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를 대접하는 나그네들의 삶!
할례 받은 자들의 삶
(김성수 목사)
(창 18:1-15) “1 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3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4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5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6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7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10 그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3 그 때에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15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쪼개짐에 관한 이야기가 17장에서 할례 언약으로 드러나고 그 할례가 아브라함과 그의 가솔들에게 행해짐으로 해서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한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작은 그림으로 일단 거기서 일단락됩니다. 17장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가솔들의 할례로 끝이 납니다. 18장과 19장은 그렇게 할례 언약 안에 들어와 할례를 받은 이들의 삶의 내용과 할례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멸망의 이야기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 공부할 부분은 그 앞부분입니다.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이 하루 중 가장 더운 정오에 자기가 거하는 장막 문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정오는 보통 화씨 150도가 넘는 뜨거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시간에는 대부분 낮잠을 자거나 집 안에서 쉰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장막 문 앞에서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창 43:16,25) 그런데 갑자기 그 때 세 사람의 나그네가 아브라함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한 분은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여호와였고 나머지 둘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행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자들은 3절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어구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아보았다고도 하는데 당시에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을 흔히 주라고 불렀고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어구도 정확히 번역을 하면 ‘제가 좋게 보이면,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처럼 보이면’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상전처럼 여기고 그들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들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 가장 좋은 음식으로 가장 시원한 곳에 모시고 가장 겸손하게 섬겼습니다. 본문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아브라함은 100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2절)’ 객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몸을 땅에 굽혀(2절)’ 나그네들을 손님으로 간곡히 초대하였고 ‘급히(6절)’ 장막에 들어가서 사라에게 음식을 장만하도록 지시하고 ‘짐승 떼에 달려가서(7절)’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거기에다 상식(常食)으로 먹던 버터와 우유를 보태어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서서(8절)’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의 발을 씻을 물도 준비해 주었고 ‘마음을 쾌활케(5절)’하는 일까지 대접에 포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의 몸과 마음의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켜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히 13:1~2) “1 계속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 2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할례와 맞물려 등장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나그네 대접입니다. 창세기 18장은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언약 백성의 특징이 바로 나그네 대접과 타인에 대한 중보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할례(골2:11)를 전가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 본문은 구원 받은 교회의 삶의 특징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의 특징은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던 것에서 돌이켜 자기와 전혀 일면식도 없는 나그네들마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것으로 섬겨주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성숙되어 가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성도의 삶의 특징인 나그네 대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행동 강령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가 율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 여러 가지 실천적 강령으로 표현되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된 인간들은 도저히 그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생명력, 즉 하나님의 성품과 됨됨이와 능력 등의 하나님의 영광과 복이 인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질 때에만 살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 속에 제한적으로 내재된 자원만으로는 그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으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롬3:20)’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서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롬 7:1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그 삶을 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정죄의 도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타락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하고 다시 그 분의 생명력(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이들이 이 땅에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는 이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고 그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 내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율법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자아(responsible self)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롬 7:4)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보시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율법에 대해 죽어주심으로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가 사별(死別)의 관계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 기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이후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율법의 삶을 전혀 살아낼 수 없는 자들이 되어 율법에 의해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우리 성도들과 율법과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끊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운명을, 율법을 다 지켜낸 자들로 미리 결론을 내시고 그 결론을 향하여 성도의 삶을 열매 맺는 삶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제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responsible self) 주님께서 그 많은 율법이 결국 어디로 수렴되는 것이라 하셨습니까?
(마 22:36-41)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렇게 율법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 둘은 첫째와 둘째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으니’입니다. ‘같으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등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결코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죽고 다시 부활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위하던 죄인들이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일면식도 없고 자기에게 어떤 보상도 해 줄 수 없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이 나그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 10:18~19) “18 고아와 과부를 공정하게 재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9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 그게 안 되거든 전에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그네들인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신 것을 기억하여 세상의 나그네들을 그렇게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렘 7:4‐7) “4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5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6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7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성전을 막아서서 그 성전의 거짓됨을 폭로하게 하시는데 그 이유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대접하지 않으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종교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다른 말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아무리 종교 행위에 열심을 부린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되지 않는 헛수고 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자각하고 그 사랑에 감읍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힘입니다.
(요일 4:20-21) “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 사람들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이웃으로 대접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내 이웃을 사랑으로 대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7:12) “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황금률이라 부르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면 먼저 대접해 주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라는 방법론적 해석으로 접근을 해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그 말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들에게 자기가 타인에게 기대하는 만큼 타인도 자기에게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각성하여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그대로 남에게 먼저 겸손하게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십자가의 삶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그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그 내용이 율법과 선지자가 선포한 내용이라는 뜻과 함께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이 설명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한 삶이었으며 이웃뿐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완벽한 율법의 성취가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시에 충족된 역사적인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율법,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한 단어로 줄여서 표현을 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 부른 것입니다.
(롬 13:8-10)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갈 5:13‐14)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사랑으로 상대방의 종노릇을 해 주는 것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바로 그 종노릇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 불현듯 나타난 사람들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나그네들입니다. 그 나그네들은 지금 지나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대접해 주고 난 뒤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나그네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이 밥 먹는 순간에도 서서 그들을 대접합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이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남을 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할례 장면 바로 뒤에 나그네 대접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들의 삶의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를 자세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19장으로 가면 그 똑같은 나그네들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는 위협을 받습니다.
(창 19:4-5) “4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5 그들은 롯에게 소리쳤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아브라함과 반대로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나그네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유익과 쾌락을 챙기려고 하는 자들이 대조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할례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능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오롯이 순종하여 사는 삶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삶임을 깨달아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의인들과,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놓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자신의 유익과 기쁨에 도구요 수단으로 동원하는 죄인들의 두 부류만 존재합니다.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기는커녕 나그네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쾌락의 도구로 삼으려는 자들의 땅, 소돔과 고모라는 저주받은 땅의 대명사가 되어 오늘날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 1:10-17) “10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16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접대, 즉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그 어떤 종교 행위도 여호와가 보시기에 가증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라 부르십니다. 그들의 열심은 멸망을 향한 열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나그네 대접을 성도의 표지로 반복하여 제시를 합니다. 바로 그렇게 진심으로 나그네를 돌볼 수 있는 자기 부인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나그네를 대접하여 영접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 전에 하늘에 적을 두신 한 나그네가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 분은 흠모할만한 것도, 뛰어난 것도 없었습니다. 누구하나 그 나그네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봐도 자기들에게 유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에게 세상의 힘과 명예와 부를 가져다 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나그네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힘의 원리를 좇는 자들은 절대 나그네를 대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은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그네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의 신화에 젖어 있는 자들은 나그네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가짜들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힘없이 당하는 나그네 예수를 사랑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역시 이 세상의 보잘것없는 나그네들을 이웃으로 사랑하며 대접하는 삶을 살게 되지 힘의 원리를 추구하며 세상에서 높아지려 다른 이들을 도구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가르시며 그들의 분리 기준을 ‘나그네 대접’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마 25:34-40)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만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대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고 바로 그들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자들, 고아, 과부, 나그네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이들 또한 이 땅에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나그네를 대접하는 나그네들의 삶’이라 붙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들은 나그네들보다 더 작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종은 역시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요 이방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성도를 가리켜 ‘나그네(벧전 1:17, 2:11)’ 혹은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라 부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성도를 ‘나그네요 외국인(히 11:13)’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성도는 나그네를 전심으로 대접하는 또 다른 나그네들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나그네들을 비웃습니다. 약해 빠진 사람들이라 손가락 질 하기도 합니다. 사랑해 주고, 섬겨 주고,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면 세상은 그 사람을 존경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무시하고 아예 밟아 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들은 그렇게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나그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날 때에는 그 언약이 믿을만한 것으로, 강하고 뛰어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비웃음을 사는 작은 자나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할례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하늘의 왕자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작은 자로 보이게 되는 그 역설이 이해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에 바로 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라에게 명년 이맘때에 자식이 생길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라가 장막 안에서 비웃었습니다.
(창 18:10‐12) “10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0절의 ‘기한이 이를 때에’라는 어구는 ‘명년 봄 새싹이 돋을 무렵’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 성취의 정확한 날짜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말씀을 비웃습니다. 자기 남편도 늙었고 자기도 경수가 끊겼는데 무슨 성적인 즐거움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2절의 ‘어찌’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방법과 메카니즘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으면 믿지 않으려는 인간의 성향을 대변해 주는 단어입니다. 거기에 대고 하나님은 ‘네가 왜 웃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하고 그녀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보잘것없는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의 환경이나 외모 그 어느 것 하나 번듯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그 분의 배경과 외모를 비웃었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으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고 희롱을 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지고 죽으실 때도 ‘네가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의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게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 비웃음거리였던 나그네에 의해 그를 조롱하던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작은 예수가 된 성도들의 삶도 역시 나그네의 모습처럼 보여 집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요셉의 삶을 보세요. 그가 그의 꿈 이야기를 하자 그는 곧 형들의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려 했을 때도 세상은 그를 비웃듯 감옥에 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꿈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를 비웃었던 자들이 모두 그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의 은혜로 아사(餓死)를 면하게 됩니다. 예수의 삶과 요셉의 삶이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다윗은 어땠나요?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형들이 다윗을 비웃습니다. 네가 양치는 것이 귀찮아서 소풍 온 것 아니냐고 빈정거렸습니다. 갑옷도 안 맞을 정도의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도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비웃었던 자들이 그의 은혜로 그의 왕국의 백성으로 존재케 됩니다. 보잘것없는 비웃음거리에 의해 비웃던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사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역시 그들도 보잘것없는 비웃음거리의 상징으로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잘것없음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크게 쓰여 지지 않았습니까?(고전 1)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하나님의 언약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웃음을 오래 참으시고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어 버리십니다.
(창 21:5-6) “5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보았을 때에,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6 사라가 혼자서 말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비웃음을 진짜 기쁨의 웃음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비웃음거리로 보여 지지만 그 비웃음거리가 비웃는 이들의 비웃음을 진짜 기쁨의 웃음으로 인도하는 역설의 심포니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비웃음의 대상입니다. 이 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태어난 어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나의 죄를 모두 대속하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 인간의 상식과 이성 속에서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비웃음거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부어지면 그 비웃음이 감격과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에게서 자랑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상식으로는 비웃을 수밖에 없는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의 소식이 되었는데 어떻게 자랑을 합니까?(고전 1:29) 천국은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고, 내가 가장 작은 자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종이 되어 서로를 섬겨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기존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질서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시간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과 섬김과 연민이라는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나라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도구화 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그들의 유익을 구하며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열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의 문이 열립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질서를 문득문득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들이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곳입니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공로의 주장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그네요, 작은 자요, 비웃음거리인 십자가의 예수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 적으로 볼 때 죽음의 자리입니다. 약한 자, 작은 자가 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진짜 승리의 자리입니다. 落花處餘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는 그 절망의 자리, 꽃이 진 자리야말로 열매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듯 예수라는 꽃이 진 자리에 교회라는 승리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이 천년 전에 완성하신 구원의 울타리 속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데 작은 예수들을 초청하셔서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 성도들도 나그네요, 작은 자요, 비웃음거리요, 열매를 위해 지는 꽃의 모습으로 또 다른 하나님 백성들을 부르는 삶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당하면서도 참아주고,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고, 섬겨주는 작은 자, 나그네, 비웃음거리, 지는 꽃들이 바로 성도들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여러분을 비웃던 그들이 여러분 앞에 무릎 꿇고 감사의 인사를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할례 받은 아브라함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나그네들의 종이 되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털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발까지 씻기는 삶을 살았듯이 우리가 그 자리로 초청된 사람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생각지 않았던 때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잘 살아낸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대망하며 하루하루를 나그네를 대접하며, 섬겨주며, 사랑하며, 인내하며 잘 살아내십시다. 그렇게 나그네를 섬기는 삶을 살 다가 어느 날 여러분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접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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