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15.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

 

(김성수 목사)

 

 

(창 12:10-13:4)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 기근이 너무 심해서,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서 살려고, 그리로 내려갔다. 11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12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13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14 아브람이 이집트에 이르렀을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아브람의 아내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다. 15 바로의 대신들이 그 여인을 보고 나서, 바로 앞에서 그 여인을 칭찬하였다. 드디어 그 여인은 바로의 궁전으로 불려 들어갔다. 16 바로가 그 여인을 보고서, 아브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다. 아브람은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 17 ○그러나 주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으므로,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19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20 그런 다음에 바로는 그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아브람이 모든 재산을 거두어서 그 아내와 함께 나라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13:1 아브람은 이집트를 떠나서, 네겝으로 올라갔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서, 모든 소유를 가지고 이집트를 떠났다.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다. 2 ○아브람은 집짐승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다. 3 그는 네겝에서는 얼마 살지 않고 그 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다. 그 곳은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다. 4 그 곳은,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다. 거기에서 아브람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당도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를 통해 성도가 구원을 얻은 후 처음으로 봉착하게 되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줄곧 장막에서만 거한 것과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 여정에서 늘 성숙을 향한 진보의 장막생활을 해야 하며 그들의 신앙 여정동안에 늘 만나게 되는 풍요와 다산(多産)의 우상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헌신과 투신과 순종의 단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이 죽을 때 차지한 땅은 무덤 한 평 뿐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그에게 무덤 이외에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이 세상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 그들이 선 땅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만드셔서 그들이 가는 곳을 모두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 나라가 우상과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 땅을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치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목표는 반드시 완성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아브라함의 여정에 등장하는 장소들과 아브라함이 그 곳에 쌓은 단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를 잘 읽어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을 몰아내고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모습이 꼭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에서 그가 점을 찍듯 지나간 그 지점들을 거점으로 정복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7:2, 8:9,12, 8:30, 11:1‐15) 바로 그러한 가나안 땅 정복의 그림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정복 사건을 모형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너와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세상 땅이 하나님 아들의 손으로 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 점찍듯 찍고 지나간 그의 신앙여정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바둑의 고수들은 포석(布石)을 할 때 아무데나 돌을 놓지 않습니다. 앞으로 치를 전쟁을 염두에 두고 적재적소에 돌을 놓는 것입니다. 그 돌을 거점으로 하여 바둑판 전체를 삼켜버리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치밀하게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바 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영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나라의 세상 나라 정복은 바로 우리 성도들을 통해 현실의 세상에서 재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정복: 아브라함‐이스라엘‐예수‐교회)

 

그런데 걸어 다니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 세상 땅을 하나님 나라로 삼켜 버려야 하는 우리 성도들 안에서 좀처럼 그러한 순종의 삶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때 참 답답하지요? 우리는 때로 절망합니다.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닐까? 만일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여전히 이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이 이 땅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기는커녕 세상에게 늘 정복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성도가 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땅이 될 것임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도 그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은 영적이며, 법정적이며, 선언(宣言)적이며, 원론(原論)적이며, 신분적이며, 운명적으로 이미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 완성이 된 현실은 우리의 현재에서 현재화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 더디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이미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응하는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 하나가 우상과 죄악의 땅 가나안에 들어섰을 때 가나안 사람들은 가소로워서 코웃음도 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이방인 하나가 들어와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인들은 그 가소로운 이방인이 그렇게 방황하다 지치면 사라지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가나안은 그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 하나에 의해 이미 하나님의 땅으로 삼켜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찍고 간 점 들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점령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아브라함 안에 이스라엘이 연합되어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 가나안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되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여 집니다. 그러나 그 적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삼켜 부푼 빵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그 이방인 아브라함 한 사람에 의해 가나안은 점령되기 시작한 것이며 결국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은 아브라함의 땅이 된 것입니다. 거듭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그 그림은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세상 땅을 모두 자신의 소유로 삼켜 버리심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삼켜 버릴 것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나안 정복의 그림은 우리 성도 각 개인 안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진행이 됩니다.

 

지금 우상과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이 심겨졌습니다. 시작은 미미(微微)합니다.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우리 안에서 새 생명의 몸부림은 그저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아브라함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의 씨앗을 비웃고 있는 우리의 죄와 허물들은 아브라함을 비웃었던 가나안인 들처럼 언젠가 모두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의 씨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옛 것들이 삼켜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결론을 이미 알고 우리의 신앙여정을 경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 입성했을 때처럼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연약하고, 힘겨워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나라 건설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놓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선한 일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완성이 될 것이니까요.(빌 1:6) 그러나 성도가 그러한 성도의 결국(結局)에 도달하기 까지는 수많은 시험과 고난과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결국 모리아 산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백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가 선 땅을 하나님나라로 삼켜 버리기까지 그의 신앙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신앙여정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남방으로 점을 찍듯 찍으며 가나안 땅을 통과하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남방 네겝 지역에 이르렀을 때 젖과 꿀이 흘러야 하는 가나안 땅에 기근(饑饉)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풍요와 다산이 아닌 기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방 네겝의 기근을 통해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의 허구(虛構)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기근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인 아브라함에게 풍요와 다산의 신의 허구(虛構)성을 알리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이 땅의 풍요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기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백성으로의 성숙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기근은 당황스럽고 마뜩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나자 즉시 순종과 헌신의 단쌓기를 중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근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그 분의 인도하심을 좇아 들어온 땅에서 웬 기근입니까? 아브라함은 그가 지나는 곳마다 순종과 헌신의 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탈한 기근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망스러운 마음에서 단 쌓는 것을 멈춥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이런 곳으로 몰고 오실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기대하고 이방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풍요와 다산의 땅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남방 네겝의 기근을 피해 나일 강의 삼각주 땅인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이 땅의 것으로 자신들의 의지(依支)를 삼으려 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아닌 애굽에 원조를 청하러 갔을 때 하나님의 일갈(一喝)이 이러합니다.

 

(사 30:1) “1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대로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의 인생을 통하여 그들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나라로 만드시기 위해 그들의 삶에 기근(饑饉)을 내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공고히 다지고 그들로 하여금 기근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살 수 있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숙을 도모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고향 땅이 뭔가 다른 장소라서가 아니라 그 곳에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인 것처럼 약속의 땅은 풍요와 다산의 땅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신 땅이 바로 약속의 땅,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고향이 좋은 이유가 그 곳에 아버지의 재산이 많아서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아버지 한 분 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진짜 자식들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때로 그들의 삶 속에 아버지 이외의 것들을 기근으로 말려 버리시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기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묻고 그 뜻에 맞게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십년 동안에 이스라엘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낮추시며 시험하사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신 8:2)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고 그 길에서 그를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것은 그렇게 낮추어진 상태에서도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알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아버지가 좋아서 말을 듣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얻어먹을 것이 많아서인 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주님을 만난 후 이 땅에서 통과하여 지나가야 하는 땅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순종의 삶을 배우는 땅이지 하나님의 힘을 빌려 나의 소원을 이루고 나의 풍요를 채우는 땅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후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곳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없었던 광야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기근과 갈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물어야 했으며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믿음을 보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을 하시고 역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단 앞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정답을 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기근과 갈증 앞에서 전부 실패하는데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 안에 연합되어 있던 당신의 모든 백성들의 현재(現在)에서 바로 그 대답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광야, 성도의 기근은 믿음의 질(質)을 시험하는 시험대이며 신앙의 진보를 향해 진일보(進一步)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면 아브라함은 지금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약속의 땅을 떠나 풍요한 삼각주의 땅 애굽으로 풍요와 배부름을 위해 떠난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다녀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곳에 가서 살려고 떠났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그가 애굽에 우거하려 그리로 내려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삭은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창26:2) 하나님이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 했을 때 야곱은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창46:3) 이렇게 단순히 애굽으로 내려가고 안 내려가고 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을 묻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따라 행동한 것이 바로 신앙의 퇴보인 것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의 퇴보(退步)를 ‘내려갔다’ ‘야라드’라는 단어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의 들릴라 에게 반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타국으로 ‘내려갔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죽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요나가 욥바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낯을 피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신앙의 하향(下向)을 암시할 때 ‘내려간다’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망신을 당하고 다시 남방 네겝으로 들어올 때 모세는 아브라함이 ‘올라왔다’ ‘아라’라는 단어를 씁니다.(창 13:1)

 

그렇게 남방 네겝에서의 기근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진일보시키려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있는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기근 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실수를 선용하셔서 기필코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그 남방 네겝에서 무너진 또 다른 이가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던 땅에 비를 내리게 하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단 칼에 참수를 하는 등의 혁혁한 신앙의 진보를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로부터 위협을 당하자 로뎀 나무에 머리를 박고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곳이 바로 브엘세바를 지난 땅 남방 네겝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와르르 무너진 곳에서 엘리야의 신앙이 또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떡과 물을 주어 힘을 내게 하신 다음 다시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돌리십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다시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의 신앙의 진보를 다시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그 말은 ‘왜 네가 이렇게 약해졌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이십니다. 그 때 엘리야는 또 다시 믿음 없는 대답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세벨이 나를 죽인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일 하실 거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하고 대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에 서게 하시고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왕상 19:11-12) “11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12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바위를 부수고 산을 가르는 크고 강한 바람처럼, 온 땅을 뒤 흔드는 지진처럼, 모든 것을 살라버리는 불처럼 당신의 일을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세벨 같은 왕비 정도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단 칼에 베어 버리게 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이세벨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자신에게는 그 위협을 이길만한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야가 ‘하나님, 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까?’하고 대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람 속에도, 지진 가운데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처럼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속에서 그 음성을 듣고 좇는 자들을 당신의 나라로 완성시키시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남방 네겝에서 엘리야와 아브라함에게 기적 같은 풍요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너 이래도 나의 말을 듣고 좇을래?’하고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도 이러한 기근과 위협이 닥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남방 네겝의 시험이 분명 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 애굽으로 슬그머니 내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기근과 갈증과 위협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신뢰하며 믿음을 발휘하시겠습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것은 믿음의 질을 재는 시금석(試金石)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의 기근이나 갈증이나 세상으로부터의 위협이나 모함과 같은 것들은 비록 당시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 도 있지만 결국 그러한 고통들은 성도의 신앙 성숙에 반드시 유익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벧전 5:9‐10)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굳게 세우고 강하게 하고 기초를 튼튼하게 해 주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벧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약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롬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렇게 우리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성도의 성숙에 커다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난이 닥쳤을 때에 하나님께 그 고난의 이유에 대해 묻지도 않고, 순종의 단도 쌓지 않고 자기의 꾀를 의지하여 그 것을 피해 세상의 다른 것을 움켜쥐게 되면 그는 그 시험에서 탈락하여 신앙의 퇴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먼 길을 돌아 와야 합니다. 수도사 에바그리오는 ‘세탁하는 사람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두드리고 짓밟고 펴면 당신의 옷은 깨끗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더러운 우리의 옛 사람을 쳐 내시기 위해 세탁 방망이를 들이대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온전히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떠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남방 네겝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마음에 이미 불신과 그로인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애굽 사회에는 힘 있는 집의 가장이 다른 집 처자가 마음에 들면 그의 힘을 이용하여 그 처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당시 애굽의 관습이었습니다. 만일 그 여자가 남편이 있는 여자이면 보복을 피하기 위해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가자마자 대뜸 그 걱정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꾀로 애굽 행을 결정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두려움이 찾아 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요일 4:18)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고 사라는 그 보다 열 살 아래였으므로 사라의 나이가 적어도 65세 이상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미모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곧바로 애굽 왕 바로에게 보고가 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바로라는 말은 ‘큰 집’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가장 큰 집의 주인인 바로가 사라를 탐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파는 쪽을 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꾀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지요. 나의 유익을 위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13절까지를 잘 보시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의 수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자신의 손해로 이웃이 득을 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대가 애굽 사람들에게 나의 누이라고 하면 내 목숨이 안전하고 보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말은 ‘자기 목숨에 관한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자신의 아내가 애굽 남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미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내 아내의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내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깡패 너 댓 명이 칼을 들이대고 아내를 빼앗아 가려고 할 때 정상적인 남편들은 목숨 걸고 한 판 붙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 보전하고자 아내를 버려두고 줄행랑친다면 그건 바로 이혼감이지요. 게다가 깡패들한테 아내의 몸값까지 받아 챙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지금 천하에 비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순종의 단, 투신의 단, 헌신의 단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있지요? 구원받은 성도는 여전히 그 속에 옛사람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신 안에 심겨진 생명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에 게을러 질 때 인생의 기근을 만나게 되면 이내 그는 자기 안의 옛 사람에 대한 연정(戀情)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자기에게 위기가 닥치자 자기 자신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버린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의 희생을 불사(不辭)하는 그런 옛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폭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실수까지도 선용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불신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 의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애굽으로 내려가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판 사건은 분명 파렴치한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왕 바로를 큰 매로 때리셨습니다. 본문 17절의 ‘큰 재앙을 내리셨다’라고 번역이 된 ‘와예낙가 네가임’이라는 어구는 ‘큰 매로 때리셨다’라는 뜻입니다.

 

애굽왕 바로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속아서 나이가 65세도 넘은 할머니를 많은 지참금을 주고 배필로 맞은 바로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를 큰 매로 때리셨습니다. 어떤 재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세계의 왕임을 자처했던 바로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놓아준 것을 보면 하나님께 크게 맞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도 벌벌 떨게 하는 크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것입니다. 그게 확인이 되자 얼른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실수조차도 선용을 하셔서 그의 성숙에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의 수중에는 많은 가축과 은금이 풍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복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꾀로 만사형통을 이룬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왕에게서 받은 그 물질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불신앙과 파렴치함을 반추(反芻)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불의한 재물은 복이 아니라 수치인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애굽 행과 그 곳에서의 부끄러운 행동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가르침으로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납니다.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는 아량과 관대함과 두려움 없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기근을 겁내어 애굽으로 도망을 갔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러한 아량과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 일에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의 훈련을 톡톡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기근과 그 기근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실수 하고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선용(善用)하셔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것들을 몰아내시는 데에, 다른 말로 우리 자신을 직시(直視)하게 하시고 그것을 도려내게 만드시는 데에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 속에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믿는 것을 여전히 내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거기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벧엘로 다시 ‘올라가서’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뼈저린 참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실패와 실수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13장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브라함이 25년 후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거짓말을 합니다. 그 때도 역시 똑같은 이유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으니 네가 내 누이라고 속이자’합니다.(창 20:2)

 

50년 후에는 그 아들이삭이 똑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자신의 아내 리브가가 자신의 누이라고 속입니다.(창 26:7) 이렇게 성도의 신앙 여정은 그들의 실수와 실패로 점철(點綴)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반드시 완성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결심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구원이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들이 한 명 한 명 사형이 집행되는 가운데, 그 두려움 속에서 사면(赦免)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내 말을 거역하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죄인들이 하나하나 죽기 시작했습니다.(창 5)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사면해주신 그 분이 ‘내가 네 죄를 용서해서 살려줬으니 이제 내 말을 잘 들어’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복음을 정말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면, 자신이 어떠한 지경에서 건져진 사람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떠한 결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살려주신 그 분을 욕보이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라가 바로의 아내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깨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약속의 후손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파렴치한 죄를 지었음에도 약속의 후손 때문에 건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드시 성숙시키고 완성시켜 내셔야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참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때문에 살아나고 예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 살아나고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 우리의 실존을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가 우리를 살려 준 그 분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삶을 반복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와 그 신하들에게 어떤 욕을 먹었습니까?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제 나에게 나타나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그를 범할 뻔 하지 않았느냐?’하고 그가 믿는 하나님까지 모독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온 무리들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준 것까지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 같은 치사한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은 더럽고 치사하고 재수 없는 것으로 간주를 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그 풍랑의 원인이 요나임을 알게 된 이방 상인들이 요나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욘1:10)’하고 질책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이 엉뚱한 행동을 하냐는 원망과 실망의 꾸짖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실수와 실패는 하나님께 불똥이 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사형집행 현장에서 사면해 주신 그 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제 목숨만을 위해 이 세상을 살 때 세상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의 하나님을 모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패와 실수의 자리에서 그렇게 유약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로 다시 올라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창 13:3)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쓰레기 더미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그 사이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든지 쓰레기 속으로 쳐 박힐 수도 있지만 그 쓰레기 더미들을 벧엘로 삼켜버리는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이에서 선택을 하시며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여러분이 내린 답에 의해 여러분의 손발을 움직이십시오. 그러나 명심하실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마 16:17)

 

토의를 위한 질문

 

1. 아브라함이 그의 신앙여정 동안에 통과하여 내려간 그 지점을 기점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 정복 전쟁이 치러졌다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 성도의 삶 속에서 신앙의 성숙이 지지부진하기만 할 때 실망대신 완성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찾아보세요.

 

3. 하나님께서 때로 성도의 삶에 내리는 기근과 갈증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4. 성도가 자기의 육신의 생명, 즉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세상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냅니까?

 

5. 벧엘과 아이 사이는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까?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