은 예수로 새롭게 창조된 여러분, 그 예수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행복하게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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