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떡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요 6:31-40)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 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주님께서 강력하게 금하신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란 단순히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하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종교행위까지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나의 구원’을 위한 신앙생활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구원’을 위한 행위로 점철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의 분투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인간들의 행위는 전부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정의를 해 주시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자꾸 주어지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발휘를 방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이 세상 것들을 얻어내려 하는 거짓 믿음에 대한 경고를 31절 이하에서도 계속해 나가십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34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썩지 않는 양식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는 주님께 모세가 자신들의 조상에게 내려준 하늘의 만나와 같은, 실제적이며 현물(現物)적인 차원의 세상의 떡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또 다시 친절하게 하늘의 떡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하늘의 떡은 너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배를 불리는 그런 떡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참 떡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고 요구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대화를 보시면서 누가 생각나십니까? 우리가 앞서 공부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나시지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늘의 생수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내가 다시 물을 길러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있도록 그 물을 내게 주소서’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을 육적(肉的)인 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 여인이 필요로 하는 물은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아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신비한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삶에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물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떡을 달라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육신의 배부름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너희가 먹고 배부른 고로 나를 찾아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6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 6:36)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좇아 온 사람들이 ‘내가 너희에게 줄 떡은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했더니 ‘그 떡을 우리에게 항상 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이 세상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하늘의 생명인 영생을 말씀하셨던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 세상의 생명에 필요한 떡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상의 힘을, 다른 말로 생존에 필요한 떡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현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육적인 생명에 보탬이 되는 어떤 것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긴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어서 얻어지는 참된 유익인 영생이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육적인 생명인 생존에 필요한 유익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려는 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는데도 자기가 기대한 세상 적 유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날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것은 믿음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나기 위한 신앙의 여정동안에 필요한 비용(expense)으로, 혹 조금 과분하게 주어질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청지기들에게 주인이신 당신의 뜻을 잘 분별하여 당신의 뜻에 맞게 요소요소에 잘 전달하라고 맡기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종교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35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그러한 세상 것을 기대하지 않는 참 믿음에 대해 기가 막힌 묘사를 하십니다.
(요 6:35)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세상 것들을 기대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예수께로 나아갔더니 정말 배도 안고프고 목도 안 마르고 그러던가요? 저는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간 그해부터 굶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풍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세상것들이 주어지던 주어지지 않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이미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배부르세요?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행복하십니까? 정말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만족하세요? 그게 잘 안되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에게 세상 것들이 부족하게 주어졌다는 것이 인식이 되면 이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지요?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분명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고 공언(公言)을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수시로 세상 힘에 대해 목이 마르고 수시로 세상 힘에 대해 배고픔을 느끼지요? 우리가 뭔가 잘 못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가고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우리가 영원한 목마름에서 해갈될 수 있고 영원한 결핍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앞서 예를 들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그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을 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 대화 속으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요 4:13-19, 28-29)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게도 그 물을 주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는 즉시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모두 이혼을 하고 지금 어떤 다른 남자와 동거(同居)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그 여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언급을 하시자 그 여자가 주님을 가리켜 선지자라 불렀고 결국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가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전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내 달렸다는 것은 그 여인은 이제 이 세상의 목마름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은 그 여인은 이제 영적인 생수를 받아 마시고 영생이 주는 시원한 해갈과 영생이 주는 풍성한 배부름을 맛보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여인이 그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 여인이 이 세상의 물을 달라고 주님께 요구하는 장면과 물동이를 버려두고 세상의 목마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가 된 장면 사이에는 한 사건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목마름의 해갈(解渴)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여인에게 갑자기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그 여인의 수치스런 실상을 폭로(暴露)하셨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의도대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비로소 인식을 했고 그에 대한 증거로 예수님을 향해 ‘선지자’라 부른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자신의 수치스럽고 더럽고 추악한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자신의 인생 속에서 정말 해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나아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른 말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참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환언하면 세상의 물동이를 버린 여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죄에 물든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육신의 편안함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더러운 상태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편안함이 아닌 새 생명의 주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지경의 자신에게 그렇게 엄청난 새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 서본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리가 정녕 죽음과 같은 결핍의 자리이며 어두움의 자리이며 추악함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자들은 생명이신 예수만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의 비참함을 보지 못한 자들이 ‘참된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고 다른 ‘희망’을 좀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나쁜 것인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도 믿고 세상의 복도 받는 것이 뭐 그리 나쁜 것인가?’ 그런 생각 안 드세요?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복이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더욱 공고해 지던가요? 세상의 복이라는 것에는 예수님만을 신뢰해야 하는 참 믿음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가 더 많습니다. 내가 자꾸 세상의 다른 복들을 예수님께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 저는 예수님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니까 제가 예수님 말고 의지할 다른 것들도 좀 주세요.’라는 불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곧바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정말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비참함과 구원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 성도의 주된 경향(傾向)이나 특성(特性)이 세상의 복이라는 것을 등지고 예수라는 참 복을 향해 질주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예수 외에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허물어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붙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예수 이외의 세상 것들은 참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향하는 길을 자꾸 가로 막는 장애물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 버리고 예수만을 오롯이 붙드는 것을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여러분의 주된 경향이나 특성이 예수 이외의 다른 세상의 것들로, 예수에게 얻어낼 수 있는 다른 세상의 것들로 여러분의 배를 채우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죄인들의 비참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세상의 힘들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올바른 자각이 있는 이들만이 세상의 힘들이 주어지지 않아도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으로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35절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목사의 설교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지적과 질타(叱咤)가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될 때 아주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고 지적을 당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배를 채우고 목마름을 해갈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세상의 힘을 초개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만을 붙들고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엔 그렇게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증거 구절이 35절과 37절인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35절에서 주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모두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힘으로 예수께 나아 올 수도 있고 안 나아 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내게 나아오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실까요? 37절을 보세요.
(요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자는 반드시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35절의 말씀처럼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고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행복의 근원을 삼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생명의 떡과 생수를 먹고 마신 이들은 이제 예수가 그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고민하며 추구하며 분투 속에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약 성경으로 가서 구약 성경에는 그러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참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가 그림으로 어떻게 설명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함께 공부한 것처럼 구약은 모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收斂)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영화의 화면이고 신약은 영화의 자막(字幕)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은 그림으로 설명된 신약인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어떤 그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이 설명이 되어 있는가? 우리는 참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하늘의 제사를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죄로 인해 성전과 성막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 중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는 제사 말고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바치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소제(燒祭)입니다.
이 소제는 일반적으로 번제(燔祭)와 함께 드리는 제사였지만 특별히 소제를 강조해서 명하신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이라는 절기와 초실(初實)절이라는 절기였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첫 이삭 드리는 날은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장자들이 살아난 유월절로부터 삼일 후입니다. 유월절 이후의 첫 안식일 다음날이지요. 그날은 보리가 처음 추수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추수된 보리를 하나님 앞에 떡으로 태워 바치는 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 소제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숨어 계신가 보세요. 첫 이삭이 추수가 된다는 것은 첫 이삭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수된 곡식이 곱게 가루로 빻아져서 떡이 되어야 합니다. 첫 이삭의 수난(受難)과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의 소제에 담겨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요 12: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날이 바로 유월절이지요? 그 유월절 이후 삼일 째 되는 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입니다. 그날 주님께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첫 이삭, 첫 열매가 되어 바쳐지므로 많은 열매와 이삭들이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고전 15:20~23)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바로 이 그림이 구약의 유월절에 드려지는 어린양과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드려지는 소제의 제물에 담겨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밀이 처음 추수되는 초실(初實)절에도 하나님은 소제를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초실 절은 밀이 추수가 되는 날이라서 맥추절이라고도 하고 유월절에서부터 50일 째 되는 날이라 오순(五旬)절 이라고도 부르지요. 그 때는 추수한 밀을 하나님 앞에 떡으로 만들어 태워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제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부활을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예수와 같은 순결하고 온전한 하늘의 떡으로 많은 열매들이 맺혀지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떡, 생명의 떡은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떡으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로 그 역할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소제의 떡에는 꼭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레 2:11) “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 할지니라”
여호와께 드려지는 제물인 소제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떡을 부풀리는 효소입니다. 효소는 부패를 일으키는 재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룩을 죄를 상징할 때 종종 씁니다. 그리고 꿀은 세상의 힘이 주는 달콤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은 부패(썩어짐)의 근원인 죄와 인간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행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세상 것들이 배제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와 세상의 허물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떡을 먹은 자들이 바로 그 예수라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떡으로 하나님 앞에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신 것입니다. 반면에 그 소제의 떡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름과 유향입니다.
(레 2:1)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기름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행 10:38)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유향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엡 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렇게 소제의 제물인 떡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제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레 2:13) “13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제에 꼭 들어가야 하는 소금을 가리켜 ‘언약의 소금’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소금 언약, 혹은 언약의 소금이라는 말로 자주 묘사를 하십니다.
(민 18:19)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분깃)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대하 13:5) “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왜 하나님은 소제에 들어가는 소금을 가리켜 언약의 소금이라 부르실까요? 이 구절들을 잘 보시면 소금 언약이라는 말과 함께 공통적으로 쓰인 단어가 나오지요? 바로 영원(히: 오람)이라는 단어입니다. 소금의 대표적인 특징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고 소금 자체는 영원히 썩지 않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소금을 영원과 온전함의 상징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소금을 들어서 당신의 언약이 필연적으로 성취될 것이며 반드시 온전하게 완성이 될 것임을 확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언약이지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먹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것을 먹는 백성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시겠다는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소금은 ‘회복’이라는 의미도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왕하 2:19-21)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물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그 물 때문에 죽거나 아이를 유산하게 되는 여리고의 물을 소금을 뿌려 좋은 물로 회복시키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데 소금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금은 회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으로도 쓰였습니다.
(출 30:34-35)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이렇게 소금은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회복시키고 거룩하게 구별시킨다는 의미도 함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에 소금이 뿌려졌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부패하고 부족한 제물이 부패함과는 전혀 관계없고 온전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의해 소금이 뿌려져야 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소금이 뿌려진 떡을 이해하실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소금이 뿌려진 떡은 그 자체로는 부패와 무관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아직 불완전한 부패의 산물인 세상의 떡에 예수라는 소금이 뿌려짐으로 그 떡이 부패와 무관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이중적 상징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므로 그 소금이 쳐진 소제물의 떡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상징하는 아론과 그의 후손들, 즉 제사장들이 먹는 것입니다.
(레 6:14-18) “14 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앞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 그 소제의 고운 기름 가루 한 움큼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다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 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 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 무릇 아론 자손의 남자는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서 그들의 대대로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레 2:10)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이렇게 그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생명의 떡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교회가 그 떡을 먹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이 열납 하실 만한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떡은 16절의 말씀처럼 꼭 회막(會幕) 뜰에서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막(會幕)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초청된 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약하여 정리를 해 드리면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에 그려진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룩과 꿀, 다시 말해 세상의 죄와 세상의 달콤함이 빠진 온전한 하늘의 것으로, 그리고 기름과 유향이 부어짐으로 성령이 부어진 향기로운 제물로, 그리고 소금이 부어짐으로 부패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이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그 온전한 제물인 생명의 떡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그들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소금이 쳐진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열납이 되어질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소금이 쳐진 소제 물인 생명의 떡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르심으로 그 언약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고 영원히 변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렇게 우리 성도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소금이 쳐진 소제의 떡을 먹은 것처럼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역시 소금이 쳐진 순결하고 온전한 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소금이 뿌려진 생명의 떡을 먹고 역시 소금이 뿌려진 생명의 떡이 된 자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소금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영적 신분은 누구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뿌려진 그 소금은 회복의 소금이며 부패와 썩어짐을 방지하는 소금이며 다른 것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구별하는 역할을 하는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세상은 지금 온통 썩어 버린 곳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온통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세상에 보내시며 너희는 세상의 부패를 막고, 너희들의 사랑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시키며, 아직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은 하나님 백성들이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소금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절대 짠 맛을 잃지 않습니다. 소금의 짠 맛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소금들은 이렇게 싱겁습니까? 소금이 싱거워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소금에 다른 싱거운 것들이 많이 들어갔을 때입니다. 다른 말로 소금 안에 세상의 누룩과 꿀들이 섞여서 이렇게 싱거운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하나하나 쳐내고 성도의 짠 맛을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세상이 함께 섞여 있어 짠 맛을 잃고 싱거워 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를 싱겁게 해 버린 세상의 싱거움 들을 털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찾게 되면 하나님과 이웃 간의 사랑이 회복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짠 맛을 되찾은 소금들이 모여 사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신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로 잘 지어져 가세요. 그게 소금의 본분입니다. 소금은 세상과 반대편에서 세상을 정화시키고 세상을 썩어짐에서 회복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힘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면 그와 같은 코미디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막 9:50)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소금이 세상에 녹아 소금이 되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다 보면 롯의 아내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 기둥과 소금의 땅으로 영원히 버려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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