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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6.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김성수 목사)

 

 

(계 17:17-18) “17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18 네가 본 그 여자는, 세상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큰 도시를 가리킨다."

 

 

우리는 계속해서 17장의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음녀 바벨론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왕의 옷인 붉은 옷을 입고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세상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어서 결국 사망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17장을 공부하면서 우리 신자들은 그 음녀와 짐승의 공격을 잘 분별해서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삶을 피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경주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인해 가고 있습니다. 그 음녀의 세력은 교묘하게 세상 전체를 힘의 논리로 취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 속에서 성도들이 어린양의 연약한 모습으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신자의 삶을 ‘어린양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 목적이 뭐였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숙, 양육’에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치르는 영적 전쟁의 내용이었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도 우주도 심지어 대적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만들어 내는 훈련소요 훈련 교관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그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계 17:17)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표준새번역]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적들의 공격을 포함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거룩’이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슬픈 일, 기쁜 일, 행복한 일, 고단한 일’이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님의 뜻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우리에게 바로 그 본보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 받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다고 나옵니다. 그 형제들이 들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을 때 요셉은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그 형제들의 잘 못을 고자질이나 하던 아주 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꿈을 꿉니다. 요셉이 들에서 그 형제들과 함께 곡식 단을 묶는데 형제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지요. 그리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는 그 걸 형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손을 대시기 시작하십니다. 형들이 그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를 하다가 팔아 버리지요. 그 형들은 어땠는지 한 번 보세요.

 

(창 37:20)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정말 철없는 동생에 악독한 형들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가는지가 창세기 후반부를 전부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요셉의 이야기를 ‘성도가 비전을 갖고 꿈을 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에 초점을 두고 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것인가를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열 두 족장들의 삶을 통해 미리 preview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형들과 부모를 기아에서 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 속에서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지 그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두고 계시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선교나 전도나 심지어 순교까지도 우리의 거룩이 빚어져 가는 과정에서 도구로 혹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를 이용해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 내는 만사형통의 무당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에 분명 형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형통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형통이라 하지 않습니다. 나의 거룩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 39:1-3,20-23)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여기 분명히 ‘범사 형통’ ‘만사형통(萬事亨通)’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만사형통이라는 말 앞에 항상 어떤 말이 붙지요? 제가 밑 줄 그어놓은 부분들을 보세요. 성경에는 ‘만사형통’이라는 말 앞에 항상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 붙습니다. 그리고 그 만사형통의 상황을 한번 보세요. 요셉이 자기 친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서 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셨다고 나오고 그 일을 형통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당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 그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나오고 여호와께서 요셉의 만사를 형통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만사형통의 교리로 보자면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일들이 일어나질 말았어야지요.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면서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 때 안 말려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면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서 도망간 훌륭한 요셉이 모함을 당해서 그 처참한 감옥에 가는 것을 안 말려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가시고는 그 걸 ‘만사형통’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 채색 옷을 즐겨 입고 형들을 고자질이나 하던 철없는 요셉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경은 만사형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과 39장의 요셉의 만사형통 사건 사이에 뜬금없이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형통한 길로 끌고 가시는 자의 삶과 자기의 쾌락을 위해 창녀를 찾아가는 것도 서슴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가 가지고 있는 환락과 즐거움과 화려함은 너무나 달콤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자꾸 차단하시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은 형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든 길이면 성경이 요셉의 삶을 이렇게 묘사를 하겠습니까?

 

(시 105:16-19)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18절을 보시면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 는 말이 있지요. 그 구절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보 바르젤’입니다. 직역을 하면 ‘그의 혼이 날카로운 철로 관통 당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요셉은 그의 삶 속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 고통스러운 삶 속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나오지요. 19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를 단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세요.

 

(계 17:17)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음녀와 짐승이 서로 연합해서 우리를 공격하고 미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될 때, 그러니까 성도들이 영원히 거하게 될 신천지가 열리게 될 때까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원에 세 시제를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적 운명적인 면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지금 현재에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완성시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완성시켜 간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되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때로 마귀의 공격이, 환난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롬 5:1-4) “1 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맞다 면(과거 시제죠)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현재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제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현재에 살아야 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이 어떤 삶인가요? 죄를 멀리하는 삶, 다른 말로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3절에 바로 무엇을 제시합니까? 그렇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 속에 무엇이 도구로 쓰여 진다는 것입니까? 바로 ‘환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그 유명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라고 번역이 된 ‘휘포모네’는 ‘경험’이라는 뜻이 포함 된 ‘견딤’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은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경험으로 완성시켜 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론으로 알고 있는 교리가 우리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데에 환난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사랑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원수가 필요하지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성품을 위해 환난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도키메’는 ‘성숙’ 혹은 ‘증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환난은 여러분이 겪어도 되고 안 겪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 된 자들은 성숙하게 양육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성도 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그 환난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그 삶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기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환난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준다는 것이 바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구절이 갖고 있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그러한 고통의 세월을 통해 자기를 판, 형들을 흔쾌히 용서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싶은 바이지 ‘신앙생활 잘하고 비전을 품으면 언젠가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듯이 너희도 너희의 꿈을 이룰 수 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눅 21:16-19)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너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환난을 잘 견뎌내면 너희는 너희의 영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가 가지고 있는 성도됨의 증거를 ‘감격이나 기쁨이나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등으로 제시하지 않고 ‘환난’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환난은 여러분에게 유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으신 혹은 겪고 계신 환난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환난을 겪게 되면 그 때서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그 법정에서 제일 먼저 후회하는 것이 ‘시간이 있을 때 부모님께 좀 더 효도할걸 그랬다’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잘 이루어 질 때는 그 것을 즐기느라고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성도가 그렇게 음녀의 금잔에 취해서 사는 꼴을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를 깨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구로 쓰이는 것이 바로 환난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 그렇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시작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만드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끝이라면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면 되지 왜 구태여 지금도 성령을 통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까?

 

(롬 5:8-10)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잘 보시면 구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과 그 분의 ‘사심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무얼 하고 계시지요? 지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구원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지금 구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건져진 것은 그 완성될 구원으로의 출발일 뿐입니다.

 

(출 12:5-11) “5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던 날 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으라고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 죽음에서 건져진 날을 축하하는지 보세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이 말은 사망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어디로 급히 가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하지요? 가나안으로 가야지요. 그런데 그 가나안은 어디를 통과해야 합니까? ’광야‘를 통과해서 가야합니다. 왜요? 그 광야에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이 되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옛 사람 60만이 모두 광야에서 죽고 새 사람 60만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진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롬 6: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구원의 목적지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광야가, 환난이, 마귀의 공격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그 광야를 여러분의 두발을 이용해서 걸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그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벧전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왜 예수 믿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막아 주시지 않을까? 이상하다’이런 일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환난은 꼭 필요한 것이니까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벧전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에 가면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이 왜 유익한지 고난의 정확한 정의가 나옵니다.

 

(빌 3:10)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성도의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음녀와 짐승까지도 이용하셔서 우리의 거룩을 지어 가시는 것입니다.

 

(렘 20:7-18) “7 주님,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께 속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 사람보다 더 잘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속았다는 말) 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 하겠다' 합니다. 저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16 바로 그 사람은 주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놔두실까요? 왜 하나님은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세상 사람들이 계속 그렇게 패고 모함하고 감옥에 가두게 놔두실까요? 하나님은 사도 바울과 예레미야를 통해 하실 일보다 그들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공격까지도 선용하셔서 그 분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분의 유일한 뜻인 여러분의 자녀 됨을 완성해 가시는 분입니다. 그 일을 위해 독생자까지 죽이신 분입니다. 그렇게 고집스러운 열심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실패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일찍 항복하고 그 거룩의 삶을 열심히 경주해 보자고요. 저 멸망해 버릴 세상이 추구하는 것 좇다가 함께 멸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십시오.

 

헤르만 바빙크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번 토요일에 성령을 하늘로 소환하시면 그 다음날 주일에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마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다. 그 것은 오늘날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 소원이나 빌고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안됩니다. 그렇게 멸망할 자들처럼 사셔서는 안 됩니다. 왜 다니엘서가 전체가 히브리어로 쓰여 있지 않고 2:4-7:28까지는 아람어로 쓰여 있는지 아세요? 다니엘서의 2:4-7:28까지에는 열방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망하고 흥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어처럼 당시 세계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아 너희들에게 종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라고 하나님께서 나팔을 부시는 장면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통용어로 그 부분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자기의 소원이나 빌고 문제나 해결하는 것으로 오도하는 자들은 모두다 그 멸망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예수 바르게 믿고 천국 갑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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