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강. 창세전 언약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요 19:31-37)
요 19:31-37=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을 일컬어 언약의 책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언약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을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간의 언약입니다.
이를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모든 역사는 여기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세상 역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를 역사는 묵시를 드러내는 도구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묵시가 역사를 침노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 역사에 온 것과 같습니다.
이를 일컬어 천국이 침노해 왔다고 합니다.
묵시가 역사를 침노해 들어와서 발생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언약의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창세전 언약을 역사 속에 펼쳐 보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언약의 책이라고 하였으니 모든 성경은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누구의 언약이라고 하였나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러면 언약을 지킬 주체가 누구인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고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세요.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일을 누가 행한다고 합니까?
여호와이지요.
그 일을 누가 지었다고 합니까?
역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여호와의 활동무대에요.
우리는 거기에 동원된 배우들이구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는데 인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언약을 위하여 사는 삶을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즉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한 시나리오대로 쓰임 받고 있단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올 때 각 자 받은 사역이 있어요.
하나님은 그 사역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예레미야를 봅시다.
렘 1:4-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야!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이미 네가 할 일을 정해 놓았단다!
너는 내가 정한 그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야!
내가 너를 열방의 선지자 역할을 맡기기로 하고선 이 세상에 보낸 것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내가 가라는 대로 가면 되고!
내가 하라는 말만 하면 되는 거야!
내가 다 알아서 너를 간섭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야! 더럽게 걸려들었구나! 라고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 당하여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도 그랬어요.
야! 네가 맡은 역할을 해!
그러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파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 안에서 나왔다고 했지요.
그럼 만물은 모두가 예수와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두가 예수님과 연관이 있어요.
독자적으로 사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목사이든 중이든 무당이든 점쟁이든지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오시자 귀신들이 발악을 하지요.
왜? 벌써 왔느냐고 난리를 치잖아요.
그러니 귀신들도 예수님이 일을 하시는데 필요한 자로 사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조차도 예수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마귀도 동원이 되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귀신들린 자가 되어서 예수를 죽이라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언된 것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을 응하게 하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이미 예언된 것을 이루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함” 입니다.
그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모든 일들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언행(言行) 하나 하나가 모두 계시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언된 것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란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시는 말씀이나 행동 하나 하나의 사건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길래 하는 것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한다는 말을 할까요?
특히 오늘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한다” 는 것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벌이에요.
그래서 가장 악독한 죄수들만 달아서 죽였어요.
형벌이 너무 가혹하고 잔인하여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그 어떤 죄수라 할지라도 십자가형은 시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주로 식민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거나 로마의 권세에 항거하는 자들을 처형 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함입니다.
주로 치안 유지 차원에서 군중들에게 로마의 권세에 항거하면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행하여지기도 했습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민란을 일으키는 자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적(逆賊)들을 달아 죽이는 십자가에 예수를 달아서 죽이라고 아우성을 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역적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조상대대로 전통으로 지켜오던 율법 신앙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유대 민족을 두 동강 나게 만들었으니까요.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자기들의 정통 신앙에 도전하는 이단입니다.
자신들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였어요.
그래서 가장 악독한 자들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벌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조차도 모두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용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다리뼈를 꺾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리의 뼈를 꺾는 것은 빨리 죽게 하고자 함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보편적으로 하루 이틀 아니면 사흘 만에 죽고 길면 일주일을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6 시간 만에 죽었습니다.
여기엔 엄청난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일반적으로 보면 6 시간 만에 죽을 수 없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6 시간 만에 죽게 하셨어요.
이는 6 시간이 갖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암튼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은 악형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악형을 당하게 할 때는 그것으로 백성들에게 경종을 울리게 하는 효과도 얻고자 함입니다.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것은 천천히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행하는 그 의미에 상반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래도록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놓고서 이단들은 이러한 처벌을 받는다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함에도 일찍 죽여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율법에 의한 처벌법을 사용하면 되어요.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있어요.
또한 참수 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러면 빨리 죽일 수가 있어요.
그럼에도 천천히 늦게 죽어가는 십자가 형벌을 택한 것은 예수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대교 교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종에 예수쟁이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은 좋았지만 막상 그 죽음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나타나면 안 되잖아요.
율법에 보면 안식일에는 죽은 자의 시체가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부정한 것이므로 땅에 묻지 않고 그대로 방치 해 두면 그건 불경한 것이 되어요.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날이 안식일 전날이에요.
이제 3 시간 후면 안식일이 되어요.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대로 두었다간 율법을 어기는 일이 일어나고 말게 생겼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빨리 죽여서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빨리 죽여 달라고 합니까?
이는 유대인의 제일 큰 명절인 유월절 이후의 큰 안식일이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유월절은 안식일 전 날에 이루어졌어요.
그 이튿날이 안식일입니다.
말이 그 이튿날이지 시간적으로는 3시간 밖에 없어요.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이 되면 부정한 것들을 없애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나 명절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시체가 보이면 안 되어요.
눈에 보이지 않게 다 묻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렸어요.
유월절 다음 날이 무교절이에요.
무교절이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입니다.
이 날에는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땅에 묻어야 해요.
이는 곧 무교절의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도 부정한 것이므로 그 시체를 묻지 않고 보이게 하는 것도 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나무에 시체가 달려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교절이 오기 전에 빨리 치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유월절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어서 죽었어요.
그러므로 유월절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특히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유월절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찾을 수가 있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오늘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을 때의 모습을 가지고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을 시켜서 계시사적 의미를 살펴볼까 합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은 정월 14일 날 해질 때에 죽었어요.
출 12: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레 23:5=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구약의 유월절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약 1500년 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5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도 정월 14일 해질 때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월절 절기를 통해서 계시되어진 약속의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통해서 계시된 메시야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대속의 메시야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 속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백성들이 살아나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신 죽어주는 분은 신약에서는 주(主)라고 해요.
여기서 주(主)에 대하여 살펴보고 갑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대신 죽어주신 분이란 말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고엘”이라고 하는데 이는 채무를 대신 담당해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담당해 주신다는 말은 나를 대신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나와 하나란 말이에요.
주님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주님이란 말이에요.
이걸 한 몸이라고 합니다.
주(主)란? 그냥 섬기는 개념의 주가 아니에요.
우리는 보통 주님 그러면 섬기는 것으로 이해하잖아요.
주님은 저 쪽에 계시고 우리가 이 쪽에서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마치 제사를 지낼 때 조상신은 제사상 너머에 있고 우리는 조상신에게 절을 하면서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많은 분들이 주님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으면서 섬기고 있어요.
이건 우상 숭배적 섬김이에요.
예수는 우리가 섬기는 분이 아니에요.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은 저쪽에 계시고 우리는 이쪽에서 섬기는 그런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러면 타자(他者)가 되어요.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오셨어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체란 한 몸이에요.
그럼에도 수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섬기듯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 맞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어서 하나 되어 사는 분이에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분은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지 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믿을 대상은 예수님이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아요.
아버지는 죄인과 직접 상대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들하고만 상대를 해요.
이걸 중보자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면서 내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아들을 믿는 것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대속주)”이 되어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나”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당신은 나와 한 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나의 주시여!”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주(主)”라는 개념이에요.
개념을 잘 정리하세요.
무식하게 주여 삼창 하지 마시고,,,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고 시키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대신 손 걷어 부치고 죽으신 분이에요.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걸 잘 이해하세요.
유월절 양이 뭔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어준 제물이잖아요.
그래서 각 사람마다 유월절 양을 잡았어요.
한 집안을 대표해서 양 한 마리만 잡지 않고 그 집안 식구 수대로 잡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각 자의 대속제물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진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의 내 죄를 속량하는 대속주(代贖主)라는 것을 믿는다면 구약의 유월절 양과 같이 각 사람의 죽음으로 맞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더 살펴봅시다.
유월절 어린 양을 해질 때 죽었어요.
그럼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그 시간에 죽어야 해요.
그래야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서 계시된 그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과 다른 날이나 다른 시간에 죽었으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예언된 실상이 아니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에요.
세례요한은 분명하게 예수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공포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반드시 1500년 전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그 시간에 죽도록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잘 아시기 때문에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그 날을 맞추어서 살았어요.
요한복음 7장을 봅시다.
요 7:2-8=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유대로 가소서…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형제들이 유월절 6개월 전인 초막절에 형이 진짜 메시아라면 이런 시골에 있지 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당당하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거부하십니다.
이는 자신은 초막절에 제물이 아니고 유월절의 제물로 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일 년에 3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했어요.
유월절(무교절, 초실절)과 칠칠절과 초막절(나팔절, 속죄일)이에요.
이걸 편의상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 절기라고 합니다.
이건 율법으로 정해 놓았어요.
유대인의 남자들은 이걸 어기면 율법을 어기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가 되면 모든 일을 중지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초막절에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올라 왔을 때 짠~! 하고 한번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를 영웅 만들고자 하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영웅 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죽으러 왔어요.
한 알의 밀알로서 많은 열매를 얻고자 오셨어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코자 오셨어요.
초막절은 가을 절기로서 씨를 뿌리는 절기가 아니고 곡식을 거두는 절기에요.
초막절은 장차 예수님의 재림을 담고 있어요.
곡식을 거두는 재림이 되려면 먼저 씨를 뿌림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씨 뿌림의 절기가 유월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들이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올라가라고 하자 거절 하였던 것입니다.
싫다고 거절 하였으면 올라가지 말아야 하는데 나중에 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갔어요.
아니 싫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올라가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인가요?
이는 예수님도 유대인 중에 한 남자이므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자신을 드러내라고 할 때는 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유대인 남자로서는 율법을 지켜야 하므로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앞서서 형제들과 나눈 대화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이 말했어요.
하지만 초막절에 만천하에 드러내 놓고 활동하셨어요.
그것도 제사장만이 할 수가 있는 일들을 행했어요.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쳤단 말입니다.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의 이러한 모습은 참람한 것이에요.
이건 율법을 정면으로 범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제사장들만이 할 수가 있는 고유권한이에요.
그런데 일개 촌 놈이 그 권한을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모습은 종교지도자들 눈에는 시건방지기 이를 데가 없는 행위에요.
참람 죄가 되어요.
자연히 종교지도자들 눈에 예수님은 가시처럼 보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종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합니다.
요 7:43-45=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그런데 종들이 가서 예수를 붙잡아 오지 못했어요.
그 이유를 성경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예수님이 죽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초막절에는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아 주신 것입니다.
그 후에도 또 잡으려고 하였으니 그 때도 번번이 실패하였어요.
여러 번 시도 했으나 그 때마다 성경은 “때가 아니므로” 라고 합니다.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 모두가 예수님이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죽을 때가 정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곧 유월절이에요.
예수님은 아무 때나 죽을 수가 없어요.
정한 때가 있어요.
그 정한 때가 바로 유월절인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이 어떤 자들인가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쥐도 새도 모르게 해 치울 수가 있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예수를 잡지 못한 것은 아직은 예수님께서 죽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죽여야 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쥐락펴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낸 것도 하나님이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도 하나님이세요.
죽고 살리는 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세요.
예수를 보낸 것도 때에 맞추어서 보냈고,
예수를 죽이는 것도 때에 맞추어서 죽여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러므로 인간들이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꽝이에요.
반대로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면 인간들이 하기 싫다고 하여도 하게 되어 있어요.
초막절에는 죽이고자 하였으나 막았어요.
그러나 반대로 유월절에는 안 죽이려고 하였는데 하나님이 죽이도록 하셨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진두지휘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정한 때에 맞추어서 예수님도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어요.
그 때를 하나님이 정하세요.
초막절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 이제 해가 바뀌고 유월절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으로 돌아가셔야 할 때가 이르자 이제 스스로 죽음의 길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젠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날 잡으라고 나섭니다.
요 12: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지요.
이는 곧 사명(使命)을 완수하고 아버지께 갈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는가 하면 높이 달려서 죽는다고 합니다.
왜? 높이 달려서 죽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끌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들을 내게로 이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영광이란? 한 알의 밀알처럼 죽는 것입니다.
왜? 죽는 것이 영광입니까?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자기 백성들을 전부 하늘로 이끌어 올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땅에 속한 자들을 하늘에 속한 자로 거듭나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즉 죽은 자를 살려 준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큰 영광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는 것은 초막절에 형제들이 권유할 때와는 사뭇 다른 행동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죽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요 13:1-3=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때가 이른 줄 알고 죽을 준비를 하십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시점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하신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1500년 전에 유월절 절기로 약속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500년 전에 양이 죽던 그 날인 정월 14일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절 때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잡고자 하여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마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월절 양으로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나서 하고자 하여도 그들의 마음을 격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킵니다.
흔히들 최후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이 때는 양을 잡지 않고 떡과 포도주로 하십니다.
예전에 하지 않던 모습입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유월절이 되면 반드시 양을 잡고 그 고기를 먹어야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양 고기 대신에 빵을 가지고 자기 몸이라고 하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곧 유월절 양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십니다.
이는 과거에는 양의 피로 죽음에 재앙이 넘어 갔지만 이제는 내 피로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제 죽음이 넘어가는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양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함은 이제 언약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발랐어요.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그 동안 율법으로 그림자로 지켜 오던 유월절을 실상으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마음에 품은 일을 진행하라고 합니다.
이건 그 동안 붙잡아 두었다가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에게 결제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쏙 들어가서 예수를 팔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파는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눅 22:1-7=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5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가룟 유다가 대 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어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기는 죽여야 하겠는데 명절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득 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로 인하여 민란이 일어 날까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예수를 죽이는 것을 망설였어요.
만약에 예수를 죽여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화가 나서 민란을 일으키게 되면 로마가 소요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로마 군대를 파병하여서 예루살렘에 주둔하게 됩니다.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 술집도 생기고 술집이 생기면 자연히 창기들도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 아니라 창기가 들끓는 매음굴로 전락하게 되어요.
이건 막아야지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런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 것은 유월절 명절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막 14:1-2=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도 죽이고 민란도 피할 수 있는지 묘수를 찾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일단 민란이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유월절이 지나고 난 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명절이 지나고 난 후 사람들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조용해지니까 그 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였어요.
그래서 명절에는 예수님을 죽이지 말자고 서로 묵계하였던 것입니다.
이건 비단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빌라도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빌라도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죽이지 않고 놓아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요 19:10-16=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빌라도 네가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합니다.
너는 반드시 나를 죽이도록 선고하게 되어 있다고 알려 줍니다.
빌라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하였어요.
요 18:39-40=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더라”
이는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고자 하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너는 반드시 나를 죽도록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에는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서 죽어야 해요.
그래야 1500년 전에 유월절기로 약속 해 놓으신 것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예수도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일을 진행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해 질 때 잡았어요.
1500년 전 하나님은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죽을 시간까지도 정해 놓았어요.
출 12: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레 23:5= “정월 14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해질 때라는 것은 두 저녁 사이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두 개의 저녁이 있어요.
저녁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저녁을 두 부분으로 구분 한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저녁은 오후로서 낮 12시부터 6시 해 질 때까지 시작되는 저녁(Evening)을 말하고,
두 번째 저녁은 해가 떨어지고 난 후의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저녁(Night)을 말해요.
그러니까 첫 번째 저녁은 오후를 말하고, 두 번째 저녁은 해가 지고 난 후의 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질 때” 라는 말은 “두 저녁 사이”란 말입니다.
두 저녁 사이는 낮 12시와 오후 6시 사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낮 12시부터 오후 6시 사이인 오후 3시를 가리키는 것이 되겠지요.
그래요.
오후 3시가 해질 때에요.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1월 14일 오후 3시에 잡았어요.
이게 해 질 때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려면 오후 3시에 죽으셔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침에 죽거나 밤중에 죽거나 새벽에 죽었다고 한다면 1500년 전에 유월절 양으로 계시하신 메시야가 될 수가 없어요.
1500년 전에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그 시간과 같은 시간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이 맞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정확하게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그 시간에 운명하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눅 23:44-46= “때가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운명하시니라”
마 27:45-50=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제 구시에 운명하셨어요.
제 구시가 해질 때에요.
유대인의 시간은 우리 시간과 6 시간 차이가 나요.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구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유월절 날 두 저녁 사이인 해질 때인 오후 3시에 유월절 어린 양이 죽는 그 시간에 맞추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면서 내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이라고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그리고 구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삼시는 오전 9시 입니다.
막 15:25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막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예수님은 밤새워 재판을 받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에 죽으신 것입니다.
삼시에 달려서 구시에 죽으셨으니 6 시간 만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6 시간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 있어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6 시간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다 이루었다”고 선언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약속하신 것을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과 약속하신 뭔가요?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 속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겨나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자 이걸 창조 사건으로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천지(天地)를 창조 했습니다.
그럼 천지 창조 속에는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요.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 창조는 창세전 언약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셨다고 하셨어요.
다 이루셨다는 것은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6 시간을 달리셔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곧 창세기의 천지 창조를 엿새 동안 다 이루신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엿새 만에 했어요.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 하셨어요.
그러니까 천지 창조는 엿새 만에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천지 창조가 같은 의미를 십자가상에서 6 시간 동안 다 이루셨어요.
창세기 1장에서 엿새 만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6 시간 동안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과 같은 말이에요.
엿새 만에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천지 만물의 창조가 다 이루어진 것이나 6 시간 동안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룬 것이나 동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6 시간 동안 천지 창조를 하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이 천지 창조와 같은 성격을 담고 있어요.
같은 영적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천지 창조와 같은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얼 하셨나요?
두 강도를 갈라놓는 일을 하셨지요.
한 강도는 천국으로 보내고 한 강도는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하는 일을 하셨어요.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것과 같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갈라내고 채우는 일을 엿새 만에 하셨듯이 예수님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6 시간 동안 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께서 6 시간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 하신 일은 곧 천지 창조의 엿새를 축약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6 시간은 온 인류의 역사를 품고 있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를 역(逆)으로 말하면 인류 역사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고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인류 역사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해서 창조가 되었고 창세전 언약대로 다스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겨냥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창세기의 엿새 동안 일어난 창조 사건이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6 시간 동안 하신 일은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잘 이해하세요.
이제부터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사건은 성경의 무엇을 응하게 하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의 고통을 극대화 하여 죽이는 처형법이에요.
너무도 혹독한 형벌이라서 로마인들에게는 집행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았다고 했어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아주 극악무도한 자에게만 집행한 악형이에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는 것은 서서히 죽음에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므로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죽는 시간이 빨라도 하루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해요.
6 시간 만에 죽는 것은 없어요.
단 한 사람도 이렇게 빨리 죽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6 시간 만에 죽으셨어요.
통상적인 죄인들의 죽음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빨리 죽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6 시간 만에 죽으셨나요?
이는 6 시간 동안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살아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다고 했지요.
유월절은 안식일 전날이에요.
유대인의 안식일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하면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에요.
유대인의 하루는 일몰(日沒)에서 그 다음날 일몰(日沒) 까지입니다.
즉 저녁 6시부터 그 다음날 저녁 6시 까지에요.
그러니까 유월절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목요일 저녁 6시부터 그 이튿날 금요일 저녁 6시까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말하면 금요일 아침 9시에 달렸어요.
목요일 밤에 재판을 받고 금요일 아침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금요일 오후 3시에 죽으셨어요.
우리나라 시간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걸 유대인 식으로 말하면 오후 3시이면 앞으로 3 시간 후면 새로운 날로 바뀌는 시간이에요.
유대인은 우리나라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이 시작되는 시간까지가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후 3시에 죽으셨으니 3 시간만 지나면 유월절 다음 날인 금요일이 되고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3 시간 만에 나무에 달린 시체들을 빨리 치워야 합니다.
밤이 시작되는 6시 이전에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서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죽지 않고 있어요.
죽지 않고 있다가 그 밤에 죽으면 안식일에 시체를 방치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율법을 어기는 죄가 되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빨리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을 죽여서 시체를 치워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십자가에 달리면 보통 하루 이상 가야지만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나 두 강도들은 십자가에 달린지 6 시간 밖에 되지 않았어요.
통상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저녁 6시가 되어도 죽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불가능해요.
이건 유대인들도 잘 알고 빌라도도 잘 알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안식일에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말고 유월절 다음에 죽이자고 한 것도 다 죄수가 죽지 않을 것을 계산하여 안식일에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을 것을 염려 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반대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대로라면 예수님은 유월절 막바지 시간인 구시 즉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죽을 수가 없어요.
아직까지 6 시간 만에 죽은 죄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다급해 진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다는 것은 성공 했지만 이제 그 예수가 안식일에 달려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다급하게 로마 병정들에게 뇌물을 주고서 죄수들을 빨리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빨리 죽이는가 하면 산 사람의 다리뼈를 꺾어서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자의 다리를 꺾게 되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리고 가중이 되어서 호흡이 가빠져서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이에 로마 병정들은 살아 있는 두 강도들의 뼈를 꺾어 버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리를 꺾으려고 다가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미 운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시키려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유대인들에게 야~ 예수가 이미 죽었다고 확인을 시켜 준 것입니다.
두 강도들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데 예수님만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모인 무리들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죽었지!
모두들 의아해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빨리 죽은 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를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어떤 성경을 응하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유월절 양은 절대로 뼈를 꺾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민 9: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규례대로 지킬 것이라”
성경에서는 뼈를 진리로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빼내서 여자를 만들지요.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고 교회를 낳는 것의 모형이에요.
아담이 예수의 모형이라고 한다면 아담 안에서 나온 하와는 교회의 모형이에요.
그런데 하와가 아담의 뼈로 만들어졌어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로 세워졌어요.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그 어떤 것으로도 진리는 변할 수가 없어요.
즉 진리는 절대로 꺾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창세전 언약의 실체에요.
교회는 새 언약으로 낳아진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해요.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것은 교회는 하와처럼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아담의 뼈로 만들어졌잖아요.
그럼 교회도 예수의 뼈로 세워진 것과 같아요.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심은 절대로 꺾여서는 안 되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절대로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뼈가 꺾이지 아니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뼈가 꺾였더라면 유월절을 통하여서 예언하신 어린 양의 실상이 아니므로 그 예수는 가짜가 되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뼈가 꺾이지 않음으로서 유월절 양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이 예수야 말로 1500년 전에 유월절 양으로서의 예언 된 그 메시야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의 죽음과 의인의 죽음에 차별성이에요.
죄인은 죽음이 가두지만 의인은 죽음이 가둘 수가 없어요.
그러니 뼈를 꺾어서 죽게 한 것과 뼈를 꺾기 전에 죽은 것은 그 의미가 달라요.
시편 34편을 봅시다.
시편 34:19-22=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의인의 뼈가 꺾이지 않게 보호해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두 강도의 죽음과 다릅니다.
강도의 죽음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임입니다.
의인이란 죄가 없는 자를 말해요.
죄가 없는 자는 죽을 수 없는 자에요.
그럼에도 죽었어요.
이는 의인의 죽임이 아니고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이란? 죽을 수 없는 자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수 없는 자가 죽음으로서 죄인을 대속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의인은 죽으면 안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강도인 죄인들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두 강도의 뼈는 꺾게 하셨지만 예수님의 뼈는 꺾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은 곧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사망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만약에 사망이 예수를 이긴다고 하면 예수는 메시야가 될 수가 없어요.
메시야가 되려면 사망 권세를 이기는 자라야만 해요.
메시야는 사망 권세 바깥에 계셔야지만 사망 안에 가두어진 자를 끄집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게 하심으로서 이 예수가 바로 사망 권세 바깥에 계신 의로운 메시야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두 강도는 인간들이 죽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다.
야~! 이게 또 난해 한데!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죽음을 불러들이신 것입니다.
30절을 보세요.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머리를 숙이시니까 영혼이 떠나가지요.
이건 예수님이 죽음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사람이 죽어야 머리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셨어요.
머리를 숙였다는 것은 죽음을 잡은 자에게 나 이제 죽을게! 라고 부른 것이에요.
즉 이제 약속의 시간이 되었으니 내 목숨을 거두어 가라고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죽음아! 이제 와라 하시면서 머리를 숙이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망이 와서 예수님의 목숨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고 하셨어요.
스스로 버린다는 말은 목숨을 내어 준다는 말입니다.
사명(使命)이 다 끝나서 내어 주신 것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된 시나리오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였어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일을 6 시간 동안 하셨어요.
6 시간은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을 잡은 자에게 야~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의 일은 다 끝내고 아버지께로 가야 하니까 내 목숨을 거두어 가라고 하면서 죽음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5 시간 만에 운명하여도 안 되어요.
7 시간 만에 운명 하셔도 안 되어요.
반드시 6 시간 만에 운명 하셔야지만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창세전 언약을 다 이루심에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도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게 한 것도 다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경대로 하신 사건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의 죽으심은 창세전부터 계획이 된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계획된 일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측은지심으로 다가갈 문제가 아니에요.
창세전 언약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 성경을 응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응한다는 말은 계획된 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기뻐할 일이지 슬퍼할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때가 찬 경륜을 이루시고자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를 찌르는 자들과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찌르는 자들은 예수와 타인으로서 서 있고!
애통해 하는 자들은 예수와 연합된 자로 서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지(認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라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자각(自覺)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 피로 용서 받는다는 그런 차원의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는 우리 죄를 치다꺼리나 해 주는 도우미가 되어요.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도우미가 아니에요.
예수가 도우미로 전락하게 되면 예수와 나는 타자로서 예수와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요.
속된 말로 자기 맘대로 살고 주여 내가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가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자기 편리한 대로 살고 마치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를 자기 잘못을 면피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기껏 내 죄를 씻어주는 하인 밖에 안 되어요.
이건 마치 대통령 자식이 사고를 치고는 아버지 해결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대통령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아비인 대통령의 마음이 있어야 해요.
내 행동 하나 하나가 곧 아버지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자식은 대통령이라는 부모의 지위를 가지고 자기 잘못을 치다꺼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자기 잘못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도리어 누가 될까봐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아버지를 하나로 생각하고 살게 되어요.
아까 주(主)에 대하여 살펴보았잖아요.
주(主)란? 나를 대신 하는 분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까 예수를 주(主)라고 부른다는 것은 죄를 씻어주는 의미보다는 우리를 대신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해요.
연합이란 한 몸이란 말입니다.
한 몸이란? 같은 운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예수의 십자가를 자기 면피용으로 생각 할 수가 없어요.
도리어 십자가 앞에 서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일어나야 해요.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 할 때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냥 수학공식 외우듯이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내가 하나로 연합된 자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껏해야 내 죄를 사해주는 주술적인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러면 복음으로 자기 가치 챙기기 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목사들에게는 복음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가치를 챙겨주는 도구가 되어요.
또한 복음으로 지기 유익을 챙기는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자기의 죽음을 발견하지 못하면 십자가는 자기 욕망을 이루는 이용물에 불과해요.
이 시대 이러한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자기 사욕을 좇아가는 자들이 수두룩해요.
복음 안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교회에도 안 오고 설령 교회에 와도 봉사도 하지 않고 연보도 하지 않고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고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깡패 짓을 하는 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어요.
이러한 자들에게는 십자가는 주술이에요.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미신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사기에요.
거짓이에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믿음이라고 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와 한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12 제자들을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 누구 하나도 십자가를 주술적으로 자기 사욕을 쫓는데 이용한 사람들이 있는가요?
없어요.
모두가 하나 같이 예수님과 같이 버려짐과 죽음의 길을 걸어갔어요.
이건 이렇게 걸어가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걸어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성도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렇게 끌고 가세요.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그대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렇게 이끌어 가세요.
이렇게 성령의 이끌림을 당하는 자들은 복음 아는 것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거나 비판하고 심판하는 깡패 짓을 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깡패 짓을 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이는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들이 말을 빌리면 누가 복음 안다고 하면 먼저 가슴이 털컥한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거치는 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로 행세 한다는 것은 그 복음이 지식이란 말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죽은 것이에요.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정죄와 비판과 심판만 나와요.
왜냐하면! 지식은 곧 힘이고 힘은 곧 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안다고 하는 복음이 죽은 것이고 법이기 때문에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으로 생명의 냄새를 토해내지 못하고 죽이는 냄새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는 긍휼이 담겨 있고 애통이 담겨 있어요.
부모의 심정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애통이란? 그와 하나로 연합이 될 때 나타납니다.
애통은 마치 자식의 아픔을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아요.
부모와 자식은 타자(他者)가 아니라 하나에요.
부모는 자식을 한 몸으로 보아요.
부모들이 자식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생명을 자식에게 준 자로서의 아픔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생명을 주신 자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 볼 때 그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낳아 주셨습니다.
낳아 주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예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곧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란? 자기 부인이고 자기 비움이에요.
마지막으로 그럼 예수님의 피로 세운 세 언약을 믿는 성도는 어떤 자세로 사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 마치도록 합시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의 원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건으로 취소되는 일이 없어요.
구원은 우리가 지켜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켜 내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원함으로 예수님이 시작 하셨고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제가 왜? 그토록 창세전 언약을 강조하는 줄 아세요.
이게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존재론으로 출발하면 안 되어요.
그게 죄에요.
내가 사는 이유를 창세전 언약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해요.
이는 나로 살게 하는 것이 창세전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하여 내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예레미야를 예로 들어 보았잖아요.
예레미야가 힘들다고 나 안 할래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나 안 할래 라고 합니까?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 캐스팅된 배우는 자기 생각이 있으면 안 되어요.
자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어요.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대로 하면 되어요.
자기 생각을 하라고 드라마에 캐스팅하지 않았어요.
드라마를 위해서 캐스팅한 거에요.
배우가 먼저가 아니고 드라마의 시나리오가 먼저란 말입니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근거로 배우를 캐스팅합니다.
배우는 시나리오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나리오에 의하여 배우가 생겨난 것이 됩니다.
시나리오가 없으면 배우도 없어요.
시나리오를 위하여 배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내가 있기 전에 창세전 언약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존재케 하는 근거는 창세전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나의 존재에 근원(根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창세전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우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것을 혜택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사세요.
예수님의 혜택을 무시하지 마세요.
거기다가 자기 공로를 보태려고 하지 마세요.
그럼 예수님의 죽음을 모욕하는 것이 되어요.
죄란?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언약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그 언약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부(富)하면 부(富)한대로 언약으로 사시고!
빈(貧)하면 빈(貧)한대로 언약으로 사세요.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곤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형편과 처지를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태진아가 복음송을 불렀잖아요.
♬♬ 잘 살고 못사는 건 타고난 팔자지만
당신만을 사랑해요
영원한 동반자여! ♬ ♬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준 배역들이에요.
그러니 그냥 언약을 믿고 사세요.
언약이 나의 영원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나로 하여금 천국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배역이에요.
다 연기를 하고 있으니 잘 사는 역할을 맡은 자를 부러워하지도 마시고 또한 가난한 역할을 맡은 자라고 깔보지도 마시고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배역을 맡겼으면 열심히 거지 노릇하고 살다가 보면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리고 가니까 안심 하세요.
나사로가 거지로 산 것은 자기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나사로는 언약 때문에 거지 노릇을 하고 산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6 시간 동안 6 천년 동안 이루실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어요.
우린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그 구원을 받았고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역사라는 6 천년 속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그 구원 안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고 언약이 먼저임을 알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고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작정하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을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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