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무엇으로 이기는가?
(김성수 목사)
(계 12:7-16)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오늘 우리는 7절부터 16절까지의 긴 본문을 공부할 겁니다. 길다고 겁먹으실 것 없습니다. 내용은 아주 simple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고단한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늘의 왕은 이 땅의 군림하는 왕, 경쟁하는 왕, 쟁취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 순종의 왕, 사랑의 왕, 용서의 왕이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러한 하늘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신자들의 삶이 고단하고 힘들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용서와 인내와 사랑과 순종의 삶이 진짜 왕 노릇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머무는 곳을 광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광야’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출애굽 광야! 광야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40년간 머물렀던 곳이지요? 그 광야는 힘들고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지키고 보호하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광야 40년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이 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나오죠? 요한은 우리 교회가 양육 받고 머물게 되는 이 세상을 광야라고 표현을 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의 삶의 본질과 또 그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왕 노릇 하는 곳은 광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거기는 마늘도 없고 부추도 없고 고기도 없는 척박한 환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곳은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양육하심이 있는 안전한 자리인 것입니다. 이 5절과 6절에 대한 부연 설명이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할 7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먼저 7,8,9절을 보시면 하늘에서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 그리고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전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집니다. 그 전쟁에서 진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땅으로 쫓겨 내려옵니다. 우리는 5절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와 반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두 구절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땅으로 쫓겨 내려온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바로 옛 뱀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도 하는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가 싸운다고 안 나오고 미가엘이 싸운다고 나왔는가? 성경에는 두 천사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달해 주는 천사 가브리엘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천사 미가엘이 나옵니다. 여기서 미가엘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모든 믿는 성도들, 천상의 교회 모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사단이 쫓겨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 12:31-33)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눅 10:17-18) “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포함한 그 분의 생애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번개같이 하늘로부터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떨어졌다. 사단이 결박당했다, 사단이 무저갱에 갇혀있다는 말의 의미는 제가 여러 번 설명해 드렸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계시록 앞의 부분 강해를 다시 들으세요. 그렇게 7절부터 9절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승귀로 말미암아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났음을 설명하고 10절부터 12절까지 에서는 그 승리에 대한 찬양,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계 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 ‘구원’과 ‘능력’과 ‘나라’그리고 ‘권세’앞에 모두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구원, 바로 그 능력, 바로 그 나라, 바로 그 권세’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빈틈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은 일 점 일획도 땅에 떨어짐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10절에서는 ‘그 구약의 언약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지자, 우리를 밤낮 하나님 앞에서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다’라고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을 함으로써 8절과 9절의 하늘에서 쫓겨난 용에 대한 말씀을 다시 한 번 부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우리 교회에게 사단은 이미 힘을 잃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얻었음을 자꾸 알려 주고 싶은 것입니다.
10절에서는 그 사단을 ‘참소 하던 자’라고 표현을 하지요? 참소라는 것은 고‘소’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검사의 역할을 하던 자입니다. 우리를 하나하나 거명하며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죄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고소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다 가지고 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털처럼 하얀, 순결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의 법정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제 하늘에서 쫓겨난 그 사단은 땅으로 내려와서 그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합니다. 계속해서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계 12:13-14)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땅으로 내어 쫓긴 사단이 교회를 여러모로 핍박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제 자기가 무저갱으로 영원히 들어가게 될 것을 아는 사단은 총력을 기울여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그 핍박받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지켜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교회가 광야로 양육을 받으러 갈 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서 날아간다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바로 그 표현이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출 19:4)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 32:11-12)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나타낼 때 독수리의 날개를 등장시킵니다. 땅으로 쫓겨난 사단이 우리 교회를 총력을 기울여 핍박을 할 때, 우리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 위에 업어서 보호하셨듯이 우리의 광야에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키실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을, 핍박을 오히려 선용하셔서 우리를 양육하시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 그 양육하시는 기간이 얼마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한 때 두 때 반 때입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는 삼 년 반, 삼 년 반은 42개월 42개월은 1260일 1260일은 우리 교회의 인생, 그렇죠? 이렇게 우리 교회의 인생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키심과 양육하심의 시간들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모든 상황, 심지어 아픔까지도 전부 하나님의 지키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양육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그 상황들이 분명 여러분의 영적 성숙에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양육 프로그램 속에 집어넣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 하지 마십시오.
보세요, 6절에서는 여자가 1260일 동안 광야로 도망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14절에서는 독수리의 날개를 타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옮겨진 것으로 나오지요? 같은 기간이지요?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광야에서 도망자처럼, 환난과 곤고 속에 던져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하나님의 지키심이요 보호하심이라는 것을 절대 놓치지 말라‘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시면 그 용이 어떻게 교회를 미혹하고 괴롭히는가 하면 그 입에서 물을 토해내서 여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계 12:15)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구약에서 홍수나 창수는 심판과 저주 혹은 악한 세력의 공격을 나타냅니다.
(시 18:4)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시 144:7) “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그 사단이 뿜어내는 물은 생수를 뿜어내시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렘 17:13)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수를 뿜어내는 생수의 근원’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목마른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서에서 그 반석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까?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답을 해 줍니다. 그러니까 용이 물을 뿜어 여자를 떠내려가게 한다는 표현은 사단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것으로 성도들을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 용이 입에서 그 물을 뿜어낸다고 ‘입’이라는 단어를 굳이 썼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입’은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 한번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 좌우에 날 선 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지요?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용이 입에서 물을 강같이 뿜는다는 말’ 진의는 사단은 여러 가지 육체적, 물리적인 핍박과 함께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들을 통해 가짜 말씀을 홍수처럼 토해냄으로써 성도들을 미혹하고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암 8:11)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목이 마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물은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식당이나 마켓 앞에 얼마나 많은 말씀 테이프와 전도지들이 넘쳐납니까?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너희가 들을 말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럼 대부분이 뭐라는 것입니까? 사단이 내 뿜는 강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흉내 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자들을 말씀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핍박, 그것이 바로 뱀이 강같이 토해내는 미혹의 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딤후 4:3-4)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얼마나 사단이 활개를 치겠습니까? 그 뱀 같은 입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거짓 말씀을 강같이 토해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참 듣기 좋다’ 그러면서 헤벌레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도’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된다’ 이런 뱀이 토해 놓는 죽음의 물을 마시면서 좋다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속에서도 안전합니다. 16절을 보시면 땅이 그 뱀이 토해 낸 물을 삼켜 버립니다.
(계 12:16)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이 구절을 보면 금방 생각나는 사건이 있지요? 땅이 고라 자손들과 그 일당들을 삼켜 버린 사건입니다. 고라와 그 일당들이 모세에게 ‘모세 너만 예언 하냐? 나도 예언 한다’라고 반기를 들자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가짜들을 삼켜 버리신 것입니다.
(민 16:31-33) “31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신 것도 역시 ‘땅이 그들을 삼켰다’라고 표현합니다.
(출 15:12)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하나님은 거짓 말씀들로 미혹하는 사단의 핍박 속에서 그분의 자녀들을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싸우시고 승리하실 것이지만 우리도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로 가보겠습니다.
(계 12:11)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 땅으로 쫓겨난 마귀와 싸우는 성도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고 합니다. 분명 하늘에서 승리했는데 땅에서는 여전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이겼고 또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시지만 우리도 죽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진지함과 성실함과 열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성도들이 무엇으로 싸웁니까?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로 싸워서 이깁니다. 여기서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무엇을 증거 합니까? 예수를 증거 하지요. 따라서 ‘교회의 증거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무기는 십자가의 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과 그 분의 인격을 우리의 삶에 우려내는 것으로 우리는 사단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우리의 능력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권능을 받게 되면 우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그 권능이 뭐 길래 우리는 이 땅에서 이렇게 당해주고 인내하고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하는 약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권능, 그 능력은 우리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그런 힘의 개념이 아닙니다.
(고후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보세요. 이렇게 우리가 받는 능력은 ‘내가 약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능력’입니다. 내가 강하게 돋보이게 되고 내가 물리적인 강한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빌 4:12-13)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의 그 능력을 받아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일? 배가 고파도 가난해도 하나님 원망 안하고 잘 견딜 수 있는 일. 사도 바울은 바로 그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능력은 풍요하고 배부를 때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배고플 때도 감사하며 지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 말씀은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바를 뭐든지 다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는 자들은 하나님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소외되고 약하고 고난 받는 자리에서도 넉넉히 견뎌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권능과는 완전히 다른 권능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그 권능을 받으면 증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증인이 뭡니까? 우리는 지금 두 증인의 삶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두 증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증인이 뭡니까? 우리는 무엇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나요? 단순히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말씀도 포함이 되기는 하지만 ‘증인’의 삶은 그보다 더 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이 땅에서 그 증인의 삶을 잘 살다간 어떤 증인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증인처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 3:14)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 1:5)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인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증거 하다 가셨죠? 하나님을 증거 하다 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가신 분이십니다. 그게 증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 가야 합니다. 그 말은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나를 희생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고 오래 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방언이나 하게하고 예언이나 하게하고 병이나 고치게 하는 능력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 사는 데 필요한 권능을 주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받은 바울이 자기를 원수 취급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권능을 받은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때려죽이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권능입니다. 그 권능이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권능,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의 도로 세상을,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엉뚱한 힘 쌓아서 그리스도의 군사로 서겠다고 헛다리짚지 마시고 여러분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 권능을 잘 펴 보세요. 그리고 그 권능으로 세상을 이겨내십시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죠? 그러면 우리에게는 권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우리 주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분명 성령과 함께 권능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사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권능을, 그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지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섬기는 십자가의 원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와 정 반대인 힘의 원리를 갖고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에게 우리가 얼마나 놀아나고 있습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여자분들 왜 보석을 좋아하세요? 그걸 어디다 쓰죠? 배고플 때 그걸 먹을 수 있습니까? 아플 때 약으로 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걸 그렇게들 좋아합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값비싼 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랑, 그것 때문에 보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느 날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이 일어나서 개똥이 다이아몬드보다 비싸졌다고 하면 여자들 전부 개똥 달고 다닐 거예요. 아닙니까? 개똥이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희소성이 있는 물질이 된다면 여자들은 전부 그거 사재기 할 거라고요. 그게 어디에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비싸고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아는 사람이 2만 원짜리 바지를 팔다가 하도 안 팔려서 장난삼아 그걸 2십 만원에 팔았더니 그 다음 날로 다 팔렸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 마귀에게 속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 바지의 질보다는 난 얼마짜리 가치를 샀는가를 더 자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왜 수 천불짜리 백이 필요합니까? 백의 용도는 이것저것 잡동사니 한 군데 모아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비싼 백이 필요합니까? 그 비싼 백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것이라는 속임수에 속은 것입니다.
왜 예뻐지고 싶어 합니까? 그게 힘이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요새는 나이가 70이 넘은 할머니들이 하도 얼굴 가죽을 당겨서, 얼굴이 30대처럼 팽팽합니다. 늘어지면 또 당기고 늘어지면 또 당기고 그런 할머니들은 아마 배꼽이 턱에 붙어있을지 몰라요. 하도 당겨서요. 왜 핸드폰에 100화음이 넘는 벨 소리가 필요합니까? 전화 벨 소리는 한 음이면 충분합니다. “따르릉” 여러분, 왜 가난이 부끄러우세요? 왜 못 배운 게 부끄러우시죠? 그러한 힘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속임수에 여러분은 어느덧 세뇌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의 영적인 미성숙으로 그렇게 부끄러워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최근의 경제 동향에 대해서 향후 국제 정세에 대해서 논하는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끼지 못했을 때 부끄러우시죠? 여러분,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이름 다 아세요? 고민 고민하다가 겨우 생각 해 낸 게 ‘아, 두 사람 이름은 정확히 아는데 나머지는 가물가물 하네’ ‘그럼 두 사람이라도 말해 봐’ 그러면 자신 있게 ‘다윗과 골리앗’이라 그러죠? 혹시 이런 신앙 적인 것으로 부끄러워 해 보신 적 있으세요? 난 왜 이렇게 인내심이 없을까? 난 왜 여전히 이렇게 성질이 못 됐을까? 난 왜 이렇게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까? 난 왜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까? 이런 것으로 고민해 보신 적 있으시냐고요? 우리는 정작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하나도 안 하고 있으면서 땅으로 쫓겨난 마귀가 만들어 놓은 무서운 힘의 논리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danger를 ‘단거’로 읽으셨어요? 괜찮아요. ham berger를 ‘햄버져’로 읽으셨어요? 뭐 어때요? 의사만 통하면 되지, 어떤 청년이 여자 친구와 함께 영화를 다 보고 마지막에 ‘The end’라고 자막이 올라오는 것을 ‘더 엔드’ 라고 큰 소리로 읽었다가 여자 친구에게 망신을 당했답니다. 모음 앞의 the는 ‘디’로 발음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만회 하려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괜히 영화 탓을 했대요. ‘아니 한국 영화 끝에 왜 영어로 the end라고 쓰는 거야, 한글로 ’끝‘이라고 쓰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탁자에다 한 글로 ‘끝’를 썼는데 티읕 받침을 안 쓰고 ‘시옷’ 받침을 써서 ‘끗’이라고 썼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여자 친구와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좀 무식하면 어때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냥 그 상대방의 배경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죠? 세상 풍조, 사단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 준비를 하다가 여자 집이 사업이 망했어요, 그래서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면 평생 반려자로 택한 그 여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위로하고 격려 해 주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도리 아닙니까? 요즘은 그게 아니라 남자친구가 바로 떠나 버립니다. 그럼 도대체 그 남자는 그 여자 친구의 뭘 사랑한 거예요? 이게 땅으로 쫓겨난 사단 마귀에게 사로 잡혀있는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거기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 테니스를 칠 때 나보다 약한 상대를 골려 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상대방이 앞으로 나오면 뒤에다 공을 꽂고 상대방이 뒤로 가면 앞에다 살짝 넘깁니다. 상대방이 왼쪽으로 달리면 오른 쪽으로 공을 보내고 오른 쪽으로 달리면 왼쪽으로 공을 날리고 뒤로 돌아서면 뒤통수에다가 공을 때립니다. 개처럼 헐떡대면서 공을 쫓아다니는 상대방을 보면서 우리는 쾌감을 느낍니다. ‘나는 이만큼 강해’
그런데 정말 재미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골려 주려고 해도 상대방이 움직이지를 않을 때입니다. 상대방이 그냥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팔만 이리 저리 뻗을 때 정말 힘 빠집니다. 정말 재미없습니다. 상대방이 그냥 개처럼 헐떡대면서 내 공을 쫓아 다녀 줘야 내가 힘이 나고 재미도 있는데, 전혀 반응도 없고 가끔 ‘너 정말 그럴 거야’ 그러면 ‘씩’ 웃고, 그러면 정말 미치죠. 여러분, 제가 사단 마귀를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사단이 여러분에게 분노의 공을 날릴 때 쫓아가서 그 공 받아치지 마세요. 사단이 여러분에게 시기와 질투의 공을 날릴 때 슬라이딩해서 받아치지 마세요. 사탄이 여러분에게 험담의 공을 날릴 때 백핸드 같은 것 하지 마세요. 그냥 반응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씩 웃어주세요. 땅으로 쫓겨난 사단 마귀가 미치고 팔짝 뛸 겁니다. ‘아니, 뭐 저런 게 다 있어’‘좀 받아 쳐봐’
그냥 바보처럼 반응을 안 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부당한 재판으로 울화를 치밀게 해도 아무 말 안 해 버려요. 십자가에 못을 박는데도 가만있어요. ‘네가 정말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 와봐’ 이렇게 약을 올리는데도 안 내려와요. 사단이 돌죠. 그게 예수님의 삶입니다. 같이 힘으로 반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왜들 전부 값비싼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목에 힘을 주면서 ‘나는 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지혜 있는 사람이다’ 이것들 증명 못 해서 안달이십니까?
여러분, 인도에 가면 박물관에 간디가 타고 다니던 볼품없는 자전거가 고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자전거는 시가로 따지면 5불도 안 되는 자전거입니다. 그런데 왜 그게 그렇게 귀중하게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 있습니까? 그 자전거를 간디가 탔기 때문입니다. 그게 얼마나 비싼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 탔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비싼 것으로 여러분을 치장하려 하지 마시고, 세상의 힘으로 세상의 가치로 여러분을 치장하고 자랑하려 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가치 있는 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그게 성숙입니다.
여러분의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무기는 나를 죽여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십자가의 도여야 합니다. 손을 얹으면 병이 낫고 새해에 목사가 안수를 하면 그 해에 축복을 받게 되고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 반에서 꼴지 하던 애가 서울대학엘 들어가게 되고 천일 새벽기도를 하면 망했던 비즈니스가 살아나는 그런 사기 극에 놀아나지 마시고 여러분은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섬기며 살다 가신, 하나님의 참 증인으로 살다 가신 ‘예수’를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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