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가인, 라멕, 네피림, 니므롯, 바벨탑 그리고 아브라함(I)
(김성수 목사)
(창 11:1-9)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1장부터 11장까지를 한 묶음으로 12장부터 끝까지를 두 번째 묶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묶음을 원(原)역사(歷史)라 부르고 두 번째 묶음을 족장(族長)사(史)라 부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1장까지를 창세기의 서론(序論)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 서론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바벨탑 사건을 공부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인간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오르려 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어가 혼잡해지고 온 땅에 흩어지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행위와 행위의 산물을 가리켜 ‘바벨’이라 이름 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행위는 한 마디로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시도였습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서론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과 그 내용이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한 마디로 줄이면 ‘바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의 모든 패역과 범죄함은 바벨의 정신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의 결론 부분인 요한 계시록에서 악의 총체를 가리켜 바벨론이라는 상징적인 언어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서론의 첫 번째 바벨의 사건인 아담의 선악과 사건은 곧 가인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창조 목적을 떠난 인간은 즉시 자신의 세상 왕 됨을 유지하고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자를 사정없이 살해하는 포악한 힘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의 공격이 두려워 성을 쌓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쫓겨난 이후에 가장 처음 한 일이 에녹성을 쌓은 것입니다. 역시 저주받을 바벨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인생의 왕으로 삼는 영웅주의는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동반하는 것임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분쟁과 다툼과 분열은 모두 그 영웅주의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영웅주의와 거대주의, 거인 숭배 사상은 반드시 타인과의 전쟁을 낳습니다. 그러한 영웅주의는 라멕으로 이어져 소년을 죽이고도 자신의 포악함을 자랑하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역시 바벨의 정신입니다. 그 라멕의 후손들이 네피림으로, 거인으로, 용사로, 땅에 유명한 자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인으로 영웅으로 서려는 시도, 역시 바벨의 정신이지요?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웅이 되어 사는 자들은 모두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십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10장의 노아의 족보를 보면 그 노아의 후손에서 니므롯이라는 영걸(英傑)이 나옵니다. 그리고 라센이라는 큰 성을 쌓고 거대한 나라들을 세운 그 영걸 니므롯에서 오늘 본문의 바벨탑으로 이어지며 창세기의 서론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저주 받을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로 그 바벨론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인도되는 장면이 12장의 아브람의 등장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가 바로 바벨론이거든요. 그리고 그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이 시작되고 그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왜 아담, 가인, 라멕, 네피림, 니므롯, 바벨탑 그리고 아브라함 인지 아시겠지요? 영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낍보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낍보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강하다, 크다, 뛰어나다, 용맹스럽다, 강포하다’라고 번역이 됩니다. 시편 52편 1절의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 고’에서 강포한 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낍보르’입니다. 그러니까 영걸 니므롯은 크고 강하며 용맹스러우나 강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가 힘이 세고 용력이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사람들을 압제하는 폭군이요, 전제 군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근거가 창세기 10장 9절에 나옵니다.
(창 10:8‐9)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대항하여)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9절을 보시면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었다고 나오지요? 거기서 ‘앞에서’라고 번역이 된 전치사 ‘알’은 원래 ‘위에, 넘어서, 대항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번역을 하면 ‘니므롯은 여호와 하나님을 뛰어넘으려 여호와와 대항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냥꾼이었다는 말은 당시 고대인들의 왕의 역할에 대한 사고가 반영이 되어 있는 어구입니다. 당시 고대 시대에는 이미 들 짐승들이 사람과 가축을 위협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왕은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온갖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멸절시키는 것을 최고 우선과제로 삼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왕을 사냥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영걸 니므롯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사람들을 압제하여 스스로 영웅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세상의 왕, 타락한 자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가 세운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인지 보면 그 점은 더 명확해 집니다.
(창 10:10‐12)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바벨론과 앗수르를 처음 세운 왕이 니므롯입니다. 이 니므롯이라는 인물이 여기 말고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데 거기서는 앗수르를 니므롯의 땅이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 5:6) “6 그들은 칼로 앗시리아 땅을 정복하고, 뺀 칼로 니므롯 땅을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앗시리아의 군대가 우리의 땅을 침략하여, 우리의 국경선 너머로 들어올 때에 그가 우리를 앗시리아 군대의 손에서 구원하여 낼 것이다.”
이렇게 그 세상의 왕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니므롯에 의해 앗수르와 바벨론이 생겨났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성경과 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다가 사라졌지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나라의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사라진 나라들입니다. 그건 역사 속에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망하지요? 그렇게 앗수르와 바벨론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막강한 세상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 계시록에서도 세상의 마귀 세력을 바벨론이라 지칭하신 것입니다.
(계 14:8)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 18:21)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바벨론에서 나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계 18:2‐4)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 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영웅이 되어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모든 존재들의 상징인 바벨론이 바로 저주받은 함의 자손 니므롯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바벨론 적 삶을 사는 자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지만 그 속에서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진노의 심판을 모면하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서게 될 바벨론 적 삶의 전형(典型)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공부할 바벨탑 사건인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이 바벨탑 사건이 우리 성도들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이 ‘왜 하나님은 바벨탑 건립에 그토록 진노하셨는가?’입니다. 본문 3절과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창 11:3‐4)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4절을 보시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려는 이유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스스로 하늘에 닿으려 한 것입니다. 그 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몇 명이서 몇 년을 쌓아야 그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요?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당시 바벨탑을 지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지그라트라는 탑들이 지금 메소포타미아 지방 유프라테스 강변에 30여 개가 남아있는데 4각형으로 되어 있는 그 탑들은 한 변의 길이가 약 100미터 정도입니다. 밑변이 100미터인 탑이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남아 있는 지그라트 중에 가장 높은 탑이 20미터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탑들은 사각형 계단식으로 되어서 5,6층마다 쉴 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판에서 계단을 사용 하여 중간 중간 쉬며 꼭대기 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탑들의 꼭대기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과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벨탑이 아무리 대형 탑이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건축술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러한 지그라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존재를 멸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든 탑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벨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했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어구 속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 홍수를 겪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피해보겠다는 의도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높은 탑을 쌓아 그 진노의 홍수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도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늘에 닿자는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맞장 한번 떠 보자는 말인 것입니다.
이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로 바벨론의 역사를 기록한 ‘에누마 엘리쉬’라는 책 6권 55절부터 64절 사이에 ‘에테 메낭키’라는 이름의 탑으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벨탑 사건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탑이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려 했던 첫 번째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여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불필요성을 과시해 보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용사인데 자기들이 영걸인데 왜 하나님이 필요하며 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단어가 3절의 벽돌과 역청이라는 단어입니다. 당시는 고대시대입니다. 고대시대의 건축물은 대부분 돌과 진흙으로 지어진 건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벽돌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벽돌은 인간이 자기들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문명과 문화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고안해낸 진흙을 불에 구운 벽돌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그 벽돌을 사용하여 벽을 올리고, 그 벽돌의 연결을 진흙 대신 역청, 아스팔트를 사용하는 데까지 그들의 지혜를 뽐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한 때 세계 최고의 거부(巨富)였던 록펠러가 이 창세기 10장 3절을 읽고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록펠러는 그가 죽기까지 교회를 4000개 이상 지었고 대학도 12개나 지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 세계 최고의 거부가 죽을 때까지 매주 예배 40분 전에 예배당에 도착해서 40분간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 후 30여명의 회계사들이 계산을 한 자신의 십일조를 내어놓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가 창세기를 읽다가 이 10장 3절에서 역청이, 아스팔트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스탠더드 정유회사 사람들을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이라크 땅으로 보내서 석유 탐사를 시작하여 결국 석유를 찾아내어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잘 읽으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결론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이라크의 석유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예수라는 보물이 담겨 있는 책이지 돈을 벌 수 있는 묘책이 적혀 있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세상의 성과 탑은 인간들의 지혜와 인간들의 자원과 인간들의 힘으로 지어지는 것인 반면에 요한 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으로 지어져 있다고 합니까? 각종 보석들, 다른 말로 귀한 돌들로 지어져 있다고 하지요? 그 것은 상징적인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바벨론 성과 바벨탑은 인간이 고안하고 인간의 힘을 사용하여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극명하게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가 양극(兩極)으로 대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의 시작조차 자신들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탄생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존재하는 이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들의 선과 악에 관계없이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을 알게 된 것이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러데 왜 선악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근거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행위를 보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자신들의 힘과 행위로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도 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대신 자신들의 힘으로 세운 인간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돌 대신, 진흙 대신’이라고 ‘대신’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닿으려는 바벨탑은 단순히 탑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영웅주의와 거대주의, 그리고 거인 숭배 사상에 빠진 인간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바벨탑을 심판하러 내려오셔서 바벨탑을 부수지 않으시고 인간들을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바벨탑이 문제였다면 탑을 부수셔야지요.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않는 인간의 죄 성이었던 것입니다.
(시 127:1)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시 28:5) “5 주께서 하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수 지으신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그들.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멸하십시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영웅이 되고 자기 인생의 왕이 되겠다고 하는, 하늘에 닿으려는 모든 시도들은 전부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들 바라보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덮어줌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함과 가나안의 후손인 영웅 니므롯이 바벨론의 왕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고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으며 그 함의 후손들은 모두 결국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는 바벨론의 아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 10:15‐18)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저주받은 함과 가나안의 후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는 족속 이름이지요?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한 가나안 족속들의 이름이 함의 자손의 이름들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우상을 만들고 자신들을 왕 삼아 사는 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영걸 바로와 애굽도 저주받은 함의 자손입니다.
(창 10:6)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여기서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이 바로 애굽을 가리키는 셈족의 언어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적 바벨론에서 건져내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10장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덮어줌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인간들의 힘과 행위를 의지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사는 자들을 가리키는 함의 후손들은 모두 다 이 세상에서 영웅의 모습으로 거대한 제국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도 마찬가지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자원과 지혜와 열심으로 만들어 놓은 문명과 문화를 의지하여 행복과 만족에 다다르려 하는 모든 이 세상의 함의 후손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 떵떵거리며 자기들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겠지만 종국에는 전부 소리 없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 계속 저주 받은 함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혹 ‘저주는 함의 아들 가나안이 받았는데 왜 자꾸 함이 자주를 받았다고 하는가?’하고 의문을 가지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해명을 해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 노아가 실수를 저지른 장본인인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당시 고대 사회의 관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이에게 내리는 축복과 저주가 그 부모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 그 자식에게 내리는 축복과 저주는 부모와 함께 한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에도 전 세계의 욕 속에 자식이 잘 못했는데 그 부모를 욕보이는 내용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누가 노아의 후손들 아니랄까봐 별걸 다 닮았지요?
아무튼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축복할 때는 자신도 그 축복 속에 함께 참여한다는 차원에서 언제든지 기쁘게 축복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식을 저주할 때는 그 자식의 자식을 저주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식을 바로 저주를 해 버리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 저주에 자신이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는 분명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자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함이 저주 받은 자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저주받은 함의 자손들이 이 세상에서는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면 그 함의 자손들이 축복을 받은 것이지 저주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 이 세상에서 영웅으로 대 제국으로 떵떵거리며 살다간 그들을 가리켜 저주받은 자의 후손이라 한다 말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화려함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단 하나, 영생입니다. 영생을 잃은 자들에게 영생을 회복시켜 돌려주시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시 133:3)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호와의 복은 곧 영생이다. 정확하지요? 하나님의 복은 이 세상에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력, 즉 하나님의 복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복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천지만물은 그 날로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복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셔서 마지막 날에 완성이 될 하나님의 복은 영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웅, 영걸은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영생을 바라보며 그 영생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진정한 영웅이며 영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웅 되려 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다가 아닌 것을 알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영생의 삶을 이곳에서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짜 복 받은 진짜 영웅들인 것입니다.
(고전 3:18~20)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또 기록하기를 "주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마 11:23)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마 23:10‐12)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칭호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여러분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지도자, 왕, 유일한 영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셔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원수까지 섬기다 가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큰 자, 진짜 영웅, 진짜 영걸은 섬기는 자라고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섬기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인 영생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삶인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진짜 영웅,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다른 이를 섬기는 영생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바보들을 가리켜 성경은 진정한 영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자신이 소유한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영웅주의에서 확실하게 빠져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힘의 원리에 의해 굴러가는 세상의 바벨론에서 나오셨나요?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의 삶인 영생,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이 땅에서부터 잘 살아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바벨탑과는 정 반대의 탑을 제시하며 그 탑을 쌓으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딤전 6:17-19) “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 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이 일 잘 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요 영걸들인 것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마시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 두지 마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세요.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시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십시오. 많이 나누어 주시고 불쌍한 이들을 향해 동정의 마음을 가지세요. 그 일이 바로 참된 생명을 가진 이들의 진정한 탑 쌓기의 삶인 것입니다. 날아라 허동구라는 아이들 영화가 있습니다. 제 대학 동기인 정진영이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라서 저도 보았는데 저는 참 인상 깊게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조금 모자라는 정신 지체 아들이 학교에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는 글도 못 읽고 이해력도 떨어져서 학교에 가면 주전자에 물을 떠다가 아이들 밥 먹을 때 물을 따라 주는 것만 하다가 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바보라고 놀리고 주전자에 개구리를 넣어 놓고 그 아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해도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물을 떠다 주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기에 늘 싱글 벙글 입니다. 그런 아이를 반 친구들은 하인처럼 부려먹습니다. 세상은 절대 바보처럼 자기를 섬겨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기와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 바보를 밟는 재미로 삽니다. 그런데 저를 감동시킨 것은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는 알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바보 같은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입니다. 비록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해서 다른 이들에게 무시를 당하지만 우리 아들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착한 아이라는 것이지요.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세상에서 바보라고 놀림을 당해도 아버지 말씀대로 착하게 아이들과 싸우지 않고 자기를 괴롭히는 반 친구들에게 열심히 물을 떠다주는 아들이 최고의 영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웅 되려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눈에 영웅으로 보여 지는 삶을 사십시다. 두 번째, 세 번째 부분은 다음 주에 계속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알려지기 위한 비밀, 무스테리온 (김성수 목사) (0) | 2013.08.02 |
---|---|
[스크랩]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정체 (김성수 목사) (0) | 2013.08.02 |
[스크랩]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떡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스크랩] 성도는 무엇으로 이기는가? (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스크랩] 지어져 가라 (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