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김성수 목사)
(창 13:5-18)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다. 6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7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9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13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18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여러분이 지난시간에 공부하셨다시피 아브라함은 애굽왕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를 판 대가로 그로부터 많은 재물과 노예들을 얻어서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지난주 설교 때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아브라함이 자신의 꾀로 애굽에 내려가서 굶주림을 해결하고 많은 재물과 노예들을 얻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절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얻은 재물과 노예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실수를 반추(反芻)했을 것이고 자신의 불신앙과 파렴치함에 대해 많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재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로인한 에피소드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창 13:6‐7) “6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7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네겝에서 30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멀쩡했던 삼촌과 조카 사이의 관계가 소유가 많아짐에 의해 분열이 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맞은 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기근이었습니다. 물질에 관한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크심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가르치신 후 다시 원위치로 올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근과 정 반대의 시험인 풍요의 시험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역시 물질에 관한 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물질로 시험하실까요? 나중에 공부할 부분이지만 14장에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과 소돔 왕 앞에서 또 물질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물질이란 그것에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시험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물질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버린 인간은 물질의 도움 없이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성도도 여전히 제한된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쉴 곳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속에서도 재물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탐심(貪心)과 의존(依存)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격하시켜 버립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재벌가 황태자들의 재산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서민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아쉬워서 소송을 하고 칼부림을 하고 하는지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재물이 갖고 있는 위험한 국면(局面)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많은 곳에서 물질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사하고 운용할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피하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물질이 인간을 다스리는 힘은 크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재물을 하나님과 견주어서 하나님 반대편의 신(神)(mammon) 이라고까지 표현을 하시겠습니까?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재물은 복(福)이 아니라 은사(恩賜)입니다. 복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나아닌 다른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고린도서에서의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도들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인 물질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위탁물(委託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물질관은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에 기여하는 복으로서의 관점이 아닌 그 위탁물을 올바른 곳에 전달함에서 오는, 즉 청지기의 임무완성에서 오는, 다른 말로 성도에게 ‘청지기가 누리는 청지기의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은사로서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paradigm shift)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물질을 나를 자랑하고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이내 하나님 반대편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관한 시험에서 그러한 세상의 힘이 주는 매력과 쾌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자로 서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의 성숙을 향한 훈련으로 점철(點綴)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에 유독 물질에 관한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물질은 성도가 버려야 하는 세상 힘의 대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첫 번째 기근 앞에서의 물질의 시험 때와는 달리 두 번째 물질의 시험에서 롯에게 초장(草場)의 선취권(先取權)을 양보함으로 해서 더 이상 물욕과 불신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는 아브라함의 멋진 양보의 진술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는지 오늘 본문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풍요(豊饒)라는 물질의 시험에 멋지게 통과한 아브라함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일취월장(日就月將)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질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던 첫 번째 위기 때는 자기 아내 사라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스스럼없이 팔아넘김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여과(濾過)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시험에서는 그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아주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으로 성숙되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조카 롯이 알짜배기 땅을 모두 차지하고 나면 자칫 자신의 육축은 아사(餓死)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이의 유익을 먼저 챙겨주었던 것입니다.(창 13:9)
이렇게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대한 훈련이 잘 된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타적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의 힘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의존의 대상으로 서슴없이 택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타인을 밟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물질’과 ‘타인과의 관계’라는 시험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로 설만큼의 성숙함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에 더욱 민감해 집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살았던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굳이 모세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창 13:7)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역시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 7장1절에서 5절까지를 보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은 아세라 목상 등의 우상 신을 섬기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아브라함과 롯이 살던 곳에 함께 거했다는 기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지금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눈이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과 롯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카 롯과의 땅 가름에 임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신자들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있더라’라는 7절 말씀 바로 뒤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우리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 종들도 서로 다투지 말게 하자’고 갈라짐의 이유를 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불화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카 롯에게 갈라지자 했던 것이고 땅을 가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자칫 자신이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롯과 다툼이 생길까봐 롯에게 먼저 선취권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네겝에서 만난 기근으로 두려워 벌벌 떨며 애굽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던 아브라함, 거기서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마저 팔아버렸던 겁쟁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두려움 없는 양보와 겸손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애굽의 경험에서 그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라 자타가 공인했던 바로보다 센 분임을 알게 되었고 당신의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난 만큼 그 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 전능의 하나님을 아는 만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요일 4:18‐19)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남방 네겝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관해 그리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근과 애굽 왕의 권세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6:3)라고 거듭 외치는 것이며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호 4:1)그들이 그렇게 패역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성경기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반복하여 권고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개념은 헬라적 개념이 아닌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알다’라는 단어의 헬라적 개념은 사물의 실체가 인간의 의식에 투사(透寫)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히브리 적 개념의 ‘알다’라는 단어의 개념은 사물의 실체가 인간의 내적 경험과 섞여서 동화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쓰인 ‘알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 해석하는 것보다‘사랑하다, 사랑하여 선택하다’라는 뜻의 숙어로 해석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히브리 사람들은 ‘알다’라는 단어를 ‘사랑하다, 사랑하여 선택하다’라는 숙어로 사용합니다.(게할더스 보스)
따라서 로마서 8장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라는 어구는 하나님께서 나중에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착하게 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이 악하게 살 것인지를 미리 아시고 그 중 착하게 살 사람들을 미리 택하셨다는 예지예정설을 지지하는 어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사랑하셔서 선택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택하셨다’는 예정론을 확고히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신앙여정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에 의거하여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여정의 최종목적지는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 본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든 고통과 질병과 두려움과 범죄가 파생되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원래 무(無)에서 창조가 된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려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고 절대 순종하며 그 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무(無)에서 창조된 자들의 무(無)에로의 재창조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좇는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을 자기 부인(否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기 부인이 바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無)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성도의 최종 목적지의 표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어떠했나요? 롯은 땅의 선취권을 주겠다는 삼촌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단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의 기자인 모세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요단을 어떠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로 갑니다.
(창 13:10)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그 땅을 물욕(物慾)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롯이 물이 넉넉한 초장인 그 땅을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땅이라 평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롯은 요단 들을 가리켜 그냥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땅이라 하지 않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본 땅은 나일 강의 잦은 범람으로 생긴 풍요의 상징인 삼각주(三角洲) 땅에 물이 넘치는 곳이었고, 그 도시들은 고도로 발달된 곳이었으며, 바로의 궁궐은 풍요의 절정이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과 나그네처럼 통과하여 내려온 가나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롯에게는 바로 그러한 풍요의 땅 애굽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의 모습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애굽의 화려한 추억은 롯의 머리에 그대로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요단의 초원과 소알까지의 도시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 땅이 물이 많고 초목이 우거진 풍요의 땅 애굽과 견줄만한 좋은 땅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롯이 그러한 좋은 땅을 보자마자 그 땅이 애굽 땅과 같았다고 표현을 한 것은 롯의 관심이 온통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풍요와 사치와 열락(悅樂)의 땅 애굽과 같은 자신만의 작은 애굽 건설에 쏠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꿈꾸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기회가 온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주고 돌보아 준 삼촌이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에 필요한 땅을 움켜쥐었습니다. 삼촌과 그의 육축들이 굶어 죽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롯은 지금 크게 혼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애굽 땅은 하나님의 임재가 무시된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롯의 눈에는 그 둘이 같은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풍요가 있는 곳에 여호와가 함께 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health and wealth gospel, 번영의 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성숙하지 못한 롯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가난은 죄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롯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긴 시간을 여행하며 아브라함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까지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읽지 못하던 자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애굽 땅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에서 롯처럼 이렇게 엉뚱한 선택을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신도 곤란을 겪게 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은 롯이 물욕의 눈으로 선택한 그 땅의 대표적인 도시인 소돔을 가리켜 큰 죄인 들이 사는 땅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를 합니다.
(창 13:12‐13)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 인이었더라”
13절의 ‘여호와 앞에’라는 어구는 직역을 하면 ‘여호와의 면전(面前)에서’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지금 소돔 사람의 죄를 히브리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급의 표현을 사용하여 그들의 죄악의 극악함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라는 어구를 사용하여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수식하는 수식어로 썼습니다. 지금 모세는 롯이 물욕에 눈이 어두워 선택한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악한 자들이 거하는 멸망의 땅임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물욕에 어두워 선택한 세상의 화려한 것들은 죄가 양산해 놓은 더럽고 추악한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는 아수라 백작 같은 것들에 불과합니다. 롯은 동으로 장막을 옮겨가며 결국 가장 악한 땅 소돔에 정착을 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물욕에서 비롯된 성도의 선택은 결국 죄악의 한 복판으로 달려가는 저주의 달음질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을 걷으며 순종의 산 모리아 산으로 행진을 한 것에 비교하여 롯은 장막을 걷으며 기어이 그 저주의 땅, 쾌락의 땅, 소돔 땅으로 입성을 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막을 옮긴 것이 아니라 세속적 판단에 의한 물질적 성공의 전망(前望)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모리아 산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물욕을 채워주는 소돔입니까?
롯은 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아주 고통스러운 결국을 맞게 됩니다. 창세기 19장 1절과 9절을 보면 롯은 풍요하고 화려하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 멸망의 땅 소돔의 장로가 됩니다. 그가 ‘소돔 성 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 성의 장로로서 그 소돔 성 사람들의 법관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성문에서 백성들의 재판이나 민원사항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롯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롯이 죄인 중의 괴수 노릇을 하고 있는 꼴입니다. 성도가 성도간의 교제를 떠나 홀로 죄악 된 세상에 놓이게 되면 그는 반드시 신앙생활의 맥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에 둔감해 지게 되고 곧 자기가 토해 놓은 토사(吐瀉)물에 뒹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홀로 적진에 들어가서 그들을 모두 교화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하겠다는 오만한 발상은 어서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을 하면서 ‘내 배우자를 반드시 전도하고야 말겠다고’ 호언(豪言)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나 그가 한 말에 책임 있는 행동을 하던가요? 대부분 믿지 않는 배우자의 생활양식 속으로 오히려 끌려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고리타분한 신앙생활보다 화끈한 불신 세계가 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롯은 소돔 사람들을 가리켜 ‘형제여’라고 부를 만큼 소돔 백성 화(化)되어 버렸습니다.(창 19:7)
그러나 결국 그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택한 애굽 같은 땅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모두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위들을 모두 잃고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소돔 땅에서 누리던 부와 쾌락과 배우자까지 몽땅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 것들의 정체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애와 문란한 성생활이 아주 자연스러웠던 소돔에서 자란 두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식을 낳아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 즉 불신자들의 조상이 됩니다. (영어로 남색(男色)이나 수간(獸姦)을 sodomy 라고 합니다. 바로 소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렇게 근친상간에서 비롯된 모압과 암몬은 대대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 동쪽의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amman)입니다. 그들이 바로 암몬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물욕 적 세계관에 의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한 성도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패망의 자리로 자신을 몰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간의 평화를 위해 복된 선택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는 발붙일 만큼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 천국에서 성도를 품어 안고 아직까지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제들을 응원하는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롯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차지한 듯 보였지만 결국에는 음침한 동굴에서 술에 취해 자기 딸들과 근친상간을 하여 이스라엘의 대적들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로 가시겠습니까? 세상의 힘을 좇다가 쫄딱 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느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올바른 선택과 롯의 잘못된 선택을 비교하여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현명한 선택을 하는 자로 살자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러한 올바른 선택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훌륭한 모습만 보여 주었나요? 아니지요? 그 후로도 많은 실수와 실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말년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수많은 첩들을 통해 많은 자식들을 낳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반면에 롯은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갔나요? 아니지요? 성경은 분명 롯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벧후 2:7) 왜냐하면 의인의 칭호는(稱義)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3:27‐28) 아브라함도 롯도 모두 자신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 의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롯처럼 자기 유익만을 위하여 세상의 힘을 좇아 살다가 가도 천국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롯을 소돔에서 강제로 끌고 나오신 것처럼 성도들이 실수를 하거나 엉뚱한 선택을 할 때 반드시 끌고 나오십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그렇게 하나님께서 완성시키실 것이면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의인이 있으니 둘 중에 한 가지 유형을 택하여 살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공부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 성도의 인격 안에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과 롯과 같은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인 아브라함과 육적인 롯 사이를 왕래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한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롯과 같이 세상적인 풍요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살 때 성도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풍요하고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의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시 106:14-15)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이유가 있으셔서 성도에게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묵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묵인 속에서 영혼의 파리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롯이 소돔에서 정말 행복했을까요?
(벧후 2:7-8) “7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롯은 구해 내셨습니다. 8 그것은 의인인 그가 그들 가운데 살면서 보고 듣는 그들의 무법한 행실 때문에, 날마다 그의 의로운 영혼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역]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8절에 ‘상하니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 ‘바사니조’는 ‘고통을 당하다, 고문을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롯은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을 위해 소돔 땅에 들어가서 물질적 풍요와 세상의 명예는 얻었을지 몰라도 그 삶이 참으로 고통스러웠고 심지어 고문을 당하는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렇게 아브라함과 롯의 모습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밀어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주시는 화평 속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롯이 아브라함을 밀어낼 때 우리는 고통당하고 고문을 당하며 결국에는 음습한 동굴로 쫓겨나 개돼지처럼 자기 자식들하고 근친상간이나 하는 처절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내 속에 들어 있는 육적인 롯을 자꾸 몰아내고 영적인 아브라함의 지경을 점점 더 넓게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실하고 경건하고 순결한 삶을 반복하여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통해 진정 행복하고 평화롭고 기쁜 삶이 어떠한 삶이며,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인생 내내 맞게 될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올바른 선택은 천국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펼쳐지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사랑과 평화와 안식과 기쁨과 참 행복이 우리를 감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조금 손해 보고 양보하는 것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시지만 그와 정 반대의 삶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 삶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용서해 주고, 당해주고, 양보하고, 용납해 주면 바보인 줄 알고 더 밟습니다. 세상은 약삭빠르게 자기 이득을 챙기고 임기응변(臨機應變)이나 권모술수(權謀術數)로 남을 이용하는 사람을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 인정해 줍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사랑은 온유하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질투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나의 유익이 아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당해 주는 것입니다. 많이 힘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도 해 보십시다. 아브라함처럼 지금은 여러분이 손해보고 당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롯이 풍요의 땅을 선택하여 떠나버린 그 공허하고 외로운 자리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진짜 풍요의 땅을 영원히 너에게 주마’(창 13:14‐17)고 약속하셨던 우리 주님의 약속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당해 주는 삶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삶입니다. 그 때에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자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선조들의 현명한 아포리즘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는 이 세상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입성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천국가족이 중도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여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부둥켜안아 주십시오. ‘당신은 절대 포기하면 안 돼, 끝까지 함께 가자’하고 서로를 격려해 주십시오. 예전에 한국에서 큰 홍수가 났을 때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고 일가족 여섯 명이 둥글게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버티다가 결국 전 가족이 손을 꼭 잡은 채로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신들을 덮치는 그 풍랑 속에서 그 가족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엄마, 꽉 잡아, 아가야 절대 놓치면 안 돼, 아빠 힘내’ 서로를 격려하며 그 폭풍과 풍랑을 이겨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서로를 꼭 붙드셔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아직도 롯이 우리 생애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삶은 고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욕 적 관점에서 세속의 요단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쾌락의 땅, 그러나 멸망의 땅 소돔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얼른 육의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가축의 살을 찌우게 할 수 있는 푸른 초장은 아닐지라도 영혼을 살찌우고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하늘의 초원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2. 우리는 삶의 전반적인 선택에서 과연 누구의 선택의 유형을 따르고 있습니까?
3. 나의 손해를 감수하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선택을 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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