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II)
<기복주의>
(김성수 목사)
(엡 3:12)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지난주와 이번 주 두 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나아감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은 모두 그 분의 신적 기원과 구속사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번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신앙생활은 느낌이나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시작되고 성숙되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도 그러한 체험 지향적 신앙이 왜 위험한 것이며 아울러 그와 한줄기로 흐르는 기복 적 신앙이 왜 안 되는 것인가를 조금 더 공부하겠습니다.
(막 7:1-2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저 북쪽 끝에 있는 갈릴리 지방까지 원정을 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왔을까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 중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을 한 뒤 자기들에게 그러한 환난이 닥친 것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더 잘 지켜내기 위해 그 율법을 해석하여 더 많은 조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미쉬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세분하여 쪼갠 것을 우리가 탈무드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모세 오경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장로들의 유전인데, 그 장로들의 유전에 어떤 것이 있었느냐 하면 제사장들이 성전에 제사를 지내러 들어 갈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들어가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들에게도 확산이 되어서 일반인들도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 장로들의 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으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저들은 부정하게도 손도 씻지 않고 밥을 먹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들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인간의 죄 성을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처해진 상황이라든지 우리의 여건, 우리의 경험, 체험, 노력 같은 외부의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너희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분들이 신앙의 내용을 자기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경험을 했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로 신앙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적적인 체험을 하고 당면했던 문제가 해결이 되고 우리가 드렸던 기도가 응답이 되고 하는 것은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용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로만 따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내 기도의 응답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의 기도 응답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경쟁을 하게 되고, 내가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 당신이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를 가지고 우열을 가르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 같은 것들도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져 가고, 아주 파렴치하고 지저분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처럼 취급이 되어져서 어떻게 하면 자기 과거를 더욱 더 자극 적으로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까지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겨우 무좀 나은 것 가지고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셨다”라든지 겨우 동네 양아치 노릇 좀 한 것 가지고 “자기가 과거에 조폭 두목이었었다.” 라든지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들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내용은 그러한 밖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자기가 가진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으로 신앙을 정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이후에 더 자극적인 기적을 원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 날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러한 외적인 체험이나 경험으로 신앙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고 우길지 모르나 구원이라는 진정한 기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맞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돼, 예수를 믿으려면 곱게 믿어야지 무슨 기적이나 쫓아다니고, 체험이나 하려고 하고 그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주님, 저는 저런 자들처럼 엉터리 신앙을 갖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누가 되는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이 전혀 반대의 사람들 같지만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 둘은 똑같이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신앙을 정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내가 얼마나 큰 경험과 체험을 했는가? 이지만 다른 쪽은 내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교양이 있는가라는 자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한 행실을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냈는가? 우리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가?“ 그런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의하는 것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정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체험과 종교행위의 목록들은 우리의 목표지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를 선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으며 우리를 더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신앙해야 하는 것입니까?
(렘 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러했던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뜯어내고 새 마음을 창조해 내셨습니다.
(겔 36:24-28)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셔서 우리를 바꿔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늘을 맛보게 하시고 그 성령이 우리에게 율례를 행하게 만드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일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며 그 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 새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이제 착한 일만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마음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 안착하잖아요? 그 새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고전 2:9-16)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새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까지 알아서 그 예수님을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노력이나 선행이나 열심으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성령께서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렘 17: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표준새번역]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이런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그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향해 그들의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왜 기적이 필요하며 왜 자극적인 체험이 필요합니까? 그 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안 믿어지니까 자꾸 기적을 보려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려하고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왜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싶어 합니까? 그냥 교리 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방언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삼각산 기도원 같은 곳에서는 방언을 연습하고 가르치는 방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저 아래쪽에 있는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구역 예배 때 방언을 못하는 사람을 따로 갈라서 “할렐루야”를 가지고 방언을 연습시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신앙적인 우월감을 방언으로 뽐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웠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 은혜를 가슴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절대 누구에게 자기 신앙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아는 자가 어떻게 남의 부족함을 지적하고 정죄를 합니까? 신자라는 사람들이 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아무리 자기가 외적으로 가진 게 많다 하더라도, 성경도 많이 공부했고 성경도 많이 읽었고 교회도 오래 다녔고 봉사도 남보다 더 많이 했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남보다 내가 조금 나은 근거가 된다면 그건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못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들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으려고 방언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 분은 아직 멀어도 한 참 먼 분입니다.
칼빈이 방언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루터가 방언을 했나요? 어거스틴이 방언을 했습니까? 방언을 안 해도 예수 잘 믿고 천국 간다고요. 지금 방언이 있다 없다 에 대해서는 제가 논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을 제가 저의 주관으로 우길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종교에도 다 방언이 있고 종교적인 특별히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극단 적인 세대주의 자들처럼 “마귀가 주는 것이라는 둥”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고3 때부터 방언을 했었고 지금도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생전 배워 보지도 않은 중국말로도 방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 효용성에서는 제가 꼭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은사들의 목적이 뭐였습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4:12)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 교회에 은사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 은사로 우 열반으로 갈렸습니다. 은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와 조금 부실한 은사를 가진 자 특별한 은사와 부실한 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것은 조금 세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구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사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모두 헛것이다.“ 라는 것이죠.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그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그 것으로 교만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은사가 아니겠지요? 제가 한번 여쭤 볼게요. 이제 막 방언을 시작하신 분이 여기 계신 걸로 아는데 그런 분들 말고, 그런 분들은 지금 한창 신기하고 재미있고 자랑하고 싶으실 때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고, 그런 분들 말고 저나 저희 집사람처럼 10년 20년 방언을 해 오신 분들에게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어떤 유익을 주던가요?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오래 기도할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영적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잘 알아들으신다.’그게 정말 맞아요? 그럼, 사람 말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조금 덜 쳐주시는 기도입니까?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다가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방언으로 얼버무릴 수 있다.’ 그게 유익입니까? 어떤 유익이 있으세요. 제가 다 해본 겁니다. 제 경우에는 남들한테 자랑 할 게 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합니다.
(고전 14:6-15,19,27-28) “6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훈이나, 이런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8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방언을 사용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10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11 내가 그 말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이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도 나에게 외국인이 될 것입니다. 12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여러분은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그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13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 방언을 통역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14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이성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이 구절에서 많이 들 오해하십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센 기도라고 생각들 하십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이성, 내 마음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이성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그래서 나는 영으로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도 기도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주 메시지인 것입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보시다시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여러분이 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방언을 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교회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 넣어 주신 그 새 마음을 하나하나 까서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밝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기적이나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이런 방법입니다.
(욥 7:11-20) “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14 주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침 삼키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의 새 마음을 싸고 있는 옛 성품, 죄의 경향, 사륵스, 집착과 중독, 통제성향, 자기 방어 이런 것들을 깨 나가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가게끔 훈련되고 익숙해진 근육들을 다 풀어 버리시고 그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 침 삼키는 동안만큼이라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가 우리에게는 고통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밝게 볼 수가 없습니다. 욥이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 “전에는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뵙습니다.”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모두 다 그러한 과정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왜 신비와 기적이 필요합니까?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외부적인 것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성숙시키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똑똑하거나 멍청하거나 많은 신비한 체험을 했거나 못 했거나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마세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알게 되셨다면 그게 바로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공부한 것처럼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로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오셔서 하릴없이 죽어 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겨자씨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 겨자씨의 삶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체험으로 멋지게 남들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게 보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은사나 재능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숨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신비적인 체험이나 비상한 은사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숨겨진 겨자씨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사기의 사사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모자란 사람들로 세워졌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모자라 보이지만 성령이 임하시자 백전백승입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눅 13:18-19)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 들였느니라”
이 말씀은 에스겔서 17장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겔 17:1-10)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채색이 구비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고의 성읍에 두고 5 또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의 아래 있었더라 7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긴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발하고 가지가 퍼졌도다 8 그 포도나무를 큰 물 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9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실과를 따며 그 나무로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로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10 볼 지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이 에스겔서 17장의 내용은 바벨론과 유대와 애굽의 이야기입니다. 독수리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독수리가 포도 씨를 옥토에 심어 그 포도나무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붙어서 물을 달라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씨를 심은 독수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뿌리를 뽑고 말라죽게 만들어 버리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유대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범죄 하자 바벨론을 시켜서 유대를 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20대 왕인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정치인들이나 학자 같은 유대의 지식인들을 함께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때 잡혀 간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자기들 마음에 드는 시드기야 라는 왕을 세우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대는 바벨론에게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몰래 애굽에 원조를 구했습니다. 함께 바벨론을 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 하는 남 유대를 깨우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그 난국을 이겨내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에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시드기야와 유대를 멸망시켜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BC586년에 바벨론은 남 유대를 멸망시켰고 성전까지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겔 17:22-24) “2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 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이 구절이 겨자씨의 비유에서 인용된 구절이지요)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백향 목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백향 목 꼭대기의 가지를 꺾어 아래에다 심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꺾여서 심기운 연한 가지가 누구입니까?
(사 53:2)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시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거기서 끝입니다.
(마 24:29-30)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한 가지의 정체는 온갖 새들이 깃들 수 있는 엄청난 백향 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비우시고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오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모두 죽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감추시고 겨자씨처럼 연한 가지처럼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예수의 품안에 숨겨져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려는 시드기야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커다란 체험을 해서 “이 정도면 되나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을 부려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려 선행을 행한 것을 자랑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봐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게 되는 거야”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로 연한 순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자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그렇게 될 자들이 아니라 이미 그런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대로 살아내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면서 자기만 군계일학이요 청산의 낙락장송인 것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를 증명하는 데 쓰는 시드기야 같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권세와 힘으로 연약한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쓰는 바보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신비적인 체험이나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와 명예를 가지고 교회와 세상에 자랑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가지고 나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시험을 통해서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알아가게 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입니다. 우리는 꺾여 심기운 연한 나무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그 광야 40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요약하는 날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셨지요? 40일 내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시험이었나요? 그 시험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우리 인생이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지 잘 알게 되겠지요.
(눅 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2절에 “날 수가 다하매“라는 말이 있지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날 수까지 지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날 동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 보시면 ”성령에 이끌려서“시험을 당했다고 나오지요? 사탄이 시험하지만 성령이 이끌고 가셔서 시험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시험은 전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시험은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허락을 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40일을 굶주리시고 처음 받으신 시험이 어떤 시험입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합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우리 신자들은 우리의 힘과 노력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되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삶으로 시인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40일의 기간을 주셨습니다. 굶으라고 하셨습니다. 배가 고프시지만 하나님의 말씀, 그 명령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에서 인용하신 것이지요.
(신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절의 “예호바 페 모짜 콜“이라는 말은 ”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100%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 8:17-18) "17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신자들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신 이 인생길에서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안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시험에 낙방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 78:12-22)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20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22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시험을 받습니다. 유독 나만 다를 사람보다 늘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진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려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떠세요?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채우실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거기에 만족하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완전하게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자, 즉 복을 회복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러한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신 8:15-16)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예수께서 두 번째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면 시편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네가 다치지 않게 너를 수종들 것이다“ 하고 시험을 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답하십니다. 그 말씀은 신명기 6장16절에서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신 6:16-18)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 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맛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요?
(출 17:2,7)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7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발 한발 가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들은 모두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나 체험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다고요? 천만에요. 잘 보세요.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시험들을 하나하나 성공으로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시험들을 예수께서 완성시키셔서 우리 교회에게 통째로 선물하시려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다 통과하고 계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40년 광야의 시험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실패를 세례를 받으시고 40일간 시험을 받으시며 그들의 실패를 완성하여 교회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시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그냥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되는데 왜 굳이 시험까지 받아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 흠도 없는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험도 다 받으시고 이겨내시고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시험이 닥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 좀 마르다고 똑같이 “하나님은 안 계실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를 지키지 않으시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키실지 안 지키실지 시험해 볼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당연히 그 하나님께서 아들인 자신을 지키실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도 배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것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감옥에서 노래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험이 왕왕 닥치게 됩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신뢰해야지요.
마지막 시험이 마귀가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영광으로 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게 하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실 분입니다. 마귀도 그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왜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셔야 합니까? 상식적으로 ,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지지 말고 그냥 왕으로 등극해라“ 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꾸짖어 가라사대 안 됩니다“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사람의 생각이요 사람의 상식입니다. 우리도 자꾸 거기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시험 통과하지 않고 그냥 천국 보내주면 안 되나? 하고 투정을 부릴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천국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예수 님 생애 끝 날까지 계속된 시험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시험이 우리의 광야 인생 내내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온전하게 들어가기까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뭐 그렇게 심각해, 대충 대충 교회 빠지지 않고 선교나 가주고 헌금이나 잘 내 주면 되는 걸, 뭐 그렇게 심각하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다고 고민하는가?” 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 뭡니까? 우리는 십자가에다가 무엇을 박아 죽여야 합니까? 그 옛 몸, 죄의 경향, 내가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지고 습관이 되어버린 그 악한 힘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그거 안 하면 미칠 것 같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가난하게 살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 죄가 되어 죽어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를 매일 매일 죽여 가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없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skip하고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풍요의 신인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광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나안의 풍요를 도둑질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전혀 어색함 없이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광야의 길인 것입니다. 그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광야의 삶 속에 신비와 기복이 웬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아까움 없이 버리며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하는 광야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그 분을 이용해서 기적적으로 소원을 성취하려는 시도가 웬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저 땅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오직 그 분이 가신 그 길을 그 분 안에서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당당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길입니다.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인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롤랑 조페 감독이 만든 감명 깊은 영화 미션을 보셨습니까? 전편에 흐르는 영화음악의 거장 엔리코 모리코네의 장엄한 음악과 시원한 화면이 압권이었지요. 그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한 선교사가 이과수 폭포로 떨어져 죽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은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1700년대 후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화라니 강으로 쏟아지는 이과수 폭포 위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올라갔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도 그 예수회 소속 선교사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가 과라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보에 하나를 가지고 맨발로 절벽을 기어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곡을 연주 합니다. 원주민들과 상면하는 자리에서 그는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니로)라는 노예 상인을 만납니다.
그 로드리고는 동생과 자기 애인과의 삼각관계로 싸우다가 그만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괴로워하던 멘도자에게 가브리엘 신부가 찾아옵니다. 그는 그 예수회 수도원에서 곡기를 끊고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신부는 그를 과라니 족 마을로 데리고 갑니다. 로드리고는 속죄를 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용병 시절에 입었던 갑옷과 칼 투구 같은 무거운 것들을 그물에 넣고 그것을 끌고 과라니 마을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원주민들에게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 영토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과라니 마을에 들어가 있는 예수회 신부들을 철수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조약을 합니다. 그 때 가브리엘 신부와 수사 로드리고는 포르투갈 정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신부는 원주민들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무저항의 행진을 합니다. 로드리고는 용병출신답게 다시 칼을 잡고 포르투갈 군대와 싸우지만 그들은 모두 죽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러 왔던 교황청의 추기경이 나중에 이런 유명한 대사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 명과 과라니 족의 멸종으로 끝났습니다만 죽은 것은 저 자신이고 저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힘입니다. 총칼로 재물로 명예로운 직업으로 우리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겨자씨의 모습으로 꺾어진 연한 가지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시면서 오늘도 나의 추잡한 인격의 한부분이 죽고 나의 고약한 습관이 죽고 나의 악한 생각들이 죽는 것으로 기뻐하시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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