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바울, 바울...
(김성수 목사)
(롬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우리는 지난주에 성도의 신분을 축약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어구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라는 존재의 종으로 살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에 선배 목사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그 선배님은 한국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분입니다.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사교육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아들 녀석이 참 착하고 말도 없이 공부도 잘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시무룩하게 앉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아빠가 왜 그렇게 시무룩하냐고 물었더니 아이 왈, 학교에서 누명을 쓰게 되어서 억울하다고 하더랍니다. 학교에 껄렁껄렁한 아이들이 있는데 이 목사님의 아이가 착하고 공부도 잘하니까 시험을 볼 때마다 항상 이 아이의 뒤에 앉아서 답안지를 베껴서 자기들끼리 돌려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아이는 그 아이들과 공범으로 몰렸고 학교 급우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 껄렁한 아이들은 수시로 이 아이를 협박하면서 자기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그래서 아이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꿈을 꾸었는데, 그날도 아이가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정이 다 되어서 아버지는 아이의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이미 불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학교 화장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더라지요.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학교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장실에 자기 아들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껄렁한 아이들에게 맞아서 죽은 것입니다. 아이의 머리는 변기에 박혀 있었고 아이는 죽어가면서 손가락에 묻은 피로 화장실 바닥에다가 아빠에게 편지를 써 놓았습니다. ‘아빠 저는 괜찮아요. 이 아이들을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다가 잠에서 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이 깨어서도, 왜 그런 못된 녀석들 때문에 착한 내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큰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성도의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당신의 사랑을 말씀과 경험을 통해 배워가며 그 한없는 사랑 앞에서 없음의 자리로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바울 사도의 이름이 사울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의 이름이 그의 사역의 현장에서 바울로만 불려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보수주의 신학계의 거장인 F F Bruce는 당시 고대시대의 로마시민들은 이름을 세 개씩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세 개 중 마지막 이름을 바울이 선택해서 쓴 것이라고 별 의미도 없는 의견을 내 놓았고, 최갑종 교수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히브리 식 이름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로마식 이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을 시작할 때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쓴 것뿐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실제로 바울이 회심을 한 이후에도 한동안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이방으로 파송 될 때부터 바울로 이름이 바뀝니다. 김세윤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단순히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을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라면 그가 그의 히브리 배경을 이야기 할 때에는 사울이라 써야 맞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히브리 배경에 대해 진술을 할 때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스스로 써 본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사울로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그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편지의 맨 처음을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어로 보면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전부 시작이 ‘파울로스,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를 ‘파울로스’로 시작을 함으로 마치 모든 편지의 내용을 ‘파울로스’라는 한 단어로 축약을 하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씁니다. 그의 편지의 구조는 전부 ‘내가 지금부터 설명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파울로스다’이런 뉘앙스를 풍깁니다. 반면에 베드로의 서신이나, 요한의 서신, 유다의 서신 등은 바울의 서신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의 서신을 항상 ‘파울로스’라는 단어로 시작할 때에는 어떤 이유가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올바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바울을 부르시는 사건 속에 들어 있습니다.
(행 9:4)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2:7)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6:14)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 이니라”
바울은 유일하게, 예수님과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던 시절의 자신을 묘사할 때만 자신의 이름을 사울이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사울로 부르셨거든요.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라는 이름은 날 때부터 바울이 갖고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큰 아이 이름이 날 때부터 ‘Joshua’ 와 ‘영민’이었던 것처럼 히브리 태생의 로마인 바울도 두 개의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사울아 사울아’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사울’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여 부르셨고, 바울도 그때를 회상할 때에만 자신을 사울로 표기를 합니다. 왜 주님은 그를 사울로 부르셨을까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그러면 일단 사울이라는 이름의 배경을 한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던 사람이 누굽니까?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은 누가 뭐래도 베냐민 지파 사람 중에서 가장 출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힘의 상징으로, 부의 상징으로,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역사서에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이름 중 가장 인기 있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라는 왕은 하나님이 택한 왕이 아니라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인간적인 왕을 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세운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수려했다고 합니다.
(삼상 9:1-2)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취향입니다. 키가 어깨 위로 크다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쓰던 관용어로서 외모 뿐 아니라 성품이나 능력에 있어서도 아주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힘의 원리 속의 죄인들은 그런 자들을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힘의 원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 자체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본주의 속의 힘의 원리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과 능력과 지혜, 그리고 수려한 외모를 힘과 가치로 여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울이라는 이름을 선호했던 것이고 바울의 부모 또한 바울이 그러한 자로 자라 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습니다. 사울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었던 것입니다.
(빌 3:5-6)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게 바로 전형적인 사울들의 삶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를 동원하여,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유익과 위상과 가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짐승들을 살려서 잡아 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렇게 한 이유를 근사하고 장황하게 떠벌립니다. 전쟁법이나 인간의 도의에 의해서도 그렇게 다 진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진 짐승들은 하나님 드리려고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그의 말만 들으면 하나님이 무식하고 잔인하며 생각도 없는 분이 되고, 사울이 똑똑하고 현명하며 인정도 있는 사람이 되지요? 하나님은 그 사건으로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지 자신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서 기특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인 사울 대신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 이새가 사무엘 앞으로 데리고 오지도 않았던 사람입니다. 너무 작았고 어렸으며 어디를 보아도 왕의 자격이 없는 자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형들이 참전을 했을 때 막내 다윗은 집에서 양을 치며 심부름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다윗이 징병의 대상으로도 부적합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형들 도시락을 가지고 전선에 갔다가 골리앗의 조롱을 듣고 그와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 사울이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히지요? 그때 그 옷이 너무 커서 다윗은 갑옷도 못 입고 전투에 출전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세운 왕은 큰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세운 왕은 작은 자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자기와 싸우러 나온 다윗을 보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넌 아직 얼굴이 붉은 어린아이가 아니냐? 네가 나를 개 취급하느냐?’하고 조롱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전사로서의 면모도 갖추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에게 ‘난 내 하나님의 이름만 믿고 나간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싸웠던 것입니다. 그게 신자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작은 자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덮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세상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골리앗이 다윗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모양의, 연약하고 작은 다윗에게 성령이 임하여 대적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이며 구속사 전체에서 보여 지는 성도의 존재 양식인 것입니다. ‘약함이 곧 강함이다’세상은 절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전체의 내용이 ‘바울’이라는 이름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라틴어에서 기원한 단어인데 양이 적거나 수가 적을 때, 그리고 크기가 작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철저한 유대 주의자였습니다.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큰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실체를 강조하여 폭로해 버리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순간 그의 삶이 바울, 즉 작은 자의 삶으로 끌려 내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그가 자신의 자아인식을 어떻게 했나 보세요.
(갈 1:13-14)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회심 이전에 하나님을 ‘지나치게’ 믿었다고 할 만큼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더욱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던지 자신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큰 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고전 15:8-9)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합니다.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그의 자아인식은 이렇게 변합니다.
(엡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이게 사도 바울의 자아인식이었습니다. 그건 괜히 겸손한 척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은혜와 사랑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실체가 그렇게 자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년에는 어떻게까지 변하는지 보세요.
(딤전 1:15-16)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로가 인정되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신 같은 자를 구원하신 것은, ‘이런 사람도 구원하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자신 같은 자를 구원해 주신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사도 바울의 자아인식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세요? 사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 갈수록 자신이 작은 자이며, 티끌에 불과한 자라는 것을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인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서신의 첫 단어가 ‘파울로스, 작은 자’인 것입니다. ‘난 지금까지 큰 자의 삶을 추구하며 내 자신의 힘과 지혜와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려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난 그분의 은혜, 그분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작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깨닫는 것이 복음이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파울로스’라는 단어 안에 전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는 자신이 작은 자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이 있어야 할 자리로 내려가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큰 자로 착각하고 있던 자가 작은 자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수긍하고 인정해가는 그 과정 속에 은혜의 왕 노릇이 실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피조물은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이 작음에 부어져 진짜 큰 자와 연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큰 자의 삶을 추구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자 흉내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한 자들은 멸망에 처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큰 자에로의 추구를 박살내고 작은 자로 밀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일관성 있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어떻게 시작하지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입니다. ‘태초에, 레시트’라는 단어는 ‘시간의 시작’입니다. 어느 때에 시간이라는 것이 창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쓰인 천지의 ‘천’이 복수라 했지요?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그걸 쌍수라고 합니다. 그렇게 거기에 쓰인 단어는 하늘이 아니라 하늘들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에 하늘들이 창조가 되었는데 그 하늘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을 모두 지칭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 나라가 지어졌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나라’라는 울타리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와 함께 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창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라는 원형을 가지고 시간 속에 모형으로 창조가 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작게 축약하고 있는 것이 성막이고 성전인 것입니다.
(히 8:5)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성전은 어떤 모양으로 형상화하여 그려낼 수 있다고 했지요? 시은좌와 언약궤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당신의 아들의 피로 덮으시고 항상 용서하는 자리에 앉으셔야 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는 자로 내려가 그 분의 긍휼만을 구하는 자로 엎드려 있는 모습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나야 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생명력을 공급받아 비로소 존재가 되고 가치를 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틀과 내용의 완성을 새 창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창조가 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있다고 하지요?(롬1:20) 그러면 결국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청사진으로 하여 만들어 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원형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지로 하여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천지만물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들의 완성지점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이 성취하고 완성해 낸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문답 1번 질문, 인생의 목적에 대한 대답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과정에 망치질 한 번 보탤 수가 없습니다. 그걸 깨닫는 것을 복음의 이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1장 1절부터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세상의 모양이 어떠했다고 합니까?
(창 1:2)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십니다. 여기에서 ‘운행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라하프’라고 했지요? 그 단어는 암탉이 알을 품을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으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생명이 탄생합니다. 바로 그 새 생명의 탄생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라하프’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라하프’라는 단어를 자신의 모세 오경에서 딱 한 번 더 씁니다. 거기가 신명기 32장입니다. 그 말은 이 창세기 1장 2절의 이야기와 신명기 32장 9절 이하의 말씀이 같은 내용을 메시지로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 32:9-12)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기에서 ‘독수리가 새끼 위를 너풀거린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너풀거리다’가 ‘라하프’입니다. 그러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하나님의 신이 너풀거리는 것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이스라엘 위로 어미 독수리, 즉 하나님의 신이 그들을 날개 위에 얹고 그들을 건져내고 있는 그림이 같은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10절의 ‘황무지’라는 단어가 ‘토후’인데 그 단어도 여기와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이라고 번역된 곳 딱 두 군데만 쓰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첫 창조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으로서의 창조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가 일부러 그런 언어 플레이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지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신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르와흐’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에도 저주의 바다인 홍해 위로 무엇이 운행합니까?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이라는 단어가 ‘르와흐’입니다. 수면 위에 ‘르와흐’가 부니까 마른 땅이 드러나고 새로운 백성이 바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후에 새로운 세상이 열릴 때에도 ‘바람, 르와흐’이 불어 물이 물러가고 마른 땅이 드러나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즉 죽은 흙이었던 인간에게 생기가 들어가 생령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도 ‘르와흐’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피조물은 늘 ‘르와흐, 바람, 하나님의 신’과 함께 열립니다. 르와흐가 덮으면 새로운 생명이 창조가 됩니다. 이렇게 첫 창조는 바로 새 창조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수신자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었잖아요. 모세가 지금 첫 창조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출애굽 사건의 진의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덮은 독수리 날개가 룻기에서는 옷자락으로 번역이 되어 쓰입니다.
(룻 3:8-9) “8 밤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 이니이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남자가 여자를 자기의 옷자락으로 덮으면 그건 곧 혼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지가 된 룻이 그 땅의 지주인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보아스의 삶에 연합이 되는 구원의 모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신부인 교회를 당신의 옷자락, 날개, 르와흐로 덮어서 당신과 연합시키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겔 16:8)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 이니라”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도 그대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는 마리아를 성령이 덮어서 예수라는 하늘의 아이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그러한 메카니즘에 의해 작은 예수화 되는 것입니다.
(눅 1:35)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한 창세기 1장의 그림이나 홍해 위에 불어 닥친 바람의 그림이나, 홍수를 밀어내는 바람의 모양이나,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처럼 덮어서 건져낸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모습은 전부 신부인 성도와 신랑이신 하나님의 혼인에 관한 모형들이었던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 모든 그림들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인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기필코 새로운 창조물로 완성해 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보여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타락한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렘 4:22-23)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 하도다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지요? 그 위를 하나님의 은혜가 덮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백성들, 교회가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백성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 바람과 불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신과 빛으로 나타났던 창세기 1장의 그 그림이 재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교회가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혼돈과 공허와 흑암, 티끌, 죽은 흙인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 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성도의 자아 인식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이구나, 죽은 흙이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와 긍휼로 품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것이구나’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죽은 흙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냥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작은 자, 죽은 자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과 은혜를 깨닫고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자각하여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이해한 자들에게서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은 자신의 티끌 됨의 자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에 의해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절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될 수 없습니다. 암탉이 품지 않은 달걀은 절대 부화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자라고요? ‘난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존재일 수도 없습니다’라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평생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내가 왜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되니? 나에게도 힘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가 있다. 나는 충분히 자아 충족적이며 자가 계발이 가능한 자야’라는 교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두 부류를 선명하게 갈라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당연히 가인은 농산물로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원하시기 때문에 양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은 가인이 거절당한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에는 피의 제사와 함께 소제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이야기 합니다.
(히 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뭡니까? ‘믿음으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어서’와 ‘믿음으로’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아벨이 믿어서’라고 하지 않고 ‘아벨이 믿음으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믿어서’는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지만 ‘믿음으로’라는 것은 믿음의 주인께서 그 믿음을 어떤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는 그 믿음의 소유주에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무상으로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가치가 없고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는 가치가 있다는 그런 공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 행위가 무엇에 의해 격발이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이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육식을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입니다.
(창 9:3-4)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 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 이니라”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먹지도 못할 양을 뭐 하러 칩니까? 양은 농사에도 도움이 못 되고 손만 많이 가는 짐승입니다. 심지어 아벨이 쳤다는 양은 히브리어 ‘쩨온’인데 그건 양 중에서도 어린양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왜 아벨이 먹지도 못할 어린양을 쳤을까요? 보세요. 하나님이 믿음을 부어준 자는 이 세상에서 약지를 못해요. 아주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자로 밀려 내려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관심은 아버지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혀 주셨지요? 그런데 그 옷이 어떤 옷이었습니까? 무죄한 짐승의 가죽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문맥을 통하여 그 짐승이 어린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산되는 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힘을 내는 데에 필요한 먹 거리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아벨이 먹지도 못할 어린양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가리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만들어 내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우리를 그 자리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하나님께 의인의 대접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예물로 증거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예물을 증거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양이라는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벨이 자신의 의가 아닌 어린양이라는 제물에 의해 의인으로 취급을 받게 될 것임을 미리 증거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서 부어진 것이지 아벨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어린양의 자리로, 예물의 자리로 밀어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부끄러움을 가릴 양의 가죽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에만 눈을 둡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쌓는 먹 거리에만 집중을 합니다. 그들의 일상은 자신의 가치를 쌓고 위상을 높이는 데에 집중이 됩니다. 가인을 보세요.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가인이 높은 겁니까? 하나님이 높으신 것입니까? 가인은 자기의 행위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 했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치 있는 행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없애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나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덮어 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덮어주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의 자리에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밖의 사람들은 혼돈과 공허 속에 자기가 세운 법을 집어넣고, 자기가 행한 행위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 혼돈에 틀을 세우고, 공허를 메우며, 흑암을 밝히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자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철저하게 부수어 가십니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에게 개평이라는 걸주지요? 그렇게 개평을 받은 사람이 그 돈 갖고 곱게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셨습니까? 결국 그것마저 다 잃어야 집에 갑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먼지만큼의 가능성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아 성취와 자기실현을 이루려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의 삶에 개입하셔서 다 털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예 일어설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에게서는 그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는 고백을 들어내시고야 마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만 붙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편지마다 ‘파울로스,’ ‘난 작은 자입니다’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 욕망의 전시장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 이해되어질 수 없습니다. 큰 자가 되어야 하고, 이겨야 하고, 복수해야 하고, 내 가치를 챙겨야 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의 성공인데 복음은 그것을 막으니까요. 인간의 욕망이 거래되고 있는 역사라는 시장판을 한 번 보세요. 인간들은 모든 것에 가치를 매겨서 시장에 내어 놓습니다. 그게 힘의 원리가 세상에서 생존해 가는 법칙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떤 것에 가치를 매겨서 그것들을 서로 사고판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행위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백화점에 2,000불짜리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보자고요. 그 사람은 그 옷을 살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 그 2,000불이라는 가격표가 어떻게 보일까요? ‘2,000불 주고 이 옷을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아라’라는 금지의 표지로 보입니다. 그때 인간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 옷이 그만큼이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따지기 전에 일단 자존심이 상해서 ‘언젠가는 꼭 너를 살 수 있는 가치 있는 자가 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옷의 가치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마음대로 결정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결국 신기루를 좇아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해서 그 욕망의 시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요?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머리를 흔듭니다. 그런데 자꾸 그 놈의 가격표가 자신의 자존심을 긁습니다. ‘내가 그 정도의 가격표에게 조롱을 당해야 하다니’하면서 절치부심 그 옷에게 보란 듯이 복수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이게 나의 욕심이고 탐심이지, 왜 내가 그런 것에 이렇게 목을 매고 있을까?’하며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칩니다.
그러다가 곧 타협을 합니다. 카드를 긁어서라도 그 옷을 사들고 나오면서 ‘난 그래도 사탄아 물러가라’를 열 번 외치고 이 옷을 샀다는 것입니다. 보통 그것을 위장이라고 합니다. 베르그송은 그것을 ‘미끄러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내하고 참고 섬기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국 최종 마지노 선 앞에서는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성도와 불신자가 다른 것은, 성도는 그러한 실패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점점 하늘의 것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행위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해 정의된 도덕과 윤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판정이 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죄인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고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무용수와 춤은 절대로 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가 무용수의 삶을 사는 게 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가치를 배우고 자신들의 피조물 됨을 배우는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브라운 운동의 수준으로 판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운 브라운 운동을 기억하십니까? 물 위에 꽃가루를 띄워 놓으면 물 분자의 움직임에 의해 꽃가루가 이리저리 움직이지요? 그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물 분자의 움직임을 추론해 내는 것입니다. 그건 형이하학적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학을 신앙생활에까지 끌어들이시면 안 됩니다. 원인이 있어야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과학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원인이 없는 것 같은데 결과가 생긴 것이 구원역사입니다. 성도는 인생 속에서 그걸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은혜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가능과 무력함을 전제하는 단어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환경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을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확률이라고 하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확률은 항상 인간의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작용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하지요? 정말 그랬나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각각 75세와 65세 때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가면 자기들은 마른 막대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말의 마지막 가능성으로 만들어 낸 게 뭡니까?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열심히 만들어 낸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묵묵부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마른 막대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건 본인들도 압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믿음으로 이삭을 낳습니다. 그렇다고 그 둘이 무슨 대단한 의지를 발동하여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닙니다.
(히 11:11)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분명 사라가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지요? 정말 그랬나요?
(창 17:17)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8:11-15)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 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둘 다 믿음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완전히 파산상태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 결과물의 이름이 뭡니까? 이삭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이 뭐지요? 비웃음입니다. 성도가 내어 놓게 되는 믿음의 열매는 무슨 대단한 업적도 아니고 공로도 아닌 ‘난 하나님을 비웃은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열매라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그에게서 반드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마른 막대기 된 실체입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다, 난 작은 자다, 아니 작은 자 중의 작은 자다’라는 고백이 분명하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가능한 작은 자, 마른 막대기에게 행하신 일이 십자가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의 열매로 맺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매가 그 수치스러운 이름 ‘이삭’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작은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신부들이 신랑을 타고 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신랑의 도움만 받아야 하냐는 것이지요? 그건 사회현상으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권신장이다 뭐다해서 이 시대의 신랑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그때 유행하는 유머는 그 사회를 반영하고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요즘 어떤 유머가 유행하는지 아세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시리즈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들이 나이가 들어 늙어 갈수록 할머니들의 기세에 눌려서 맥을 못 추게 된다는 그런 식의 유머입니다. 60대 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식사 때도 아닌데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하면 할머니한테 맞는다고 합니다. 70대 때는 조금 더 심해져서 할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밥 차려 달라고 하면 할머니한테 맞는다고 합니다. 80대 때는 더 심해져서 할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서 할머니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맞는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지요. 그러나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인간들이 신랑이신 하나님 앞에서 점점 더 그렇게 기고만장해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신랑들은 점점 더 기를 못 펴게 될 것이고 신부들은 점점 더 기고만장해 질 것입니다. 그건 성경에 예견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가 아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어야 한다’로 가야 합니다.
우리 신랑이신 주님은 절대 그 꼴을 못 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부들을 진짜 신부답게 작은 자의 자리로 밀어 내리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때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파울로스’ ‘난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내 신랑은 너무도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난 큰 자입니다.’이렇게 신랑의 크심에 연합이 된 진짜 큰 자가 되셔야지 어줍지 않은 자기의 큼을 자랑하려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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