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져 가라
(김성수 목사)
(엡 2:19-22)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그 죄로 말미암아 갈라졌던 사람들 사이의 담과 하나님과의 담을 허물어 버리셨고 우리 교회를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만드셔서 화평케 하셨고 화목케 하셨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진술들이 18절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로 수렴되는 것을 확인했지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써 기도가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공부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조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에게 그들의 거룩을 이루어가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우리는 거기에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기도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고 응답도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좌를 흔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사고와 인격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기도자의 바른 자세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을 하려면 또 오늘 시간을 다 할애해야 할 것 같아서 hand out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버리지 마시고 꼭 읽어보세요. 오늘은 19절부터 22절까지를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18절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가 살아나고 그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도 허물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위대한 진술을 마치고 19절부터 그 새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권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첫째로 그 새사람들은 하나의 큰 나라의 시민이며 그들은 한 권속, 가족이며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먼저 19절을 보시면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12절에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에베소 교인들은 이방인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너희가 이제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인들은 어떤 사람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외인들은 어떤 나라 안에 그 나라 시민들과 함께 살더라도 그들은 여권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소에는 아무 불편이 없이 시민들과 함께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그가 사는 나라와 자기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면 그 여권을 갖고 있는 외인들은 바로 적군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올라갔을 때 많은 다른 족속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 갔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움직였지만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이 있었습니다. 외인들이 있었습니다.
(요일 2:19)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They went out from us, but they did not really belong to us. For if they had belonged to us, they would have remained with us; but their going showed that none of them belonged to us.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함께 수 십 년씩 신앙생활 하다가 중간에 변질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외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시민권이 아니라 패스포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어떨 때 표시가 나는지 아십니까?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압니다. 여권만을 소지한 채 자기의 유익 때문에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이내 다른 좋은 곳을 찾아 철새처럼 떠납니다. 그러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사는 그 나라 시민들은 오히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 더욱더 일치단결하여 그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할 때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하늘의 시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나 어려움이 닥치면 그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그 나라 시민은 그 나라의 법률과 관습을 잘 따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사랑합니다.
(시 119:97-115)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5 너희 행악 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당시의 나라들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왕국(kingdom)이었습니다. 그 나라에 속한 시민들은 모두 그 황제와 중앙 정부의 훈령과 명령을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표현을 한 것은 거기에는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함께 따른 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왕국은 한 통치자와 그가 제정한 법과 생활방식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 시민들은 그것들과 함께 묶여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법을 기쁘게 준수해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울러 그 나라의 시민들은 왕과 나라의 보호를 받습니다.
1739년에 영국에 젠킨스 선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스페인 해안 경비대가 아무 이유 없이 젠킨스 선장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젠킨스 선장을 잡아다가 귀를 자르고 돌려보냈습니다. 이 젠킨스 선장이 그 귀를 술병에다 담아 가지고 영국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의회에다가 그 귀를 제출하고 상황 설명을 했습니다. 그 즉시 영국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른바 “젠킨스 귀 전쟁“(The War Jenkins' Ear)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모욕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의회의 판단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아니라 스페인 할아버지라도 대영제국의 시민을 어떤 식으로든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미국 시민 중 누군가가 북한에 포로로 잡혀갔고 그 사실이 부시 행정부에 알려졌다면 당장에 미국에서 그 사람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시 3:6-7) “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4:8)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슥 2:8) “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롬 8:31)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히 13:6)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그렇게 신실한 왕을 섬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시민들은 자기의 왕을 자랑합니다. 롬멜의 부하들이, 히틀러의 부하들이,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이순신의 부하들이 “난 그 위대한 장군의 부하였다. 난 그와 함께 싸웠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지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명령에 기쁘게 순종합니다.
(벧전 2:10-12)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그렇게 교회를 시민으로 부른 후에 다시 권속이라 부릅니다. 권속은 말씀드린 대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서 이제 하나님의 가족으로 그 개념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국가나 시민 하면 외적인 연합을 떠올리게 되지만 권속, 가족 하면 이제 내적인 연합이 떠오르시지요? 국가는 법률적인 관계이지만 가정은 생명 적이고 살아 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묘사하면서 한 단계 더 전진해서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는 좀 더 조밀하고 깊은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는 교회를 묘사하는데 건물의 개념을 갖고 들어옵니다.
(엡 2:20-21)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지어져 가는 건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사도가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설명을 하고, 교회를 권속, 가족이라 묘사를 하면서 울타리 안에서의 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어져 가는 건물이라 묘사를 하면서 교회의 유기체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건물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시민이나 가족은 서로가 끈끈한 연합관계에 있지만 여전히 개인이 모인 개인 집단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어떤 부분이 빠져버리면 붕괴되어버립니다. 교회는 그렇게 어떤 한정된 울타리가 쳐져 있는 곳이며 끈끈한 새로운 혈연으로 묶인 사람들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진정한 유기체라는 것을 사도는 점층법을 써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보시면 우리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고 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벽돌들인 것입니다
(21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어떤 집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벽돌들이라는 것입니다.
(요 14:21-23) “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22 가룟 사람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주님, 주께서 우리에게는 자기를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고전 3:9-11)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6:19)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벧전 2:5)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건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의 안에 계시지만 우리가 연결되어져서 지어지는 전체 교회라는 건물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건물은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보시면
(21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여기에서 “되어가고“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욱 세이“는 ”길러지다, 자라나다”라는 뜻입니다. 성전이 자라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교회가 커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교회가 자라나는 것입니까? 예배당 건물이 커지면 자라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건물의 특징이 뭡니까? “거룩”입니다. “성전”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나온 하기온”이라는 말은 “거룩한 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자라난다는 것을 점점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성전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 말은 교회의 벽돌 각자가 거룩하고 성결하게, 그 성전에 맞는 돌로 만들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란다는 것은 기계적이며 산술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란다는 것은 생명 적인 것입니다. 거룩과 성결이 없이 숫자만 늘어난 교회에 어찌 하나님께서 머무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로서 이 땅에서 싸우는 싸움이 궁극적으로 누구와 싸우는 싸움인지 아세요? 사탄과의 싸움입니까? 자기와의 싸움입니까? 누구와의 싸움입니까? 여러분이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누구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끝까지 잘 들어주세요.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죽여 가십니다. 우리는 그게 힘드니까 싫다고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거룩하게 만들어야 ,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야 천국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사탄도 우리의 죄 성도 모두 그 싸움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방법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탄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져 간다는 말이지요? 죄와 싸워서 이긴다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러 저러한 방법을 동원해서 타락한 우리를 죽여 가시며 우리에게 항복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인생입니다.
(출 4:24-26) “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40세에 애굽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40년 동안 풀이 다 죽어서 이제 파파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떨기나무에 큰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모세가 힘없는 떨기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의 불로만 일을 하는 자가 될 때가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모세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모세는 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우깁니다. 하나님의 설득으로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오기로 하고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데 길의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은 좋은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애굽은 나쁜 사람들이라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 하신다.“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애굽 사람들보다 그들이 잘나고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유월절 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하러 출발하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닫고 가야 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착하고 선한 자들이기 때문에 너희를 건져주는 것 아니다, 나는 나의 기쁜 뜻에 따라 너희를 건져 내려 하는 것이고 건져 낸 후에 애굽과 똑같이 죄 속에 젖어있던 너희를 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라는 것을 모세는 알고 출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은 너도 내 말에 순종치 않으면 살아 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셨던 할례를 행치 않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할례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니까 오늘은 그 할례를 명하시는 부분만 한번 찾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창 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 곧 할례를 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삼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수 5:2-7)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할례를 받지 못하면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포경수술 하고 안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하면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뜻인 것입니다.
(신 10:16)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할례를 행하지 않은 자들은 목이 곧은 자들이라는 말이죠?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들은 하나님께 순순히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렘 4:4) “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하는 자들의 표징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며 이제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할례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시켜 설명을 해드렸었지요? 예수님도 역시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육체적인 할례도 받으셨지만 진짜 예수님의 할례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골 2:11) “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보세요. 우리더러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아기 때 육적인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 할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는 십자가에서 온 몸이 쪼개지신 그 할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 할례인 십자가의 사건은 무엇을 나타내는 사건입니까? 철저한 순종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하나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마셔라. 네가 마셔라. 예수님은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잔이 지나가는 것이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시고 할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자, 즉 할례를 행하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싸움을 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가 되지 못하면 모세처럼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 뻔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순종한 자로 여겨 주셨고 실제로 그 순종을 지금 우리와 싸우시면서 가르쳐 가고 계시기 때문에 감히 소망을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우러 오시는 장면은 여기 말고도 또 있습니다.얍복 강가에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싸우십니다. 비열한 사기꾼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서 재물로 그를 회유하려 합니다. 그리고 강 건너로 식솔들과 가축들을 다 보내고 혼자 남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야곱과 씨름을 하십니다. 고집스러운 야곱은 하나님께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지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인 나다.“라는 것을 야곱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 뼈를 쳐서 그의 고집스러운 옛 사람을 죽여 버리시고 순종하는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야곱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수 5:13-15)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제 여리고를 공격해서 무너뜨리고 가나안에 막 입성하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여호와의 군대 장관의 모습으로 칼을 빼 들고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 적군의 편이냐?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No! 아니다. 여호수아가 자기들은 좋은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은 나쁜 적군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No! 그게 아니다. 너희도 가나안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사실을 반드시 깨닫고 들어가라“ 그러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그 신을 벗으라는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이끄는 대로 순종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6장부터 여리고를 공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망치질 같은 것 하지 말고 그냥 돌아라.“ 그러십니다. 주님이 돌라면 그냥 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항복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러 우리와 싸우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오해해서 마치 사탄과 욥의 전쟁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사탄은 처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일 뿐입니다. 욥기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이야기는 욥과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욥이 사탄의 공격으로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의 소유가 다 사라진 것을 들어서 “너는 하나님한테 뭔가 잘 못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다 빼앗아 가신 것이다“라고 충고를 해 줍니다. 욥이 아주 멋진 반응을 보입니다.
(욥 1:21-22)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 2:9-10)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욥의 마음속에도 자기는 의로운 자라는 생각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욥 13:3,15,22-24) “3 그러나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 15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22 하나님,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내가 먼저 말씀드리게 해주시고, 주께서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23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24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욥은 하나님께 어찌 의로운 나에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욥 31:1-29) “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7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9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24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욥 32:1) “1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욥은 계속해서 나는 잘 못한 것이 없다“ 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 여겼습니다. 그 말은 ”의로운 나한테 이렇게 한 하나님은 불의 하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을 소송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사탄과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있는 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생기느냐고 막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욥 38:1-3)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는 말은 허리를 묶고 씨름을 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씨름을 하시며 욥을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지 보세요. 하나님은 38장4절에서21절까지 지구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2절부터 38절까지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우주를 창조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리고 39절부터 39장 끝까지 동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항변하던 욥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욥 40:1-8) “1 야훼께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2 전능하신 이와 변론하는 자야, 어찌 물러서려느냐?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야, 대답하여라. 3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4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읍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5 한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읍니까? 두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6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7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8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그리고는 네가 세상의 죄를 물리치고 악을 해결 할 수 있느냐? 또 베헤못(하마)와 리워야단(악어)이야기를 하시면서 너 그 들을 네 종으로 삼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욥이 완전히 항복을 합니다.
(욥 42:1-6)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과 씨름을 하시면서 의로운 자 욥을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완전히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개혁신학을 배웠고 지지하고 있으며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분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 편과 적군을 가르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기 위해 지금도 매일 우리와 씨름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오늘도 허리를 묶고 우리와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이신 고집과 집념으로 여러분을 죽이시고 계신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날마다 죽여 가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가면 죽어갈수록 사탄은 오히려 우리에게 카운터펀치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롬 16:20) “20 평화의 하나님께서 곧 사탄을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우리를 죽여 가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사탄을 짓밟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정말 사탄을 이기신 것을 우리가 그 이기는 삶을 살아냄으로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야, 정말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기셨구나,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이길 수 있는 것이구나.“하고 세상에 증명해 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던 그 고백을 우리도 반드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라는 거룩한 건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엡 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기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에서 사도는 어떤 사람들을 사도라고 하지요? 먼저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지요? 그래서 다른 사도들보다 뒤늦게 부활하신 주님을 뵌 자신을 가리켜 고린도 전서 15장 8절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고전 9:1)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표준새번역]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그리고 사도는 특별히 부름을 받아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복음의 전도자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행 26:16-18) “16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너에게 보여 줄 일을 밝힐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7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내서, 18 그들의 눈을 열어 주고,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복음 전도자로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특별한 권위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적들을 행하고 교회들을 설립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 일이 없고서는 어떤 사람도 사도일 수 없습니다. 가톨릭이 주장하는 사도직의 계승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했고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쓰인 선지자는 신약의 선지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라고 순서를 바꿔서 기술을 했을 텐데 사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라고 기술합니다.
(엡 3:5) “5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여기서도 선지자들은 신약의 교회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들입니다.
(엡 4:11-12) “11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그 계시를 땅에다 내리꽂는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을 받은 선지자들이 아직 신약 성경이 없는 신약의 교회에서 무엇을 전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겠지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교훈을 전했던 사람들로 그들을 터로 삼아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만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3:11) “11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갈 1:6-8)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닌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저주받을 건물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외골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융통성도 없고 아량도 없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이미 그 터가 닦여졌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또 따른 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터는 한번 닦이면 그걸로 끝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 그 터 위에 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터가 왜 필요합니까? 왜 지금 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필요합니까? 카톨릭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들을 좇아가는 일부 개신교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20절을 다시 보시면 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교회의 모퉁이 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엡 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모퉁이 돌은 건물의 제일 초석을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퉁이 돌을 세우고 그 돌을 기준으로 거기서부터 돌을 쌓아 건물을 지어나갔습니다. 그 모퉁이 돌이 없으면 건물은 세워질 수도 없고 지어져 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 모퉁이 돌이라는 말은 시편 118편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시 118:22)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에 쓸모없는 돌이 굴러 다녀서 버렸는데 그 돌이 바로 모퉁이 돌 머릿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비유로 모퉁이 돌이신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막 12:1-10) “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성전 청소를 하시고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너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했을 때에 답변으로 하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포도원 지기들이 주인이 소출을 바치라고 사람을 보내면 보내는 족족 때리고 죽이고 해서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더니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 주인이 그 소출을 바치지 않은 포도원 지기들을 다 진멸하고 소출을 바칠 다른 포도원 지기들에게 포도원을 맡긴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욕심 많은 포도원 지기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도원 지기들은 욕심 때문에 소출을 못 바친 것이 아니라 바칠 소출이 없었기 때문에 못 바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 본문인 구약의 이사야서를 한번 찾아보지요.
(사 5:1-7)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를 바라시고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서 포도원을 만들어 주셨는데 거기서 쓸모없는 들 포도만 맺혔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꼬집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칠 열매가 없으니 열매를 요구하러 간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 말라기 호세아 등등 선지자들을 다 때려죽이고 쫓아내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이신 예수께서 열매를 요구하러 내려 오셨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열매를 요구하시니까 예수님마저 죽여서 내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 원 지기들을 예수 안에 넣어서 다 죽여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너희가 죽여서 내 버린 그 아들을 모퉁이 돌로 삼아 너희를 열매를 맺는 거룩한 전으로 지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로 말미암아 그 짓이겨 질 뻔했던 포도원은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사 27:2-6) “2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 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 나 여호와는 포도 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예수를 통해서 열매 맺는 데 방해가 되는 질려와 형극, 잡초와 가시나무 같은 것은 여호와께서 밟아 뭉개 버리시고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예수만이 교회의 터이고 모퉁이 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터로 모퉁이 돌로 하여 지어져 가는 자들은 충돌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되어져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잡음이 없습니다.
(왕상 6:7) “7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 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이렇게 조용히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의 소리도 자랑의 소리도 시기나 질투의 소리도 없이 조용히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그렇게 그 전에 맞는 돌이 되기 전에 여러분은 아직 성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절박하고 긴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옛 몸을 죽여 가십시오.
여러분의 안에서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는 아말렉을 쳐부수세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지금도 그 전쟁은 매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집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복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최전방에서 누가 싸웁니까? 여호수아가 싸웁니다.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입니다. 예수가 누구와 싸웁니까? 아말렉과 싸웁니다. 아말렉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여러분 자신과 싸우고 계십니다. 항복하십시오. 두 손을 높이 드세요. 우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것이 예수가 이기는 길이고 예수가 이기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떡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
[스크랩] 성도는 무엇으로 이기는가? (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스크랩] 소수에서 다수로 전파되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김성수 목사) (0) | 2013.07.31 |
[스크랩]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아이 (김성수 목사) (0) | 2013.07.29 |
[스크랩] 썩지 않는 양식과 하나님의 일 (김성수 목사) (0) | 2013.07.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