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김성수 목사)
(요 8:12-30)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 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 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다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 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 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 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의 첫 창조와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 사건 그리고 요한복음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 등을 비교하며 ‘나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고찰해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킴과 절기 준수를 자신들의 빛 됨의 근거로 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열심히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규례들과 장로들의 유전 등을 지키며 자신들의 선민 됨을 자랑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초막절 명절날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물이고, 내가 빛이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그들의 열심을 기각시켜 버리시고 또한 그들을 어두움이라 선포하시고는 그들이 내어놓고 있는 열심과 방법이 아닌 ‘예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예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사건을 삽입으로 집어넣어 유대인들의 추악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시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만 말미암게 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게 8장 서두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계속 율법을 근거로 자신들의 의인됨을 주장하고 있고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이 붙들고 있는 율법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은혜로 초대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불가능함을 지적하시고 구원자 앞에 항복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증거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지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의인됨의 근거로 제시하는 율법을 들어 계속해서 살인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19절 이하를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놓고 율법을 어긴 자라는 죄명을 씌워 주님을 죽이려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초막절을 열심으로 지키는 유대인들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고발이 되어 있고 8장으로 넘어가서는 유대인들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을 들고 한 여인을 죽이려 합니다. 보세요. 안식일 준수라는 율법으로 주님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열심으로 절기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으로 가련한 한 여인을 죽이려 달려드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들이 율법을,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흉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하셨던 것처럼 율법의 마침은 사랑입니다.(롬 13:8,10; 갈 5:14)
그런데 그 율법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들고 다른 이들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들이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를 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을 소유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빛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다른 말로 자신들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내가 빛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이 어두움임을 공포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17장에서는 열심히 초막절 예식을 행하며 제단에 물을 갖다 붓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내가 물이다’라고 말씀하시고 18장에서는 역시 초막절 예식을 행하기 위해 열심히 촛불을 켜고 춤을 추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내가 빛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인간은 절대 율법으로는 생명수를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빛으로 나아올 수도 없음을 고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삽입해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좀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부분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설명을 해 드리고 오늘 본문의 구체적 내용 분석으로 넘어가지요. 오늘 본문 12절 서두를 좀 더 원문에 맞게 번역을 하면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입니다. 그런데 11절에는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12절의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다시’는 어느 것을 받는 말일까요? 그 12절은 7장 37절 이하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요 7:37)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께서 초막절 끝 날에 ‘내게로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신 후 당신의 생명수 되심을 설명하시는 내용이 나오고 8장 12절에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의 빛이다’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장 12절의 ‘그들’은 37절의 군중인 것이고 ‘다시’ 또한 37절을 전제한 단어인 것입니다. 그 맥락을 놓치지 마시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세상’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니다.
(요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자들만을 위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에서의 ‘세상’ 또한 전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의 주장처럼 주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고 그들이 빛이신 예수가 주시는 생명의 빛을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그 빛이신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두움이 맞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자신의 어두움을 지적하는 빛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능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어두움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거짓 증거자로 몰아붙입니다.
(요 8:13)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 하도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그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19:15) 지금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역시 율법을 들어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을 거짓으로 몰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하시는 지 보세요.
(요 8:16-18)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심으로 당신의 증거는 혼자의 증거가 아닌 둘의 증거이기에 당신의 증거가 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여 그 분의 증거를 자신의 증거로 삼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의 증거는 항상 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하고 묻습니다.
(요 8:19)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 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 하므로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그들의 무지를 폭로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생애와 그 분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고 그들은 심판대에서 사망이라는 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목숨 걸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망 선고를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만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이고 싶었을 만도 한데 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요 8:20)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성경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지 않은 것은 아직 예수님의 죽으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굳이 밝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이고 싶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0절 상반 부에 예수님이 연보 궤 앞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어구가 나오지요? 그것은 주님이 성전의 뜰 중, 여인의 뜰에 있는 연보 궤(13개가 있었음) 앞에서, 즉 산헤드린 공회가 모이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계셨음을 일부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가 차지 않아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어구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주님은 계속해서 시퍼런 율법의 칼날을 들이대며 선민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갖고 있는 자기 민족만큼은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당신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21절과 24절 두 절에 걸쳐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요 8:21-24)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 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율법을 가지고 그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살해하려 하는 것 자체가 죄이며 그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선포를 해 버리신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내가 그인 줄’이라는 어구가 있지요? 그 어구는 우리가 잘 아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지요. 주님은 지금 당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어구를 이해하기 쉽게 조금 풀어 보면 이러합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인 것을 믿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6장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에고 에이미’(요6:20)라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셨고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와 죽음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군중들에게 고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그 죄의 대가로 오는 것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이런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불가능함과 무력함 속에 있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자기들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이용하여 선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에도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인 인간이, 다른 말로 무(無)인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과 유(有)로서의 존재 증명을 하려 할 때 성경이 그 것을 죄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 선에 이르고 구원과 행복에 이르겠다는 발상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선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보다 약하고 못나 보이는 이들을 정죄하고 밟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존재 증명이 시작이 되면 그는 반드시 다른 이들을 경쟁자로, 심지어는 적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를 뛰어난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나보다 못나 보이거나 실수를 범한 이들을 정죄하게 되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자들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위나 재산이나 지식이나 열심 등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되고 있고 그들을 주눅 들게 하고 있다면 그건 죄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에 관한 지식이어도, 종교 행위에 대한 열심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유대인들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서 납작 엎드려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한 번에 지고 죽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어두움을 지적하시는 하나님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목사가 강대상에서 여러분의 죄를 지적할 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맞아요.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해요.’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자기를 발가벗기고 질책하는 그 목사를 죽이고 싶으십니까?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자신의 죄가 지적을 당할 때 더욱 더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잠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어두움을 폭로하시는 주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 부인이 안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전 세계의 기독교는 소비자 중심의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에 필요한 생산품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칭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삶을 더욱 더 윤택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제품의 하나님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쇼핑을 합니다. 그러한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목사들은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의 하나님을 만들어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소비자들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해야 하기에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들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과 어두움을 지적하시는 성경 속의 하나님을 감추고 병이나 고쳐주고 부자나 만들어 주고 소원이나 들어주는 그런 제품의 하나님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부인하고 구원자이신 하나님 뒤에 숨어 그 분의 은혜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단지 조력자나 해결사 정도로 여기는 교만한 자들이 모인 곳을 어찌 교회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유진 피터슨의 ‘doing nothing, being useless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존재하기’ 라는 아포리즘은 오늘날 소비자 중심의 기독교가 한번은 곱씹어 봐야 할 화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결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사망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만 정복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자꾸 율법을 들고 너희들을 증명하려 하며 왜 그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지어 남을 살해하려 하느냐 하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사망이라는 것은 인간 측에서 그 어떤 귀한 것을 내어 놓더라도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역사 속에 났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이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한 것은 누가 봐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두 힘을 합한다 하더라고 사망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루어낸 평화에 관한 모든 업적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사망은 이길 수 없습니다. 슈바이처의 봉사와 간디의 저항과 석가모니나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다 합쳐도 사망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사망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nothingness의 고백에서만 극복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평화를 위해 무기를 비축해야 하는 모순 덩어리들입니다. 훌륭한 자녀 양육을 위해 교활함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여 내어놓는 모든 종류의 선이 다 죄입니다. 시험 전날 가난한 친구의 이삿짐을 나르고 온 아이에게 ‘너 그렇게 살다간 쪽박 차기 딱 알맞다’는 욕을 해 대는 크리스천 부모들의 야누스적 이중성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훌륭하다는 기준을 인격적인 성숙에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손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남을 더 넘어뜨리며, 남위에 올라서는가 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알지 못하는, 아니 예수를 의지하지 않는 인간에게서 나온 그 어떤 선해 보이는 행위도 결국에는 자신의 손해와 상함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자아숭배교의 교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1959년 11월 미국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클러터네 가족 4명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오 헨리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티파니에서의 아침을’같은 작품을 성공시켰던 뉴욕 사교계의 재담꾼 트루먼 카포티가 그 칙칙한 범죄 현장을 취재하러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유년기의 친구인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분량의 취재를 마친 카포티는 범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논픽션 소설인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를 씁니다. 그 책은 나중에 500 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 책은 주관과 객관이 결합된 새로운 저널리즘을 탄생케 했다는 극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트루먼 카포티는 살인자들을 취재하던 도중에 범인 중 한 사람인 페리 스미스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그의 묘한 매력에 빠져 듭니다. 그림 등 예술에 재능이 있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페리에 매혹된 카포티는 인간적인 교류를 꾀하고,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진 뒤에는 그의 구명을 위해 나서기도 합니다. 범죄자를 향한 카포티의 사랑과 섬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카포티의 딜레마는 역설적이게도 페리 스미스의 사형 집행이 연기되면서 시작됩니다.
카포티는 페리 스미스의 사형 집행이 연기 되자 그의 논픽션 소설 ‘in cold blood’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그는 자기 소설의 완성을 위해 페리 스미스의 사형 집행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사랑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손해 앞에서는 상대방을 기꺼이 살해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이중성을 발견합니다. 결국 페리 스미스는 사형을 당해 죽고 그의 소설은 출간이 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그는 그 때부터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그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 때 일가족 살인 사건의 범인 페리 스미스를 향한 트루먼 카포티의 사랑과 섬김은 세상 사람들에게 큰 귀감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적과 유익 앞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붓던 자의 죽음까지도 간절히 원하는 그의 모습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선행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민주나 평등, 화합 등을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예수를 알지 못하는 열사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그 어떤 인간도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을 불살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비교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빛 됨을 증명하기 위해 율법이라는 칼을 들고 다른 이들을 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옷 술에 달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사흘에 한 번 금식하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던 자기 나름대로의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제를 안 했습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고스란히 고아와 과부의 구제에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종교 행위들이 자기 존재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자기 의’가 될 때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의 살해로 이어지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전제로 구원과 행복에 도달하려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인 것입니다.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자기가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던 한 남자의 사형 집행을 간절히 원하는 다중 인격의 모습을 보여준 트루먼 카포티의 행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감동해 마지않는 선행과 사랑과 섬김의 모습 속에서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야 마는 죄인들의 무서운 속성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자기를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행복과 구원에 이르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그들이 내어놓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율법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과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 시작에서부터 8장까지 줄곧 그 이야기를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아, 너희들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라’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이며, 더 나아가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얼마 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구약학 교수님의 글을 읽다가 오늘 날 우리에게 참 공감이 가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분이 출애굽기 23장 19절의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구절을 해설하시는데 어쩌면 그렇게 오늘 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맞아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구약에 세 번(출 23:19, 34:26, 신 14:21) 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그 말씀은 죄인들의 맹목적인 맘몬 숭배에 대한 진단임과 동시에 예견이며 그러한 죄인들에게 쏟아 부어지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 보면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에 삶는 것은 풍요를 위한 우상 숭배의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이 땅에서의 풍요를 얻기 위해, 다른 말로 이 땅의 것들을 이용하여 행복에 이르기 위해 최소한의 인도주의 적 예의도 포기하는 존재임을 그 관습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 그 염소의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삶는 것은 정상적인 이성과 감정을 가진 이들에게는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풍요를 향한 인간들의 맹목적인 신앙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쓰레기처럼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풍요를 향한 인간들의 맹목적 추구를 향해 일갈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런 짓 하지 마라’
오늘 날은 어떤가요?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늙고 병든 어미 소를 갈아 육골분 사료로 만들어 새끼 송아지들에게 먹입니다. 새끼 염소를 어미젖에 삶는 것과 어미를 죽여 새끼에게 먹이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자아 숭배 교에 빠진 인간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서 어미의 젖에 새끼 염소를 삶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가능성을 의지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인간은 이 땅의 풍요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돌아온 것이 광우병이라는 전염병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단골 심판의 메뉴 중 하나가 뭡니까? 온역입니다. 요즘 말로 전염병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풍요를 향한 맹목적 질주를 하고 있는 죄인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국의 시청 앞을 가득 메운 분노의 촛불은 사실 한국 정부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교회야, 왜 너희들까지 풍요를 향한 광념(狂念)에 사로잡혀 세상과 함께 미쳐가고 있니?’ 우리 성도는 우리를 온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아야지, 풍요의 쟁취라는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한 광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교회라 하는 자들이 또 다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될 것입니다.
(신 28:58-62)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 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여러분은 자신을 부인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냄으로 해서 참 된 행복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의 힘과 그 힘으로 말미암는 세상 적 행복에 눈을 두고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존재 증명을 위해 하나님을 살해 하는 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죄 가운데서 죽어 영원한 사망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나를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 내가 죽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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