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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13)-(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31.

 

 

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13)

 

(김성수 목사)

 

 

(롬 1:6-7)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 감상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의 일상을 대리 체험케 해 주고 그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준다는 차원에서 권장할 만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분은 영화나 TV나 신문까지도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금기 목록에 넣어 놓고, 그런 것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수시로 강조를 하셨지만 그분도 돌아가실 때까지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가끔 좋은 영화를 찾아서 보는 것은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활력소가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늘 시간에 쫓기는 제가 가끔 시간을 내서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를 고를 때는 아주 신중하게 고릅니다. 엉뚱한 것을 골라서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화를 고를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입니다. 영화 안에는 감독의 인생관이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기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고려하는 것이 촬영감독이 누구인가입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이지만 그 스토리를 어떤 영상으로 담아내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전달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저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화면에는 촬영감독의 세계관이 담겨 있거든요.

 

한국의 촬영 감독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 정일성 감독님입니다. 거장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그야말로 ‘작품’으로 만들어 낸 분이 정일성 감독입니다. ‘천년 학’이나 ’취화선‘ 같은 영화의 영상은 어느 컷 하나 버릴 것이 없는 명작이지요. 그래서 그 분이 카메라를 잡은 영화는 대체로 다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외국 촬영 감독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이가 ‘잭 N 그린’이라는 사람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을 거의 도맡아서 촬영을 하는 거장입니다. 70년대부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명콤비가 되어서 정말 주옥같은 작품들을 멋진 영상으로 담아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잠깐 외도를 하여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감독이었던 데미안 해리스와 작품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이 ‘deceived’입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서 저희 집 앞에 있는 코아 아트홀에서 개봉을 했던 영화인데, 잭 N 그린의 시원하고 치밀한 영상이 아주 잘 나타나 있어서 제 개인적으로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장면 하나하나가 다 기억이 날 정도로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흥행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20년 동안 딱 한 사람 만났었는데, 그 사람도 저와 똑같은 감동을 갖고 있어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스릴러물에 어울리지 않는 골디 혼이었습니다. 극중에서 골디 혼은 뉴욕 미술계에서 활동을 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그녀는 능력도 있고 재능도 있어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상하고 친절한 남편 잭을 만나서 예쁜 딸까지 키우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너무너무 사랑해 주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녀는 그야말로 행복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신분증은 이미 16년 전에 죽은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남편은 어떤 목적을 갖고 치밀하게 잠입을 한 골동품 절도단의 살인마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골디 혼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남편,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잭의 정체를 캐내려 하자 그 죽었다는 남편 잭이 골디 혼을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달려듭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가 났기 때문입니다. 데미안 해리스 감독은 그 영화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물으려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쭤 볼까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겉으로 보이는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이 맞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미쳐있는 이 세상의 힘과 가치의 정체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추구하고 있는 이 세상 가치와, 그 가치로 치장하여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자아가, 정말 우리가 사랑해도 되는 그런 것이 맞습니까? 자신 있으세요? 만일 나의 가치를 올려주고, 나의 행복지수를 높여 줄 것으로만 알았던 그것들이 나를 죽이려 교묘하게 위장을 하고 숨어든 마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큰일 나는 거지요.

 

(전5:10-17) “10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11 재산이 많아지면 그만큼 돈을 써야 할 데도 많아진다. 많은 재산도 임자에게는 다만 눈요기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12 적게 먹든지 많이 먹든지, 막일을 하는 사람은 잠이라도 달게 자지만, 배가 부른 부자는 잠도 편히 못 잔다. 13 나는 세상에서 기막히게 억울한 일을 보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더라는 것이다. 14 어떤 사람은 재난을 만나서, 재산을 다 잃는다. 자식을 낳지만, 그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이 없다. 15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16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17 인생이란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사는 것이다.”

 

보세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 세상 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돈이 오히려 우리를 근심케 하는 괴물이라는 것입니다.

 

(딤전 6:10)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확실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말씀에 절대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돈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치를 한없이 올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돈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유익하게 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가치와 소유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그 돈이라는 것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해서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은 ‘나’ 그 육적 자아는 과연 우리가 사랑해도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잖아요?

 

(눅 17:33)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보세요. 그 육적 자아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리고 나를 사랑하여 나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도와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투입이 된 악당 ‘잭’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세에 심판을 받을 자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딤후 3:1-2)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이렇게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육적 자아, 즉 '자기 자신‘과 ’돈‘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심판대에 세워 죽일 수 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나‘를 사랑하여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처럼’의 자리에 올려놓아 줄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deceived’라는 영화에서의 골디 혼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자신의 가치를 높여 주었던, 그러나 사실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잠입을 했던, 그 멋진 남편에 대해 그토록 오랫동안 달콤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에 잠입해 들어오는 살인마 ‘잭’같은, 재물과 자아를 몰아내고 죽이라고 반복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 5:3)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딤전 6:17)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히 13:5)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골 3:5)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힘과, 그 힘을 제물 삼아 섬기려 하는 육적자아는, 몰아내고 죽여야 할 것이지, 모으고 살찌워야 하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적 자아가 날마다 죽어가는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고전 15:31)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내가 날마다 죽어 가는 것은 이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육의 세상 속에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부정되고, 부인되는 현장, 날마다 죽는 현장을 자랑거리로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11:30)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보세요. 사도는 약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절대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육적 자아의 신분 상승이나 명예 획득, 세상 가치나 소유의 증대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약함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소유가 늘어나고 신분이 상승 되는 것을 성공이라 추켜세우고 있는데 사도는 그 앞에서 자신의 약함으로 자랑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기독교 전도는 너무 솔직하지 못합니다. 그저 호객행위를 하는 술집의 삐끼들처럼 어떻게 해서든 예배당으로 손님을 모시고 가는 데에만 급급하여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예수 믿으면 강해진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등등의 감언이설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켜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옵니다.

 

(눅 10:25~28)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진정한 복, 진정한 삶을 얻기 위해서 사랑해야 할 것은 돈이나 재물, 신이 되고 싶어 하는 ‘나’라는 육적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과 이웃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모두 우리를 사랑하는 척, 우리의 가치 상승에 기여하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죽음으로 몰아붙일 악당 잭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나’가 아닌 ‘이웃’이나, 이 세상 권세가 아닌 ‘하나님’에 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 있으세요? 솔직히 자신 없으시지요? 그래서 바로 그 이야기 밑에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천국 입성 조건 바로 아래에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의 이웃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하나님 측에서의 해답이 적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목숨을 바쳐 건져 내셔서 당신의 이웃으로 삼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과 이웃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명령은 우리가 이 땅에서 힘을 써서 성취해야 할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성취가 된 묵시 속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현실을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나’라는 자아와 이 세상의 힘만을 향하여 부어지던 사랑이 조금씩 하나님과 우리의 진정한 이웃인 예수님께로 옮겨지게 되는 신앙생활의 지향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요 15:12-13)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보세요. 이웃 사랑이란 그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듯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요일 4:10)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진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챙기기 위해 먼저 선심을 쓰는 악당 잭의 행사가 아니라 자신이 조금 오해를 받더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이 세상과 육의 존재는 절대로 그 사랑을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중간 정리를 해 볼까요?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흙에서 나온 자기의 육신을 포함한 땅의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하늘의 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흙에 속한 것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을 하여, 산 자가 될 때 땅에서 눈을 들어 그가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조차도 성도 안에 들어가신 성령의 열심일 뿐, 성도의 육적 자아는 끝까지 자기를 죽이려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들만을 사랑합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성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나온 내용으로 설명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애초에 창조가 되기를 able to sin 의 상태로 지어졌는데 그들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not able not to sin의 상태로 추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무리가 선택이 되어서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 상태가 able not to sin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 상태를 육적 자아의 변화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상태는 그들 안에 들어가 그들의 삶을 살고 계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한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주 가끔씩 하늘의 선을 경험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그 육적 자아를 모두 벗어 버리고 not able to sin의 상태로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지, 라는 의지의 결단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입고 그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도는 이미 묵시 속에서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것만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라는 사람들이 원래 흙이었단 말입니다. 땅과 하늘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상극입니다. 그런데 그 흙들이 하늘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로.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도들을 그들이 나온 땅에다가 한동안 처박아 두시는 것입니다. 흙에서 나온 자들이 얼마나 땅과 땅에 속한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를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그냥 흙에 속한 것을 좋아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은 자들임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그들에게 가입하여 땅만 좋아하는 죽은 흙들이 땅에서 들어 올려져서 하늘의 존재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인지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돌아가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성도를 규정하기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사랑으로 반응하기 이전에 이미 완료가 되어버린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성도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이 얼마나 땅의 것을 좋아하는지를 철저하게 폭로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 그렇게 땅에 속한 자로 땅과 함께 영원한 저주의 바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음을 확실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실 때에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지요? 흙인 인간이 땅과 땅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즐기다가 땅과 함께 멸망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반면에 흙인 인간이 땅과 이별하고 하늘의 존재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 인간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그 과정에 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를 죽일 이 땅의 것들과 땅(흙)에서 나온 나의 육적 자아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악마 성을 처절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그러한,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랑이 결국 나를 파멸 시키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아프게 배우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나’라는 존재의 세상 사랑에 대한 집요한 집념에 치를 떠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필연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영원히 땅의 존재, 마귀로 밖에 살 수 없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이 진정으로 자각이 될 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이 믿음 속에서 확인이 될 때, 우리는 ‘나’와 이 땅의 것으로 집중이 되어 있던 사랑을 조금씩 하나님께로 돌려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자각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게 되는 것을 성도의 하나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다른 이웃들을 바라보며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구나’하는 동질성의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곳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가는 곳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천국은 은혜로 가는 것이지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관계가 아주 잘 그려져 있는 곳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라는 신랑과 술람미라는 신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술람미라는 여자는 마귀 같은 오빠들 때문에 포도원에서 실컷 일만해야 했던, 얼굴이 검은 노예 여인이었습니다. 그 술람미라는 여자와 대조가 되어 등장하는 여자들이 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솔로몬에게는 1,000명이 넘는 아내와 후궁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재색을 겸비한 훌륭한 외모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을 제치고 포도원에서 죽도록 일만하던 검은 피부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만 번드르르한 예루살렘 여인들은 검고 못생긴 술람미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여인들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검고 못생긴 술람미 여인은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가운데 오직 신랑의 선택과 사랑에 의해 신랑의 신부가 된 은혜를 입은 교회(세리, 창녀, 병자, 고아, 과부 등)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외모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생 쇼를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게 율법주의의 자기외모 가꾸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심과 노력을 서로 서로 인정해 주면서 ‘당신이야말로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신부’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행위들을 다 부정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어놓는 행위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검고 못생긴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하는 아내로 간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을 소유하지 못한 그런 여자입니다. 그런데 신랑인 솔로몬이 무조건 적인 선택으로 신부를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울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롬 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신랑이 신부를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이 된 신부를 목숨을 걸고 사랑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신랑의 나라의 통치 원리를 적용시켜서 신부의 나라 생활원리로 못 살게 들들 볶아요. 생각해 보세요. 천지만물의 창조주께서 죽은 흙을 신부로 택하셨어요. 그런데 그 흙은 자꾸 땅의 세상에 동화되려 해요. 땅에 대한 연정을 못 버린단 말입니다. 흙이니까요. 거기서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흙의 삶을 추구하며 흙의 삶을 누리다가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고 말아요. 그래서 신랑은 당신의 신부의 삶을 차압해 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세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롬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보시다시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포도원의 검고 못생긴 노예였을 때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묻지 않으시고 신랑이 와서 날 선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처음자리가 들켜지고 우리를 향한 엄청난 신랑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면목 없는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나를 찾아오신 그 신랑만을 꼭 붙들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놈들에게, 세상 것들에게 기웃거려 보아도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뿐임을 자신의 인생을 통해 배우게 되거든요.

 

고멜 보세요. 신랑 호세아가 그토록 열심히 사랑을 해 주는 데도 열심히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지요?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 노예 시장에 팔아 버려요. 그때 신랑 호세아(헬라어로는 예수)가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그 창녀 같은 신부를 사오는 것입니다.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삼십 냥이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우리의 속전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얼마에 팔리셨습니까?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신랑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선택을 받아 죽어야 할 창녀의 자리에서 왕의 신부의 자리로 옮겨 앉은 대박 맞은 인생들인 것입니다. 그걸 실존적 경험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것이기 이전에 창녀같이 더럽고 추악한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장이란 말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떨어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믿어진다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제발 그 사랑을 좀 깨달으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엡 3:18-19)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어버린 우리 자신 안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근거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라는 교만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아킬레스건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감언이설로 인간의 아름다움과 훌륭함과 위대함을 칭찬해 줍니다. 어리석은 죄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마귀에게 자신의 단물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이 그 마귀에 의해 심판의 노예시장에 팔리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비위를 맞추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실하게 보게 하십니다. 제발 감추어 주었으면 하는 그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까발려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 것이란다’하고 사랑고백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받을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이 찾아지지 않으면 그 근거를 마련하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매순간을 헉헉 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두렵거든요. 내 꼬라지로는 절대로 신랑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게 양심이 있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폄훼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신부가 신랑의 사랑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게 될 때 신부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혹시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합니다.

 

(요일 4:18-19)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정확하지요? 이러한 두려움이 술람미의 꿈속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 3:1-5)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 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 하였구나 3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 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서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 그러니까 인간의 외모와 행위와 소유 등의 세상 적 힘과 가치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인본주의와 유대주의가 술람미를 격동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 같은 시커먼 노예가 어떻게 위대하고 위대한 솔로몬 왕의 신부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가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주의의 공격을 ‘포도원을 허는 여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여우를 잡으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런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술람미의 꿈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해도 그러한 예루살렘 여자들의 비아냥 속에서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지요? 마치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을 때 주위에서 누군가가 ‘너 같은 게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똥파리도 새다’라고 비아냥거릴 때 여러분 마음이 뜨끔 한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러한 불편함이 꿈에 나타난 것입니다. 진짜로 신랑이 어디로 떠나 버린 것입니다. 술람미가 얼마나 안타깝게 신랑을 찾아다닙니까? 그런데 신랑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서 ‘나 잠시 화장실 다녀왔는데,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이러는 겁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요? 그때 술람미 여인이 그 신랑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4절을 보시면 ‘내 어미의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랑을 꼭 붙듭니다. ‘내 어미의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이란, 자신의 존재의 근본, 사랑받음의 근본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무슨 자격이 있거나 외모가 훌륭하거나 행위가 근사해서 신랑에게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랑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에 의해 신부로 간택이 된 것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루살렘 여우들의 참소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칼로 여겨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제 서야 술람미가 자신을 참소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외칩니다. ‘이제 나를 흔들지 마, 날 방해하지 마, 난 알았어, 나의 처음자리가 어디인지를, 난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 신부가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자꾸 나의 자격이나 조건을 들춰내며 날 격동시키지 마’ 그때 신랑이 예루살렘 여자들 보란 듯이 그 술람미를 그 앞에서 꽉 껴안아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신랑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목숨을 바치죠. 그렇게 성도는 자기가 받은 것이 확인이 되면 반드시 그 받은 것을 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그런 겁니다. 무작정 열심히 노력해서, 허벅지를 찔러가며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이 확인이 될 때 그 받은 것이 나에게서 흘러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주신 것만 내 놓으라고 하세요.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내 놓으라고 하신 것이 뭡니까? 이삭입니다. 이삭은 원래가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없음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어 아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준 것, 도로 내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상환을 요구하는 타자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이들은 아낌없이 그것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신랑인 솔로몬이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원래 없음입니다. 아버지 우리야의 죽음을 먹고 은혜에 의해 탄생한 자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형이 죽었을 때 다윗을 함께 죽여 버렸으면 솔로몬은 이 땅에 존재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어미, 솔로몬이 잉태된 자리가 어디입니까? 간음한 여인 밧세바의 태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어미의 태에서부터 죄 덩어리로 존재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여디디야)을 입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술람미가 바로 그 사랑을 입은 것입니다. 그걸 확인한 것이 술람미가 솔로몬을 ‘어미의 집, 자신을 잉태한 이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는 어구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 그분만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목숨 걸어 사랑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사랑에 속지 마세요. 남편, 자식, 아내, 부모, 물질, 명예, 신분, 등등 그 모든 육적 사랑에 집착하다보면 여러분은 그 육적 사랑에 짓눌려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것은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의 육적 삶을 풍요하고 행복하게 만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육적 관계나 물질이나 힘 등이 얼마나 허황되며 거짓되며 무가치한 것인지를 깨닫고 진짜 신랑이신 예수만 사랑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진리인 내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내가 검이 되어 그러한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온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 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보세요.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고 있는, 그러나 결국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불과한 인간관계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 목숨을 향한 애착과 열심까지도 끊어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살 길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내 팽개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는 말이 나옵니다. 가족은 자신에게 허락하신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당연히 보호하고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족 관계, 친족 관계, 이웃 관계라는 것을 ‘나’라는 존재의 존재확장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혹은 내 만족과 내 평판을 위해, 꼭 붙들고 있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건 내 자신이 악당 잭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랑이라는 것으로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육적 사랑은 항상 유동적입니다. 그러한 육적 사랑은 항상 자신의 유익을 위한 쪽으로만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가차 없이 다른 유익 쪽으로 이동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건 사기요, 속임수일 뿐입니다. 아니 좀 더 원색적으로 말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우상을 살찌우기 위한 더러운 죄인 것입니다. 성도의 가족사랑은 그 대상의 영원한 생명을 걱정하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내가 받은 신랑의 사랑이 그들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내가 받은 솔로몬의 사랑을 술람미같은 그들에게 흘려 보내주는, 자기희생의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신랑의 사랑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먼저 폭로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존재의 자각에 근거하여 ‘나’라는 존재는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임을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죽은 흙에게, 거름덩어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을 믿음 속에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음속에 금강석 철필로 새기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어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것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게 로마서 8장 말미의 위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엉뚱한 가짜 신랑들에게 한 눈팔다가 단물 다 빼앗긴 다음에 노예 시장에 팔리지 마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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