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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알려지기 위한 비밀, 무스테리온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

 

 

알려지기 위한 비밀, 무스테리온

 

(김성수 목사)

 

 

(엡 3:1-6)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는 2장 말미에서 교회의 특권과 신분과 상태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3장을 “이러하므로”라고 시작을 합니다. 헬라어"tou tou karin"은 “for this reason""이러저러한 이유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은 나뉘면 안 되는 장입니다. 계속 연결이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2장 전체의 내용을 잠깐 review를 해 드리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이방 사람들인 에베소 교회가 유대인들과 화평해 지게 되었고 하나의 새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성도들과 같이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고 주께서 사시기 위한 성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가르던 담은 허물어졌고 모든 적대감이 사라졌습니다. “이 놀라운 연합과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기술한 뒤에 "tou tou karin" “for this reason" ”이러하므로“ 하고 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하므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전혀 앞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갑자기 “이러 하므로”하고 말을 꺼낸 뒤 자기의 임무와 그 임무의 목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갇힌 이유를 설명하고 자기가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너희가 낙심하면 안 된다고 부탁을 한 후 14절에서 다시 “이러하므로“ 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장1절에서 13절까지는 삽입구입니다. 2장 말미와 3장의 14절이 문맥상 매끄럽게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자기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목회자적 심정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갇혀있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건강과 장래에 대해 심히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영광에 대해 기술해 나가다가 혹시 자기가 갇혀 있는 것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 오해를 하고 그 것이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될까봐 잠시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 고난은 오히려 영광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 교리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풍요와 영광을 가르쳐 놓았는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그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도 점점 핍박과 환난이 닥쳐왔습니다. 그 때 믿음이 어린 신자들이 환난 때문에 복음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될까봐 노파심에서 자기의 처지에 대해 확실한 해석을 해주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만큼 빈번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 때도 사람들은 똑같이 물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련과 환난을 겪도록 하시는가? 왜 바울과 같이 구별되어져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두어 놓으실까?” 그런 것으로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서에서 그토록 자주 고난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장 디모데서, 에베소서 거의 모든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난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고난의 문제를 다룰 때 절대 “걱정 마세요, 곧 나아질 거예요.” 이렇게 위로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호전될 거예요”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고난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먼저 보여주고 “여러분도 이렇게 고난에 대처해야 합니다.“ 하고 권고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갇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사도 바울이 한 마디라도 불평을 하나요? “내가 이렇게 주의 일을 하다가 노인이 되었는데 왜 이 나이에도 감옥에 가두게 놔두시는가?” 하고 불평을 합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이 단순히 “힘들지만 불요불굴의 극기 정신으로 이를 악물고 참아낼 것이다“ 그렇게 고난을 설명하나요? 그건 극기요, 이교 적 신앙입니다. 사도는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걸쳐서 그 환난의 이유와 내용에 대해 설명한 후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 2: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오히려 자기의 환난을 벅차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바울은 자기가 처한 고난을 견뎌 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해서 환희에 넘쳐 있습니다. 역시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서도 사도는 자기의 갇힌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 1:12)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디모데에게는 어떻게 편지를 썼는지 한번 볼까요?

 

(딤후 1:7-8)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똑같은 진술을 합니다.

 

(벧전 4:12-14)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복되고 기뻐해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갇힌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바울은 자신이 네로 때문에, 로마 제국 때문에 붙들려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잘 보세요. 사도는 지금 하나님께서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데, 네로와 로마제국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도 말려 주시지 못하고 나를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하셨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엄밀히 말하면 네로의 죄수도 아니고 로마의 죄수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인 것입니다.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그 사실만 확인하고 계신다고 해도 여러분은 대단한 실력자 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아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힘도 닿을 수 없는 대단한 대적의 감옥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옛날의 사울로 살았다면, 여전히 바리새인으로 살았다면,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교사로 살았다면 그 감옥에 들어갈 일이 있었겠습니까? 왜 바울이 그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님 때문에 그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왜 그 친했던 여러분의 술친구들이 여러분을 하나 둘 씩 떠납니까? 왜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때로 독설을 퍼붓습니까? 왜 여러분의 남편이, 아내가 “예수를 믿으려면 곱게 믿어라” “왜 그렇게 미쳐서 날뛰냐?“ 이런 심한 말로 여러분을 공격합니까?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예수 님 때문 아닙니까? 그러한 핍박이 올 때에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도 이기지 못하는 대단한 대적의 감옥에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어있는 영광스러운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그리스도의 죄수로 삼고야 마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승리의 길이기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죄수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골 1:24)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벧전 2:21)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빌 3:10-11)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분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 1:29)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래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 앉아서도 웃음이 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시켜주시는가? 아, 나는 진짜 맞구나” 이런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리스도인이 되면 필연적으로 가난해지고 고통만 당하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맞게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반드시 어떤 모양으로든 불이익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고민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고 있구나.” 그렇게 고민하다가 어느 때 신앙 때문에 어떤 핍박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 이런 거구나.”하고 오히려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는 이방인들인 너희들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엡 3:1) “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우리가 지난번에 실제로 사도행전 21,22장을 두루 살펴보면서 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지요? 왜 입니까?

 

(행 21:27-28) “27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바울이 각처에서 우리백성(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해서(against)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이 유대인들을 훼방했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특히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명확하게 전파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을 자극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이야기만 뺐어도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그렇게 막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확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감옥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미워해서 그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롬 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렇게 자기 민족을 사랑했던 바울이 왜 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될 이방인들의 구원을 전했겠습니까? 진리니까, 양보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에 전한 것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을 보면서 자기들 때문에 감옥에 가 있는 그의 편지를 받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노예이거나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죽으셨고 사도 바울 같은 대 사도가 자기들을 위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 않고 진리를 전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에베소 교인들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3장 1절에서 13절까지 그렇게 문법과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까지 행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는 그렇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 새 창조물이 된 것을 “비밀”이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은 비밀이다.“ 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지요? 그 “비밀” 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secret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secret는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쓰인 단어 “무스테리온”은 영어의 mystery와 같은 말입니다. 미스테리는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고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서 나중에 그 감추어진 것이 드러났을 때 감격을 더하게 하기 위해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미스테리 영화 볼 때 계속 마음 조리다가 끝나면 시원하지요? 그러니까 이 “무스테리온”이란 단어는 감추기 위한 비밀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한 비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막 4:21-23) “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에다 두겠으며 평상 아래, 침대 아래에다 두겠느냐?” “숨겨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은 나타내기 위한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3장에서만 네 번이나 쓰고 그의 서신 서에서 총 19번이나 씁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서신 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밀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3절과 4절을 다시 한 번 보지요.

 

(엡 3:3-4)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제가 거기에 괄호를 집어넣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을 보면 문맥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KJV에는 아주 잘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3 How that by revelation he made known unto me the mystery; (as I wrote afore in few words, 4 Whereby, when ye read, ye may understand my knowledge in the mystery of Christ )

 

그걸 보시면 지금 3,4절에 두 가지 종류의 비밀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비밀은 6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것을 특별한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괄호 안의 삽입구 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비밀을 우리가 일반적인 비밀이라 합니다. 이런 내용이지요.

 

(딤전 3:16)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여기서 “경건”이라고 번역이 된 “유세베이아”는 “복음의 개요” “거룩”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복음의 비밀“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한 아이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전 세계에서는 매일같이 수많은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특별한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아기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고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작고 못 생긴 아이로 자라갔습니다. 그 아이는 청년이 되어 결국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수난을 당했으며 그 길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었고 사흘 만에 부활을 했습니다. 그 사건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 비밀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사도 바울에게 계시하셨고 사도는 이해를 한 것입니다. 사도는 그 예수 안의 복음에 푹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바울은 지금 특별한 비밀을 이야기하면서 또 자기가 1장2장에 이미 기록해 놓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 복음의 비밀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되었다는 6절의 특별한 비밀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있는 일반적인 비밀, 즉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먼저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특별한 비밀은 일반적 비밀의 결과지요, 결국은 같은 이야기 즉, 교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6절은 원래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엡 3:3-6)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됨이라”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내게 알게 하신 그 비밀은 , 지금 그 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명확하게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비밀의 내용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동일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일한 한 몸이 되고 함께 동일한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해가 더 쉬워지셨지요? 그런데 5절의 말씀을 가지고 세대주의자 들이 이렇게 우깁니다. 먼저 5절을 읽어보지요.

 

(엡 3:5)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봐라, 교회에 대한 비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계시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덤으로 , 마치 삽입구처럼 역사에 등장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우깁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결코 교회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언젠가 교회가 종말을 맞게 될 때 다시 유대인들은 하나의 국가로서 회복될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세대주의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은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이나 근동지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해서 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성경에 적용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2만만 2억의 군대가 실크로드를 따라 아마겟돈 전쟁을 하러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도 하고 적그리스도는 누구누구일 것이라고 추측도 합니다.

 

Dr. Bullinger같은 Ultra dispensationalism“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4복음서조차도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복음서도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관한 메시지는 우리가 오늘 읽은 에베소서 3장에 처음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럼 베드로의 설교는 뭡니까? 고넬료의 집에 간 사건은 뭡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가서 안수 하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건 뭡니까? 전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교회!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3장 15절부터 계시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셨지 “너만 복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만 건지십니다. 나머지는 계속 유기 시키십니다. 그럼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마엘도 아니고, 에서도 아니고, 이렇게 오히려 장자들을 유기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안에 모압 여자 롯이나 여리고 여자 라합을 굳이 집어넣으십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는 바로 이 감추어진 비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교회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5절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다시 한 번 보자고요.

 

(엡 3:5)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는)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다른 세대에서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확실하게 나타내지는 않으셨지만“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로 모형으로 계속 계시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사라,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 모두가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이신 예수를 받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그들은 멀리서 보고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 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세대 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런 구절들은 찢어버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 내내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교회를 계시하셨고 그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져서 이제 너희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이렇게 함께 동등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등한 지체가 되고 함께 동일한 약속의 수혜자가 된 것이라는 것을 사도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그 특별한 비밀에 대해 조금 부연설명을 하고 넘어가지요. 3절의 그 특별한 비밀의 내용은 6절이라고 했지요? 6절을 다시 보세요.

 

(6절) “이는 (그 비밀은)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 하는 자가 됨이라”

 

개역 성경으로는 그 의미를 밝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후사, 지체, 약속에 참예 하는 자” 앞에 전부 "쉰“ 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접두어는 ”동등한, 공동의, 하나의”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쉰”이라는 접두어가 상속자를 의미하는 “클레로 노모이” 앞에 붙어있고 몸을 의미하는 “소마” 앞에 붙어 있고 “동반자, 함께 나누는 자“를 의미하는 ”메토카”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함께 동등한 상속자가 되고, 함께 동등한 한 몸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쉰 클레로노모스, 쉬소모스, 쉰 메테코스 테 에팡겔리아스’ 이 말은 구원받은 자들은 그가 하나님과 조금 더 친한 측근이냐 측근이 아니냐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일등이고 이방인은 이등이고 이런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복을 공동으로, 동일하게 함께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몸이 되는 것이고 하나의 구속의 언약 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 바울 서신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죠. 무슨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이 옵니까? 우리가 예전에 공부한 1장 9절 10절에도 같은 설명이 나와 있지요?

 

(엡 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없습니다. 누가 유대인입니까? 지금 어떻게 유대인을 구별합니까? 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리방황하며 피가 섞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사람들과 잠깐 섞였다고 그들을 사마리아인으로 몰아 개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러면 2000년을 다른 민족과 섞여있던 사람들 중 몇 %가 순수혈통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원래 유대인들이 저렇게 유럽인들처럼 생겼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아시아의 사막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신약 성경에서도 12지파는 사라졌습니다. 12지파도 없는 이스라엘이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그런 세대주의의 농간에 속지 마세요. 상속자나 후사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공부를 했으니까 ‘동일한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것만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약속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약속이 뭡니까?

 

(갈 3:14)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표준새번역]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행 2:14-17) “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요엘 서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보지요.

 

(엘 2:28-32)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교회에 대한 약속은 이미 구약에 이렇게 명확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오심으로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민이 그 약속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비밀이 밝히 드러나 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드러난 비밀의 내용에 따라 이방인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들이 개종을 하면 이스라엘 사람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로 개종을 요구하는 전도를 해 왔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 1:11-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마 11:25-26)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바울 사도는 지금 그 비밀을 사도인 자기가 계시로 받았고 그것을 기록하였고 너희도 내가 기록해 놓은 그 계시를 보면 그 비밀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3절 4절을 보겠습니다.

 

(엡 3:3-4)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그토록 오랜 세월 비밀에 부쳐졌던 그림자로만 상징적으로만 주어졌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드러났고 그 것을 성령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셨으며 그들은 그것을 성경으로 기록했고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받은 그 계시의 내용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경을 통해 다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깨어난 자들은 성경 안에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전부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2:6-11)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받은 자, 성령을 받은 자들은 성경 안에서 그 하늘의 비밀을 밝히 계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또 다른 계시들을 받으시느라고 그렇게들 바쁜 분들이 많아요? 사도 바울보다 더 큰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베드로보다 더 밝히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 보다 더 큰 계시를 받을 수 있나요? 그 분들이 받으신 계시는 모두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너희가 읽으면 나와 같이, 나와 똑같이 그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데 무슨 딴 계시가 또 필요하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만 계시를 받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우리는 나의 의견을 첨가할 수도 없고 그 성경에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뺄 수도 없습니다.

 

(계 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비밀이었던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었고, 그 곳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기쁘십니까? 진짜 그 천국의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시고 그렇습니까? 그게 잘 안되시죠?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처럼 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가지와 줄기와 잎사귀와 열매를 믿음으로 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아 시큰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맛 볼 수 있는 천국의 풍성함은 그야말로 겨자씨 같은 것입니다. 그나마도 자기 믿음의 분량만큼만 맛 볼 수 있습니다.

 

(막 4:26-34)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여기에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씨를 뿌려놓은 농부의 비유이고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거시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및 성장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이지만 작게는 성도 개개인 안에서 체감되어지는 천국과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 성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열매를 기다리는데 처음에는 그 것이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고 정말 여기서 줄기와 뿌리가 나고 열매가 맺힐까? 의심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 이 땅에 계시되어진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씨 안에 줄기와 뿌리와 열매,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생길 때도 그 작은 수정란이 엄마의 자궁에 착상이 되고 그것이 2의 배수로 분열을 하다가 세포가 270개가 되면 멈춥니다. 그리고 뇌가 생기고 심장이 생기고 콩팥이 생기고 뼈가 생기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수정란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도 겨자씨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작은 것을 표현 할 때 속담이나 격언에서 쓰던 단어입니다. 우리말에서도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가리킬 때 “새 발의 피” 같은 말을 쓰지요? 그런 겨자씨 안에 나중에 3미터나 되는 겨자 나무가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천국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중의 새라는 말은 “열방”을 의미하는 랍비들의 숙어입니다. 천국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이 깃드는 그렇게 엄청난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겨자씨를 볼 때는 정말 보잘 것 없고 여기서 뭐가 나올까 의심스럽지만 그 씨 안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만한 커다란 나무가 숨어 있듯이 천국도 지금은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아주 조금, 겨자씨만큼 그 천국을 맛보고 있지만 그 천국은 세상 모든 나라를 품을 만큼 풍성하고 엄청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난하고 못생긴 나사렛의 목수와 11명의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바로 3000명, 5000명으로 늘어났고 심지어 로마의 심장부를 강타했습니다. 그 천국은 이제 마침내 그 완성된 위용을 드러낼 것입니다. 열방에 퍼져있던 그 천국의 백성들이 수도 없이 그리로 들어갔고 지금도 들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확장 원리는 힘과 무기가 아닙니다. 그 나라의 확장 원리는 전하는 자가 땅에 떨어져서 죽는 “썩어지는 밀알의 원리”입니다.

 

2000년 동안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전파되어졌습니까?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해서 전해졌나요?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있었지요? 12세기 후에 200여 년 동안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하겠다고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를 늘려 가면서 여론을 의식해서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허울을 쓰고 기독교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그렇게 해서 정말 기독교가 전해 졌습니까? 오히려 그런 곳은 모두 이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독교는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죽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가 됨으로 승리를 하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논리가 바르고 똑똑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대학교 4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어머님 때문에 억지로 교회에 나가 앉아있기는 했지만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언제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설교를 공박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논리가 정연한지 목사님들이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목사님들이 와서 그 청년을 논리 정연하게 설득을 시키려 해도 그 청년은 오히려 목사님들의 빈틈을 노려 목사님들을 골탕 먹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이 예수를 믿겠노라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예배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 청년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논리에 의해서가 아닌 그 어머니의 인격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머니의 소박하고 겸손한 삶은 어떤 논리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소리 없이 살아내는 소박한 희생에 의해 전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고 늘 당하는 것 같고 가족을 위해 흔쾌히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는 그런 어머니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고 우리가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심 순덕님의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라는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누어 드린 handout에 적어 놓았으니 함께 보세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엄마가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는데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머니라는 이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며 홀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짓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살다가 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의 희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이 생각이 안 나시거든 그런 어머니의 삶이라도 떠올리시며 그렇게 살아 주십시오. 다른 이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며 이런 아름다운 회고를 할 수 있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 보자고요. 하나님 나라 , 천국은, 교회는 그렇게 자라 가는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숫자가 차게 되면 계시록의 그 찬란한 하나님 나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누구도 방해 할 수 없습니다. 이 겨자씨는 반드시 엄청난 겨자 나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겨자씨의 비유가 천국의 외적인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천국 백성의 내실이 깊어지게 될 것에 대해서도 주님은 비유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마 13:33)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빵을 발효시킬 때 쓰는 것이죠. 누룩은 밀가루 안에 아주 적은 양으로 숨어있지만 그 적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아십니까? 이 누룩 비유는 성도들의 내부적인 변화 (intensive transformation)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천국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아주 조금밖에 못 누리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누룩이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천국을 더 명확히 알아가게 될 것이고 그 만큼 우리도 천국의 시민으로 변해 갈 것이며 곧 그 완전하고 풍성한 천국에서 완전히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이 땅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고 중독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끊어버리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순종하게 만들어져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 13:44-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끼어 있던 팔레스타인에는 유독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던 지주들이 전쟁에서 빼앗길까봐 자기만 아는 밭에다가 보물들을 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주인이 갑자기 급사를 하게 되면 아무도 그 보물이 어디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종이 밭을 갈다가 보물항아리를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종은 얼른 그 보물을 묻어두고 가서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산다는 것이죠. 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시대는 진주가 부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주 상인들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곤 했었지요. 그러다가 진짜 좋은 진주를 발견하게 되면 그 진주 상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사들였습니다.

 

좋은 진주는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입니다. 클레오파트라가 가지고 있던 진주가 250만 파운드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안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천국을 움켜쥔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 팔아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비밀을 아는 만큼 천국 백성답게 사실 수 있고 아는 만큼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생각만 하면 가슴이 떨리고 처음 연애할 때 애인 만나러 갈 때처럼 두근두근 한다는데 혹시 천국에 대해 아직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없는 것 아닙니까? 성경을 공부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그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그 소망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멋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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