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
(김성수 목사)
(계 15:1-4)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천상의 하나님의 교회가 부르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그 찬양의 내용 중에 3절에 나와 있는 ‘전능하신 이, 만국의 왕이시여’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4절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출애굽기 15장을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노래는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애굽을 심판하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로 노래를 마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 계시록 15장 3절과 4절이 정확하게 그 노래를 요약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모세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바로 그 노래의 앞장인 14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출 14:27-30)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자신들의 대적인 애굽 사람들이 그 홍해에 다 빠져 죽게 된 그 심판의 자리에서, 자신들은 안전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홍해 바닷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고 이 모세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 홍해 바닷가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홍해 바닷가의 사건을 보고 경험 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의 대적들은 이미 결박을 당했고 그들은 가시적으로도 멸망해 버릴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유리 바닷가의 찬양을 “지금“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지금 여러분 앞에 엄청난 홍해가 가로 막혀 있는 분들이 계시죠?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가 똑같이 홍해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때때로 홍해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홍해가 저주와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 홍해가 구원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의 일관된 논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서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의 앞길에 놓여 있는 그 홍해를 장애물로만 여깁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왜 내 자식은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릴까, 왜 내 생활은 점점 더 빈곤해 질까, 왜 나의 병은 이렇게 더 위중해질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인생의 장애물처럼 보이지요? 홍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해에 여러분을 빠뜨려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앞장을 서시고 그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 홍해를 다 건너고 났을 때 이스라엘에게 그 홍해가 여전히 장애물이었나요? 아닙니다. 그 들이 홍해를 다 건너고 난 뒤에는 그 장애물이었던 홍해가 바로 이스라엘의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 홍해에다가 우리를 다 빠뜨려 죽이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홍해는 ‘우리의 대적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 사람, 옛 성품, 이런 것들을 죽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구나.’ 하고 오히려 그 상황들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홍해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경이로우심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배우게 되고 그 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홍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홍해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홍해로 가게 되었습니까? 구름 기둥, 불기둥이신 하나님께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종으로 계속 살았다면 굳이 홍해라는 장애물을 맞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홍해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내세요. 아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 면 이겨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실 거니까요. 그리고 반드시 찬양을 받아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을 보시면 그 찬양의 내용 중에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분은 두려우신 하나님’이라는 찬양을 합니다.
(계 15:4)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십니까? 아니죠?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상대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이 정말 권위와 힘이 없거나 아니면 그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지식이 없을 때 두려움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정말 권위가 없으신 분이십니까? 권세가 없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을 모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겁 없이 막 사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하나님보다 상위 권위에 올라앉아서 그 분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막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상위 권위가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해 주고 이끌어 줄 상위 권위자가 없었다면 여러분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 것 같으세요? 이가 하나라도 제대로 남아있을까요? 학교는 제대로 졸업하셨을까요?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여러분을 돌봐 주신 어떤 상위 권위자가 여러분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이 닦아라, 늦잠 자지 말고 학교는 꼭 가야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남의 것 훔치지 말라’ 그 분들이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대부분은 감옥에 가 있거나 벌써 전염병 같은 것에 걸려서 다 죽었을 겁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이 닦는 것, 세수하는 것, 샤워하는 것 이런 걸 그렇게 싫어할 수가 없어요, 부모가 어르고 달래고 패면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하지 않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절대 안 닦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상위 권위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게 속성 화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마음이 아프지만 일부러 라도 혹독하게 몰아치는 것은 ‘우리 청년들이 부모와 떨어져서 유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칫 자기 마음대로 게으르게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나라도 패자’ 라는 마음으로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고후 5:9-11)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막 못 산다는 것입니다. 두려워서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두려움은 단순히 우리가 그 분을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나의 상대방이 너무 크고 존귀하고 엄위하셔서 그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프호베오‘’두려워 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죄를 짓습니까? “내가 나의 경쟁상대로 놓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아지고, 행복해 지고, 그로 말미암아 잘난 척도 좀 하고 싶고, 부러움을 사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은 의도“ 대부분이 그런 의도지요?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고 싶어서 죄를 짓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죄인들은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서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떠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느라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살전 2:4)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갈 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왜 오늘 날 교회의 강대상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들이 이렇게 힘이 없어졌는지 아십니까? 어느 때인가 부터 목사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헌금해서 자기 월급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월급을 주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엘 가건 말건 그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복 받는다, 부자 된다, 당신들 지금 잘 하고 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해 주면서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는 시도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니까 설교의 내용도 점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이혼에 관한 설교를 못 합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서 탈세나 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많은 돈을 벌어 교회에 큰돈을 헌금하는 장로가 있는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에 관해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들이 점점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런 설교를 하면 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표적 설교’라고 들고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날 들으라고 일부러 표적 설교를 했다 ’이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 혹시 교회를 나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의 모든 설교는 ‘표적 설교’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 설교를 들으시고 ‘오늘 우리 목사가 날 들으라고 일부러 이런 설교를 했구나.’하고 분한 마음이 드셨다면 여러분은 설교를 잘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제 설교를 듣고 매주 찔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매주 ‘저 목사는 왜 매주 나만 갖고 그래’ 라는 마음이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시고 하나님께로 여러분의 발길을 돌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당당히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영원히 지옥에서 태워 버리실 수 있는 천지의 주재 만국의 왕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마 10:28)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삶의 내용이 바뀝니다.
(고후 7:1)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히 12:28-29)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따라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두려우신 하나님, 다음에 바로 붙어 있는 찬양의 내용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내용입니다.
(계 15:4)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여기서 ‘영화롭게 하다’‘독사조’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유리 바닷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하고 찬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고, 그렇게 살며, 또 그 사실을 찬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알고 있어야 우리가 지금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WBC야구 대회에서 4번 타자가 홈런을 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나요? 월드컵 축구에서 골게터가 결승골을 넣고 잔디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하나님은 그 자체가 영광이요, 존귀함이요, 거룩이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들 그 분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시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럼 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가 지난 수요 성경공부에서도 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지점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공부했지요? 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지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내용을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영광의 내용은 무엇인가?
(엡 1:11-12)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된 것,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전에 읽은 요한복음 17장 22절을 잘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다’라고 하시죠? 그럼 우리 예수님께서 받으신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예수님도 죄에서 구원을 받으신 건가요?
(딤전 3:16)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우리 주님은 본래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성령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거죠?
(고후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죄가 되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이 의롭게 만드시지 않으시면 영원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리로 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망에서 살리시고 그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셨고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함께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최초로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신 분이니까요. 그 분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신 유일하신 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분께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순종의 삶, 십자가의 삶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요 17:4)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빌 2:5-12)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이 영화롭게 만든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으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경주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어느 날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의 순간까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경주해 내야 하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롬 5:1-2)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구원을 얻었다, 과거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현재입니다)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미래입니다)
이렇게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은 신분적이며 운명적인 차원에서의 시제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노력과 미래의 변화로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체 세 시제를 모두 합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이 현재에 손발을 움직여 경건을 훈련하고 미래의 소망을 향해 부단히 변해 가는 그 모든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우리의 목표지점은 ‘구원’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지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오늘을 분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일관 성 있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 복음서 모두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 뭡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제가 그 오병이어의 본문으로만 서너 번은 설교한 것 같은데,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왜 그렇게 성경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기독교의 본질과 내용’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우리가 예수님께 많이 드리면 예수님은 몇 배로 갚아주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님 자신이 그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좇아오는 수많은 무리를 향해 ‘너희가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배가 부른 연고를 나를 좇는구나.’하고 한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지고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헌신한 만큼 하나님은 그 몇 배로 갚아 주십니다.’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정말 무식한 해석입니다. 예수 님 자신이 그거 아니라고 그렇게 명백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우길 수가 있습니까? 예수 님 스스로 ‘그 건 너희들 배부르게 해 주겠다는 게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가 가리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요 6:47-58)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의 피를 마시고 살아나게 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관해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꺼내 놓자 예수님께서 축사를 하시고 그 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이 나누어주신 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20,000명이 족히 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기적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일 차로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를 열두 제자가 가지고 나갈 만큼 불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그 것을 받아 가지고 나가서 20,000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제자들이 동참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뿌려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 내시는 그 구속사의 한 복판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동업자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에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갖고 있는 본질 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7절을 다시 보실까요?
(요 6:57)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 6장은 1절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명한 후에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설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술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권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미에 그렇게 나를 먹고 살아나게 되는 자들은 ‘내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그들도 나로 인하여 살게 된다고’말씀하십니다. 이게 키포인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산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은 ‘그 분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과 삶의 내용”들을 늘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사셨다는 말입니다.(by the father, because of the father)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구원을 얻은 자들도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그 분을 위해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오병이어의 키포인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혼자 빵과 물고기를 다 나누어 주시지 않고 제자들이 그 기적에 참여하여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너희도 하게 될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으신 분들이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같은 모습의 삶을 사시게 됩니다. 수난과 고난 속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나의 가진 것을 다 잃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나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을 통해 여러분은 실제로 사랑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인내와 겸손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답니다. 어떤 일이겠습니까? 기적? 신유?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돌아 온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냄으로 인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잘 안 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요구는 뭐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 17:18-19)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왜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의 행복, 쾌락, 자랑 이런 것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허비하라고 이렇게 세상 속에 남겨 두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셔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며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조금 부족합니까? 그래서 남은 고난을 우리가 함께 나누어서 가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한 유기체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삶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난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뭔가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가신 그 길을 그대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든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노벨 문학상을 받으신 펄벅 여사의 ‘대지’ ‘Good earth’와 Jane austin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이라는 책을 사주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룽은 아주 가난하지만 순진하고 열심이 있는 농부였습니다. 올란이라는 못 생긴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 아내가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왕룽은 부모님을 모시고 만족한 삶을 삽니다. 그러던 중에 계속 흉년이 들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혁명을 맞게 되고, 혁명이 일어나면 으레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집을 털지요? 그 와중에 왕룽의 아내 올란도 부자 집에서 보물을 훔쳐 옵니다. 거지처럼 동냥을 해서 먹고살던 왕룽의 집은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사들이고 대 지주가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움켜쥐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부자가 되자 순진한 농부 왕룽이 제일 먼저 한 것이 기생집 출입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죽을 고생을 다한 자기 아내를 두고 어떤 젊은 기생을 첩으로 데리고 삽니다. 결국 그 돈 때문에 왕룽은 귀한 아내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도 전부 고리대금업자나 한량이 되어 버립니다.
Jane austine의 오만과 편견도 젊은 처녀들이 빙글리와 다르씨라는 부자 청년들에게 어떻게 잘 보여서 명예와 부를 한 번에 움켜쥘까 그 궁리하는 거죠? 우리 둘째 녀석이 대지를 다 읽고 오만과 편견을 chapter 5까지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뭘 느꼈니?’ 그녀석이 대답하기를 ‘Money makes man crazy’ 정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훈련 없이 그런 세상 힘을 먼저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다 미친 짓 하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 9:3)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제가 새벽 기도 나오기 전에 항상 우리 아이들 방에 가서 아이들을 꼭 안고 기도를 합니다. 그 중에서 빠지지 않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 우리 아이들 절대 부자 되지 않게 해 주세요”입니다. 오히려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부로 느끼며 작은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사람들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지 나의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united airline의 스튜어디스 할머니가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우리 한국 어학 연수생에 관한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셨답니다. 하루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한국 대학생들이 한 무리가 탔답니다. 그래서 이 스튜어디스가 그래도 대학생인데 기본적인 영어는 알겠지 생각하시고 어떤 남학생에게 가서‘What would you like to drink?’ 라고 물어보셨답니다. 그 학생이 멀뚱멀뚱 쳐다보기에 ‘sprite? or coke?’하고 다시 물어보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yes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콜라를 갖다 줬더니 잘 마시더래요. 몇 개월 뒤에 그 학생들이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역시 그 비행기를 탔답니다.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예전의 그 학생이 "what‘s up!" 이라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래서 이 스튜어디스가 그래도 몇 개월을 영어를 배웠으니까 이번에는 알아듣겠지 하고 그 학생에게 'sprite? or coke?' 하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yap'그러더랍니다. 그 어학연수 몇 개월 동안 'yes'를 'yap'이라고 혀를 굴리는 것 이외엔 개뿔도 변한 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아주 황당해했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황당함을 느낍니다. 예수를 수십 년간 믿었다는 사람들이 뭐 변한 게 없어요. 뭐 많이 아는 것처럼 떠벌리기는 하는데 그들의 삶을 보면 여전히 'Yap'입니다. 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그 엄청난 신분을 잊지 마시고 바로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시오, 그리고 매 순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선택하시고 행동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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