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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복음,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6)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16.

 

 

복음,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6)

 

(김성수 목사)

 

 

(롬 1:2-4)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늘은 2절의 내용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택하심의 이유를 ‘복음을 위하여’라고 이야기를 한 뒤, 2절에서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것이 ‘그의 아들에 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것이라고, 반복하여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아들에 의해 시작되고 종결된 어떤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아들에 의해 완료된 복음의 현실이 그것을 듣게 되는 어떤 대상에게 무상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받는 자들의 능력과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상 침투 작업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복음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의 대상들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 복음은 역사의 어떤 시점에 급조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 속에서 이미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이라 합니다.

 

(벧전 1:20)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공동번역] “20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창세전에 예수님이 구세주로 미리 정해졌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과 천사들의 타락도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임이 창세전에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은 자들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아들에 의해, 죽은 자들이 살아나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구원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거기에서 죽은 자의 역할은? 그냥 죽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삼상 2:8)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시 113:7) “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이게 죄인들의 구원의 현실을 묘사한 대목인데 죄인들의 상태를 ‘진토, 아파르’ 그리고 ‘거름 더미, 아쉬포트’라 합니다. ‘아파르’는 아담의 재료였던 ‘흙, 땅, 먼지’라는 말이고 ‘아쉬포트’는 ‘똥, 쓰레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전의 모든 존재는 흙이요, 먼지요, 똥이요, 쓰레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냥 구원의 은혜 아래에서 쓰레기요 똥으로 발각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돋보이지요.

 

제가 2주 전쯤에 새벽 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은퇴 시기 무렵 설교 집을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한동안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를 거의 읽지 않았었습니다. 분명 그분은 청년시절 저의 유일한 영적 스승이셨고 신학교 때까지도 저의 영적 롤 모델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분의 모든 설교들이 성화에 대한 독려로 결론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로 결론이 나야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행함을 독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그분에게서 흥미를 잃고 그분의 책들을 멀리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난주에, 그분이 1968년 질병으로 은퇴하시기까지 영국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를 하신 내용을 기록해 놓은 책들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무려 아홉 권이나 되었는데, 얼마나 감동적으로 읽었던지 일주일동안 그걸 다 읽었습니다. 그 책들이 왜 그렇게 저를 감동시켰는가 하면 그분의 말년 설교들이, 성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그 이전 설교들과는 달리 전부 인간의 불가능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결론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휠체어를 의지하여 피를 토하듯 쏟아내신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마지막 설교의 몇 부분을 제가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그 분 생애의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독일어를 번역한 것이므로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 그 진의를 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되고 나아졌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오.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멈추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오.’ 이게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부정당하고 아들의 이름만, 그리고 아들의 행하신 일만 오롯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그게 복음입니다.

 

설교는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시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들에 대한 소개와 그 아들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여야 합니다. 그리고 적용은 살아있어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에 의해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일을 하게 해야 인간의 자랑이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 적용부분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아들이 하신 일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 스스로가 그 복음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어떻게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복음으로 풀어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겠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서머나 새 가족 반 성경공부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고 있으니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 아들에 관한 복음을, 역시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달리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창세기1장과 2장을 읽으시다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신 적이 없나요? 이런 부분은 어떠세요?

 

(창 2:4-7)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 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제가 창세기 강해 때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창세기 2장 4절부터의 내용은 하나님의 첫 창조가 다시 설명이 되는 부분입니다. 4절의 ‘대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토레다’인데 그 단어는 ‘역사’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설명할 것’이라는 말을 그 ‘대략’이라는 단어 속에 함의시켜 놓은 것입니다. 잘 보시면 7절에서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면 마치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초목과 채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진술이 나옵니다.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초목과 채소는 창조의 셋째 날에 이미 만들어졌고 인간은 여섯째 날에 지어졌습니다. 사람이 나기도 전에 초목과 채소가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2장에서 그 창조가 다시 설명이 될 때에는, 사람이 나기 전에는 초목과 채소가 없었던 것처럼 기술이 되어 있을까요?

 

5절을 보시면 경작할 사람의 부재를 진술하기 위한 다리가 하나 놓이는데 그것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음’입니다. 저는 이 어구가 창세기 2장 4절 이하를 푸는 아주 중요한 키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 조금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창세기 2장 5절은 성경 전체의 맥을 잡는 아주 중요한 어구입니다. 성경에서 ‘비’는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예에서처럼,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유하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비는 은혜의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려다 돌아오는 이야기를 떠 올리시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도로 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지 않아서 채소와 초목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비가 와야 채소와 초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비는 생명을 있게 하고 유지케 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렇게 채소와 초목을 존재케 할 수 있는 비는 하나님의 은혜의 비입니다. 그런데 그 비가 ‘땅’에 쏟아져야 합니다. 그 비가 땅에 쏟아져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창조와 연결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모세가 창세기 2장 4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땅, 즉 죽은 흙에 부어져 생령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기 이야기, 즉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관한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기가 땅에 부어져야 비로소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생기가 땅에 부어졌을 때 발생되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의 창조였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완성되어 그들에 의해 모든 것들이 장악되고 다스려지기 전에는 모든 존재가 ‘없음’의 상태라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저주의 상태’라고도 말을 합니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보세요. 5절을 보시면 들과 밭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 중 밭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정리가 되고 다스려지고 장악된 채소와 초목들이 자라는 곳이잖아요? 밭은 인간이 채소와 초목을 다스리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구획해 놓은 것이니까요. 따라서 그 밭의 바깥에 있는 것은 인간의 다스림 바깥쪽에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밭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밭의 울타리 안에서 인간에게 경작될 수 있는 채소나 초목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과 관계를 맺고 인간이 다스리는 밭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직 ‘없음’과 방불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5절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인간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초목은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미 셋째 날에 초목과 채소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야 그 초목들이 다스림 속으로 들어와 비로소 존재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땅이 은혜의 비를 맞고 살아있는 땅이 되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을 해 낼 수 있듯이, 죽은 땅, 죽은 흙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생기를 받아 산 존재가 되기 전에는 그와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흙에 예수의 피가 부어져 함께 이겨져야 땅이 살아있는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전 언약이잖아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에 예수님의 침과 흙이 이겨져서 발라지자 개안이라는 창조가 일어났던 사건이 바로 그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땅에 은혜의 비가 내려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는 창세기 1장1절부터 2장 3절까지의 첫 창조에 관한 기사를 2장 4절부터 창세전 언약의 관점에서 다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저의 추론이나 비약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보면 창세기 2장 4절부터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2장 3절까지 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엘로힘’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2장 4절부터 다른 이름을 등장시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장 4절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을 하고 그 이름이 반복되면서 땅에 비가 부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사람의 창조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책 출애굽기에서 그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출 6:1-8)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보세요. 여호와라는 이름은 어떤 이름입니까? 여호와는 언약을 성취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어떤 언약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은 자들을 살려 내어 하나님만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에 등장하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이름을 창세기 2장 4절에서 갑자기 등장시키는 것은 첫 창조의 이야기가 바로 그 창세전 언약의 이야기임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4절부터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죽은 흙에 불과했던 인간에게 생기가 들어가니까 비로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가 탄생이 되지요? 그리고 그 존재에 의해 모든 것이 다스려지는 새 세상이 열리지 않습니까? 그게 ‘살아있음’이에요. 그런데 예레미야 애가 4장 20절에서 그 생기가 누구라고 했어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라고 했지요?

 

(애 4:20)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

 

여기에서 ‘기름 부으신 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마쉬아흐’, 즉 ‘메시아’입니다. 이 어구를 히브리어로 나열을 하면 ‘여호와, 메시아, 르와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등장합니다. 그렇게 땅에, 죽은 흙에, 메시아가 부어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탄생을 하고 그 존재들로 인한 하나님의 왕국이 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탄생 이야기잖아요? 출애굽이야기나 창세기의 첫 창조 이야기나 모두 그 구원의 새 창조를 모형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증거를 대 드릴게요. 모세가 쓴 이 여호와라는 단어,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는 ‘큐리오스’라는 헬라어로 번역이 됩니다. 그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성취자이시며 주체이신 여호와가 신약에서 누구로 드러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 의해 새로운 언약 백성이 탄생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탄생 과정에 그들 자신의 힘과 노력이 전혀 개입될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긴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가 조금 더 선명하게 그림으로 그려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떠 올려 보세요. 그 속에 구원의 메커니즘과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죽은 흙, 티끌에, 땅에, 생기, 즉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는 하나님과 연합이 된 하늘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법’이 주어지지요? 어떤 법입니까? ‘선악과’라는 법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법을 잘 지켰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생명나무 실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디서요? 에덴에서.

 

잘 보세요. ‘죽은 흙, 생기(성령), 율법(선악과), 영생(생명나무), 약속의 땅(에덴)’ 이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창세전언약을 설명하는 재료들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성령이 들어간 자가 법을 어길 수 있는가?’가 궁금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즉 성령을 받고 하늘의 존재가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탄생 과정과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논리적 분석을 요구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생기를 받아 산 존재가 된 죽은 흙’이 하나님 작정의 결론이잖아요? 결론이 앞에 제시되고 연역적인 설명이 부연되는 것입니다. 그 결론은 선악과와 생명나무라는 과정을 거쳐 도출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과정과 순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백성이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 영생을 얻어, 영원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게 정석입니다. 그러면 죽은 흙, 죽은 땅이 생명의 땅,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의 처음자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죽은 흙이란 말입니다. 죽은 흙은 법을 포착할 수도 없고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 다른 말로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여, 영생,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의 은유인 에덴은 그림 속의 떡일 뿐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생기를 부여받은 죽은 흙,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통과하여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하나님과 영원히 한 곳에 거하게 된다는 구원의 공식이 첫 창조 때 제시가 되는 것이고, 그 속에 선악과 문제를 해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고전 2:6-7)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아까 우리가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하시고 감추어 두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들이었지요? 이렇게 구약에는 ‘아들’이라는 해결책이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없이 인간들이 내어놓는 해결책들의 무용함이 계속 지적되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그림은 출애굽기에서 똑같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시내산은 에덴동산의 다른 그림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빽빽한 구름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덮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그 현장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묘사를 합니다. 구름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시내산 사건이고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이 홍해 도하 사건입니다. 그런데 세례란, 성령세례, 즉 성령의 인치심의 모형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성령에 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지지요? 그리고 그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그 생명이 길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역시 죽은 흙 같은 이스라엘과 그들을 덮는 성령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선악과의 법과, 그것이 지켜졌을 때 주어지는 보상인 영생, 그리고 약속의 땅이 똑같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에스겔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산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 산 사이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을 보여주시는데 이미 먼지가 풀풀 나는 죽은 흙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흙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생기가 똑같이 등장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여호와의 군대, 즉 언약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땅이 약속됩니다.

 

(겔 37:11-14)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죽은 흙, 마른 뼈가 누구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약 성도의 모형이지요? 그들에게 생기, 성령이 부어져서 생명이 생기고, 약속의 땅이 주어집니다. 역시 죽은 흙, 하나님의 신(성령), 약속의 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갑자기 선악과, 즉 법이 없어졌습니다. 왜죠? 바로 앞 장에서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새 언약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깨끗이 씻어서 더러움을 제거하시고 그들 마음을 새 것으로 바꾸어 주심으로 규례를 지켜 행하는 자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예레미야 31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스라엘 안에 법이 심겨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이 선악과라는 하나님의 법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존재, 즉 죽은 흙, 마른 뼈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이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는 존재임을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그림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재현이 됩니다. 죽은 흙인 자들에게 생기가 들이 닥칩니다. 불의 혀처럼, 바람처럼 들이 닥칩니다. 그리고 선악과 시험은, 법(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안에서 완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곳에 있는 자들에게 영생이 임하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땅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이 일관성을 가지려면 땅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땅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바로 약속의 땅이고 그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거처, 에덴, 가나안,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결국 땅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것이라는 말이 되지요? 죽은 땅을 회복시켜 약속의 땅, 하나님의 거처로서 합당한 땅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아들의 사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처소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 즉 우리 자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처소란 말입니다.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왜 성경에 에덴, 가나안,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 등등의 땅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근거로 땅이 약속이 되고 있는지 잘 들어 보세요.

 

창조 때의 땅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모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땅으로 하여금 풀과 채소와 씨를 가진 열매를 맺는 과목을 내도록 하셨습니다.(창1:11-12) 그리고 짐승과 육축과 기는 벌레 등, 생물을 땅으로 하여금 내도록 하셨습니다.(창1:24-25) 또 인간도 땅의 흙먼지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창2:7). 이렇게 볼 때 땅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모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땅이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땅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과 함께 할 때 그 안에서 창조가 일어나고 다스림과 정복과 질서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땅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지요? 그 땅에서 비롯된 모든 생명 세계가 문제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타락이라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함께 그 타락이라는 문제 속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면 그 땅에 뿌리박고 있는 피조물들이, 다른 말로 땅의 다스림과 정복 속에서 질서로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들이 땅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그 땅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바꾸어 씁니다.

 

(롬 8:19-22)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렇지요? 창세기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간이 되는 것이 땅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땅(흙)으로 지어졌고 땅에 속하여 생존을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그 땅의 회복을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복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간과 땅의 상관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성경의 많은 부분이 풀립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과 땅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을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내었습니다. 땅과 인간은 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조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에덴이었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사시는 곳이었고 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스리는 인간에게 아무런 어려움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땅과 인간이 함께 하나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과 인간의 연합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는 땅이 인간을 거부하고 인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땅이 인간을 토해내 버리는 형국입니다. 땅과 인간의 분열입니다. 땅(흙)으로 지어진 인간이 땅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땅이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땅과 연합이 되어 땅이 인간의 다스림을 받는 그 질서가 깨지고 땅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인간이 먹을 채소를 내어야 할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반란하는 땅에서 채소를 생산하여서 먹고 살아야 할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고 거기서 채소를 생산하여야 하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과 인간의 분열 속에서 수고와 아픔과 고통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건 정말 철저한 분열이요 전쟁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땅이 어떠했습니까? 땅이 피를 받아 놓았다가 그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도록 합니다. 땅은 가인의 살인 사건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이렇게 땅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효력을 내지 않습니다. 땅은 살인자를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자 가인은 땅에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땅이 두려움과 무서움의 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살인자를 보호하십니다. 가인에게 손대는 자는 하나님이 죽여 버리시겠다고 엄포를 놓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아벨이 이 세상에서 맞아 죽을 때에는 그를 보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살인자 가인은 열심히 지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관심 밖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둘째가 물에 빠졌을 때 열심히 수영을 해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이 참 무심하시다’라는 생각보다는 ‘당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시는 당신 백성의 육신적 죽음에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것은, 이 육신의 죽음이 사실은 죽음의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조차 사유할 수 없는, 아니 추측이나 포착도 불가능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착하고 있고 정의하고 있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짜 죽음을 경험하신 분은 예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벨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려주지 않으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벨을 보호하지 않으셨다는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육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쪽으로 발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타락한 살인자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에 의해 자신의 안위가 결정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가인이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못미더워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이 뭡니까? 자기 힘으로 성을 쌓아 자기를 둘러 버린 것입니다. 그건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이 쌓은 성 밖으로 밀어내버린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성을 더 신뢰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세상의 건축자들은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자기들의 성 밖으로 계속 내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인간은 바벨 성을 쌓아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행위 밖으로 밀어내 버림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 즉 그들의 죽은 땅을 파괴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타락한 땅, 하나님이 떠난 죽은 땅, 죽은 흙인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창 6:1,5-7,11-13)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 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보세요. 인간의 죄 상을 고발하시면서 땅이 패괴했다고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땅과 함께 멸해 버리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원시는 어디였지요? 에덴.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거하는 곳의 첫 번째 모형입니다. 그게 안 될 때 땅은 그냥 죽은 흙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땅이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다른 말로 선악과 시험을 잘 치러내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의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땅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써 땅도 인간을 반대하지 않고, 창조 때의 효력을 그대로 발휘하여 포도송이 하나를 두 장정이 메고 와야 할 정도의 소산을 내는 그런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선악과만 안 먹으면 너희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고,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신 8:6-10)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 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 하리라”

 

성경이 약속의 땅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선악과 시험만 잘 치러내면(율법) 그 땅은 아무런 부족함과 불편함이 없는 풍요의 땅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땅에서 그러한 생명의 풍성함이 깃드는 옥토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거기가 가나안이어야 합니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주위에도 땅이 많잖아요? 그런데 왜 약속의 땅이 꼭 가나안이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신명기 11장 10절 이후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신 11:10-15) “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보시다시피 애굽은 인간들의 노력으로 꾸려지는 땅입니다. 인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산이 결과물로 맺히는 땅이 애굽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모든 것이 하늘에 의해 결정이 되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인간의 힘으로 물을 댈 수도 없고 물을 가둘 수도 없는 땅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 골짜기에 갇혀 있다가 초목과 채소가 열매를 맺을 때 그 물을 대주는 그런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쉬운 말로 약속의 땅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단 하루도 유지되거나 지속될 수 없는 그런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된 것입니다. 여기도 잘 보시면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내리셔서 밭의 소산을 내시는 하늘의 메커니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그 내용과 똑같은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땅은 내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힘이 되어, 인간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고파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하나님의 땅(흙)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현실을 에둘러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레 25:23) “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생기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땅은, 쉬운 말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힘을 과시하거나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 약속의 땅, 하나님의 것인 땅, 자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땅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산 땅, 약속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생기, 성령의 부어짐이란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은혜로 종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땅, 흙 자체는 그저 거름더미에 불과한 것이니까 그 거름더미에서 열매를 맺겠다고 수선 좀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발 그걸 알아먹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티끌로 서라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 32:11-18) “11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 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하여 할 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 지어다 12 좋은 밭을 위하며 열매 많은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 이니라 13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14 대저 궁전이 폐한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산과 망대가 영영히 굴혈이 되며 들 나귀의 즐겨하는 곳과 양떼의 풀 먹는 곳이 될 것임 이어니와 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16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17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질려와 형극,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그 질려와 형극의 땅이 아름다움 밭이 되고 화평과 평안의 땅이 되는 것은 성신의 부어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기경을 한다거나 인간들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 좋은 땅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전해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바로 그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요 14:18-23)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과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모습으로 다시 내려오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어디로 내려오신다는 말씀입니까? 당신의 백성, 즉 교회에게 내려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에는 당신의 백성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때부터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지킨 자가 되어 버린다는 완료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악과 시험이 성취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생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흙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임하니, 선악과의 시험이 성취가 되고, 에덴(약속의 땅)이 회복이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실, 아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회복이 되는 복된 현실을 바울이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엡 2:18-22)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화평 속에서 거하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은 바로 교회,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약속의 땅이며, 에덴이며, 하나님 나라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성령의 부어짐으로, 생기의 가입으로만 비로소 가치 있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과 죽은 흙의 연합은 하나님 측의 열심과 하나님이 쏟아 부으시는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니까 ‘죽은 흙들아, 죽어라’는 말인 것입니다. 왜 산 자의 흉내를 내느냐는 것입니다.

 

(계 21:1-2)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잘 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다른 공간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린양 예수의 신부인 ‘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우주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흙이었던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은혜로 임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다른 말로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풍요를 함께 누리는, 하나님 백성들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에 의해 성취되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피(창세전 언약)에 의해 성취되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완전히 배제 된 땅입니다. 하늘의 처분에 따라 열매가 맺히기도 하고 안 맺히기도 하는 천수답의 땅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 아들에 의해 죽은 흙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으로 화하는 구원의 이야기가 성경이고 복음이며 그것이 성취되는 시간을 역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 전체를 거룩한 성이 회복되고 완성되는 것으로 딱 잘라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단 9:24)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네 백성, 즉 거룩한 성을 위해 이 역사 전체가 칠십 이레로 기한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처소, 약속의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이 되면 역사가 종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아들의 공로로만 성취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땅이 안식을 하지 못하면 그 땅에서 사람들을 쫓아내 버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나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되고 완료가 되어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 백성들의 안식이 성취가 되었을 때의 현실을 모형 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사람들이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모든 종들이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운영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 일을 하는 자는 돌로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운영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거기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는 것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거기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할 수 없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인간을 분리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냥 죽은 흙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 넣어져 완성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적합하지 않은 자, 안식일에도, 안식년에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세상 적 힘의 축적을 위해 일을 하는 그런 인본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을 당신의 약속의 땅에서 쫓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곧 죽음입니다.

 

(레 26:43) “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보세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안식의 현실을 무시하는 인간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심으로 땅의 안식을 지켜내십니다.

 

(대하 36:20-21)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 하였더라”

 

역시 마찬가지지요? 땅의 안식을 위해 이스라엘을 70년간이나 바벨론으로 보내버리십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 거룩한 성, 새 하늘과 새 땅, 교회, 하나님 나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만을 찬양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땅들, 하나님의 흙들, 그런데 살아있는 하나님의 땅들이 된 성도 여러분, 기뻐하시고, 자유하시고, 찬송하십시오. 오직 그분의 은혜, 그분의 긍휼과 영광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땅이 될 때 우리가 속한 이 땅에 우리에게서 부정당하여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힘내세요. 여러분이 진짜 땅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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