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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5.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I)

 

(김성수 목사)

 

 

(롬 1:7)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니체라는 철학자가 소리 높여 외친 핵심 명제는 ‘신은 죽었다’라는 허무주의적 외침이었습니다. 현대 철학의 거두라 할 수 있는 들뢰즈 또한 그러한 니체의 허무주의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니체라는 인간의 영향력이 오늘날까지도 큰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겠습니다. 그 허무주의의 자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니체에게 있어서 허무주의란, 어떤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막 살자는 그런 주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을 했던 사람이 니체입니다. 많은 이들이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동류의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입니다. 그는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감성과 정열, 디오니소스적 삶에의 의지를 강조했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그의 저서 ‘권력에의 의지’가 그러한 그의 주장을 아주 잘 담고 있는 대작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허무주의에 맞선 진정한 허무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엉뚱한 가치에 집중을 하느라 진짜 가치에 소홀한 민중들에게 진짜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여 가짜 가치의 허무함을 일깨운 자가 니체라는 말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 적 관점에서의 평가입니다.

 

니체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유대교나 기독교, 그리고 플라톤 철학을 중심으로 한 헬라철학까지도 허무주의적이라고 단언을 합니다. 니체가 보기에 그것들이 전부 현세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고 내세에만 가치를 두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를 부정적 허무주의라고 부릅니다. 그건 타파되어야 할 것이라는 거죠. 니체에 의하면 유물론자들처럼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회의주의자들처럼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허무주의도 있습니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허무주의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있어서 역시 그것도 깨져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가치 평가조차 하지 않으려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불교와 힌두교 등의 범신론 종교들입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그것 또한 깨져야 할 것에 불과합니다. 니체의 관점에서 그렇게 편만하게 인간을 장악하고 있던 허무주의의 대표로 발탁이 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명한 명제 ‘신은 죽었다’라는 독설을 기독교의 신을 겨냥하여 쏘아 버렸던 것입니다. 인간의 일상을 가치 없게 만드는 그런 신과 신의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니체는 당시에 2000년 동안 기독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당시 기독교 문명 하에 있던 사람들은 지고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횡포 아래에서 사람들은 왜소화되고 노예화되어, 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대중’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내는 노예들, 그것이 니체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인간들의 왜소화와 노예화에 제동을 걸어 인간의 위대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인간을 노예화하고 왜소화하는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으로 점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신 앞에서의 무기력과 게으름에 빠져 버린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이며 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 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회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초인, 영겁회귀, 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 문명 하에서의 인간 세계의 문제점을 잘 지적은 했지만 거기에 대한 잘못된 대안을 제시했던 사람입니다. 니체의 말처럼 기독교는 이 세상이 허무한 것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니체의 주장처럼 ‘그러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대충 살다가 가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허무하다고 해서 불행하지만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기독교인들에게는 소망이라는 것이 있고, 그 소망에서 비롯되는 평안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과 역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던 당시의 기독교 문명은 니체가 이야기한 것처럼 허탈한 허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은 우리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 자칫 니힐리즘 적 경향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직관은, 분명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적 신관에 대한 옐로우 카드를 꺼냄으로써 당시의 대중들을 일깨우기 위해 작동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결책 제시에서 그는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구는 성도를 허무주의자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냉소주의자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 성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추구는 소망을 동반한 추구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반드시 열심을 격발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성도는 절대로 인생을 대충대충 막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이 어떤 목적을 지닌 채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어 자신에게 주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눈에 비친 기독교는 왜곡된 신관에서 비롯된 가짜 기독교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 소망으로 향하는 필연적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인생에 대한 올바른 자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양육의 교사로 참여하시는, 그에게 허락된 역사와 인생을 최선의 성실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니체는 당시에 왜곡되어 펼쳐지고 있던 가짜 기독교를 보고 허무주의니 뭐니 하며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지 진짜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가 왜곡된 기독교적 허무주의의 탈출구로 제시한 초인 사상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세상 속 아담 군상들의 보편적 악마성의 표출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니체의 주장과 알매니언 주의가 아주 닮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는 인간들이 무기력하게 허무주의의 발아래에서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일견 옳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람에게 분주하고 바쁜 일상을, 디오니소스적 열정으로 살게 했을 때, 그 증상들이 호전이 되는 것을 보면 분명 권력에의 의지, 혹은 힘의 추구 같은 것은, 사람을 생기 있고 활기 있게 만드는 약효가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진짜 허무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한 마귀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 일상에 대한 열심과 권력에의 추구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아예 생각하지 못하도록 막는 가시와 담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일상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격발이 되는 은혜의 열매이어야 올바른 열심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들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내어 놓는 열심은 인간을 진짜 허무로 밀어 넣는 야차들의 삼지창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일상에 대한 성실과 열심은 그 일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성실과 열심이 아니라, ‘왜 이 육적 아담들이 열심과 정성으로 생산해 내는 소산물들이 인간의 행복과 평안에 기여할 수 없는가’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공하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실패하고 망하기 위한 열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업과 가정 등의 환경과 현실에 성실하게 임하면서 그것의 성공과 실패와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과 만족의 근거가 되심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일상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 없는 일상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배우기 위한 열심인 것이며, 그러한 열심이 절대로 참 만족과 행복을 성취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열심인 것이며, 그 속에서 믿음과 소망을 더욱 더 또렷하게 붙들게 하는 열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주장한 것처럼 허무주의를 파하기 위한 열심이 아니라 이 세상은 허무하고 위험천만한 곳임을 배우기 위한 열심인 것입니다.

 

제가 가끔 철학이야기를 하면 득달같이 이메일들이 쏟아집니다. 제가 드디어 변해서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나 스토아학파 사람들처럼 철학으로 성경을 설명하려 한다는 그런 경고의 메일입니다. 잘 들으셔야지요. 저는 철학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인간들의 철학은 신학의 시녀일 수밖에 없는 지를 대조시켜 드리기 위한 소개일 뿐입니다. 예전에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잠간 언급을 했을 때에도 이 세상의 엉터리 노마디즘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짜 유목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드리려고 했던 것이지 들뢰즈의 노마디즘으로 성경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렇게 니체가 ‘신은 죽었으므로 신과 신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일상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신성 모독적 주장을 한 것이라면, 기독교는 ‘신이 살아 계시므로 신의 선물인 일상에 최선을 다해서 그 일상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사는 곳, 하나님 나라의 모형)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져 가는 역사를 살면서 그들의 일상에 무관심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방주 안에서 사용할 식량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그 일상의 일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방주 만들기에도 투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일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매우 성실하게 자신들의 일상을 살아내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상의 열심을 방주 짓기의 도구로 사용하실 뿐이었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일상의 일을 하면서 추수를 많이 한 해도 있을 것이고, 형편없이 망한 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쓰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가 일상 속에서 얼마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하나님의 관심 밖입니다. 노아는 그저 방주 안에서의 식량, 즉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일상을 산 것 뿐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역사의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일상 속에서의 열심은 방주라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전혀 무용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부정당하기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일상은 그 자체로 세상 적인 열매를 맺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과정에 도구로 쓰일 뿐임을 보여준 것이 노아의 성실한 일상입니다. 그렇게 성도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이 세상의 허무하고 추악한 실체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격발이 되고, 완성이 된, 창세전 언약의 성취, 즉 죄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그를 평안하게 붙들어 주게 되는, 그 전체의 과정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아,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 허무한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생각 없이 살다가 이 허무한 세상과 함께 멸망당할 뻔 했구나’하고 깨닫는 그 삶이 바로 이 역사 속에서의 ‘영생 살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생이라는 것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이 역사와 인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붙들고, 순종하는 데에 필요한 과정인 것이며, 그 폭풍 같은 역사와 인생 속에서 하늘의 진정한 평화를 배우는 도구요, 시험장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 비롯되지 않은 은혜와 평강은 다 가짜라는 것을 배우는 곳이 바로 이 역사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배우기 위해 성도는 자기에게 허락된 일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어 세상 속에서 망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리고, 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성도의 망함입니다. ‘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을 떠나서는 절대로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임을 분명히 배우는 곳이 가정, 직장, 학교, 교회 등의, 우리의 인생의 현장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동행을 하십니다. 그것은 폭풍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당신의 자녀들을 폭풍 속으로 몰아넣으신 아버지가 자녀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 폭풍을 다 맞으시면서 폭풍의 해악과 위험함을 가르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폭풍 속에서도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들에게서 비롯된’ 은혜와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 구약의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레위 인들이 살던 도성입니다. 그 레위 인들의 도성에 부지중에 오살 한 자, 즉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자들이 피해서 살던 곳이 도피성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구약 성경의 도피성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와 인생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의 도피성이 담고 있는 내용을 잘 공부를 하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역사와 인생의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 땅에서 감지가 되는 우리의 현실이나 상황 등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를 아는 지식에 의한 평강이라 하는 것입니다.

 

(민 35:1-8) “1 여호와께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얻은 기업에서 레위 인에게 거할 성읍들을 주게 하고 너희는 또 그 성읍 사면의 들을 레위 인에게 주어서 3 성읍으로는 그들의 거처가 되게 하고 들로는 그들의 가축과 물산과 짐승들을 둘 곳이 되게 할 것이라 4 너희가 레위 인에게 줄 성읍들의 들은 성벽에서부터 밖으로 사면 이천 규빗이라 5 성을 중앙에 두고 성 밖 동편으로 이천 규빗, 남편으로 이천 규빗, 서편으로 이천 규빗, 북편으로 이천 규빗을 측량할지니 이는 그들의 성읍의 들이며 6 너희가 레위 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 이 성읍이라 7 너희가 레위 인에게 모두 사십 팔 성읍을 주고 그 들도 함께 주되 8 이스라엘 자손의 산업에서 레위 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얻은 자에게서는 많이 취하여 주고 적게 얻은 자에게서는 적게 취하여 줄 것이라 각기 얻은 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 인에게 줄 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을 하시는데, 레위 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므로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니,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레위 인들이 살 성읍을 제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고 살 것을 나머지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십일조로 공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피성에 관한 명령은 민수기에서 처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도피성에 대한 언급을 처음으로 하십니다.

 

(출 21:12-14) “1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13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 지니라”

 

보시다시피 여기에도,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사람을 죽인 자들이 피할 곳을 마련해 놓으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그 성이 한 곳입니다. 신명기로 가 볼까요?

 

(신 19: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의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여기는 세 성읍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피성이 이스라엘 안에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지요?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도피성이 민수기에 와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열립니다.

 

(민 35:15)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타국인, 즉 이방인과,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들도 그 도피성으로 피해 보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도피성은 죽어야 할 자들이 레위 인들의 은혜와 긍휼을 입어 레위 인들의 도성에 얹혀살게 되는 그런 성읍인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내야 하는 생활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에서 도피성이 점점 늘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으로 확대가 되는 모양이 성경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예배 때 공부한 로마서 11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현실이 이 도피성에도 그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단 지파와 유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해 드렸지요? 그렇다면 먼저 레위 인이 상징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레위 인들은 출애굽당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거저 살아나게 된 장자들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차압해 버리신 이스라엘의 한 지파입니다.

 

(민 3:12-13)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 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레위 지파는 유월절 날, 애굽의 장자들과 함께 다 죽었어야 했던 이스라엘의 장자들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당신의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그것은 유월절 날 애굽에서의 장자들의 죽음이 이스라엘 전체의 죽음이 될 뻔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출 4:22-23)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죽어야 할 이스라엘 대신에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대속제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체 하나님 백성들의 기능적 모형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에게 대속 물로 바쳐진 레위 지파가 담고 있는 은혜의 현실을 몸소 경험케 해주신 율법의 규례가 십일조였습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에 바쳐진 레위 인들에게 ‘내 대신 당신이 바쳐졌다는 것을 인정 합니다’라는 수긍과 감사의 의미로 바쳐진 예물이었습니다. ‘나’라는 장자가 바쳐져야 할 곳에 레위 인이 바쳐져서 ‘나’라는 존재가 그 제물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나’의 가치에 상응하는 예물로 드린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의 대속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드려진 분이 예수 그리스도잖아요? 그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십일조가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참조)

 

보세요. 헌금은 우리가 먼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아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헌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게 레위 인과 십일조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레위 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나, 레위 인들이 거주할 성읍을 제공한 것이 바로 오늘날 헌금이라는 행위의 예표 적 모형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레위 인과 그들에게 바쳐졌던 십일조는 둘 다 공히, 죽어야 할 장자들이었던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위 지파와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과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의 평강, 하늘의 안식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고 하고 있는 이 레위 인들의 도피성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속의 메시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 역사와 인생의 모형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도피성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그 도피성의 거주민들인 레위 인들에 대한 유언이 아주 무섭게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 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 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잘 보세요. 우발적 살인자들이 피해 살던 도피성의 거주민들인 레위 인들이 실상은 반드시 죽어야 할 고의적 살인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용서 받을 방법이 없는 잔해하는 기계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출 21:14) “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 지니라”

 

(신 19:11-12) “11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거든 12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이렇게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용서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의 피로 갚아야 합니다. 속죄 제사도 못 드립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그런 연고로 레위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49장 7절의 말씀처럼 레위가 이스라엘 중에서 48개의 성으로 흩어지긴 흩어지는데 그들이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의 일을 맡은 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죽어야 할 레위인 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저주의 현실이 축복의 현실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육적 현실은, 자기 땅 하나 없이 여기저기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이 땅을 이방인이요 나그네로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교회의 모습 같아 보이지요? 맞습니다. 정확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레위 인들의 저주를 무엇이 풀어 낸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레위 인들의 저주를 풀어 낸 것입니다. 레위 인들은 죽어야 할 장자들의 대표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잖아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을 얻었습니까? 어린양의 피의 공로로 생명을 얻었잖아요? 그러니까 레위 인들은 어린양의 공로로,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의 대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인들은 그 자체로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죽어야 할 죄인들을 상징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중보자의 삶을 살게 되는 예수와 그 예수 안의 성도들을 상징하는 예표 적 실물예시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십일조도, 죽어야 할 죄인 대신에 하나님께 바쳐진 속전으로서의 예수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렇게 성경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동시에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인들이 거하는 48개의 도성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호받고 살아나게 된, 레위 인들의 피난처인 것이고, 그 중에서 오살한 자들이 피하여 사형을 면할 수 있게 되는 여섯 개의 도피성 또한, 죽어야 할 자들이 은혜로 용서받게 되는, 살인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레위인 들과 오살 한 자들은 죽어야 할 자신들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휼하고 배우게 되는 것이고,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찬송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들의 인생이 목적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머릿속에 넣어두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셨다시피 흩어져서 저주받아 죽어야 할 레위 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하게 되는 48개의 성읍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은혜의 땅인 가나안의 축소판인 것이고, 48개의 성읍 중 여섯 개의 도피성은 하나님의 저주로 죽어야 할 레위 인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48개의 성읍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레위 인, 즉 제사장이 있고,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구속의 일이 일어납니다. 거기가 어디지요? 성전입니다. 성전에서도 제사장들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들의 죄가 사해지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이나, 48개의 레위 인들의 성읍이나, 여섯 개의 도피성이나, 성전이 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서 보호를 받게 되는 은혜의 이야기, 구원의 이야기가 구약 전체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성전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들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은혜의 모습이 증거 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이 살인자들로 수시로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살인자들을 덮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 자신을 가리켜 살인자라고 부릅니다.

 

(요 8:4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 15:19)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보시다시피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살인자들입니다. 살인자 취급을 하시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살인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를 전부 자기의 유익을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죄인들은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요 원수로 여기며 살게 됩니다. 그들이 누구이던 간에 그들 위에 내가 올라서야 나의 ‘하나님처럼’의 삶이 공고히 구축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 자체를 살인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 ‘나’라는 존재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며 사는 모든 인간들이 살인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우리도 여전히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일 3:15)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렇지요? 그것도 우발적인 살인이 아닌 고의적인 살인을 매분 매초마다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합니까? 그래서 모든 존재는 다 사형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이니까요.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그러한 하늘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한 몸의 상태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니까요. 그게 부부입니다. 그건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의 존재 양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의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는 그렇게 한 몸으로 존재하게 된 것임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게 되자 한 몸의 관계가 깨지지요? 그건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인간은 절대로 한 몸으로서의 부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외의 다른 어떤 힘 있는 존재에 의해 품어 안아지지 않으면 절대 한 몸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두 사람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한 몸이었던 부부가 자기만 살기 위해 서로에게 핑계를 댑니다. 인간이 신랑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로 눈을 돌리는 순간 한 몸의 관계는 깨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흙들은 전부 자기만을 위해 상대방을 고소하는 삶을 삽니다. 바울은 사랑해야 할 자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태초의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죽어서, 그리고 자신의 것을 털어서 상대를 살리는 한 몸의 원리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죄인들은 상대방을 죽여서 나에게 귀속을 시킴으로 한 몸을 이루려 하는 속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한 몸은 자신을 죽여서 상대방과 연합이 되는 한 몸을 추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나’를 향해 있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상대에게 쏟아 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나’를 향해 집중이 될 때 그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 모든 부부는 다 이혼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죽여서 상대방과 한 몸 됨을 추구할 수 있는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한 사람들을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두가 이혼한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누가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인간의 자기사랑은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만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꾹 참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이 되어 마음에 흡족하지 않지만 꾹 참고 사는 것이 이혼이 아니고 뭡니까? 율법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너희는 그렇게 다 이혼한 자들인데, 이혼 당해 마땅한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너희들을 오래도록 참으시며 끝까지 한 몸으로 완성해 내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헤아려 보라’는 권고인 것이지, 단순히 부부관계를 깨지 말라는 그런 정도의 권고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고 그로 말미암아 다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입니다. 확인 도장을 찍어 드릴까요?

 

(롬 1:29-32)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 중에 수군수군 하는 것을 재미로 사는 사람들 있지요? 시기, 분쟁, 탐욕, 자기 자랑, 교만, 이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성경은 그 모든 것들이 죄의 경중을 떠나 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합니다. 그 말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자들이 다 고의적 살인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아담의 첫째 아들인 가인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 성경을 보면 가인이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하고 꾀어서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죽여 버립니다.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살인을 한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입니다. 그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인이라는 이름이 죄인들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와 다를 바가 없는 고의적 살인자들이란 말입니다. 그게 티끌들의 실체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조차 알 수 없는 티끌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자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란 말입니다. 그 상태가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게 고살 자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덮으셔서 오살 자(우발적 살인자)로 여겨주시고, 그 오살 자들이 피할 곳인 도피성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배우는 곳이 바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일상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당신께서 창세전에 이미 선택을 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 던져 넣으시고 이 역사와 인생을 살다가 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도피성을 직접 경험하여 살면서 우리들의 처음자리가 어떤 자리였으며 누구의 덕으로 하늘의 백성이 되었는지를 배우고 오라고 내려 보내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상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 것들이 마음에서 끊어져 나가는 삶으로 점철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피성에 들어가는 순간 밖의 모든 관계와 소유와 차단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민 35:22-27) “22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 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27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서 고의적 살인자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게 되면, 그는 그 도피성 안에서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도피성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피해자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그를 죽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도피성 안의 오살 자들은 도피성 안에서 가족들과 자신의 소유들을 마음에서 놓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이 있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도, 아무리 많은 전답과 재물이 있어도, 그것이 그를 살려 줄 수 없고, 그것으로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나가면 죽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나가 이 세상 그 어떤 힘과 가치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피성 안의 오살 자들은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자기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따로 있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민 35:28)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오살 자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대 제사장입니다. 대 제사장이 살아있을 때에는 대 제사장의 생명에 얹혀서 살다가 대 제사장의 죽음과 함께 살인자인 자기 자신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피성 안의 오살 자들은 사나 죽으나 대 제사장의 생명에 얹혀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고살 자들은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살 자들은 속죄 제사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죄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이 대 제사장입니다. 그렇게 대 제사장을 제물로 한 속죄 제사가 드려지면 오살 자들은 그 대 제사장이라는 제물과 함께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새 사람으로 탄생을 하여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의 생명을 먹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형국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처음자리, 티끌의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경험하기 위해 오살 자가 되어 이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내려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도피성 안에 감추어져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대 제사장이신 예수의 죽음이 자신을 죽은 흙의 자리에서 하늘 왕자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기업, 즉 하나님 나라로 복귀를 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 안에 감추어져서 보호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떠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배우기 위해 그렇게 살인자의 모습으로, 하나님 이외의 세상 힘들이 자꾸 떠나가는 모양으로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낙담을 하실 것이 아니라 감사의 찬송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시는 분이라면요.

 

(히 2:15-17)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바로 이 구원의 현실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자유롭게 살리셨다는 그 구원의 현실을 배우기 위해, 예수만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도피성이신 예수 안에서 대 제사장이신 예수의 생명에 얹혀서 살다가 대 제사장의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되는 그 날,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자기의 원래 기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나안 땅 안에 도피성이라는 것을 만드셨으며 그 도피성의 거주민을 레위 인으로 삼으셨을까요? 그리고 왜 그 도피성 안으로 오살 자들을 들여보내신 것이지요? 다른 질문으로 바꾸어 볼까요? 왜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바로 천국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시고 오살 자들로 만들어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도피성의 삶을 경험하게 하실까요? 그 모든 건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오살 자가 뭡니까?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인자가 된 자들입니다. 신명기 19장의 예를 한 번 생각해 보자고요. 나무를 하다가 도끼머리가 빠져서 다른 이를 찍어,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된 사람, 그 사람은 그냥 용서해 주시면 안 되나요? 어차피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꼭 도피성으로 피하게 하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사람의 그 행위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연인가요? 성도의 삶에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나요?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살인자로 만들어서 도피성으로 집어넣으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그러한 시나리오를 작성하시고 드라마를 진행해 가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추악함, 그리고 그것과 다르지 않은 우리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게 하시고, 그들 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교훈하시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만일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오살 자들이 생겼을 때 굳이 그들을 좇아가 복수를 하려 할까요? 이해하고 용서를 하겠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때요?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나’의 가족, 내 소유에 위해를 가한 자는 절대 용서를 못하는 것이 죄인들의 세상 현실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지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고 해서 난장판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레위 인들은 어떻게 그러한 오살 자들을 받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까? 자기들이 원래 그렇게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자들이거든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도피성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은혜에 둔감한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고, 자신들 또한 그러한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다른 이들의 고기를 노리고 있는 추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제사장의 죽음이 나의 그러한 추악함을 함께 죽여주었음을 믿음 안에서 배우고, 그러한 은혜를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하루하루 굴복해 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의 삶 속에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이 나오고,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씩 비치게 되는 것이며, 섬김과 구제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진정한 평강의 삶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인생은 이 세상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세상인지를 배우고, 자기 자신의 처음자리가 얼마나 불가능하며 추악한 자리였는가를 배우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체휼하는 은혜의 ‘도피성 살이’인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도피성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며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우발적 살인자들, 오살 자들로 만들어 도피성을 살게 하시면서 이 세상 속에서의 관계나 소유나 평판이나 인기 등이 자신들을 살릴 수도 없으며,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지고의 복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배우는 것, 그게 성도의 ‘도피성 살이’인 것입니다. 그 현실을 믿음 안에서 깨닫지 못한 자들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을 찾지 못해 아비규환하게 됩니다.

 

(계 6:12-17)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열심히 쌓고 모으고 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산에게, 바위에게, 자신들을 좀 가려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도피성 살이’를 하면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해 줄 것은 하나님의 날개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배우게 되기 때문에 그때 이렇게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139:7)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 하리이까”

 

(시 91:1-8)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 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 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5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켜 줄 수 없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자각하는 ‘도피 성 살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대 제사장의 죽음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대 제사장이 죽지 않으셨다면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라는 기업으로 복귀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양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바로 그 도피 성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잊지 마시고, 그 도피 성 속에서 배워야 할 것만 잘 배우시면 됩니다. 그것을 잘 배우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일상에 피 흘리기까지 열심을 부려 임해야 합니다. 열심을 부려 무엇을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부려 실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적 실패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이 오롯하고 명확하게 여러분에게 인식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참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왜 하나님의 도피성 안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이렇게 구차하고, 고통스럽고, 아픈지, 그리고 이 도피성 안에서 도피성의 은혜 성을 깨닫게 된 자들의 삶이 어떻게 지향되어 가는지에 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고 올바르게 이해를 하시게 되면 여러분의 평안의 깊이가 더욱더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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