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인간들의 복음)과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복음(5)
(김성수 목사)
(롬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오늘은 우리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복음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하나님의 복음은 뭡니까? 하나님의 복음 말고 다른 복음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도가 굳이 복음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어구를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11:4)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 하는구나”
지금 이게 교회에게 쓴 편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던 초대교회 때에도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로 가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갈 1:6-10)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존재하고 완료가 된다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로, 인간의 의를 챙겨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복음이 가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 복음을 듣고 사람의 위상이 올라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뻐지면 그건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성도의 육을 공격하여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복음에 부딪히면 일단 아파야 합니다. 지금부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먼저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다른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의 차이를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제가 범신론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불교와 기독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판단해 보세요. 불교의 핵심은 마하 반야 바라밀다 입니다. ‘마하’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를 말하고, ‘반야’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다’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감’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불교는 수도 정진을 통해 지혜, 즉 깨달음을 얻어, ‘마하’, 절대적 존재로 합일을 함으로 해서 ‘바라밀다’, 극락으로 넘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절대적 존재가 지혜를 얻어 극락으로 넘어가는 것이 불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거기에서의 전제는 모든 존재의 절대성입니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유일한 선인 브라만의 투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불교의 지혜, 반야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입니다. 이 반야경의 첫머리에 ‘관자재’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보살’입니다. ‘관’이란 본다는 말이고, ‘자재’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 뒤에 ‘보살’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 설명하면, ‘보살은 스스로 있는 신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인간관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 스스로 있는 신인 보살이 깊은 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수인 것입니다. 보살은 그러한 반야 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고, 극락을 경험하며, 마침내 극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신적 세계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서’ 구현될 수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이 극락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신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고행과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범신론입니다. 부처는 이 보살의 원형이며 부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나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목적은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수행을 통하여 우주의 실체인 브라만과 합일이 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깨달음을 얻어 신으로 귀소 하는 형국입니다.
그러한 부처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되 자신의 해탈이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가 부처이고 그가 보살입니다. 보살은 만인을 하나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일으켜 작심을 하면 곧 보살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순수한 마음을 먹고 곧바로 수행 정진에 힘쓸 때 누구든지 보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되,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지요.
석가는 최초로 반야를 깨달은 부처가 되어, 바로 이러한 보살들의 맏아들 역할을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석가모니를 신앙하고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라 보살들의 맏아들인 석가모니처럼 반야를 깨달아 둘째 석가, 셋째 석가, 이렇게 자신들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무속신앙에 먹혀 버려서 불교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연등을 달고, 삼천 배를 하고, 절 건축 할 때 기와를 사서 올리고 하는 무당 잡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차치하고, 그렇게 범신론 속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신이고,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어떤 절대자로부터 선택이 되고, 예정이 되고, 작정이 되고, 그 삶 속에 절대자의 섭리와 경륜이 개입하게 된다는 기독교의 진리는 그들의 교리 앞에서 흰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살이 바라밀다를 가능케 하는 수행, 즉 마하로 합일이 되어, 극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상에서의 수행에는 6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보시(布施)입니다. 보시는 베푸는 것입니다. 베풀되 보상이나 성과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용어로 바꾸면 헌금이나 구제나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했다고 반대급부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게 보살들의 바라밀다의 수행에 필수적인 보시입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불교의 보시가 기독교의 헌금, 구제, 선행보다 훨씬 신사답지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보시를 하고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습니까?
두 번째 수행이 지계(持戒)입니다. 지계란, 계명을 유지하는 것, 계명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계’라고 하는 것이 경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계란,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과 뜻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경계를 타고 넘어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탐, 진 ,치의 욕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성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의지의 행위로 죄를 지으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절대 그 경계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못 지키면 보살에서 탈락합니다. 보살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치 구약의 옛 언약과 흡사하지요? 그리고 오늘날 개혁주의의 성화 론과도 흡사합니다.
세 번째 수행이 인욕(忍辱)입니다. 인욕이란,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참고, 매를 맞아도 참고, 사기를 당해도 참고, 모욕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지요? 네 번째 수행이 정진(精進)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가다가 중지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다는 김천택의 시조처럼, 수행이 지속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 이미 한 것도 다 헛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작심삼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되 그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 걸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바라밀다의 수행, 그 다섯 번째가 선정(禪定)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번뇌와 염려, 그리고 산란한 마음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여 참된 이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묵상과 명상과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기도가 있지요? 그 중 관상기도와 비슷합니다. 여섯 번째가 지혜(知慧)입니다. 지혜란, 일체 모든 것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 세계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 평등하고 무분별한 지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으로 바라보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것은 무집착의 지혜로 비움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움에 극락의 세계가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불교의 자기 비움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반야를 깨닫는 단계입니다. 세상은 공이며 허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그저 브라만의 투영(illusion)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성도의 삶과 비슷하지요?
어떠세요? 과연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선배 격이 되는 불교의 범주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들어보시기에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뭡니까? 천국, 극락 이름만 다르지, 그곳에 가기 위해 열심히 수행 정진하고, 선행을 쌓고, 기도를 열심히 하여, ‘나’라는 존재가 훌륭한 존재로 변화하여, 순전히 ‘나’의 힘으로, ‘나’의 욕심인 천국에 가서 많은 상을 받고 남과 차별된 ‘나’의 삶을 사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된 목적 아닌가요? 바울이 그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에서 출발하여 ‘나’라는 존재의 유익으로 끝나는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로 귀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존재에서 출발하는 신앙생활은 항상 자아라는 존재의 유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 여기 있고’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거기 있지요?’를 확인하려는 신앙은 엄밀히 말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단어는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신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차압해 버리는 단어인 것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내가 바라 볼 대상만 오롯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자아’의 확장과 ‘자아’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살게 되기 때문에 그 신앙의 대상으로 ‘자아’를 상정해 올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우상의 형성은 반드시 그 자신의 행위를 재료로 합니다.
인간은 ‘나’와 ‘신’ 사이의 간극을 자신들의 행위로 메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심은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신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교리처럼, 내가 신과 합일 되어, 나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나’라는 자리와 내가 되고 싶은 ‘신’과의 갭을 행위로 메우려고 하는 메타형식을 제가 우상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헌금을 하고, 선행을 하고, 봉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뭡니까? ‘나의 천국’을 확보하기 위함 아닙니까? 아님, ‘나’라는 존재의 변화를 보고 싶어서 아닌가요? 좀 더 훌륭해 진 나, 좀 더 착해진 나, 좀 더 선해진 나를 보고 싶어서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훌륭하게 변한 ‘나’가 다른 사람들이 못가는 천국에 가는 것, 그게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던가요?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걸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기’를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고, 멋지게 변화시켜 그 ‘자기’를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 하는 그 모든 추구가 절대자아를 추구하는 타락한 악마의 사고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작은 하나님이 되어버린 모든 인간은 ‘나’라는 절대 자아, 즉 보다 큰 신을 구축하기 위해 ‘나’ 이외의 모든 타자들을 대상화 해 놓고, 그 대상을 정복하고 극복하여 ‘자’와 ‘타’를 통일시켜 ‘나’의 울타리 안으로 귀속시키려는 본능적 삶을 삽니다. 모든 대상들을 다 자기 자아 속으로 빨아들여 이글이글 불타는 욕망의 용광로로 다 녹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자아는 살이 찌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신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을 섬긴다는 행위를 내어 놓고 그 신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걸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헤겔이 본 ‘인간의 절대 자아와 종교의 형성 과정’입니다. 그렇게 절대 자아의 추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호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른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것으로 취하여, 내가 그 신의 자리로 가기 위한 교활한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절대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은 내 것을 내어 놓으면 반드시 그 힘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대 자아 안에서 빠져 나간 힘이 다시 어떤 모양으로든 자아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절대 자아가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어떠한 행위와 사유를 내어 놓더라도 반드시 반대급부를 생각합니다. 그 보상이 물질적인 것으로, 가시적인 것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으면 정신적인 만족이나 타인의 평가로라도 돌려받아야 합니다. 그게 타락한 마귀들이 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걸 대자적 존재라고 합니다. 자기가 내어놓은 것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빨아들여 버리는 존재가 대자적 존재입니다. 그와 반대로 내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타자만을 위해 사는 존재를 대타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타적 존재, 즉 내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타자만을 위해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타적 존재란 인간들의 노마디즘의 추구에서처럼 다시 자기로 돌아오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되어버린 인간들이 절대자아의 죽음을 넋 놓고 좌시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대자적 존재, 자기가 내어놓은 것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귀속시켜 버리는 대자적 존재로 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러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옛 사람을 깨부수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대타적 존재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복음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복음은 진짜 하나님의 가짜 하나님들에 대한 전쟁 선포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다’가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게 기쁜 소식인가?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 우리 스스로는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여주신다고 내려오셨으니 그게 어찌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행위를 보태어서 다른 이들과 하나님에게까지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를 박살내 버리시고 예수의 피 공로만 의지하게 만들어주러 하나님이 내려오셨다는 게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수고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존재의 위상과 영광을 ‘나’라는 존재 스스로가 지키기 위해 그토록 속박된 삶을 살았는데 이제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해 주셨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올바른 복음이 교회에 떨어지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 교회가 붕괴되고, 가짜 신자들이 와해가 되며, 가짜 종교 행위들이 빛을 잃어, 밖에서 보면 교회가 더 어수선해지는 것 같고, 열심도 없어지는 것 같고, 지리멸렬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공격을 당하거든요. 그런데 그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고 골수와 관절과 영혼까지 쪼개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 안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 기독교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진짜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구원파나 신천지나 다락방 같은 그런 유의 이단소리를 들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어떻게 성도를 자유케 하시는지 제가 예를 들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마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내용을 잘 보시면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 부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20절에 의하면 그들은 천국에 못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천국에는 가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사람들과 천국에서도 큰 자라 일컬음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마치 천국에서도 차등과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리고 그 차등의 근거는 율법지킴인 것 같잖아요? 신약 안에 구약이 들어와 있는 모습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한 번 잘 보세요.
주님은 지금 율법과 선지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일점일획도 버려지면 안 된다고 강조에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작은 자가 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잘 행하면 큰 자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로 분류해 버리시고 그들보다 낫지 않은 자들도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로 가면 다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는 게 하나님 나라의 율법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는커녕 작은 자로라도 여겨질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 하러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어차피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왜 번거롭게 이런 ‘하라’의 명령들을 반복하여 하셨을까요? 지금 주님께서 율법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몸과 법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신이 되어 버린, 인간이라는 몸은 항상 법을 대할 때 대상으로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이제 몸과 법이 분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몸’인 내가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게 몸과 법이 분리된 인간에게 있어서 법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이 됩니다.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반드시 성취되고, 그 자체로 선하고, 천국과 지옥을 구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서 타락한 인간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고, 약하고, 악하디 악합니다. 따라서 그 지고지순한, 살아있는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 악하디 악한,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법의 파괴이며, 법에 대한 모독이며, 조작인 것입니다. 즉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악한 인간이 선한 법을 지킬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법을 지킨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얻어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연약함을 폭로하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롬 3:19-20)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몸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끌어 올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법이 인간의 몸에 투사가 되면, 죄라는 녀석이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며 그 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게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 법을 해석하고 있는 주체자의 몸으로 직접 법의 요구, 즉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그런 요구에 부응하면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설 수 있는 멋들어진 ‘자기 의’로 무장을 할 수 있다는, 노림수를 부추겨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법을 지키려 노력을 한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법을 지켜낸 대단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주장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도 하나님입니다’를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렇게 내 몸, 내 자아가 내 삶의 목적이 되고, 우상이 되면,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법은 객체,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악한 주체가 선한 객체를 해석하고 소유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죄라는 것에 있습니다. 악한 것이 선한 것을 해석하고 소유하여 선한 것을 아래로 밀어내려 하는 시도가 교만이며 죄이니까요. 그러니까 법과 분리되어 있는 살아있는 주체로서의 몸은 결국 죽을 때까지 죄만 양산해 내는, 죄 머신(machine), 죄 자동판매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분리가 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만 짓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은 하나, 몸과 법이 하나가 되면 됩니다. 법이 몸과 분리 되어 몸에 의해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되는 한 인간은 절대 그 지고지순한 법을 성취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새 언약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뭡니까? 이제 더 이상 갱신될 수 없는 완전한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새 언약의 내용이 너무 쇼킹합니다.
(렘 31:31-34)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 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 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 이니라”
새 언약이 뭡니까? 몸 안에 법이 새겨지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몸과 분리 되어 있지 않고 몸과 법이 하나가 되는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몸과 법이 분리가 되어 있을 때에는 몸이라는 주체가 법이라는 객체를 해석하고 지켜야 선이 됩니다만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버리면 몸이 법에 대해 주체의 노릇을 할 수가 없지요? 몸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몸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몸이 법을 지키던 지키지 않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법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한 마디로 새 언약 하에 있는 자들이 법 지킴은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 몸과 법의 일체를 선물 받은 자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합력하여 선이 된단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 보세요.
(요 1: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 즉 법이 육신, 몸이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은 그 모양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전부 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과 몸이 하나인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해도 선인 것이고, 성전에 들어가서 남의 장사를 다 때려 엎어도 선이 되는 것입니다. 창녀와 포도주를 마셔도 선이 되고,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율법을 어겨도 선이 되고, 간음한 여자의 편을 들어 돌을 든 사람들을 다 쫓아 버려도 선인 것입니다. 그게 몸과 법이, 말씀과 육신이 하나가 되신 분의 삶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새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옛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라,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그런데 그 옛 언약의 대상자였던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앞에서 완전히 실패자로 드러나 버리지요? 옛 언약이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파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 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너희 인간들은 옛 언약에 의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새 언약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라’는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사전 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법과 몸이 하나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법을 지킨 자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법의 일체로 오신 예수 안에서, 몸과 법이 일체가 된 자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어 놓는 모든 행위가 뭐가 되는 것입니까?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선’의 재료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 예배 때 민수기 30장을 공부했지요? 거기에서 여자의 서원이 하나님 앞에 가치가 있었나요? 하나님은 남자와만 약속하시고 남자의 행위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주시잖아요? 여자가 해 놓은 실수를 남자가 떠안으면 여자가 용서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자로 존재할 수 있는 남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우리 모든 여자들은 누구의 행위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이 세상 유일한 남자이신, 몸과 법, 말씀과 육신의 일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구원들 받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고, 그게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갈 3:26-27)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렇지요? 우리는 우리의 옷, 우리 행위의 옷, 우리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모든 법을 다 지킨 자가 되어, 27절의 말씀대로 표현을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따라서 알매니언 주의나 알매니언 주의 화 되어 버린 개혁주의 성화 론은 이피 파기 되어 버린 옛 언약에 속한 것이며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면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옷에 내가 다른 것을 첨가해버리면 그 옷은 못 쓰는 옷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새 언약 설명의 단초로 삼았던 마태복음 5장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천국에서의 ‘큰 자’와 ‘작은 자’는 ‘어떠한 행위를 하면 큰 자가 되고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작은 자가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분은 인간의 행위로 구분 지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분하시는 것이니 너희는 법을 지켜서 큰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를 깨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오히려 ‘인간의 행위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성도가 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큰 자와 작은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담이 범죄 한 후 부끄러운 자가 되었을 때 아담이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치마를 해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벗겨 버리십니다. 너의 행위로는 절대 부끄러움의 본질을 씻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죽 옷을 입히시지요? 그 가죽 옷은 어린양 예수의 가죽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그게 첫 창조든 새 창조든, 개입을 하게 되면 그 창조가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첫 창조를 마치시고 ‘참 보기 좋다’고 하셨지요? 그게 ‘선’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에 인간이 손을 보태겠다고 나선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때 ‘선’의 상태가 ‘no good’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걸 타락이라고 합니다.
제가 우리 웹 게시판에 지난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신 분들은 그 수요 예배 설교를 반드시 다 듣고 오시라고 공지를 했지요?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무엇을 공부했는가 하면 신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신랑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여자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남자 흉내를 내고 용사 흉내를 내는 것이 바로 죄이며, 악이며, 타락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의 형상’(사사기 9번째 설교, 우리의 형상에 대한 설명 참조),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 하나님의 뜻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었지요?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와 둘이 연합이 되어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형상’이 뜻하는 ‘선’이었습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분의 열심과 노력으로 창조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분리가 되면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창 2:18)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좋지 못하니’가 ‘토브 로, 선이 아니니’ ‘No good’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남자인 하나님과 여자인 인간이 따로 떨어져 분리가 되어, 여자는 여자의 삶을 추구하고 남자는 남자의 삶을 사는 상태가 바로 NG인 것입니다. 말씀과 법이 분리가 되어 인간이 그 말씀을 대상화 하여 지키려 하는 그 상태가 NG가 난 상태란 말입니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이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그렇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습니까? 무엇을 잘해서 축복을 받나요? 아니지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맏아들의 옷을 입고 축복을 받습니다.
(창 27:4) “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분명 축복 권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축복의 대가로 그 별미를 요구하십니다. 에서는 자신 있게 아버지의 별미를 만들러 나갑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낼 실력이 없습니다. 그때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가 개입을 합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롬 9:10~13)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잉태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삭 집안의 존재 양태에 대해 확인을 받은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가장이 원래 없음에서 있음이 된, 약속의 자손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라인은 그렇게 없음의 자리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어야 하는, 은혜의 족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자기 마음대로 누가 봐도 든든하고 멋진 큰 아들에게 유업을 넘기려 합니다. 강한 자에게 유업이 전해지는 인간 존재중심의 인본주의가 꿈틀 거리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던 리브가가 ‘이 집안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지속되고 끌려가야 하는 집안이지 인간의 강함과 열심과 노력을 중심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유명한 ‘야아코브, 사취하는 자, 강도’를 맏아들의 자리로 밀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 능력이 없는 연약한 야곱 대신에 어머니가 별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야곱에게 에서의 껍질을 씌워 버리는 것입니다.
(창27:15-17) “15 리브가가 집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 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이때 야곱이 한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별미를 들고, 어머니가 입혀준 옷을 입고, 형 에서로 위장하여 아버지 앞에 선 것뿐입니다. 자기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이삭이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창27:21-22)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이삭이 야곱의 음성을 알아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옷, 즉 에서처럼 꾸민 야곱의 가죽을 만져보고 그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준비한, 아버지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자이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앞에서 면목 없이, 다른 존재가 만들어 준 별미와 다른 존재가 입혀 준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새 치마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저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그의 전 인생 동안에 ‘왜 인간은 그렇게 거저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도취하고 나서 외삼촌의 집으로 쫓겨 갑니다. 그게 축복받은 자의 삶입니까? 맞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는 약속의 땅에서만 유효한, 아버지로부터 도취한 축복을 이루기 위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외삼촌 집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도록 놔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성취한 것을 하나님이 직접 전부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받고 얍복강가에 숨어 여전히 ‘자아’를 챙기고 있습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와 전쟁을 치르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지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의 자아 챙기기의 집요함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그건 전인을 치는 것이라 했지요? 야곱이 거기서 사실상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대신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대신에 죽은 이를 평생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이 되고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팡이 하나를 선물 받습니다. 그 지팡이는 자기가 평생 짚고 다녀야 할 의존대상이 됩니다. 이제 야곱은 그 지팡이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 죽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전 인생 동안 야곱과 전쟁을 하시면서 ‘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살 수가 없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야곱이라는 가짜 하나님과 싸우셔서 결국은 승리를 이끌어 내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에게 지팡이가 주어지고 그 지팡이와 함께 이름이 주어지는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과도 싸워서 이기고 하나님과도 싸워 이긴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들의 마귀 적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이라 부를까요? 교회는 하나님 앞에 순종한 자들을 끌어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 이기려고 하는 작은 하나님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부수고 만들어 낸 발생론적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발생, 원인과 이유가 없이 뜬금없이 나타난 무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과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신이 되어버린 ‘나’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외부에 있는 대적들과 싸우는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절 같은데 가서 땅 밟기 같은 거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근지근 밟으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과 싸워서라도 ‘나’라는 존재의 하나님 됨을 챙기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옛 사람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들을 당신 아들의 옷으로 덮어 은혜로 아들 삼아 주신 것입니다. 에서의 털과 에서의 옷이 야곱에게 입혀져 하나님의 축복이 거저 내려 온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통해 바로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온전히 항복해 가는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의 열심은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쓰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지옥에 보내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라는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온전히 비워진 자가 정말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주의자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천국에서의 큰 자, 작은 자, 운운 하시면서 그들의 큰 자되기의 삶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국의 장자는 이 세상에서 차자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차자, 즉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버지 전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하고 수긍하겠지요? 그는 돼지우리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경험했거든요. 그래서 탕자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 노릇하겠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가 죽이면 죽겠다는 말입니다. 노예는 생사여탈권을 주인에게 차압당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만일 맏아들을 아버지가 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맏아들이 어떻게 할까요? 이를 갈겠지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나를 버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옥에 갈 사람들이 이를 간다고 하잖아요? 그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체휼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못합니다. 이를 갑니다. 자기 힘으로 열심히 율법 지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를 갈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열심히 잘 지킨 맏아들이 아버지를 탄핵하지 않습니까?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보세요. 야곱이 그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읽게 되자 곧바로 어떤 자리로 내려갑니까? 형 에서의 앞으로 달려가 형을 ‘내 주’라고 부릅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야곱이 에서의 섬김을 받는 자가 될 것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야곱이 에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삶의 원리라는 것을 거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깨달은 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요셉의 삶입니다. 창세기 37장1절 이하를 보면 야곱의 약전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약전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토레’입니다. 그 단어는 ‘역사’라는 의미인데, 야곱의 역사를 이야기 하겠다고 한 모세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야곱의 인생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하고는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말은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이 어떠했나요? 처음부터 꼬이지요? 무죄한 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고난과 고통을 통과하여 자기를 죽인 자들을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야곱의 장자가 누구라고 나오지요?
(대상 5:2)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를 장자라 부릅니다. 왜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차자에서 장자가 된 야곱의 삶을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요셉이기 때문에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가 다른 차자들을 위해 죽도록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예수의 역할을 하고 역사 밖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하지 않고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요셉은 죽어야 할 차자 야곱의 삶을 대신 살아내어 야곱을 살려내는 예수의 역할을 하는, 인간 족보 밖의 인물을 상징하기에 야곱의 족보에서 빠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내시고 우리에게 그 삶을 전가시켜 주심으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내시는 예수의 역할인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편입을 시킵니다. 그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을 올리고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 손을 어긋 맞겨 올립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서의 차자가 하늘의 장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장자 노릇하려는 자들이 차자가 되어 지옥에서 이를 갈게 될 것을 확증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 세상 장자들이 유기되고 자격 없는 차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장자가 되는 이 은혜의 구원을 이해하십니까?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에서처럼 서고 싶어 하잖아요? 탕자의 형처럼 떳떳해 지고 싶어 하잖아요? 그게 불교란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 율법지킴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처럼 배설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라기는 사도 바울보다 더 격한 표현을 했습니다. 볼까요?
(말 2:3)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절기의 희생, 즉 이스라엘의 율법지킴을 똥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똥을 내어놓은 자들의 얼굴에 그 똥을 발라 똥과 함께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똥은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다 빠져버린 허울 좋은 쓰레기입니다. 그게 인간들의 행위입니다. 율법지킴이란 말입니다. 그걸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에게서 진짜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신자가 맞다면 여러분은 이미 몸과 법이 하나가 된 새 언약 하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란 말입니다. 그 자유는 절대 방종으로 흐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먼저 그 자유 안에서 기뻐하세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그 은혜의 부어짐에 행복해 하며 감사히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영광을 스스로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손자들 사랑하는 것 보시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지요? 아들이 낳아놓은 자식이 아들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을 근거로 만들어 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입니다. 손자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가치 있는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제한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공은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은혜 안에서 자유하십시오. 그게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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