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김성수 목사)
(엡 3:14-21)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이제 두 번째 기도를 올립니다. 바울은 2장 마지막 부분에서 태반이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탁월하신 지혜로 전에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이방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헐어버리셨고 십자가로 한 몸으로 만들어 버리셔서 이제 에베소 교회 사람들은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고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만드셔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다는 복음의 핵심을 설명해 주었지요? 그리고 3장 1절에서 ‘이러하므로’하고 시작을 하는데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똑같은 ‘이러하므로’가 등장하는 것을 들어서 3장 2절부터 13절까지는 괄호를 쳐서 이해를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13절까지는 앞에서 설명한 2장까지의 부분을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어 그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어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영광으로 삼으라는 위로의 말을 하는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목회 적 심정에서 에베소 교인들의 낙심을 위로하는 것이 문맥의 매끄러움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잠시 어법상이나 문맥의 흐름상 파격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래의 맥으로 돌아옵니다. ‘이러하므로’ 2장 말미와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물이므로 나는 이렇게 기도 한다“ 하고 오늘 본문을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교회가 그렇게 탄생이 되었고 지금 바울이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 열심히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는 기도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하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사도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의 내용을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기도의 자세부터 공부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의 자세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서서 기도하는 자세가 있지요? (마 6:1; 막 11:25; 눅 18:11)에 서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눅 18:11)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러한 기도는 보통으로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자복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에스라10:1; 눅 18:3)
(스 10:1)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세 번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있습니다.(단 6:10; 눅 22:41; 행 7:60,20:36,21:5)
(단 6:10)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왜 제가 기도의 내용에 앞서 이렇게 형식의 부분인 기도의 자세를 언급을 하는가 하면 우리가 형식주의를 배격하면서 꼭 필요한 형식까지 다 내다버린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 목욕물을 내다버리면서 아기까지 내다버린 꼴입니다. 형식을 갖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예의의 외적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형식주의를 나무라기 위해 자기가 설교할 때 반바지를 입고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1.5세 혹은 2세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리타분한 한국 예절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몸부림입니다.
정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요? 윌로크릭 쳐치의 youth담당 목사님은 헐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팔뚝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삭발을 한 채 가죽 상하의에 쇠사슬을 달고 설교를 합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그 분을 소개하던 빌 하이블즈 목사님의 모습이 지금도 안쓰럽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게 잘하는 것입니까?
청교도들은 주일날 교회에 갈 때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에 있는 교회이지만 자기 옷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잘 다려서 입고 갔습니다. 그들이 형식주의에 빠져서 그런 것일까요?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예를 갖춘 것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는 도저히 못 가겠어서 빌려서라도 좋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러 간 것입니다.
렌스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몸의 자세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몸의 자세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굴복과 겸손한 간청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형식을 완전히 배척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배척해야 할 것은 생각 없이 형식만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이지 크고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예의까지 배격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하고 순결하게 서기 위한 훈련은 그런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히 12:28)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어떤 사람은 12절 말씀을 가지고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자들이 무슨 형식을 따지냐고 반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담대함은 뻔뻔스러움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함은 건방진 것과 다른 것이지요. 물론 제가 마음에도 없이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무릎을 꿇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몸은 무릎을 꿇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무릎이 꿇어진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로마의 감옥에서 죽기 2-3년 전의 노구의 몸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늙은 노 사도의 사역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두들겨 패고, 감옥에 넣고, 모함하고, 욕하고 하면서 사탄은 마침내 그 대 사도를 손발을 꽁꽁 묶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사도의 손발은 묶였습니다. 사도는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는 가르칠 수도 없었습니다. 사도는 전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자유로운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기도는 사탄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는 감옥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바울은 “할 수 있으시다면?”이라든지“그게 만일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것이다”라는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요 14:13-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6:23-24)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분명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도를 당당하게 하지 못하지요?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엉뚱한 것들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당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당당합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이러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요. 두 번째로 사도는 당당함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 어떤 특정한 무리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14절15절에서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여기서 “각 족속“이라고 번역이 된 ”파사 파트리아“는 ”모든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2장 공부할 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권속”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지요?
(엡 2:19)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역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모든 천국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모든 가족)“ ”파사 파트리아“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 어디에 국한되어 있습니까? 나, 아니면 우리 가족, 대부분의 기도가 여전히 이기적으로 드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교제를 기도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주신“이라는 말은, 고대 관습에는 이름이 개인의 근본적인 특성을 나타내었던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가족들을 창조하셨으며 온전히 자기의 백성들, 가족들을 주관하고 계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도의 기도는 모두가 영적인 기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 내용 중에 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빨리 감옥에서 나가 너희에게 좀 더 많은 교리를 가르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든지,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해 달라든지”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복을 주어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시기를 바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는 전부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하나하나 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첫 번째로 신자가 성령을 통해서 내적인 힘을 얻어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거하게 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거기서 쓰인 단어“머물러” “카토이케오”라는 말은 “영구적인 거주지로 삼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는 신자가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신자는 사랑이라는 터에 성전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자라는 성전은 사랑이라는 뿌리로 사랑이라는 양분을 빨아들여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빼면 시체입니다.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다른 것으로 자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오직 여러분의 사랑을 자랑하십시오. 네 번째로 사도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함을 깨닫게 되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구약의 교훈이 도움이 됩니다.
(욥 11:7-9) “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감옥을 부수고 지하 감옥을 열었을 때 처참하게 썩어 버린 시체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착고와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 작고 음침한 방에 십자가가 하나 그려져 있었는데 그 십자가 주위에 스페인 어로 네 마디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는 “높이” 라는 단어가 집자가 밑에는 “깊이”라는 말이 그리고 십자가 왼편에는 “넓이” 그리고 십자가 오른편에는 “길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신자는 그러한 고난 중에서도 결코 자신을 낙심시킬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깨닫고 있었고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아는 만큼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삶을 살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라는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성도들, 교회의 존재가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무슨 종족이든지 그들의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이 모두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신자가 충만해 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거기서 쓰인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단어는 목적 적 속격이 아니라 “주어 적 속격“입니다. ‘충만’이라는 단어”플레로마“ 앞에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있는 걸 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어떤 충만”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그 충만은 하나님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충만은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의 전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충만, 그 자체를 우리에게 부어 넣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의 응답은 확실하게 이루어 질 것들입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시면
(엡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첫째,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며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을 능히 응답하실 수 있고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시고,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 이상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하고 있지요? 따라서 이 기도의 내용은 우리 삶 속에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들을 공부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근거로 ,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강건”이라는 말 “크라타이오-”는 13절의 “낙심” “엨카케오”라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엡 3: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여러분, 속사람이 뭡니까? 속사람은 영혼을 말하는 것인가요? 겉 사람은 육신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닙니다. 그것을 헬라의 이원론이라 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공격한 이단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말합니다. 저 천상의 “이데아”가 실체이고 이 땅의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적인 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 육적인 것은 속되고 저급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복음과 혼합시켜서 육적인 자기 몸을 마음대로 시궁창에 굴렸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비단 고린도 교회뿐이겠습니까? 그런 이단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속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다 포함한 거듭난 “네페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도 없고 반응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고 거듭난 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기는 본질적인 인간“을 속사람이라 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 거듭난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진 또 하나의 성향, 경향 등 속 사람과 반대 되는 모든 부분을 겉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처럼 속사람과 겉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자꾸 강건해져야 겉 사람이 후패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속사람이란 표현은 성도 전인을 다른 측면에서 관찰한 것입니다.
(고후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속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기도가 어떤 기도 다음에 드려지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2장 말미에서 “너희의 신분은 이러이러한 자들이다“라고 선언해 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이후에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12:5-11) “5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받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强健)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으로 우리가 힘을 키워 무엇인가를 이겨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사형통, 탄탄대로는 아닐 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계속해서 속사람의 강건(强健)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그 강건함으로 이겨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베소서는 총 6장으로 되어있습니다. 3장까지가 교리 부분이고 4장부터가 실천 부분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었지요? 4장 1절이 “그러므로“라고 시작이 되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가 4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3장까지 에서만 머물고 있지 더 이상 삶의 부분으로 걸음을 내딛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4장부터의 투쟁의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감격 속에서만 머물면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구원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 난 이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그런 사람은 지금 “아, 하나님은 딱 나 만 하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 놀랄 것이 없다니요? 우리는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지 아십니까?
(엡 3:19)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난 이제 목적지에 다 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숙해 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엡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until we all reach unity in the faith and in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nd become mature, attaining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표준새번역]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 져 가야 합니다.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속 람의 강건함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은 수준이 아니라 성숙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나누어 부릅니다.
(요일 2:12-14)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표준새번역] “12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로 한번 가보지요.
(고전 3:1-2)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어린아이로 분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젖만 먹였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딱딱한 음식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성숙한 어른 대접을 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젖을 물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가 이미 거듭난, 성령의 이끄심대로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 내는 자들입니다.
(고전 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서 신령한 자들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인데 이"프뉴마티코스”가 바로 그러한 영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전혀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전 2:14)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이 “프쉬키코스”입니다. 이 “프쉬키코스”는 전혀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 3: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의 육신에 속한 자와는 다른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을 사도 바울은 “사르키코스”라는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전 인류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인 “프뉴마티코스”와 거듭났으나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사르키코스”와 전혀 거듭나지 못한 “프쉬키코스”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이 동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나 시험공부를 할 때 늘 듣던 말이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입니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못 이룰 일 있습니다. 정신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 정신력에 상응하는 근력과 실력을 함께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벤치 프레스, 역기를 215파운드를 듭니다. 제 아내는 50파운드 들고도 팔이 덜덜 떨립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저와 똑같이 215파운드를 들겠다고 정신 일도 하사불성 하면 그게 들립니까? 기도는 항상 팔다리의 수고와 함께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많이 오해되어져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속사람의 강건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불편해 하십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강건함, 힘은 요즘 예배당에서 유행처럼 전해지고 있는 그런 힘과는 완전히 다른 힘입니다. 그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힘은 어떤 힘인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강건함을 받아야 하는지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그룹회장 장로님께서 구속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법 외화 유출과 온갖 불법 자금 관리 등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친지가 목회자로 있는 교회의 예배당을 지어 기증도 했고, 선교 사역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목사님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구제 사업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몇 천억, 몇 조원 단위의 돈을 해외로 빼 돌리거나 상환능력이 없는 계열사에 불법 대여를 하는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기가 막혔지만 거기에 대응한 한국의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의 모습은 더욱 기가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마다 일간지에 그 분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고 미국 이민 교회 목사님들까지 나서서 연판장을 돌리고 그 분의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에 따끔한 징계도 하시지만 항상 너그러우신 용서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일련의 사건을 대하면서 교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까지도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아 저렇게 힘 있고 빽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이 그룹 회장의 직분을 가진 장로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 사람을 위해 구명 운동을 펼쳤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힘이 과연 그런 힘일까요?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서 교계가 전부 일어나서 구명을 해서 용서를 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감옥에 가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 그런 것이 정말 기독교가 추구하는 힘입니까?
여러분 혹시 북미주 유학생 수련회, 코스타라는 것을 아십니까? 매년 시카고 휘튼 칼리지를 통째로 빌려서 4-5일간 수련회를 갖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카나다, 남미, 유럽, 일본까지 전 세계를 돌며 수련회를 갖습니다. 거기에 주 강사로 섭외가 되는 분들은 소위 한국에서 뜬 목사님들입니다. 거기에 가 보신 분들에게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그 주 강사님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는 대표적인 주제가 뭡니까? “고지를 점령하라”입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그 설교들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뭔가를 결심합니다. 무엇을 결심할까요?
“예수 믿는 자들이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가고 해서 거기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내면 세상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런 설교를 듣고 무엇을 결심할까요? “그래, 힘을 키우자. 강건해 지자.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볼 수 없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통해 많은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겠지요?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실까요? 그럼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공부도 많이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까? 어떤 강사님은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기까지 한 못난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근본이 못났는데 어떻게 겸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건 그냥 못났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겸손도 못 떱니까?
그런 힘은 “겉 사람의 강건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사람의 강건함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 분들은 기독교를 오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위해 사건을 일으키시고 일을 도모하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일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백성다워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제넘게 무슨 일 하려고 하지 마세요.
기독교의 역사를 한번 보세요. 기독교가 세상의 힘을 추구 할 때 여지없이 기독교는 타락을 하지 않았습니까? 박해받던 초대 교회 때, 공산주의 치하에서, 독재자들의 권세 아래서 기독교는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박해의 때에 가장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힘이 주어지고 토지가 주어지고 물질이 풍성해 지자 기독교는 망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의 왕까지도 교황이 세웠다 폐위시켰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던 때에 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는 지경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추구하는 힘은 하나님이 추구하라고 요구하시는 힘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두 가지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말씀드린 세상 적인 “힘”과 “지혜”입니다. 인간은 타락을 하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무한한 것으로부터 차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선행체계, 지식체계, 그리고 물질주의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한 인간들의 힘과 지혜와는 완전히 반대 개념이 바로 십자가의 도, 속사람의 강건함,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18-3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뒤나미스 떼우 에스틴) 성경이 말하는 힘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 적인 겉 사람의 능력이나 힘 같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2:1-5)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밖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한 것입니다. 5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10:10)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표준새번역]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도 시원치 않았고 몸도 약골이었고 생긴 것도 보잘 것 없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고 통솔력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서 전부 쫓겨나고 홀대를 당했겠습니까? 그러한 사도 바울이기에 사람들은 그의 족적을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재력이나 힘을 키워 깃발을 높이 들고 나가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십자가의 도와 정 반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힘과 지혜를 우상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고전 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힘 있는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는 사람이 와서 일개 로마 지방 관리의 손에 잡혀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신21:23)더더욱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매 달린 메시야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멸시한 것입니다.
헬라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인들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간에 더 진보되고 발전된 지혜를 자꾸 추구해서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라든지, 동방 정복에서 얻은 물리학, 수학, 의학, 화학 같은 것들을 많이 발전 시켰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지혜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현실 적인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이성적이고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것들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는 사람이 와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습니다. 헬라철학에서의 신의 속성은 “아파데이아”신은 고통을 감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제1 속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그 십자가를 멸시했겠습니까? 고통과는 관계없는 신이 인간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통을 당했다는 말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 foolish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세상 부귀영화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누구든지 나를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 이런 말이나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십자가의 도가 진짜 힘이요, 진짜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십자가에 달려서 함께 죽은 바보들이 또 있습니다.
(롬 6: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도 세상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했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로 세상을 살겠다고 하는 그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을 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몸은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으면서 여전히 세상이 추구하는 힘과 지혜를 똑같이 추구하고 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 분은 아직 안 죽은 거지요? 오늘 날 교회라는 곳에서 여전히 힘 있고 돈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접을 받고, 직분도 받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군 같은 사람들이 새 신자로 들어오면 온 교회가 술렁술렁합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도 현직 장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분과 함께 교회에 다닌다는 것조차 자랑스러워서 못 견뎌 해요.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누가 헌금을 얼마를 하는지를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 혹시 저도 사람을 가려 보게 될까봐, 안 봅니다. 교회에서조차 그러한 세상 적인 힘이 그 사람의 경중을 판단하는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지요.
여러분, 인간이 추구한 지식체계, 선행체계, 물질주의가 정말 사람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얼마간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세상이 되었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세상입니다. 한국의 상위 1%가 전 국토의 60%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 바람직한 인류의 행복의 모습입니까? 상위 1%로는 명품관에 가서 수백만원짜리 사리마다를 사 입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극빈자가 되어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목을 매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식만으로도 전 세계가 다 먹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지요? 미국은 전 세계 곡가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엄청난 양의 밀을 태평양 바다에 가져다 버립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자국의 유익을 위해 밀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힘과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내 이익과 내 힘을 조금 포기하고 나누어주면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아닙니까? “나를 죽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게 진짜 힘인 것입니다. 자기 배만 불리고 자기 힘만 추구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요? 그건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가장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가 뭔지 아세요? 공산주의입니다. 공동생산 공동 분배, 계급투쟁, 평등 얼마나 이상적인 개념들입니까? 그 이론대로만 된다면 지상 낙원이 될 텐데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죄인들은 절대 남을 위해 나의 노동력을 사심 없이 제공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북자 1호인 이민복씨가 LA에 왔을 때 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의 옥수수 종자는 남한의 옥수수 종자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겁니다. 유휴농지도 많습니다. 노동력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식량이 부족하냐고 했더니 사람들이 일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두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만 겨우 채우면 이내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이지요. 계급투쟁을 해서 계급을 없애겠다던 공산당 혁명에 참여한 자들이 혁명에 성공하자 무엇을 하던가요? 자기들이 그 상위 계급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도 소수의 당 간부들을 위한 엉터리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죄 된 속성은 절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 합니다. 인간을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풀어서 남을 살찌우는 삶, 주고, 주고 주다가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주어버리는 십자가의 도, 그것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인간들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만들어 낸 최고의 지혜라는 것을 무색하게 하는 진짜 지혜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은 진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하지 못 하면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삶입니다. 어떻게 나의 것을 희생해서 남을 살찌웁니까? 어떻게 피 같은 돈을 남을 위해 씁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인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러한 진짜 힘을 키워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실 때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다른 자녀들보다 더 뛰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요행히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남과의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출세를 위해 교회는 빼 먹을지언정 학교에서는 무조건 일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진정으로 아이의 복을 비는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는 자기 존재의 확장인 아이에게 자기의 욕심을 채워 달라고 요구하는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성경은 진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렇게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 5:3-12)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고, 져 주고, 당하면서 애통해 하고, 당연히 행사해야 할 권리조차 남을 위해 포기하는 온유함을 발휘하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 입기를 힘쓰며, 남을 긍휼히 여겨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며, 자기 것을 챙기느라 전쟁과 다툼을 일삼는 자들과는 달리 자기 것을 나누어주며 오히려 평화를 만들어 내는 화평케 하는 자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진짜 복이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자들이 진짜 강한 사람이요, 진짜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가 힘드니까 늘 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LA 지역에 있는 커다란 한국 교회들이 또 다툼이 일어나서 많이 들 갈라졌습니다. 수 천만 불짜리 예배당 지어놓고 미국 교단한테 다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미국 교단에서 그거 빼앗아 가면 다시 한국 교회에게 줄 것 같습니까? 오늘 낮에 오레곤에 있는 선배하고 통화를 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오레곤에 있는 큰 한인 교회가 재산 싸움과 세력 다툼으로 거의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20여명도 안 남았답니다. 다 무엇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세요?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삼하 12:8) “8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여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나무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이 여자를 탐한 것에 대해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성적인 꾸지람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더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무엇을 나무라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힘으로 살지 않고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오용했느냐“에 대한 꾸지람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를 계발하여 우리를 살찌우고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을 자꾸 비우고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고후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러분은 그 힘을 키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로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매달려 기도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르키코스”에서 머무시면 안 됩니다. “프뉴마티코스”로 성숙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자라지 않고 어린아이로 있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악한 죄악의 뿌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맞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계속 어린아이로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care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상하게 세상에서 누가 자기를 어린아이 취급하면 “이게 누굴 어린애로 알아?” 이렇게 화를 내면서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목사님 젖 주세요.” 이렇게 어린아이가 됩니다.
감기가 들었는데 왜 목사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까? 감기가 들었으면 의사를 찾아 가셔야지요. 밥 먹을 때도 꼭 목사보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목사가 기도하면 밥맛이 더 나십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속사람의 강건함을 입어 자기가 싸워야 할 싸움’을 목사가 대신 싸워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목사한테 자기를 투영시켜놓고 목사가 잘하면 자기가 잘하는 줄로 착각하고 목사가 못하면 금방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왠 줄 아세요? 자기를 거기에 투영시켜 놓았으니까? 예전에 저희 집사람하고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데 우리 선수가 헛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제가 저도 모르게 “저걸 다리라고 달고 다니냐?”그랬답니다. 자기가 들어가면 5분도 못 뛸 거면서 남 경기 시켜 놓고 욕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앙인인 것입니다.
연고전을 보면 연대와 고대와의 경기가 아니라, 정작 싸워야 할 연 고대 학생들은 관중석에 앉아서 소리만 지르고 있고 돈 주고 사온 용병들이 경기장에서 싸우지요? 연 고대 농구선수 축구선수 배구선수 누구하나 제대로 공부해서 들어 온 사람들 있습니까? 전부 사 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는 그들이 이기면 마치 자기가 이긴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건 코미디입니다. 그런 코미디 같은 신앙에서 이제는 벗어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하나님 제가 가서 대신 싸우겠습니다가 아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셔서 그들이 싸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지 아시겠지요? 여러분도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넉넉히 십자가의 도로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을 살아가실 수 있는 실력을 키우세요. 성숙하십시오. 자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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