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언약과 쪼갠 고기 그리고 할례
(김성수 목사)
(창 15:7-21) “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13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16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18 바로 그 날, 주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19 이 땅은 겐 사람과 그니스 사람과 갓몬 사람과 20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르바 사람과 21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을 다 포함한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신자의 삶 속에서 왕 노릇을 하여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시켜 가는가에 관한 것을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좀 더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실례를 통하여 그 은혜 언약의 실체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창세기 15장의 이 은혜 언약의 구체적 그림이 성경 전체로 어떻게 점진적으로 계시가 되고 있는지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 바울의 서신 서까지 갈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은 14장까지에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땅이나 이 세상의 자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구성의 삼 요소 중 국민과 영토를 약속하신 것이라 했지요? 그 약속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천명(闡明)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던지신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절박한 기근과 전쟁, 여전한 불임(不姙)의 막막한 어둠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두려움과 절망감과 초조함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5장에서도 그렇게 두려워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약속한 땅을 줄 것이고 그 땅에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네 자손들을 번성케 할 것이라’고 당신의 약속을 반복하여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가 400년을 종살이 하다가 4대만에 풀려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400년과 4대라는 것은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예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반드시 하늘의 뭇별만큼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예언입니다. 후손이 있어야 애굽으로 잡혀가든지 풀려나든지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의 미래에 관해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풀려날 때에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애굽을 치실 것이고 그 후손들이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본문 13절로 가 보겠습니다.
(창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얼른 생각나는 장면이 없으세요?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 곳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애굽왕 바로에게 빼앗겼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찾은 후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그 사건이 생각나시지요? 똑같은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상기시키시며 그 때와 같은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창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것인지를 성도의 삶 속에서 실재 화시켜 경험케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인생동안에 겪는 모든 사건과 정황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지신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데 소용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야곱과 그의 식솔들 70명이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요? 역시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쏟아 부으시는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지요? 그 때 그들이 애굽의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출발을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요? 하나님이 애굽왕에게 퍼부은 재앙으로 하나님의 힘에 의해 애굽에서 나오게 되지요? 그도 역시 애굽왕으로부터 받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어떠세요? 아브라함의 애굽행(行)과 가나안 복귀, 이스라엘의 애굽행과 가나안 복귀가 정확하게 같은 그림으로 겹쳐지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을 때 자신의 후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탄생될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이 준비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방법과 과정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질 것임을 아브라함의 경험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교회에게 힌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오늘 본문에서 좀 더 실감나는 그림으로 반복되어 설명이 됩니다. 지금 살펴본 본문 13절 14절의 전후를 한번 연결해서 볼까요?
(창 15:8‐10, 17)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 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두려움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해 ‘증거를 보여 주세요’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을 마련하고 그 제물들을 쪼개 놓았습니다. 제물을 쪼개는 것은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고대 시대의 언약 관습입니다. 언약 당사자가 손을 잡고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걸어감으로 해서 이 언약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이 제물처럼 쪼개지게 될 것이라는 굳은 약속의 예표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쪼개짐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렘 34:18-21) 그런데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끝까지 순종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순종을 한 것이라고 지적을 하곤 합니다만 훗날 모세의 율법에도 보면 새는 쪼개지 말고 불태우라고 나와 있습니다.(레 1:14‐17)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제사의 형식이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주어져 있었던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17절입니다.
해질 무렵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홀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연기와 횃불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현현(顯顯), 불기둥과 구름기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쪼갠 고기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과 땅은 하나님이 홀로 마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깹니까?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깹니다.
바로 다음 장인 16장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15장에서 네 몸에서 날 자(者), 즉 적자(嫡子)가 네 후손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서자(庶子)를 내어놓고는 이가 내 상속자라고 금방 그 약속을 깨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은 깨졌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쪼개져서 죽어야 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쪼개져야 할 아브라함 대신에 당신의 쪼개짐을 통해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언약 완성을 당신의 쪼개짐으로 이루실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홀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쪼개짐이 어디에서 실현되었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가 탄생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창세기 15장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예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쪼개다’라는 히브리어는 ‘바타르’입니다. 그 단어는 역시 ‘쪼개다’라는 단어 ‘바라’를 어근으로 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바라’라는 단어를 어근으로 갖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베리트’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은 모두 그렇게 쪼개짐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쪼개다’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칼로 자르다, 칼로 쪼개다’라는 단어 ‘바타르’의 동의어는 히브리어 ‘물’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쪼갠 고기사이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시는 장면은 할례 언약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의 그림을 할례 언약으로 먼저 끌고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인 15장에서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 가셨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포기하실 분이 아니시지요? 17장에 보면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또 다시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시면서 언약을 하시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15장에 나타난 ‘쪼개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쪼개짐’ 즉 ‘할례’라는 방법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므로 자꾸 네 방법으로 방해하지 말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창 17:6,9‐11)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네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10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이다.”
여기까지 우선 연결을 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과 그들에게 주실 땅에 대해 약속을 하시는데 인간들이 자꾸 엉뚱한 것들을 내어놓고 그 약속의 성취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홀로 성취시키시는데 그 방법으로 ‘자신의 쪼개짐’ ‘할례’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그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할례를 안 받으시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가?’ 이 설교를 다 들으시면 그 의문이 풀리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쪼개짐이 17장의 할례로 연결이 되는 것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이삭의 모리아 산 사건을 통해 그 쪼개짐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힌트 해 주십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이삭이 8일 만에 할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22장이 모리아 산 사건입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가 자기가 죽을 나무를 지고 어떤 산으로 오릅니다. 그리고는 아비의 손에 들린 칼에 의해 쪼개져서, 다른 말로 온 몸에 할례를 받고 죽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므로) 할례가 ‘칼의 언약’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삭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나무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에 할례를 받으시고 죽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 백성들이 하늘의 뭇별처럼 살아나게 될 것임을 이삭이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삭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하나님 백성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할 이삭 대신에 어린양이 대신 죽고 그가 살아나지 않습니까?(창22:13) 그렇게 이삭은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어린양)와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망에서 살아나게 되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중적 상징을 함의 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 사건은 야곱의 얍복강 사건에서 또 한 번 구체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얍복강 이전까지의 야곱의 삶은 그야말로 사기와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가능한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씨름을 하시는데 죄인들의 세상 힘을 향한 욕망과 욕구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그를 죽이고 새로 창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 뼈를 치시는 것입니다. 환도 뼈는 인간의 전인(全人), 전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생식기를 가리켜 환도 뼈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죽은 것처럼 원리적으로는 거기서 환도 뼈가 쪼개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처럼 실제로 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다시 살아나 새로운 존재, 즉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쪼개져 죽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재탄생하는 사건이 얍복강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 역시 죄로 인해 죽어야 할 하나님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하나님 백성의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한 발 더 나가 볼까요? 출애굽기로 가면 그 ‘쪼개짐의 언약’ ‘칼의 언약’ ‘할례 언약’이 좀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출 14:21)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여기서 ‘갈라져’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쪼개다, 베어내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바라’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바카’라는 단어입니다. 그 저주의 쪼개짐, 베어냄 속으로 이스라엘이 들어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주의 쪼개짐 속으로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나왔을까요? 바울이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저주의 쪼개짐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세라는 사람 안에 들어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저주의 쪼개짐 속에 들어가 죽은 자는 모세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세의 죽음에 의해 다른 이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품에 품고 홀로 죽은 것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저주받아 쪼개져 죽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품고 죽으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나게 된 교회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뭡니까? 오늘 본문에 그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성취 될 것임을 예표 하는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언약은 창세기 15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시작되었지요. 무죄한 짐승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부끄러움이 가려진 사건이 바로 할례 언약의 최초의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생식기에 쪼개짐의 자국이 나야합니까? 어차피 하나님이 쪼개지셔서 우리 죄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왜 인간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인간의 생식기가 쪼개져야 하지요? 그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거든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쪼개짐이 우리 성도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쪼개진 것으로 간주(看做)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 예수님께서 온 몸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온 몸이 휘장이 찢어지듯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쪼개짐이었습니다. 바로 그 쪼개짐이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는 이제 결코 정죄되지 않는 자로, 새 생명을 가진 자로 탄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할례가 내 할례가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 흔적이 우리의 몸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하나님 백성의 생식기가 쪼개진 흔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넌 예수 안에서 죽은 자’라는 선포지요. 그런데 왜 오늘날에는 우리가 할례를 안 받지요? 이제는 성령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성도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육신에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의 영에 할례를 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복된 소식,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골 2:11) “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는 모두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할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할례의 정신이 오늘날 세례로 이어지는 것이고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쪼개진, 다른 말로 저주의 바다 속에 빠져 죽고 다시 살아난 자라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쪼개짐에서 골로새서의 그리스도의 할례까지가 연결이 되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거하게 될 약속의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국민과 영토에 관한 약속은 주어지지만 왕에 대한 약속은 없지요? 그러나 국가가 완성이 되려면 ‘주권’을 쥐고 그 영토와 국민을 다스릴 왕에 대한 약속도 있어야 지요? 그 왕에 대한 약속은 사무엘 서에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2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실 땅의 경계가 나오지요? 그 구절들은 얼핏 보면 전혀 쓸모없는 구절들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절들은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구절들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약속의 땅의 경계가 그 상태로 확정이 된 시대는 여호수아 때가 아니라 다윗 왕 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본문 18절에서 21절까지는 할례언약을 사무엘서의 다윗언약으로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것입니다. 다윗 왕 때에 가서 창세기 15장의 하나님의 약속이 천년 만에 비로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백성과 땅이 확보된 그 때에 또 다시 언약을 주십니다. 사무엘 하 7장으로 가서 소위 다윗언약이라 부르는 그 언약의 끝 부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하 7:12‐13,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때는 백성과 땅이 창세기의 하나님의 언약대로 온전히 확보가 된 상태입니다. 물론 모형과 상징으로서의 백성과 땅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왕에 대한 언약을 보태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을 약속하시는데 그 왕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후손이 가리키는 일차적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왕위가 지금까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그 후손은 솔로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왕은 누구일까요? 영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8:36-37) “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37 빌라도가 예수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고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
보세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요? 다윗 언약에서 약속된 그 영원한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늘나라의 땅과 백성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 언약이 다윗 때에 이르러 성취가 되고 또 다윗 왕 때에는 왕에 대한 언약이 추가되고 그 전체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국민, 주권, 영토)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할례언약으로, 출애굽 사건으로, 다윗언약으로, 십자가로 이어지는지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이렇게 우리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 받아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옛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선언합니다.
(골 1:1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아들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권세와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갈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골 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전부 과거시제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 현실이 바로 예수 안에서 할례 받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제 죄의 나라는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요일 5:18) “18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자의 지키심으로 악한 자가 성도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가까이 오지도 못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의 나라에서 빠져 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가 분명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요.
(요일 3:9) “9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닌 것 같지요? 여전히 우리는 죄에게 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모두 가짜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 성도는 결코 정죄치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 성도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기각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죄의 모양이 수시로 나오지요? 그것은 지금 우리가 저 건너편 흑암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는 죄에게 지레 겁을 먹고 옛 습관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나의 새사람이 짓는 죄가 아니라 옛사람의 습관일 뿐입니다. 나의 영혼은 새로워졌는데 여전히 부패한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그 몸속에 옛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먼 죄의 나라에서 죄가 우리를 격동하고 협박을 하면 그 습관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롬 7:19-20)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도가 죄를 의인화시켜 설명을 하지요? 내가 지금 죄의 협박과 격동에 못 이겨 옛 습관으로 다시 빠져드는 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내 속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부패한 성향과 특성과 경향과 습관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내 죄로 간주하지 않으시고 죄의 소행으로 간주해 버리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거에 미국의 노예들이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만치서 옛 주인이 기침만 해도 두려워 벌벌 떨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심지어 어떤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너무 어색해서 자진하여 노예로 복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죄는 우리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범접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저 멀리서 눈을 부라리며 ‘야, 너 옛날에 내 종이었잖아. 이리와’하고 위협을 하면 지레 겁을 먹고 우리 몸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부패한 성품과 성향과 경향이 무조건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없는데 그 옛사람의 습관과 성향과 경향만이 남아 계속해서 우리 몸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미 온전하게 된 영과 구별하여 ‘죽을 몸’이라 부릅니다.
(롬 6:12) “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할례를 받아 우리 주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지만(엡 2:6) 아직 부활의 육체를 받지 못하고 죽을 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죽을 몸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향, 습관, 경향 등에 수시로 노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죄의 삯을 받아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는 그 몸의 구속, 즉 그 몸마저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날을 간절한 소망으로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롬 8:23) “23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부패한 성품이나 습관이나 경향이나 특성 등이 자기에게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될 날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쪼개짐을 받아 구원을 선물 받은 자라는 올바른 자각이 있는 성도는 자기 몸이 죄의 공갈 협박에 넘어가 다시 죄의 종처럼 살게 되는 그 삶을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롬 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2절의 ‘죽은’이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미 죄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죄의 종으로 살 때의 습관과 성향을 반추해 내는 것에 불과한 것임을 확실히 깨달아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공격은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롬8:1) 그 말은 구원받은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께 카운트가 안 되는 죄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지금 우리는 신기루 같은 죄에게 속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확실한 진리 위에서 대적을 하면 마귀는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들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약 4:7)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러분, 자신이 쪼개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한 언약을 성취해 내신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우리가 여전히 옛사람의 더러운 모습으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우리 것이 아닌 신기루 같은 죄에게 계속 놀림감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쪼개져 죽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새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새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삽시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13)-(김성수 목사) (0) | 2013.08.31 |
---|---|
[스크랩]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김성수 목사) (0) | 2013.08.29 |
[스크랩] 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들의 상급?(III) (12) (김성수 목사) (0) | 2013.08.29 |
[스크랩]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I) / 아가 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0) | 2013.08.28 |
[스크랩] 음녀의 가진 금잔 (김성수 목사) (0) | 2013.08.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