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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I) / 아가 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8.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I)

/ 아가 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엡 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오늘은 아가서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쉬르 하쉬림”인데 쉬르가 노래라는 뜻이고 ‘하쉬림’이 쉬르의 복수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70인 역도 “아스마 아스마톤”이라 번역을 했고 라틴 벌게이트 성경도 ‘칸티쿰 칸티코룸’이라 했습니다. 전부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아가(雅歌)라고 번역이 된 것은 조금 의역이 된 것입니다. 아(雅)자가 ‘우아할 아’자입니다. 우아한 노래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가서가 남녀 간의 애정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책은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어떤 교회에서 ‘가정 사역’팀이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이 아가서를 인용해서 부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하는 것을 보고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신랑이 떠났을 때 신부가 어떻게 처신을 하는가 하는 내용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단순히 연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늘 그렇듯 구속사 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의 지혜를 얻어내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1장1절에 그 저자가 뚜렷이 나와 있습니다.

 

(아 1:1) “1 솔로몬의 아가라”

 

뿐만 아니라 (1:5, 3:7,9,11, 8:11,12)에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 아가서의 저작 연대는 그 솔로몬의 통치 시기인 BC970-931년 사이로 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지명들 ‘예루살렘, 갈멜, 사론, 엔게디, 헤르몬, 디르사’같은 지명들은 모두 통일왕국 시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기 전의 도시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솔로몬이며 그 저작 시기도 그의 재위 기간 중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아가서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풍유적 해석 방법(allegorical)이 있습니다. 이 해석방법은 대체로 역사나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작자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 강도 만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강도는 사탄이고, 여리고는 세상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인데, 그가 그 가는 길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예수 님(선한 사마리아 인)이 오셔서 그를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구해 주시고 여관(교회)에 데리고 가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재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구약과 신약)그를 맡기셨다 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을 풍유적 해석 방법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비약이지요? 아가서는 풍유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물 사건들이 문학적 고안물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풍유적으로만 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극적 해석방법입니다.(dramatic)이 해석 방법은 아가서를 한 편의 희곡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곡이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요소를 많이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도 오늘날에는 그렇게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세 번째가 제의적 해석방법입니다.(cultic-mythological) 이 해석 방법은 고대 근동의 신화를 바탕으로 아가서가 기록이 되었다는 해석방법입니다. 이 아가서는 여 사제로 변신한 어떤 여신과 왕과의 혼인 이야기인데, 그 혼인을 축하하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예표론 적 해석방법입니다. (typological)이 해석 방법은 풍유적 해석방법과 비슷한 해석방법이지만 완전히 다른 해석 방법입니다. 풍유적 해석 방법은 역사성이나 사실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감추어진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예표론 적 해석방법은 구약 성경의 본문 설명 자체를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본문 속에서 신약 성경의 어떤 사건이나 가르침에 대한 예표 론 적(모형 적)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표론 적 해석방법에 따르면 솔로몬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술람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 한다고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 방법이 이 아가서를 푸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원어 적으로 해석을 해 보면 그 해석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옵니다. 술람미 여인에서 ‘술람미’는 ‘솔로몬‘이라는 단어의 여성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는 솔로몬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은 왕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한 교회와의 사랑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신랑과 신부와의 깊고 깊은 사랑의 이야기를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모든 오감을 다 동원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것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아가 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신부, 그리고 혼인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혼인 언약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아가서를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나 살갑게 사랑하시는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마다 낭독을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에는 룻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허무한 이 세상의 장막을 의지하지 말고 참 장막이 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부림 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멸망당한 날에는 예레미야 애가를 읽었습니다. 이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혀졌던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가서를 이해하기를 출애굽을 한 이 후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그 언약의 관점에서 이 아가서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저 죄만 짓고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과 혼인을 맺으시는 구속사의 이야기가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가서 혼인을 맺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가서의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전체적인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서의 구조는 대칭 구조입니다. 카이즘 구조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가운데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앞에서부터 한번 설명하고 그 핵심을 지나 다시 뒤로 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총 7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네 번째 부분이 핵심부분이고 그 네 번째 부분을 향해 전체의 내용이 모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1:1-2:7 까지는 서문입니다. 왕의 사랑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왕이 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왕의 고백이 적혀 있습니다. 2:8-17 까지 에서는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서 왕이 방문을 합니다.

 

(아 2:10-13)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 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3:1-5 까지 에서는 그 가운데 밤이 찾아옵니다. 그 여인이 꿈을 꿉니다. 하나 됨에서 분리되는 악몽입니다. 꿈에 솔로몬이 떠납니다.

 

(아 3:1-2)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6-5:1 까지는 아가서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랑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혼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 됨에 대한 갈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장 6-11에서 솔로몬 왕의 혼인 준비 모습이 나오고, 4장 1-15 에서 혼인을 준비하고 있는 술람미 여인의 단장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 16절에서 5장1절 까지 에는 혼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 5:1) “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그런데 신부가 또 악몽을 꿉니다. 혼인을 한 이후인데 또 신랑이 떠납니다. 그게 다섯 번째 부분입니다. 그게 5:2-7:10 까지 입니다. 이 부분은 세 번째 부분과 연결이 되는 내용입니다. 혼인을 했는데 또 남편이 떠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11-8:4 까지가 여섯 번째 부분입니다. 거기서는 다시 왕이 찾아옵니다. 이제 그 후로는 여자가 신랑을 잃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이제 영원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 7:11-13) “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사랑이 회복 된 에덴동산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8:5-14까지는 첫 번째와 연결되어져서 왕이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이 더 커지게 됨을 보여 줍니다. 아주 진한 사랑의 모습이 오감을 동원하여 묘사가 됩니다. 이렇게 아가서의 구조를 잘 보시면 전체 구속사가 보여 집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네 번째 부분에서 혼인을 하게 되고 다섯 번째 부분에서 다시 신랑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며 여섯 번째 부분에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가 되어 영원히 변치 않은 하나 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혼인 이후에는 왜 신랑이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까?

 

여러분 예수를 만나고 나면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순간 늘 기쁘고 행복하고 평안하고 하십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지요? 왜 그런 일이 있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 버려진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가 게으르고 무관심하고 나태해져서 부패한 정욕과 합당치 못한 정서에 빠져들어 악한 정욕들을 부단히 제어하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물리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잠깐 당신의 얼굴을 가리 우심으로 우리를 자극하셔서 당신을 부지런히 찾고 탐사하도록 하시기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실 때 아가서의 신부처럼 혼비백산해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호 5:15-6:1) “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 5:6-8)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들을 합니다. 그게 혼인을 한 후에도 신부가 신랑이 떠나는 경험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이 아가서를 어떻게 구속사적인 면에서 해석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가서를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아가서 전체에 흔하지 않은 식물들의 이름과 동물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스물 한 종류의 식물의 이름과 열다섯 종류의 동물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시겠지만 그러한 동 식물들과 이 사랑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동산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군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왕상 4:33-34) “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34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이 구절은 솔로몬이 백향목으로부터 벽에 붙어 나는 우슬초까지, 그리고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설명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비슷합니까? 아담과 비슷합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 준 아담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기원과 내용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동식물에 대해서 그의 지혜로 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아담의 이름을 짓는 모습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동산에서의 사랑은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사랑을 재연해 놓은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사의 이야기가 어떻게 아가서에 배어있는지 한번 보지요.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는 서로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창 2:20-25)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여기에 보시면 아담의 결혼 장면이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결혼 장면입니다. 그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분부를 받은 자였습니다.

 

(창 5:1-3)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은 자를 아들이라 하지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창조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담은 이 땅을 다스리도록 분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왕의 아들이며 그 자신도 왕인 솔로몬과 아담을 연결시켜 드리려고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지의 주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아담에게 신부인 이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무죄한 상태에서 순결하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사랑에 금이 갔습니다. 서로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자기의 잘못을 서로에게 미루는 그런 타락한 사랑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 3:6-13)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의 관계로 묶여졌던 부부관계에서도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 쫓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고 쫓아내십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끄러움을 가려 그 타락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언약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깨어진 혼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그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열심이 계속해서 성경 전체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가죽옷이 어떻게 구속사와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그 가죽옷이 아가서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 지느냐하면 신랑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신부를 덮는 것으로 결혼식이 완성됩니다.

 

(룻 3:9)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고 말한 것은 나를 당신의 신부로 맞아달라는 부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성경을 살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좇아 다니시며 광야에서 그들을 무언가로 덮으셨습니다. 무엇으로 덮으셨지요? 구름으로 덮으셨습니다.

 

(시 105:39-40)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마치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덮는 것 같은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구름으로 이스라엘을 덮으신 것은 바로 그 결혼언약의 예표를 계속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 신부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구원해 내고 말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렘 2:1-2)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 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표준새번역] "너는 가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이렇게 외쳐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나에게 진실하였는지, 네가 신부 시절에 얼마나 나를 사랑하였는지, 저 광야에서, 씨 뿌린 것이 없는 땅에서, 네가 나를 어떻게 따랐는지,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시는데 이스라엘이 과거 결혼 때에, 신부 시절에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언제를 결혼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광야를 지날 때 시내 산에서 시내 산 언약을 맺으시지요? 그 때를 결혼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내시겠다는 것을 구름으로 그 신부를 덮음으로 예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신부를 덮는 신랑의 “옷자락”은 “카나프”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옷의 끝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원래 단어의 뜻은 “날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셔서 광야를 통과하여 그들을 이끌어 내실 때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다고 하지요? 날개로 업어서 인도해 내셨다는 표현을 하지요?

 

(출 19:4)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 32:11)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눅 13:34)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성경은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신부와 이제 다시는 깨어지지 않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혼인 언약을 하시겠다는 고집스러운 집념과 계획과 그 실행이 성경 전편에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아가서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2:16)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 6:3)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 7:10) “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 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 하는구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요?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아가서 전체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렘 11:4)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20)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슥 8:7-8)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히 8:10)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요 17:20-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혼인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우리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게 아가서입니다. 그 복음을 깨닫고 확신 속에 거하는 자들은 절대 이 세상의 상황 때문에 기죽지 않습니다.

 

(아 1:4-6)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이 자기가 거무스름하다고 흘겨보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조금 못생기고 못났다고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왕이 나를 침 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내 처지가, 나의 상황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왕이 나를 사랑하시고 왕이 나를 신부로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당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훌륭한 위인이 되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아름답게 승화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신랑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신랑이 먼저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아 2:8-9) “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그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 예식을 거행하십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 못나고 부족한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찬사를 다 동원해서 “너는 아름답다, 난 널 사랑한다.”하고 프러포즈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게 아가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으로 인해 열등감이나 우울증 같은 것에 빠져 있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열등감에 빠집니까? 세상 적인 가치 기준에 내가 미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울해 지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은데 내 인생은 전혀 자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신분을 아세요. 그리고 외치십시오. “감히 누가 나를 업신여겨? 누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겨?” “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우리 신랑이신 주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보시겠어요?

 

(아 8:7)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품어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 1:15-16)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 신랑은 이 독사 같은 눈을 비둘기 같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세요. 그 신랑이 나만 예뻐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깁니까? 그러니까 당당하세요. 담대하십시오.

 

(아 4:1-5)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 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썩어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이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이렇게 예쁘게 보아주시는 신랑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렇게 거듭 거듭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 54:4-8) “4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 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 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 2:19-20)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 열심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에게 친절하게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가서도 바로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결론지어지는 구속사, 복음의 내용을 극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을 에스겔서에서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겔 16:6-13)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7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 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12 코 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죄인이었던 하나님의 신부들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적신이요,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신랑의 영광의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시고 그들을 단장하시고 영원한 왕후의 지위에 올려놓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의 그 벌거벗은 부끄러운 아담과 하와를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신부인 교회의 부끄러움을 덮고 아름답게 단장시켜 영원한 혼인잔치에 서게 하는가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신부를 단장하는 모습을 보시면 구약의 어떤 대목이 생각나시지 않으십니까? 머리에 관을 씌우고 기름을 바르고 베실로 짠 옷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을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사장이지요? 출애굽기 28장에 제사장의 의복에 관해서 자세하게 나오고 29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출 29:4-9) “4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5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7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8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9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이 제사장의 의복을 만드는 순서는 어떤 것을 만드는 순서의 정확하게 역순입니다. 무엇입니까? 성막입니다. 성막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품어 안고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가 맨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성막이라면 그 지성소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의 흉패가 제일 바깥에 나와 있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옷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의 옷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부의 단장하는 모습이 대 제사장의 입성과 흡사하다는 것은 이제 무죄한 제물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해결이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신부로 회복이 되는 복음의 옷을 대 제사장이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신부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제사장 나라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도 말하고, 신부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계신 분들로서 그 신분에 맞게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요 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이미 그 영광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이 자꾸 그 옷을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의 저 밑바닥까지 경험을 한 창녀를 데려다가 한 나라의 왕이 자기의 신부로 삼아 주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그 왕비가 여전히 창녀 짓이나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 신랑이 얼마나 존귀하고 크신 분인지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랑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크시고 그럼에도 나만 이렇게 끔찍하게 사랑해 주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 신랑에게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그 분의 영광에 흠이 가지 않도록 삶을 다스리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정말 사랑하는 신랑과 영원히 살 혼인잔치를 앞두고 있는 신부가 그 신랑이 전혀 보고 싶지 않다면 그게 정말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결혼식 끝나면 영원히 볼 텐데 뭐, 지금은 옛날 애인도 좀 만나고, 신랑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먹지 말라는 것도 실컷 먹어두고 그래야겠다.“ 이게 정말 결혼식을 앞둔 행복한 신부의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돌아서면 또 보고 싶고 한 것이 결혼식을 앞 둔 연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전화가 조금만 뜸하게 와도 몇 번씩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잖아요? 그 신랑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성경입니다. 유일하게 신랑이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신부로서 프러포즈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고민해 보세요. 결론을 맺지요.

 

(엡 5:22-3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장시간에 걸쳐 공부한 내용이 여기 다 들어 있지요? 이 혼인잔치를 앞두고 있는 자들로서 아니 영적으로, 신분적으로는 이미 혼인을 한 자들로서 여러분의 평상의 삶을 잘 다스리십시오. 결혼 생활에서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세상에 잘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지요? 잘 되던가요? 경험자들 한번 말씀해 보세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1차 적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그 1차 적인 사명이 올바로 수행이 되어질 때에 2차 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세요. 그리고 교회의 1차 적인 사명도 올바른 말씀과 성례와 치리를 엄격히 거행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신부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후 11:2)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네, 우리는 그거 하는 겁니다. 교회는 무슨 대단한 일 하는 단체 아닙니다. 신부를 신부답게 만드는 훈련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신부를 소개하는 중매쟁이가 되셔야 합니다.

 

(계 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제 곧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희게 씻기어진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시면서 오늘도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경주해 보자고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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