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이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김성수 목사)
(창 12:1-4)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우리는 이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생애를 개괄적으로 살펴봄으로 해서 믿음의 여정을 걸어야 하는 성도들의 여정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지에 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것은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들의 탄생과 성숙의 과정과 결국(結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모델로서의 호칭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을 받은 후 가장 처음 행한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후손인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뒤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델이니까요. 그 명령은 성도에게 가장 처음 주어지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신앙의 여정 동안에 완성 되어져야 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에서 완전히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온전히 소망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최종 목적지라는 것이죠.
그렇게 성도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성도의 신앙여정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성경이 버리고 떠나라고 말하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이 오늘날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밝혀 우리가 과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 믿음의 조상이 걸어간 믿음의 여정을 올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겠지요?
먼저 ‘본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에레쯔’는 그냥 ‘땅’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 땅은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고대 근동 지방에서 땅이라는 것은 그 땅을 소유한 사람의 부의 척도(尺度)였습니다. 당시에 땅이라는 것은 모든 부(富)를 총칭하는 단어로 쓰일 만큼 땅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자마자 아브라함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생존의 근거였던 땅을 가차 없이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가 배태 (胚胎)하여 출산한 물질주의에서 속히 떠나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땅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물질주의 속의 세상의 힘들은 한시적이며 임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들에게 아직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진짜 고향 땅이 있음을 믿음을 통하여 알리시고 한시적이며 임시적인 이 세상의 땅에서 떠나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부유(浮遊)하는 자처럼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 11:9-10) “9 믿음으로 그는, 마치 타국에서와 같이 약속의 땅에서 거류하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10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나 평생을 천막 속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았습니다. 그 말은 성도는 이 땅을 언제든지 걷어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장막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진짜 우리의 본향(本鄕)을 믿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 11:15‐16) “15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썩은 사과를 들고 그게 가장 소중한 것처럼 애지중지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 썩은 사과를 버리게 할 수 있는 길은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온전한 사과를 쥐어주면 되는 것처럼 이 세상 것들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의 힘을 꼭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믿음 안에서 인식이 될 때 그는 이 세상 것들인 썩은 사과들을 자연스럽게 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 안에서 천국을 본 이 들은 이 세상 것들을 모두 팔아 그 천국을 산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 13:44) “44 ○"하늘 나라는 마치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소중함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에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천국 소망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소중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은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그 분이 떠나라고 하는 땅의 것들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생과 이 세상의 힘 사이에서 단호하게 영생을 택하지 못하고 어물쩍하다가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좇게 되는 것이지요.
(마 19:21-22)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잘 지켰다고 하는 부자 청년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영생의 떡인 당신을 좇아오라고 하시자 그 부자 청년은 재물과 영생 사이에서 고민하고 근심하다가 결국 영생의 예수님을 떠나가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귀한 보화를 사는 사람과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지요? 이렇게 본토가 의미하는 물질주의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물질의 매력에 홀려 주님을 떠나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 13:22) “22 또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절대 말씀 속에서 성장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말씀을 막아버리는 악한 담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4:10)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을 좇아 전도여행을 하다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은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힘은 성도의 신앙여정에 커다란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 18:4)’ ‘본토(땅)를 떠나라’ 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눅 14:33)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은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거지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소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필요한 비용(expense)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그 소유를 목적으로 살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 힘의 소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러분은 가난하다고 기죽을 이유도 없고 부자라고 교만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본토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친척과 아비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시대에 친척과 가족은 외부세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수단이었습니다. 나를 지키는 힘이었지요. 그런데 그 친척과 가족을 떠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며 신앙의 여정을 가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역정을 내실 때는 항상 이스라엘이 위기의 상황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강대국에 도움을 요청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위기의 때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의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 분이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영생이라는 하늘의 소망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영생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가족에 대한 의지(依支)나 애착이나 사랑까지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마 4:19‐22)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왜 성경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제자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사실을 애써 기록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자기들의 생존의 수단인 세상의 힘과 가족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 10:34-37) “34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딸이 제 어머니를,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슬러서 갈라서게' 하러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이 말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생의 소중함은 너무나 커서 가족들에 의해서 저지되고 방해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무 사랑하는 부모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 나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 그들과 원수가 될지언정 나의 신앙을 포기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하는 남편이 주일만 되면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그 남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 남편이 기뻐하는 그 일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하는 시어머님이 주일예배 빼먹고 쇼핑가자 그럴 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나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둘 사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날이 시퍼렇게 선 검(劍)을 든 사무라이의 관계가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 관계 속에서도 그들이 신자와 불신자로 나누어질 때 그 사이는 검을 든 원수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이들이 정말 영생과 구원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나요? 그냥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당장의 화목이 깨지지 않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부모가 어떠한 신앙을 갖고 있는지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가 서먹하게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올바른 복음에 대해 입을 닫고 계시지는 않나요? 아닙니다. 그건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무관심이며 유기(遺棄)입니다. 정말 그 가족을 사랑하는 길은 지금 당장은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될지언정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과 올바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엉터리 신앙을 갖고 있다면 가차 없이 지적을 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신앙의 여정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면 그들에게 그러한 게으름을 향한 소름끼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그게 바로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처럼 구원은 소중한 보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속되는 버림의 삶 속에서도 성도는 천국의 소망으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당신과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그들이 버린 것들을 백배나 받게 된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이 구절을 들어 혹자들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은 이 땅에서 백배로 돌려받게 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땅을 한 평 바치면 백 평으로 돌려주시고 집을 한 채 팔아서 바치면 백 채의 집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정말그런가요? 그러면 형제를 하나 바치면 형제를 백 명 주십니까? 어미를 바치면 어미를 백 명주시나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래야 하잖아요. 그리고 백배로 주신다고 하는 것들의 목록에 왜 아비는 빠져있지요?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입은 성도들은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자로 살게 되는데,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큰지 그들이 이 땅에서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 전토, 집 등에서 얻었던 만족감과 행복감의 백배에 해당하는 커다란 만족이 이 땅에서 그들의 마음속에 주어지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은 내게서 사라졌지만 그 성도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주어지던 안위와 평안과 행복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참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소망 안에서 주어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 성도에게 백배로 주어지게 된다는 그 것들은 이 땅의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백배라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관용구 같은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좋은 어떤 것을 그보다 못한 것과 비교하여 표현 할 때 백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좋은 것은 이 땅의 좋은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인데 그 것을 이 땅에서도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배로 주신다는 것의 내용물 중에 ‘아비’가 빠진 것입니다. 아비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셔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의 아비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이 땅의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풍성한 하늘의 것들을 누리며 살게 되는데 그 하늘의 풍요를 이 땅에서도 맛보며 살게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반드시 떠나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지지요? 그 구절에서 악센트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다’에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이든 성도에게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지시하시는 것은 모두 최선의 것들이기에 우리는 그 지시에 그냥 순종하며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지시하는 것을 온전히 순종하여 사는 곳을 천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종하고 의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듣습니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통해 너희는 내가 지시하는 길을 따라 내가 지시하는 삶을 살며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만 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그 많은 하나님의 지시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무엇이라 했지요?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을 가리켜 거룩한 삶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서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성도의 거룩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집착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것들을 지키느라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그것들보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을 오롯이 의지하기 위해 이 세상의 힘들을 자꾸 놓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삶의 시작이며 과정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물론 한 번에 다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긴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앙의 여정동안에 사활을 걸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놓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벗을 때 그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가 세상에서 떠나는 일은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1절 말미의 ‘가라’는 단어는 계속되는 행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거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되고 앞으로만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롯의 아내가 화려한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아서 소금 기둥이 된 것을 기억하시지요? 성도는 절대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옛 것들을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로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기 위해 온통 세상의 힘을 향해 집중되어 있던 그들의 눈을 돌려 하늘의 복을 좇다가 중도에 지쳐서 다시 세상의 힘을 향해 달려가곤 하는 것을 왕왕(往往) 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좇아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기 위해 쌓아둔 집착과 중독과 통제성향 등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다가 그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다시 자기 스스로를 세상의 것들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집착과 중독에 빠져드는 것을 봅니다. 성도는 그렇게 멈추거나 뒤로 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눅 17:31-32) “31 그 날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물건들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들을 꺼내려고 내려가지 말아라. 또한 들에 있는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라. 32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롯의 처가 돌이켜서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함과 달콤함을 바라보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소금기둥과 염밭 등은 저주의 땅과 저주 받은 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신 29:23; 시 107:33‐34; 습 2:9) 성도는 그렇게 저주받은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중도에 지쳐 자꾸 뒤를 돌아다보면 뒤로부터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날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야 하는 신앙의 경주자 들입니다. 그렇게 달려야 할 자들이 달리지 않고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마부는 채찍과 박차(拍車)로 그 경주마를 독려(督勵)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눅 9:62) “62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데라는 어땠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여정 중간에 하란이라는 곳에서 머물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왜 가나안으로 가던 도중에 그곳에서 머물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추론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 화려한 문명의 매력을 버리지 못했고 이방인과 나그네로서의 위험감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미 먼 거리를 왔기 때문에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하는 안일하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는 그곳에 머물러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두 가지 이유가 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들입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하고 더 타락한 도시 문명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그네요 이방인이 되어, 즉 베두인이 되어 세상에 뿌리박지 말고 타락한 도시문명에서 떠나라고 하셨음에도 아브라함과 데라는 하란의 매력적인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데라가 가나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우상의 도시 하란에서 죽어 그 곳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며 어슬렁거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비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채찍이 떨어진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 하란에서의 데라의 죽음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힌 것과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여정에서 뒤를 돌아다보거나 이전에 세상에서 누리던 것들로의 회귀(回歸)를 꿈 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는 ‘이만하면 되었겠지’하는 안일하고 교만한 자족과 게으름에 머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정확하게 북서쪽으로 600마일 지점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그 하란에서 남서쪽으로 400마일 지점입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가나안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이라는 꼭지 점까지 열심히 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나안을 향해 걸었어야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신앙의 여정에는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물론이요 쉼표 또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뒤를 돌아보고 그리로 돌아가지는 않는데 오랫동안 제자리에서 맴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까지 와 있다는 착각들을 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더 나아가기보다는 지금까지 걸어온 믿음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유혹에 이끌리기 쉽습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드시거든 얼른 그 마음을 털어 버리셔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쉼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면 되겠지’라니요? 그건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그런 생각이 드시거든 ‘아, 이곳이 바로 나의 하란 땅이구나.’하고 빨리 그곳을 벗어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데라를 통하여 그러한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은 많은 거리(距離)를 달려온 사람처럼 위장하며 그러한 삶에 안주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 사람들은 데라처럼 영적 중퇴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데라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체 구속사의 그림 안에서 데라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하고 우상의 땅에서 죽은 영적 중퇴자의 모델로 그려진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 말은 구원을 받았음에도 데라처럼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당신이 정하신 목적지로 끌고 가실 것이므로 그렇게 여전히 세상에서 안주하고 있는 자들은 가나안으로 초청받은 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 출발을 하면 끝까지 쉬지 말고 달려야 하는 경주자여야 하는 것입니다.(히 12:1; 빌 3:12-14)
이렇게 성도들은 죽는 날까지 우리의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고 하란에 정착하게 했던 데라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걸림돌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하란에서 데라가 죽자 즉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당신의 명령을 전달하십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데라가 죽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 여정의 진보를 가로막는 수많은 데라들을 직접 처리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전진할 수 있는 물꼬를 트신다는 것을 데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이차 행진의 연결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 여정을 정체시키고 있는 여러분의 데라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가족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취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가진 재산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식들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야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죄와 세속의 더러움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 맞으시다 면 그게 어떤 것이든 하나님은 그것들을 곧 박살을 내 버리고 여러분이 정체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밀어내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어서어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재촉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데라가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여러분의 신앙의 순례 길은 자꾸 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데라는 속히 죽어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행진을 방해하는 더러운 나의 온갖 죄와 세속의 더러움과 내가 집착하고 중독되어져 있는 모든 데라들은 하루속히 털어 버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우리는 하란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데라가 철저하게 죽지 않으면,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 말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왔던 세상의 힘들과 우리의 옛 사람의 습성들을 철저히 극복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결국 우리의 신앙의 골방에까지 치고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옛 것들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털어버린 듯하면 또 붙어 있고 털어버린 듯하면 또 붙어 있는 것이 우리의 데라입니다.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이 하란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 그들이 이방 신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시지요?(창 35:1‐2)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이방 신상들을 지닌 자들이 있었습니다.(수 24:23)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붙들고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박살낼 수 있는 이방 신상들을 여전히 몸에 지니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매일 아니 매 순간 매 순간 혹시 우리에게 여전히 우리의 옛 육신의 것들이 남아있지 않은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벧후 2:20) “20 사람들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데라들을 죽이지 않고 끌고 다니다보면 갈대아 우르보다 더 타락한 하란에 정착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야말로 처절하게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를 부추기는 세상의 힘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새로운 생활양식인 신앙생활은 과거의 부끄러운 것들을 쓰레기처럼 내던져야 할 뿐 아니라 일단 내 버린 쓰레기들을 다시 긁어모으지 않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게 되면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됩니다. 믿지 않는 부모나 믿지 않는 자식 믿지 않는 남편이나 믿지 않는 아내에게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게 주님께서 주시는 칼입니다.
(시 69:8‐12) “8 친척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자녀들에게마저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9 주의 집에 쏟은 내 열정이 내 안에서 불처럼 타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욕하던 자들의 모욕이 나에게로 떨어집니다. 10 내가 금식하면서 울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망신거리가 되었습니다. 11 내가 베옷을 입고서 슬퍼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게는 말거리가 되었습니다. 12 성문에 앉아 있는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술에 취한 자들이 나를 두고서 빈정거리는 노래를 지어 흥얼거립니다.”
이 현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인해 아비와 어미와 자식과 전토와 집을 버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거룩의 완성과 가나안 입성이라는 대 목표를 바라보며 버리고, 쳐 가야 할 것들을 열심히 쳐 내며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계속해서 떠나는 신앙의 여정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내가 주(主)가 되어 나보다 힘센 존재를 달래어 나에게 필요한 복을 얻어 챙기는 유치한 무속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렇게 그러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전달해 주는 자로서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 성경공부 때 공부한 것처럼 내가 생명의 떡을 먹은 자로서 작은 생명의 떡들이 되어 세상에게 먹혀 또 다른 생명의 떡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새 창조에 작은 예수의 역할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문 2절 말미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는 어구는 직역을 하면 ‘너는 복이 될지라’입니다. 오늘의 이 짧은 세절의 본문에 ‘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아브라함 자신이 ‘복’이 되어 복을 상실한 다른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먹도록 내주어 그들 또한 ‘복’이 되도록 만드는 복이었던 것입니다.(갈3:8) 그 삶이 바로 천국의 삶이요, 그 삶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나를 죽여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 그렇게 이 세상의 복이 되어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사는 삶은 반드시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세상의 힘인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이라는 내 소유가 하나님과 이웃에게 먹히고 나의 사랑이 나의 소유에서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직접 당신의 나라인 본토와 당신의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목숨을 걸고 순종하심으로 결국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전체 신앙의 여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 삶이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동안에 미리 그림으로 보여 졌던 것이고 그 삶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가 당연히 그리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힘들을 놓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며 그 삶이 이 땅에서는 손해를 보는 삶처럼 보이지만 그 삶은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천국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지금부터 한 이 십여 년 전 영화중에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이차 대전 중에 중국 상해에 살고 있던 영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일본군의 포로로 온갖 고난을 다 겪는 그런 내용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쯤에 로마의 콜로세움과 같은 거대한 경기장에 그 포로들이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가구들과 보석들과 자동차들이 가득 차 있고 그 포로들이 자신들이 예전에 누리던 그 보물들을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거에는 그러한 세상의 보물들이 가치가 있었지만 이제 포로가 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그 보물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냥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보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으로 상징된 세상의 힘들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포로로 잡아가시는 그날에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들입니다. 그러한 쓰레기들 모으느라 여러분의 시간과 힘을 소비하지 마세요. 많이 나누어 주시고 오히려 여러분의 손해를 감수하시면서 다른 이들에게 복을 전해 주시는 진짜 ‘복 덩어리’들이 되세요. 여러분 자신이 복입니다. 거기에 무슨 복을 더 얹고 싶으세요. 그건 나 자신이 복 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복들로 나를 채우고 싶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복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먹히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모함을 당하고 누명을 쓰도 억지스러운 대우를 당하고 그럼에도 그들을 감싸 안고, 용서하고, 섬기는 것은 그야말로 고통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그 삶을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 복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면 이 세상은 그 즉시 심판의 불에 태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세상은 온통 다 썩어 있는데 그나마 소금인 우리 때문에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온통 다 썩어 문드러져서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이 죄악의 세상 속에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소금의 삶, 복으로서의 삶, 떡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 세상은 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예루살렘 길을 행하며 의인 한 사람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지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그 성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썩어빠진 세상이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지 아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복으로, 떡으로, 소금으로, 빛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러한 소수의 용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삶을 절대 손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데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바보짓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해 줍시다. 손해 봅시다. 세상에서 바보가 됩시다. 떡이 됩시다. 복이 됩시다. 여러분은 이 우주를 존재케 하는 존귀한 이들입니다. 여러분의 그 귀한 일을 멈추지 마시고 세상의 복과 떡이 되셔서 그들에게 먹히세요. 그러나 명심하세요.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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