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들의 상급?(III) (12)
(김성수 목사)
(롬1:3~6)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니라”
제가 일전에 인간의 문자는 그 자체 내에 법을 함의하고 있다는 말씀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표피 적으로, 문자적으로만 읽게 되면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놓치게 되고, 도덕과 윤리, 즉 조직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에 관한 책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조)
문자 층->
예수 그리스도->
위의 그림에서 문자 층에서만 머무는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과 윤리, 혹은 행위 규범을 기록한 책으로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루소나 간디, 도올 김용옥씨 같은 그런 사람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문자 층 아래로 내려가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올바른 성경 읽기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성경이 도덕책이나 윤리 책이 되어 버리면 성경은 즉시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짐으로 작용하게 되고, 그 짐을 누가 많이 져내느냐에 따라 상벌의 차등이 결정된다고 하는 법전으로 격하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법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구약과 신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 언약들은 모두 ‘예수 안에서, 예수의 십자가 피로 내 백성을 건져내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만들어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자녀가 되게 하겠다.’라는 창세 전 언약(엡1:3-14)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언약의 주체도 하나님이시고 실행자도 하나님이시며 완료자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익히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창세 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완성이 되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 언약을 피의 언약, 죽음의 언약으로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9:16-18)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여기에서 유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와 언약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공히 ‘디아데케’입니다.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첫 언약, 즉 옛 언약도 피로 세운 언약이라는 것이고 그 언약들의 원형인 창세 전 언약 또한 피로 맺은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보시다시피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죽어야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은 성부와 성자간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가 죽으신 것입니다. 왜요? 언약의 효력을 발생시켜 그 언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살려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구약과 신약은 전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활약으로 창세 전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고지하는 언약의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성취 과정과 언약의 배경, 그리고 언약의 필연성을 성도의 삶 속에서 실제 화시켜 나타나게 하겠다는 선포가 담긴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 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그것을 수긍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복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죽은 흙이냐? 왜 우리가 소품이냐? 왜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값어치가 없는 것이냐? 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해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 역사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자신이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이며, 소품이며, 피동체이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약할 때 강함이 된다는 바울 신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약함은 쇠하여야 할 ‘나’이고 강함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왕 되심,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책이기에 성경 스스로가,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 1: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히 10:7)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눅 18:31)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 24:27)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렇게 성경은 전부 언약의 당사자이자 언약의 실행자요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필연성을 확고하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지 간디나 슈바이처처럼, 우리가 행해야 할 행위 규범들이 적혀 있는 법전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우리가 행해야 할 규범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일을 기록한 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읽어내지 못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만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법으로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법적 행위를 근거로 상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내가 지켰거든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번 잘 들어보세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선과 악의 구분을 스스로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인간의 속성을 인간들은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넌 양심도 없니? 양심 좀 있어라’ 혹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 ‘양심에 털 난 자’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양심을 따라 사는 자들을 선한 자, 착한 자, 훌륭한 자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종류의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과 무관한 양심입니다. 아니 오히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 마음대로 선악을 판단하게 된 상태에서 인간들이 감지하고 내어 놓는 양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양심인 것입니다. 그걸 바울이 율법의 기능을 가진 양심이라고 합니다.
(롬 2:15)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보시다시피 이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을 송사하여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속한 문화나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합의하여 각 개인에게 요구하는 공동체적 요구사항인 윤리, 그리고 그 윤리의 근간이 되는 도덕 등을 기준으로 하여 양심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채우려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합의하여 결정한 도덕과 윤리, 그리고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것들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선악을 정의하고 판단하기 시작한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들의 존재 가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그것들을 지키고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행함과 지킴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에 전혀 선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윤리 등의 그러한 자기 존재 가치 구축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자기의 의를 하나하나 챙겨 갖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양심을 따라 살면서 ‘난 정말 양심 있는 사람이야, 가치 있는 사람이야’라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방인의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게 인간을 죽이는 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마저도 잘 지켜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그 허울 좋은 양심을 따라 살게 되면 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이 세상 속에서 전혀 유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대로 살아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챙길 것인가? 아니면 양심을 좀 거스르더라도 형이하학적 육의 이익을 챙길 것인가?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인간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갖게 되고 그러한 가책을 회개라는 이름으로 미화하여, 역시 그 안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챙겨 버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이 바로 그 양심의 가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다의 행위는 사뭇 비장해 보이기도 하고 훌륭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건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죽음으로라도 자신의 가치를 챙기겠다고 하는 추악한 마귀 적 행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과나 반성 그리고 회개를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내어 놓고 사과는 할 줄 알고 반성은 할 줄 아는데 회개를 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우리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탕자의 비유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주인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인간 측에서 격발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격발시켜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의 삶 속에서는 사과와 반성은 나와도 회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과와 반성 속에는 여전히 ‘나’라는 우상의 잘남과 가치를 챙기려 하는 육적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울타리 밖에 있는 양심의 가책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마귀 적 속성을 더욱 공고히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눅 15:8~10)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보세요.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였음도 자각하지 못하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열심히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시면 주님이 그것을 회개라 부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찾아진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그 분의 열심만을 면목 없이 찬송하게 되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사과를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간들은 반성이나 사과를 하면서도 반성을 하고 있는 자신을 칭찬하는 그런 존재니까요. 유다를 보세요.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치를 놓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처럼 가치 있는 존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만한 짓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의 의를 스스로 챙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를 가리켜 ‘마귀(요6:70)’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여전히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양심을 따라 살며 자신들의 존재가치와 만족과 영광을 챙기려 하는 행위는 선하고 기특한 행위가 아니라 마귀의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어때요?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이죠? 금방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사람이 뻔뻔스럽게 ‘저 주님 사랑합니다.’하고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양심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찾아진, 진짜 회개의 사람은 자신의 행위나 열심을 절대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예레미야 17장 9절의 말씀처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인간의 양심도 거짓되고 부패한 것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은혜로부터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 또한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옷(사64:6)(슥3:4)’에 볼과 하다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신자의 양심이라고 합니다.
신자의 양심은 이방인의 양심과는 다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신자의 양심은 자기 행동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면서 ‘이건 선한 것이니까 열심히 행해야 해, 이건 악한 것이니까 절대로 해서는 안 돼’라고 하며 선한 행동을 하고자 애를 쓰는 양심이 아니라, 자신의 그 어떤 행동도 의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양심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양심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잘 살아내지 못하는 그런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자각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능성과 능력을 여전히 신봉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렇게 이방인의 양심 고백이 ‘내가 이런 나쁜 일을 했습니다.’라며 자신의 행동의 잘못됨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신자의 양심은 ‘저는 착하게 살고자 하는 열심 속에서도 여전히 저의 가치와 영광과 만족만을 챙기려 하는 추악한 죄인입니다. 저는 말씀 안에서 우리 인간의 그러한 선을 추구하는 행위까지도 죄가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 참된 의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양심고백은 윤리와 도덕에 어긋난 행동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착하게 산다고 여길 때는 양심 고백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날마다 양심 고백을 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니면 의에 속할 수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게 진짜 양심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양심은 매순간 자신을 죄인으로 밀어내리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양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다보면 절대로 도덕과 윤리의 범주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성경의 문자 층에 머물면서 자신들이 규정하고 상정해 놓은 허울 좋은 마귀 적 양심을 따라 자신들의 행위에 일일이 가격표를 붙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값어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어떤 것은 가치 있는 행위로 어떤 것은 가치 없는 행위로 구분지어집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 다시 여러 가지로 세분화 되어 상세한 가격표를 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이 규정해 놓은 가격표를 많이 떼어서 모은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상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행위들은 인간의 양심에 따라 가치 있는 행위가 되기도 하고 가치 없는 행위가 되기도 하면서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회적 합의에서 ‘법’이라는 것이 도출이 됩니다. ‘이런 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고, 이런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이며, 이것은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며 그 가치의 양은 이 정도이다’라는 식의 법이 도출이 되면 그 법이 언어와 문자 속에 담기게 됩니다. ‘도둑, 살인, 거짓말, 사랑, 섬김, 은혜, 밥, 반찬, 배설물, 이별, 슬픔’등등 모든 언어는 그 자체 안에 인간들이 합의한 선악의 메시지를 담고 있고 가치라는 내용을 담습니다. 그걸 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양심이라는 것에서 나온 법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은 온통 인간들이 지켜야 할 행위 규범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이 인간 자체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해 작동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지켜서 자신들의 가치를 챙겨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인간들의 열심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롬 10:2-3)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렇게 성경은 전체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구구절절이 담고 있는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고작 행위 규범 정도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골 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 이니라”
성경은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의 눈에는 문자로, 법으로만 보입니다. 그게 비밀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 비밀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그저 법의 수준으로 보아 ‘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면 가치 있고 폼 나게 살아내어 세상으로부터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상을 받을 수 있을까?’로만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경의 비밀을 풀지 못한 사람인 것이고, 그 수많은 법의 언어 속에서 예수와 십자가를 읽어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는 자들이 성령을 받고 구원에 이른 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나 사역 자들에게도 동일한 문제점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 두 친구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상급의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전 세계 유수의 신학교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서 박사학위 논문 여섯 개를 구해서 돌려가며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중 두 편이 독일 튀빙겐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이었고, 두 편이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이었고, 한 편이 한국 총신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이었고, 다른 한 편이 한국 장로교 신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그 중 독일 튀빙겐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 두 편이 참으로 흥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 독일어를 공부했었던 지라 독일어를 좀 하는 편이어서 웬만한 논문들은 그냥 읽을 수 있는데 그 학위 논문은 너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전문 번역가에게 맡겨서 거금을 주고 번역을 시켜서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 번역료를 할부로 갚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일 년 치의 도서 비를 다 쏟아 부어 번역을 해 읽은 그 학위 논문은 그냥 레퍼런스의 나열 정도밖에 안 되는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존 칼빈, 루이스 벌콥, 조지 래드, 등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표피적으로 인용을 해다가 자신들의 주장에 덧입히는 식의 논문에 그렇게 많은 물질과 시간을 허비한 것에 대해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를 할 정도입니다.
저희가 토론을 하기 위해 읽었던 여섯 개의 논문은 각기 다른 주장들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논문 작성자들이 자신들의 논문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너무 문자적이고 법적인 수준에서 인용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급이 있다고 주장을 하기 위해 많은 레퍼런스들을 인용하고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그 구절들에 쓰인 단어들의 원어 분석들을 해 놓았고, 어떤 사람은 상급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많은 레퍼런스들을 들이대며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해 놓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반된 주장을 하는 그들이 인용한 신학자들이 거의 같았다는 것이고, 그들이 인용한 성경 구절들이 전부 문자적 해석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도 자신의 책들 안에서 자체 모순과 자체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이고,(그러니까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레퍼런스가 같을 수 있었던 것) 그렇게 인용을 하는 이나 인용을 당하는 이나 공히 교리적인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라, 지키라, 하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의 명령을 전부 우리가 해내야 할 것으로, 성화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니까 그러한 일들이 상급의 조건과 전제가 될 수 있다고 우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그러한 명령들은 성도의 행위규범이나 의무사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료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새 삶에 대한 소개이며, 지향성의 확인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골로새서를 중심으로 성경의 몇 군데를 예로 들어, 성경이 과연 법으로, 문자로 읽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고 기독교 상급 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우리가 얼마만큼의 선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흡족해 하시고 상을 주실 것 같으세요?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천 번 한 사람과 거짓말을 열 번 한 사람과 상이 같을까요? 다르겠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선악구조에 의한 판단으로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그렇다면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신 하나님은 나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받을 상을 하나님이 하나 깎아 버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도 자기 나라를 팔아먹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서의 상급이 조금 줄었겠네요? 그 일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 과정에 꼭 필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가 받을 상급에 손해를 보아야 하는 겁니까?
다른 질문을 해 볼게요. 비슷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 둘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자기 재산 중 10억 원을 떼어 내어 구제비로 쾌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100만원을 구제비로 내 놓았습니다. 어떤 게 더 가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10억 원을 구제에 사용한 사람과 100만원을 구제에 사용한 사람과 상이 같을까요? 분명 겉으로 드러난 모양으로는 10억 원을 구제비로 쾌척을 한 사람이 더 큰 상을 받을 일을 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10억 원을 쾌척한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 불리고 싶은 자신의 육적 자아의 욕망에 기인하여 구제비를 내 놓았던 것이고, 100만원을 기부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주님이 주신 재산 중 일부를 ‘나는 이 세상 힘을 힘 삼아 살지 않고 예수님을 나의 힘으로 삼아 삽니다’라는 고백으로 구제비에 썼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정말 가치 있는 행위가 되겠습니까? 100만원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악구조는 그 마음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그 행위의 가격표를 매기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속습니다. 자신은 원래 자신의 만족과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도, 자기 같은 훌륭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만족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그런 연극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고 칭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자기 방어기제는 그렇게 교활하고 영특합니다. 그러한 선악구조 하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그 수많은 ‘하라’의 명령들이 전부 내 가치를 쌓을 수 있는 가격표 모으기의 재료들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평생 모은 가격표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선을 행하라고 하면서 ‘항상’이라는 전제를 달아 놓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갈 3:10-12)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0절에서 ‘온갖’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스’는 ‘온, 전체의(every, the whole)’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에 기록된 것 중 몇 개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게다가 바로 옆에 ‘항상’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엠메노’는 ‘계속 머무르다(to remain in, continue)’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항상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는 것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면 그는 저주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온갖’이 아니라 ‘몇 개’도 안 될 뿐 아니라 ‘항상’은커녕, ‘가끔’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 맞는 것입니다.
(약 2:9-10)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어떠세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우리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되는 게 하나님 나라의 사법체계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읽으면서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단 한 건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허벅지를 찔러가며 착하게 살자’라고 결심을 해야 하나요? 그게 여러분의 실존적 경험 상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오히려 우리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시키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의 필연성과 은혜 성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롬 11:28~32) “28 복음으로 하면 저희(이스라엘)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 선물)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28절의 저희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민족적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는 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28절의 ‘저희’는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민족적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함의 가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의 행함을 전혀 내어 놓지 못했던 이방인들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인간의 행함의 가치를 부여잡고 있다가, 다른 말로 인간 존재의 자존심을 부여잡고 있다가 하나님의 원수로 판명이 났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원수들을 사랑해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근거가 ‘조상들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을 따라 부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밑 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방해와 저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나가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32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교회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임을 먼저 자인 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온 몸과 마음을 던지는 교회인 것이지, 육적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의 행함의 가치를 끝까지 챙기는 그런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야 그 원수의 머리에 긍휼이 부어지지요. 그것이 바로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구조인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 모형 화하여 내려온 하나님 나라, 즉 성막과 지성소의 구조 아닙니까? 하나님은 시은 좌위에서 인간의 죄를 내려다보시는데 그 중간에 예수의 피가 덮이는 것이 지성소의 구조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용서를 베푸시는 이로 항상 존재하셔야 하고 교회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원수로 발각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절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골 3:18-25)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 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얼핏 보면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자녀를 격노케 하지 않는 부모,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들은 상을 받게 되니까 열심히 하라는 명령같이 보이지요? 그래서 열심히 하고 계시나요? ‘항상’ 그리고 ‘온갖 일’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잘 안되지요? 그러면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들이겠네요? 이러한 명령이 어떤 문맥에 이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초대교회 안에 들어 온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한 경고의 편지로 쓰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경계해야 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세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 2:8,16-23)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편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 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여기에 보면 골로새 교회에 들어 온 거짓 가르침의 첫 번째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절기나 월삭, 그리고 안식일 등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행위주의와 율법주의입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것들은 전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못을 박습니다. 거기에서 장래 일이라는 것은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주신 절기나 안식일은 모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 들어 온 유대주의는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율법을 계속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두 번째가 신비주의입니다. 18절을 보시면 골로새 교회에 천사 숭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 숭배라는 것은 당시 환상으로 천사를 본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가지고 교회 앞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18절 말미를 보면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신비주의의 정체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너보다 훨씬 훌륭한 신앙인이며 영성이 깊은 자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입니다. 역시 인본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폭로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앞에 ‘일부러 겸손함’이라는 것이 경고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겸손함이 전부 다 진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일부러 겸손’이라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성화를 강조하다보면 이런 일부러 행함의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그런 가르침이 들어와 있었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골로새 교회에 들어와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던 자들이 ‘여러분, 겸손하기 싫어도 일부러 겸손 하세요, 그래야 사람들이 존경해 줍니다.’라고 가르쳤을까요? 아니요. 그냥 절기와 안식일 등의 율법을 잘 지키라고 가르쳤어요. 신비한 체험이나 경험이 월등한 신앙인의 표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를 쏙 빼먹고 인간의 힘으로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가치 상승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하지 않은 가짜 겸손, 가짜 율법지킴, 가짜 체험이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료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금욕주의입니다. 20절 이하를 다시 보세요.
(골 2:20-23)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 교회에 아주 극심한 금욕주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23절에서 그것을 가리켜 ‘자의적 경건, 자의적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의적 행위가 겉으로 지혜 있는 모양을 갖추고는 있지만 실제로 육체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가짜 행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 답이 19절입니다.
(골 2:19)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예수라는 머리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지체가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이신 예수께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고 존재케 하시는 것인데 왜 지체들이 저마다의 존재성과 개체성을 확보하려고 하고, 자신들의 가치를 챙기려 하냐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너희들의 행위, 너희들의 외모, 너희들의 조건 들먹이지 말고 예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땅에 것을 구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권고인 것입니다.
(골 3:1-3)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사도 바울이 2장에서 거짓 가르침, 즉 인간 중심의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가짜 겸손 등에 대한 경고를 던지다가 지금 땅의 것과 위의 것을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땅의 것이 뭡니까? 2장 말미에서 열거 된 인간의 행위와 외모를 중시하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행함이 사람의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것. 그것이 땅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로 위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예수만을 믿는 ‘믿음’입니다.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억지로 내놓는 겸손, 이런 거 말고,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위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성하시고 완료해 놓으신, 그것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맥락에 붙어 있는 것이 조금 전에 읽은 ‘남편들아, 아내들아, 종들아’의 권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맥락 속에서 갑자기 ‘너희들의 행함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 행함을 근거로 상 받아라’는 말이 튀어 나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거창한 행함이나 신비적인 체험 등을 거론하여 경계시키면서 소소한 일상으로 독자의 눈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뭐 거창하게 일부러 겸손한 척 하지 않아도, 금욕적인 삶을 보여주지 않아도, 신비적인 체험으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아도 남편이 남편의 역할을, 아내가 아내의 역할을, 종이 종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며, 그 삶으로도 얼마든지 상을 받게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해야 상 받는다’가 아니라 뭐 대단한 것들로 너희들을 치장하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일상 속에서 너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23절과 24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골 3:23-24)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사람들에게 잘 나 보이기 위해 억지 행위 같은 거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 상은 주님이 알아서 주시는 것이지 우리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4절의 상이 ‘유업의 상’이지요? 그 유업의 상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라는 유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갈 3:18)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여기 똑같이 유업의 상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유업이 율법지킴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난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행위와 약속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 우리의 영생, 우리의 나라는, 우리의 행위나 됨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차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만을 붙들고 자신의 행함을 부인하는 것을 ‘순종’이라 합니다. 사전적 의미의 순종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을 다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선물을 면목 없이 덥석 받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는 어구에서 잘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구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격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완료시켜 선물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물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자존심은 절대로 자신의 노력과 가치가 제외된 그 결과물을 면목 없이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그걸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이들은 면목 없이 그 선물을 받고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그걸 순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 순종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삼상 15:22)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울이 아람과의 전쟁을 치르고 대승을 한 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좋은 제물 감들을 살려 가지고 왔을 때 사무엘이 한 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자 낫다’고 하지요? 여기에서 ‘낫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그건 ‘보시기에 좋았더라’ 즉, 창조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작품에 대한 평가가 ‘토브’입니다. 그것만 ‘선’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어구는 순종도 좋고 제사도 좋은 것인데 둘을 비교 할 때 순종이 조금 더(better) 나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순종만 선이고 제사는 악이라는 말입니다. 제사라는 행위와 순종이라는 믿음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요일 1:8-10, 2:1-5)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1장 말미를 빼고 2장 1절을 읽으면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이 단순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오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장 말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죄 없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못을 박은 후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장 1절에서 사도가 경고하고 있는 ‘범죄’는 사건화 되어 밖으로 나타난 개별적 죄의 증상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는 훌륭한 행함으로 죄인의 반열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의 그 사고와 행위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러면서 또 금방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자’라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을 바꾸지요? 이게 바로 성경을 문자로, 법으로 볼 때의 문제점인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일관성 있게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다른 말로 행함을 근거로 하여 ‘나는 이제 다른 죄인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고 있는 성숙한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행함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3장에 그 답이 나옵니다.
(요일 3:22-24)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 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 요한이 말하는 계명은 23절의 말씀대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를 믿는 자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사랑’이라는 단어가 걸리시지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면서 ‘사랑’은 또 뭔가? 우리가 우리의 꼴을 직시해 볼 때, 우리 안에서 사심 없는 형제 사랑이 절대 나올 수 없어 보이지 않으세요? 여러분, 그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분의 보혈,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예수님의 영광만을 이야기 하려 할 때, 쉬운 말로 복음을 나누려 할 때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가 통하던가요? 너무 외롭지요? 그런데 아주 가끔 말이 통하는 천국 가족을 만났을 때 어떠세요? 물 만난 고기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지요? 그리고 힘들고 어렵고 외로울 때마다 바로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여러분, 왜 우리 인터넷 가족들이 이 황금 같은 휴가 기간 동안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고 이렇게 서머나 교회를 찾아올까요? 산호세 모임, 샌디에고 모임, 베이커스필드 모임, 덴버 모임, 뉴욕 모임, 여러 곳에서 이렇게 불원천리 LA까지 왜 찾아오신 것입니까?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만 믿는 자’ 요한의 말로 바꾸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자신들의 잘남과 가치와 만족을 챙겨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의 피만 믿고 있는 동지를 만났을 때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 형제간에도 복음의 대화가 안 통하잖아요. 어떠세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면 형제간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격발이 되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친절, 미소, 일부러 하는 섬김,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나와 한 길을 가고 있는 천국 가족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서머나 교회는 진짜 사랑이 넘치는 교회인 것입니다. 누가 서머나 교회가 차갑다고 합니까? 괜히들 와서 기복 적이고 신비 적이고, 인본주의 적인 지식들을 자랑하고 하니까 대화할 가치가 없어서 안 하는 거지. 우리 교회만큼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교회가 없어요. 지난주에 우리 교회를 방문하셨던 한 선교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제가 지금까지 세계 곳곳의 수많은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서머나 교회만큼 꽉 찬 교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우리 교회만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하나가 되어 있는 교회가 진짜 큰 교회이고 진짜 꽉 찬 교회인 것입니다. 열매요? 어떤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맺혀야 할 열매는 단 하나, ‘내가 할 수 없어서 성령께서 내 삶 속에 열매로 들어와 계십니다.’ 이러한 자기부인의 고백이 성도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진짜 열매인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은 이렇게 수많은 ‘하라’의 명령 속에도 예수만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걸 지켜서 상을 받아라가 아니라 예수가 그걸 다 지켜 주셨기에 너희들의 삶 속에서도 그 지점으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성이 생기게 될 것이니, 그때 너무 당황하거나 외로워하지 말고 끌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복음인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몇 가지 선한 행위를 내어 놓고 ‘상 주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상은 이미 십자가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상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상이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삶 속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과 세상의 가치에 대한 관심의 폭,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폭이 완연하게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겨울이 되었으니 겨울옷을 입으세요.’라고 누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우리는 철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게 되지요? 성도의 삶은 그렇게 나의 노력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석처럼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자연스러움입니다. 성령은 바람 같아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성령이 임한 자의 삶은, 바람의 흔적이 물결의 움직임이나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남듯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러한 성령의 흔적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이라는 것을 요구할 수 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찬송밖에 없습니다. 우리 요한계시록 배웠잖아요? 거기에서 허다한 무리와, 144,000, 24장로 등으로 표현이 된 천상의 성도들이 전부 뭐하고 있던가요? 찬송하고 있잖아요? 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찬송하는 자가 되어가는 것이지, 찬송을 받을 만한 행위를 내어놓는 자로 변해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밥을 맛있게 짓고 아이는 그 엄마의 정성에 감사하며 맛있게 밥을 먹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봐야 밥만 태우고 일만 더 많이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덥석 받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꾸 뭘 갚겠다고 나서봐야 나중에 아버지 일만 더 많이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일을 망쳐 놓아도 우리 아버지가 그 일을 들어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엄마의 설거지를 돕겠다고 나서서 열심히 했는데 여전히 그릇에는 고춧가루와 밥알이 묻어 있어서 아이가 잠든 후 엄마가 다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그런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우리 아이가 나를 위해 설거지를 다 해주다니, 녀석 다컸네’하면서 대견해 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망쳐놓은 지저분한 그림을 당신의 지우개로 지워 가시면서 우리를 대견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 놓고 상을 받겠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의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일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하신 일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절대로 상의 근거로 쓰여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모든 존재가 최상의 만족과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에 나오는 ‘상’이라는 단어에 묶여 ‘상급’ 운운 한다는 것은 여전히 은혜의 지평에 도달하지 못한 유아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가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하나님 백성의 진짜 열심이 여러분에게서 나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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