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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9.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김성수 목사)

 

 

(계 14:6-13)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이제 14장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12장과 13장 그리고 14장 서두에서 교회는 이 땅에서 세상에게 지는 모습으로 가게 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 놓아야 할 만큼 세상과의 전투는 치열한 것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시켜 가신다는 것도 아울러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표를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매매도 할 수 없는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때로 너무나 교묘하게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는 뱀이 토해 놓는 물로 해를 입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의 오른 손으로 붙드시고 이끄셔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장이 바로 12장 13장 그리고 14장 5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14장 6절부터는 이제 그 마귀의 세력의 심판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 후반부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13절까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절을 보시죠.

 

(계 14:6)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6절은 ‘또 보니’로 시작이 됩니다. 장면의 전환이지요. 그리고 복음을 가진 다른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 ‘카토이케오’는 짐승에 의해서 미혹되고, 짐승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존재를 묘사할 때 쓰이던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의 ‘땅에 거하는 자들’에는 ‘카데마이’라는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구절이 10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만 다른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 나오는 ‘땅에 거하는 자들’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은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천사에 의해 복음을 전해 받을 땅에 거하는 자들은 지금은 땅에 속하여 있지만 앞으로 그 복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 올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을 ‘그들은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이라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들은 우리가 계시록 7장에서 본 단어들이죠.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그 단어들을 동원해서 묘사를 했었지요?

 

(계 7:9)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똑같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세상 끝 날까지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해 내신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가진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계 14:7)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복음이라는 것은 good news,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심판’입니다. 어떻게 이 ‘심판’이 복음이 될까요? 이 심판의 날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벌(永罰)로 들어가는 저주의 날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찬란한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복된 날이 되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실 것 같으세요? ‘영화 딥 임팩트‘에서처럼 ’이제 네 시간 후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해서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이 다 죽게 됩니다.‘ 이런 선고를 받으셨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의 삶만 추구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심판의 날이 두려움이요, 고통이요, 절망이요, 끝이지만 이 땅이 끝난 후에 새로 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우리에게는 그 심판의 날이, 이 땅이 끝나고 새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날이기 때문에 잔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복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그 심판을 알리는 천사의 소리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그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온 것이 너희에게 복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7절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 속에 기다리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마태복음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최후의 종말은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세계 3차 대전이나 핵폭발, 이렇게 예고된 종말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날은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고 그 날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아무도 오늘 우주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평소 때처럼 장가가고, 시집가고, 논 갈고, 밭 갈고, 장사하다가 갑자기 멸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AD78년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매몰이 된 폼페이의 유물을 본적이 있습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당시 로마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폼페이가 높이 3미터의 용암과 화산재에 그대로 묻혀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물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정말 죽음을 예견치 못한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 목욕하다 묻힌 사람, 창녀촌에서 발가벗고 죽은 사람, 부엌에서 밥하다 죽은 아주머니, 놀이터에서 놀다가 죽은 아이들, 심지어 아이를 낳다 죽은 산모까지,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다 화석이 되어버린 시체들을 보면서 심판의 날을 준비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최후가 어떻게 처참하게 끝이 날 것인가를 조금은 미루어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1815년 똑같은 화산 폭발로 12만 명이 묻혀버린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유적을 발굴하는 곳에서도 똑같은 모습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전부 일상생활을 하다가 돌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의 때처럼 노아의 때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 때 ‘허허’하며 손 털고 기쁘게 갈 수 있는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라고요?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라.’입니다.

 

어제 아침에 제가 좋아하던 선배님이 돌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았을 때 KBS 간판 개그맨이었던 김형곤 씨 하고 김미화 씨가 저를 인터뷰하러 왔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를 참 아껴 주셨는데 어제 갑자기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가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답니다. 아무도 그 분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본인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렇게 순식간에 닥쳐서 그 분의 숨을 끊어 놓았습니다. 이건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심판의 날도 그렇게 도적처럼 닥칠 것이지만 여러분의 개인적인 종말인 죽음도 그렇게 도적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떠 날수 있도록 오늘을 준비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세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죽음도 심판도 여러분에게는 복된 소식,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계 14:8)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둘째 천사가 등장을 해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외칩니다. 바벨론은 우리가 공부했다시피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너졌다’(에페센)은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에 이미 단번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할 때도 사용되지만 ‘반드시 일어날 미래의 사건’을 기록할 때도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그것을 헬라어에서는 ‘예변(豫辨) 적 과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8절에서 그 마귀의 세력은 이미 십자가 앞에서 무너졌고 또 가시적이며 물리적으로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8절에서 그 바벨론, 마귀의 세력이 모든 나라에게 먹인 진노의 포도주가 10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계 14:10)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마귀가 먹이는 진노의 포도주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세상 사람들을 미혹해서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마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 세상은 하나님과 마귀가 싸우는 곳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마귀는 피조물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싸울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지금 하나님의 작정 하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마귀를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구원이란 것은 ‘마귀로부터의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로부터의 구원이라 했습니까? saved from what?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마귀의 세력과 그 마귀를 추종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죄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제외된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거기 ‘먹이다’‘페포티케’라는 동사가 과거 완료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되는 자들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predestination(예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셋째 천사가 등장합니다.

 

(계 14:9-11)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 구절들을 잘 보시면 9절의 ‘짐승을 경배하고’‘손에 표를 받고’는 현재시제입니다. 역시 11절에서도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우상에게 경배하고’‘표를 받는 자’‘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이게 모두다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 진행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고 있고 손에 표를 받고 있으며 그들은 이미 지금부터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미 그들은 이 땅에서 심판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의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와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는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에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도 그 심판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2장 13장하고 논리적 충돌이 일어납니다. 분명 12장 13장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우리가 경제활동도 제약을 받고 많은 불이익 속에 노출되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는다고 지금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지금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시편 73편의 말씀처럼 오히려 죄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사업을 해도 자기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이 남고, 고난도 없고, 형통한, 반면에, 우리 성도들은 종일 재앙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고, 침 삼킬 틈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고 해 놓고, 세상은 지금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 본문의 내용을 잘 풀어서 설명해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롬 1:18-31)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를 시켜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신다는 말의 내용입니다)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5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26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27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두셨습니다.(이게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욕심을 따라 계획하고 도모하는 일이 모두 다 잘 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분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그렇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29절부터 잘 보세요.

 

(29-31절) “29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30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않은 줄 아세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림, 중상, 하나님을 미워함, 불손함, 오만함, 자랑, 악을 꾸미는 모략,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신, 무정, 무자비 이런 모든 것들을 행하면서도 왜 만족하지 못합니까? 왜 늘 불안해하죠? 왜 우울증은 더 늘어만 가고 왜 자살은 더 증가하며 왜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들은 더 늘어만 갑니까? 그 죄라는 것은 우리 인간을 파괴하는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행복한 것 같고 오히려 우리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약하게 보이고, 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 성도들의 속사람은 날로 강건해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의 속사람은 그 죄로 말미암아 매일 매일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절대 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스러워할 때 애굽을 고쳐서 이스라엘에게 주시지 않고 거기서 꺼내 오셨는지 아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애굽은 수시로 왕조가 바뀌던 나라였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는 기마 민족인 힉소스 민족이 애굽의 왕조였습니다. 애굽의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헬라의 톨레미 왕조였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를, 그렇게 쉽게 왕조가 바뀌던 애굽의 왕으로 만드시고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예 애굽을 주셨어도 되지 않습니까? 애굽은 나일 강이 흐르는 삼각주 땅입니다. 곡창지대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땅입니까?

 

거기는 물을 한바가지 가져다 부으면 쌀이 한 말이 늘어나는 곳입니다. 부추와 고기와 마늘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을 거기서 끌어내다가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나안에다 쳐 넣으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물을 열 바가지 부으면 쌀이 열 바가지 더 나는 곳에서는 사람이 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똑같은 환경에서 누가 나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밤에 자다가도 옆 집 사람이 바가지 들고 나가면 자기도 따라 나가서 옆 집 사람보다 한 바가지 더 붓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죄인들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건 심판입니다.

 

그런데 퍼부을 물이 없어서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은 씨를 뿌려놓고 마음 편히 잠이 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셔야 농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굶어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누구를 시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욕심 부리지 않고 남들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계 14:11)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 우리가 스스로 우리들의 인생에 만들어 놓은 그런 우상을 좇고 여전히 이 세상의 헛된 힘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밤낮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전진해야 하고 계속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진리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심지어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행복하게 기쁘게 하루하루가 가는 것을 감격 속에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하루하루가 가는 것이 너무나 불안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가진 게 별로 없어도,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하루하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진짜 복과 진짜 상급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며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많이 가졌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이 가는 것이 불안하십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여러분은 ‘이제 우리 주님 만날 날이 하루 가까워졌구나.’하고 기대에 부푸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살날이 하루가 줄어들었구나.’하고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약삭빠르게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을 이용해서 여러분보다 더 편안하고 더 풍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지금 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절대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들의 삶은 인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겸손하게 섬기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 보여도 거기에는 진정한 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완성이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커다란 쉼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힘이 들게 보인다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신다는 증거라고 했지요?

 

(호 2:6-7) “6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시나무로 그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 7 그가 정부들을 쫓아다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찾아다녀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이제는 발길을 돌려서 나의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좋았다' 할 것이다."

 

우리 죄인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은 모두 다 헛되고 악한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이 그러한 것을 도모하고 계획할 때는 반드시 막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히 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여기서 ‘징계’라고 번역이 된 ‘파이데이아’는 ‘자식 만들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 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훌륭한 자식으로 만드시는 프로그램 속으로 집어넣으신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문 사립학교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엄격한 교육과 체벌’입니다. 그 명문 사립학교들의 졸업생들이 그 학교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hell’‘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그 과정을 다 견디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돈을 싸 짊어지고 가서 자식들을 그 학교에 못 보내서 안달을 합니까? 비록 그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지옥 같은 교육과 훈련을 통과해야 하지만 그 과정을 다 통과하고 난 뒤에는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원으로 탄생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바로 그 ‘파이데이아’‘자식 만들기’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때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일입니다. 그래서 힘들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서 하나님의 자식 만들기 과정 졸업학점을 채우는 날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 116:15)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그 혹독한 과정을 다 이수하고 졸업을 하는 명문학교 학생들의 졸업식이 그토록 축제 속에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의 훈련과정을 다 마치고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서 하늘로 입성하는 날은 천군 천사들이 환호하며 우리의 이름을 연호 하는 그런 감격스러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더욱 명확하게 확인이 되실 것입니다.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그 죽음이 복이랍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의 수고가 끝나고 드디어 쉼이 허락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복이 된답니다. 저는 참 그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불러주신다면 기쁘게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염치가 없어서 그렇지, 지금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땅에서 우리가 채워야 할 졸업학점을 채우게 되면 모두 다 하나님 앞으로 불려 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은 왼편의 염소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오른편의 양이 될 것입니다. 왼편의 염소들은 세세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고 오른편의 양들인 여러분은 그 때부터 세세토록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존귀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사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하시면서 존귀한 신분으로서의 삶을 지금부터 살아 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는 죄를 멀리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왜? 우리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여기서부터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육신도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잘 간수하세요. 여러분의 육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술, 담배, 마약 이런 해로운 것들은 금하도록 하세요. 그게 “죄다 아니다“를 떠나서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시간을 방탕하게 허비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예전에 개그맨인 제 친구 생일날 유명한 선배 개그맨이 와서 자기의 무용담을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술만 먹으면 필름이 끊겨서 늘 아무 데서나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제 친구 하고 둘이 술을 마시다가 헤어져서 분명 집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잘 개켜놓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롯데백화점 정문 앞에다가 옷을 다 벗어서 개켜놓고 양말도 벗어서 신 발 안에다 넣어놓고 속옷만 입고 자고 있더래요. 술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폭음을 하면 그 다음날까지 영향이 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건강도 해치지만 귀중한 우리의 생명인 시간까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립니다. 그건 다 놓치는 시간들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아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도 아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열심히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서울 대 안에는 많은 경찰들이 무전기를 들고 공공연하게 학생들을 감시하고 다녔습니다. 두 셋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경찰이 옆에 붙어서 그 내용을 세세하게 듣곤 했습니다. 가끔 써클 친구들과 써클 룸에서 시국에 관해서 토론을 할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는 무조건 붙잡아 갔습니다. 그렇게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거기 있던 친구들이 대부분 창문으로 뛰어 내리거나 화장실로 도망가거나 해서 화를 모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의자에 그냥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게 멋있는 건 줄 알았습니다. 경찰들이 잡으려고 하면 ‘놔라, 내 발로 간다.’ 그러고는 저만 관악 경찰서에 끌려가서 실컷 두들겨 맞고 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까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 마가의 다락방에 가서 잠깐 인사만 하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립니다. 그 땐 참 그게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그 병사들하고 맞서지 못하고 도망을 다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몸을 아껴야 합니다. 보약이 필요하신 분은 보약을 드세요. 비타민이 필요하신 분은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십시오. 운동? 열심히 하세요. 여러분은 건강하게 하셔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거룩을 챙기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지 말고 그 때는 당당하고 기쁘게 그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그런 실력자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영혼을 파먹는 죄를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고 여러분의 생각도 더러운 세상 것들로부터 지켜 내십시오. 그게 이 땅에서 여러분이 유일하게 하셔야 할 일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더 가면 우리에게 영원한 쉼이 옵니다. 조금씩만 더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그 날까지는 우리 아버지의 혹독한 양육 훈련을 잘 이겨내자고요. 여러분은 존귀한 분들입니다.

 

(계 14:12)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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