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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신자의 때와 불신자의 때 <주님도 거부하신 고지론>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10.

 

 

신자의 때와 불신자의 때

<주님도 거부하신 고지론>

 

(김성수 목사)

 

 

(요 7:1-10) “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 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거의 육 개월 가량을 머무시며 기적과 이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6장의 사건들의 배경이 유월절이었지요?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3월과 4월 사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초막절은 태양력으로 9월과 10월사이니까 얼추 육 개월이 맞지요? 주님은 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갈릴리에서 머무셨을까요? 오늘 본문 1절은 예수님께서 왜 오랜 시간 갈릴리에서만 머무셨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요 7:1) “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 이러라”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갈릴리에만 머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다고 그들이 주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까?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우리는 6장을 공부하면서 단면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이 주님을 미워하고 떠나버린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였지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영생의 떡인 하늘의 떡을 주러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하늘의 떡은 율법을 지키는 등의 인간 측의 어떠한 근거도 배제(排除)되는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 중의 많은 자들을 포함한 군중들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요6:66)

 

다른 말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들의 선한 행위가 예수님에 의해 묵살이 되자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께 율법을 들어 경고를 했으나 주님은 그들의 말을 묵살해 버리셨지요? 그 때 그들이 주님을 죽이려 모의를 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그들을 죄인이라 부르셨고 그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이며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러한 자신들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회개하라’고 그들의 죄인 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요 7:7)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 구절에서의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님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자들이 정작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이기적이고 세상 적이고 물질적이며 자기 구원적인 신앙을 가리켜 ‘악’이라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상’이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세상’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유익과 명성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의 행사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죄인들은 보이지 않는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떡과 자신들의 행위에 근거한 자기 자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그러한 세상 적 요구 앞에서는 그 어떤 기적도 예수님을 믿게 하는 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미워하고 있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자들 앞에서 주님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물고기 두 토막과 보리 떡 다섯 개로 수만 명이 배를 채웠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맨몸으로 걸으시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완치가 되었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이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이 그러한 기적적인 힘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 줄 마음이 전혀 없는 분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 분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요 11:47-48,53)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지금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흘 동안 썩어가고 있었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직후의 장면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엄청난 기적을 본 사람들은 그 즉시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 앞에 무릎을 꿇을 것 같지요? 아닙니다. 죄인들은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체험한다 해도 그 기적이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을 때 그들은 그 어떤 기적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게 죄의 본성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 나와도 소용없습니다.

 

(눅 16:27~31)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 나와서 천국과 지옥이 진짜 있다고 전하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기적이 필요하다고 우깁니다. 그들이 인도하는 부흥 집회에 가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그들은 은 이가 금 이로 바뀌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병자들이 낫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구원의 도구로 방법으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들이 그러한 기적 앞에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적과 신비를 외치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번영의 신학에 집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러한 기적들이 성도의 인생에도 나타나서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가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기적과 신비는 늘 기복주의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는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모두 진리라는 프래그머티즘으로 둔갑하기도합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러한 시대정신들은 사실 자기가 우주와 역사의 왕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죄 성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자기 증명과 자기 자랑, 자신의 필요와 유용성과 유익 등의 세상의 떡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 어떤 기적 앞에서도 요지부동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세상 적 유익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기적 자체에 관심이 있지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기적이 자기 인생에 유익이 되지 않을 때 그 기적행하는 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기적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6장을 공부하면서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기적에 얼마나 광분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기적을 좋아하는 자들이 그 기적을 이용하여 이 세상의 떡을 얻어내려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와의 만남이 결국 무엇으로 결론이 납니까?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모의로 결론이 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날 신비주의를 지향하고 기복주의가 가르쳐지고 있는 곳에 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니 세상 적 욕심을 모두 버리고 영생을 살자,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을 살자고 설교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 맞아 죽지요. 그들이 이 천년 전에 태어났다면 역시 예수님에게도 돌을 들었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러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똘똘 뭉쳐서 그 어떤 것으로도 부술 수 없는 인간의 죄 성을 3절부터 이어지는 예수님 형제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또 한 번 폭로합니다. 본문 3절로 갑니다.

 

(요 7:3-5)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 때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5절의 맨 앞에 헬라어 ‘가르’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5절을 정확히 번역을 하면 ‘왜냐하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입니다. 따라서 이유와 원인의 접속사 ‘가르’ 앞의 3절과 4절의 내용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이유로 5절의 평가가 내려진 것이니까요.

 

그러면 믿지 않는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한 번 보지요. 3절과 4절의 예수님 동생들의 권고를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입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행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주님이 유명해지면 동생들인 자기들이 유익을 좀 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세상의 이치대로 하자면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자신을 증명하고 드러내기 위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인기를 얻고 신뢰를 얻는 일이 뭐 그리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요한은 5절에서 바로 그러한 자들이 불신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삶에 나의 삶이 포개어져서 비록 그 삶이 고생스럽더라도 예수의 삶이 내 삶 속에서 재현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방법을 거부하시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원수까지도 섬기며 심지어 십자가를 지고 쓸쓸히 죽어가는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그 삶이 내 삶 속에서도 재현되기를,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가 내 삶 속에서도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증거하자고 주장하는 고지론 자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모두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뛰어나고 빼어난 성도들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어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복 받게 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파되어 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늘 교회의 피, 순교자의 피를 타고 면면(綿綿)히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자기 증명과 자기 과시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해보라는 마귀의 시험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과시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시고 그와는 정반대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지요? 그게 좋아서요? 아니요.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지 자신을 증명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의 명성과 인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께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여 명성과 인기를 얻고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고 그게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신 것뿐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연대적 머리이시며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의 명성과 체면과 인기와 자존심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면 그의 몸인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을 좇아 이 세상에서의 명성과 체면과 인기와 자존심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두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입니까? 심지어 우리는 종교 행위조차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증명하는데 이용하는 데까지 타락해 버렸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주일을 잘 지키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까지 자신을 자랑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앞 세워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를 증명하며 자신의 세상 적 유익을 챙기려 하는 것을 불신(不信)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원리는 그렇게 다른 존재를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용의주도(用意周到)하고 약삭빠른 삶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바보 같은 삶인 것입니다.

 

(고후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내가 가진 자원이 비워져서 나는 가난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자랑하고 증명하여 더 큰 인기를 누리라’는 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 7:8-9)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주님은 이렇게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를 자랑하라는 동생들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으셨지만 며칠 후에 비밀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요 7:10)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예전에 가나의 혼인 잔치를 공부할 때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여 자신의 값을 높이 매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혼인 잔치집의 포도주 항아리를 채우라는 어머니의 요구는 거절하셨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의미를 설명해 주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신을 자랑하고 증명하여 더 유명하고 가치 있는 자로 서라는 동생들의 요구는 거부하셨지만 유대인의 삼 대 절기에는 성전에 올라가야 한다(신16:16, 갈4:4)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초막절이 담고 있는 진의(眞意)를 설명하시고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삶은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요6:38-39)는 당신의 말씀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두 부류의 사고방식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삶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사고방식으로서 자신을 자랑하고 증명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자신의 명성과 인기와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사시는 예수님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은 곧 이 두 사고방식으로 구분이 되고 어떠한 사고방식에 순종하느냐에 의해서 하나님 편의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 편의 사람인지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갈라지는지가 더욱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요 7: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내 때’라고 말씀하신 때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 1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바로 이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이 마음대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여기서 ‘때’라고 번역이 된 단어 ‘카이로스’는 ‘호라’나 ‘크로노스’에 비해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를 의미하는 구절에 주로 쓰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라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을 포함한 구속사 속에서의 모든 사건과 시간까지도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갈 4: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사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시간표에 의해 착착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을 가리켜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시간 체계나 세상이 강제하는 시간 표 속에서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초조해 하고 불안 해 하는지 아세요? 세상이 정해 준 속도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려다보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내 나이, 내 경력, 내 외모에는 이 정도 수준의 소유와 명성과 인기가 있어야 한다는 세상이 정해 준 속도에 자신을 맞추려 하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롯과 엘리에셀과 이스마엘 같은 것들을 내어 놓으며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동생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시지요? 그 말은 자기의 명성과 인기와 자존심을 위해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불신자라 하는 것입니다.(요 6:5) 하나님이 가난 속에서 기다리라 하시면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질병 속에서 기다리라 하시면 기다리는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무명으로 인기 없이 살다 가라고 하시면 그 하나님의 때에 항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때에 맞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 삶이 좀 더뎌 보여도 가장 현명한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때야 말로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총명을 다 합해도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해진 때이기 때문입니다.

 

(계 13:8) “8 (창세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우리 말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창세전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이미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의 사건과 그 ‘때’가 정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행 2:23)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베드로도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고 미리 선택하신 결과라고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벧전 1:20)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주님은 창세전부터 미리 준비되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때와 그 때에 일어날 사건들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그 정해진 때에 맞게 지금도 착착 진행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세상이 강제하는 속도로 엉뚱한 목표 지점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시간체계에 맞추어 달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때가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르게 지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때에 맞춰 달려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의 명성과 인기와 자존심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는 실패의 순간이 성공의 때를 기다리는 지루한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때로 인식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의 생에 허락하시는 모든 시간과 사건들이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정하시고 계획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실패의 자리, 고난의 자리에서 좌절하거나 조급해 하거나 원망의 화살을 하나님께 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며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조바심을 내야하며 무엇 때문에 기가 죽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슬퍼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은 사람이 그깟 세상의 명성과 인기와 자랑에 연연하며 산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이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무엇이 부끄러우며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더 갖고 싶으십니까? 그것 말고 또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며 무엇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싶으세요?

 

아울러 우리의 구원의 자리가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없는데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으로 거들먹거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자기증명이나 자기 자랑은 애시 당초 우리 성도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또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눈을 두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며 사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아닌 손익 계산의 결과에 따라서만 행동하며 살고 있다면 혹시 우리도 믿지 않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의 가치를 얼마만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느냐로 따집니다. 돈의 값이 커지면 커질수록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도 값비싼 사람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월가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의 CEO인 존 테인의 작년 연봉이 8천 4백만 불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한 달 월급이 700만 불이고 하루 일당이 23만 불입니다. 그 존 테인 회장의 인생이 하루 일당 60불로 근근이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보다 더 나은 인생이라고, 더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생의 가치는 자유 시장 경제가 매겨주는 돈값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60을 벌더라도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애를 쓰는 그 인생이야 말로 가치 있는 인생이요, 멋진 인생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세상 가치관에 눈멀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여 눈 먼 경쟁의 질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더 알려지고 더 비싼 값에 팔려 다니고 더 많은 것을 쌓으려 하는 욕망의 정체를 보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기독교 복음이 우리 사회에서의 무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독교인만의 비법을 가르치는 축복의 종교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에 얼마나 큰 위험이 숨어있는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을 상품화시키고 더 많은 값을 받으려는 노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려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값을 자신의 직업이나 연봉의 크고 작음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심지어 교회도 교인이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헌금이 얼마나 많이 걷히느냐, 목사가 얼마나 유명하고 유능하냐로 그 가치를 잽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형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그 것을 상품화 시켜 인기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얻을 생각에 잠겨 있던 예수님의 동생들과 뭐가 다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사건들과 상황들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목적지를 향하여 나에게 대가가 얼마가 주어지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랑하며 섬기며 용납해 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일들을 열심히 묵묵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의 꾀로 나의 때에 묶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때에 순종하며 올바로 반응하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십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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