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영광, 보내신 이의 영광
(김성수 목사)
(요 7:11-24)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 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말씀을 통해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 외식하는 자- 불신자의 순으로 설명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하나로 연결이 되는지 잘 보세요. 큰일을 하려거든 사람 많은 곳에 가서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라는 예수님 형제들의 권고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겠다던 예수님께서 슬그머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자기의 영광과 자기증명, 자기 자랑을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절기를 지키셔야 했던 예수님의 속 깊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성도의 삶은 자기를 증명하고 자랑하는, 자기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 했지요?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특징과 그들에 대한 경고가 이어집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명절 중간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함은 성전 뜰을 말하는 것인데 그 성전 뜰은 오늘날의 축구장 네 개 정도를 합해 놓은 것만큼 넓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전체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셨던 것이 아니라 성전 뜰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 가르침이 매우 탁월하여 사람들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탄이 어떻게 표현이 되고 있는지 보세요.
(요 7:15)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이할 정도로 탁월했는데 그들은 그 가르침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저 가난하고 미천한 목수가 히브리 성경을 읽고 설명을 하는가에 대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놀라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BC586년에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70년간 그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었습니다. 그 70년 동안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고 바벨론의 언어인 아람어를 국어처럼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소수의 랍비들만이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랍비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그를 지도해 준 스승도 없는데 예수님이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시고 강론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배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미가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미5:2)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아비는 미천한 목수였고 예수 자신도 랍비교육 같은 정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무식한 집안의 무식한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보잘것없는 예수가 히브리어 성경을 줄줄 읽고 그 성경을 강론하며 자신이 하늘의 떡이라 말하는 것이 못 마땅했고 못 미더웠던 것입니다. 이 15절에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특징과 경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처럼 사람의 영광과 세상 적 자랑을 중요시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말로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겉모습과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못된 특징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십니다.
(요 7:25)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에 눈먼 자들은 항상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원인에 의해 결과를 판단하는 인과율(因果律)이며 그 인과율에 근거한 것이 기복(祈福)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노력과 열심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복으로 재려 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우매한 짓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그와 정반대의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잘 보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행함에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16)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에서 당신이 가르쳤던 말씀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는 어구를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이 어구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푸는 중요한 키입니다. 지금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인과율에 의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배워야 알고, 알아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가 주시면 배우지 않고도 가르칠 수 있다’고 은혜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상반된 사고방식이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내가 나의 능력을 자랑하여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인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의 지식은 나의 노력과 열심에 비례하여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나의 노력과 열심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도 우리의 학식과 지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고전 1:20-24)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렇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의 지적 능력이나 배움의 수준, 학력 등에 의해 복음의 질이 높아지고 낮아지고 하지 않습니다. 구두 수선공 무디와 땜장이 존 번연이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을 회심시켰습니까? 그들의 학식이 높아서였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복음에 자기의 지혜를 전혀 섞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 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 지성의 두 산맥인 힐렐과 샤마임의 두 학파를 집대성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세계 최고의 학자를 지도교수로 두고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을 해(害)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배설물(排泄物)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전하는 자를 통로로 삼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인과율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자신은 부인되는 은혜의 원리로 이 땅을 해석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는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의뢰가 요약되어 함의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17절과 18절에서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참 성도의 차이를 마치 쐐기를 박듯이 구별해 주십니다.
(요 7:17-18)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절대 복음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외모와 배경으로 판단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이 아닌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자기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며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에 의거하면 모세 율법의 참된 내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8절 바로 밑의 19절을 보세요.
(요 7:19)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주님께서 자기영광과 보내신 이의 영광을 말씀하시다가 불쑥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담고 있는 진정한 목표지점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목표지점을 향해 매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지점이 어디지요?
자기의 영광만을 위하며 살던 죄인들에게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고지(告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던 죄인들이 십자가의 공로로 그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되는 그 복된 결론을 위해 율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을 깨닫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과 유익을 구하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조차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하는 자들은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눅 18:11-14)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보세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은 자기의 율법 준수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밟습니다. 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는 그들보다 월등히 나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자기가 부인되고 자기의 무력함이 증명되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소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기의 의가 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마 6:1-2,5)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 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율법을 지키거나 구제나 선행을 하는 것을 가리켜 ‘외식(外飾)’이라 하십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성경이 말하는 외식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는 모든 행동을 가리켜 외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외식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어떻게 대하셨는지 보세요.
(마 23:33)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주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익과 영광에만 관심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명명하시고는 그들에게 그 시대의 가장 저주스러운 욕을 하셨습니다. 보신 것처럼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욕과 함께 너희는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저주까지 쏟아내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는 이 곳 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 23:13)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예수를 이용하여 병이나 고치고 물질의 복이나 받으려 하는 등의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는 외식하는 자들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도 지옥의 자식이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번영의 신학이니 고지 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지옥 자식들의 지옥자식 만들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의 영광을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키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율법을 안 지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자기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행하는 모든 종교 행위는 주님 앞에서 기각(棄却)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 19절 다시 보세요.
(요 7:19)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그렇지요?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율법을 안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반드시 그 분을 죽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열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이들보다 더 열심을 내어 종교행위를 합니다. 분에 넘치는 헌금도 할 수 있고 시간을 쪼개어 구제나 선교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율법지킴, 요즘 말로 종교 행위들이 자신들의 이생의 삶에 유익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열심을 냅니다.
(롬 10:2-3) “2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이 얼마나 열심을 부렸던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 환언하면 올바른 복음의 지식을 좇지 않은 열심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열심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 그의 서신 서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빌 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행 26:14-15)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기 영광을 위해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열심히 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이가 바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을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지금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한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열심은 자기에게도 해가 됩니다. 주님은 그러한 바울의 열심을 가리켜 ‘가시 채를 뒷발질 하는 것’이라 표현하십니다. 그 말은 자기의 자랑과 유익과 영광을 위해 종교 행위를 하는 이들은 심히 피곤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한 마지못해 하는 행위이기에 힘든 것입니다. 고단합니다. 수고스럽습니다. 그래서 쉬 지치기도 하지만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토라집니다. 주님은 그러한 수고는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지옥에 쳐 박히게 될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슴없이 남을 비판합니다.
(마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님은 그렇게 자기의 영광을 위해 외식의 열심을 부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막 7:6)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 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불신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여 지적하신 것이고요. 그런데 20절을 보시면 그들이 자기들은 절대 주님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요 7:20)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그러나 우리가 5장을 공부할 때 이미 보았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1년 전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 때 이미 안식일을 거론하며 주님을 죽이려 했었습니다.
(요 5:18)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렇게 1년 전부터 주님을 죽이려 노심초사했던 자들이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느냐’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주님은 21절부터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사건을 들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율법주의에 젖은 유대인들을 고발 하십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소상히 까발리시는 주님이 싫었을 것입니다. 감추고 싶은 것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 그 사람이 미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겠지요. 주님은 그 이야기를 통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살해하기를 서슴지 않는 죄인들의 헛된 종교 적 열심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영광을 위해 외식도 불사하는 자들아, 모든 일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판단하라’고 권고를 하십니다.
그 이야기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난지 팔 일만에 모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아이가 안식일에 태어나면 그 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인간의 몸을 248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한 부분이 지나치게 움직이거나 사용되는 것을 그들은 일이라 보았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고민을 했겠지요. 결국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할례를 행하는 법이 더 큰 법이라 결론을 내렸고 안식일에 태어난 아이는 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할례를 위해서도 안식일을 범하면서 죽어가는 자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너희들이 너희의 자존심을 건드린 나를 죽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결코 율법을 수호하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눅 13:15-16)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자기들은 소나 말도 안식일에 목말라 죽을 까봐 외양간에서 끌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귀신에게 매여 십팔 년을 고통당하던 여인을 고쳐 준 주님을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율법의 수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감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달리고 있던 차에 예수님이 오셔서 신자는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메시아라는 작자가 자기들의 영광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지금껏 쌓아놓은 영광마저 무시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자랑과 자기 자존심을 위해 그들의 인생을 소비합니다. 그 중에서 선택된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영광과 자기 자존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 그 삶이 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삶이었기에 우리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 걸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자기를 자꾸 비교하지 마세요. 나는 이만큼 하는데 당신은 왜 그 정도 밖에 못하느냐고 핀잔주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얻은 것 중에 은혜 아닌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인데 우리가 자랑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한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뒤에 앉은 승객에게 너는 뒤에 앉아 있으니까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놀리면 누가 바보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바보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섬기십시오. 자기 영광과 자기 유익과 자기 자랑과 극한의 이기심에서 어서어서 벗어나세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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